양의
1. 일반적인 의미
- 洋醫: 서양 의학을 전공한 의사. 의사를 한의사와 구분하여 지칭하기 위해 드물게 사용되는 용어다. 자세한 건 양의사 명칭 논란 문서 참고.
- 良醫: 의술이 뛰어난 의사.
- 瘍醫: 피부과 의사.
- 良意: 선량한 뜻.
- 兩意: 두 가지의 뜻이나 마음.
- 量宜: 잘 헤아려 좋도록 함.
- 兩儀: 양(陽)과 음(陰), 또는 하늘과 땅을 아울러 이르는 말.
- 凉意: 서늘한 느낌.
2.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楊儀
(? ~ 235)
삼국시대 촉나라의 관료다. 자는 위공(威公)이다.
형주 출신으로 원래 형주자사 부군의 밑에서 일했던 인물이지만, 당시 형주에 주둔 중이던 관우에게 귀순했다. 관우는 귀순한 양의를 익주에 머무르고 있던 유비에게 보냈는데, 접견한 자리에서 유비는 양의의 정치적 식견을 높이 평가하고는 좌장군병조연에 임명하여 곁에 두었다. 그리고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상서에 임명되어 유비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양의의 성격이 매우 안 좋았다는 것. 보통 주변 사람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트집을 잡는, 즉 인간관계에서 늘 마찰을 일으키는 타입이라고 묘사된다. 그나마 윗사람의 말을 따르기는 하고 실무 능력은 뛰어났지만 사회생활은 전혀 못하는, 다루기 힘든 사람인 것. 때문에 상서령 유파와 사사건건 부딪혔다. 유파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그대로 유비를 굉장히 기피했지만 어쩔 수 없이 유비 세력을 따르는 마찬가지로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 역시 능력이 좋아 유비가 어떻게든 안고가려 애쓰던 인물이라, 유비는 양의를 홍농태수로 좌천시켰다. 홍농은 위치상 장안과 낙양의 중간에 있는 곳으로 당시 위나라의 영지다. 즉 적지의 태수인데, 이건 사실상 '''무보직'''과 다를 바 없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이 다시 양의를 불러들여 남만을 정벌하는 동안 해당 부서의 일을 맡겼고, 남만 정벌 후에는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옮겨가 북벌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제갈량이 양의를 아꼈던 이유는 양의는 사람됨이 뼈대가 있고 민첩하였는데 작전계획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고 필요한 물자를 산정하는 행정/보급 업무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여전히 성격은 어디 가질 않아 여러 사람과 반목하여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다. 특히 촉의 핵심 장군인 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워대서 제갈량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위연도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란 식으로 충돌을 피했는데 반해, 양의는 위연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꼬장꼬장하게 나오는 바람에 사이가 최악이었던 것.
높은 지위에 있는 두 사람이 이 모양이니 당연히 누군가를 내치거나 충돌 가능성이 없는 곳으로 보내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릉대전으로 인하여 많은 인재들을 잃은 촉은 군수품 조달 및 관리라는 국가에 꼭 필요한 재능의 소유자였던 양의도,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맹장 위연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최대한 공정하게 두 사람을 대하였지만 둘의 사이가 좋아지게 할 수는 없었다. 감척론이라는 글을 지어 두 사람을 깨닫게 하고자 했으나 이 둘은 깨닫지 못했다.
보통 상사가 이 정도로 신경쓰면 부하로서 그래도 조심을 해야 할 판인데 이 두 사람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예 논쟁 도중 위연이 칼을 뽑아들고 양의를 위협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제갈량도 그저 최대한 두 사람을 달래가며 제어할 수밖에 없었고, 제갈량이 없을 때는 호방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던 비의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뜯어말리고 달래는 식으로 갈등을 완화시켰다.
건흥 12년(234년), 제갈량을 따라 북벌군으로 출병해 곡구(谷口)에 주둔했다. 그런데 이때 제갈량이 죽으면서, 직후 이들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제갈량은 오장원에서 임종하기 직전 자신의 후계자로 장완을, 그 다음으로는 비의를 지명했다. 다만 장완은 성도에 남아 있었기에 강유와 양의, 비의에게 후퇴 작전을 지휘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며 반기를 들고 북벌군의 퇴로를 끊었고, 이에 양의와 위연이 동시에 상대방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표를 올렸다. 북벌군이 전멸하고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양쪽의 표를 받은 장완은 침착하게 판단하여 위연이 먼저 저지른 짓임을 파악하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데려올 것을 명했다. 위연은 남곡구(포야도 남쪽)를 막고 아군 장수인 양의와 그가 보낸 왕평을 공격하는 개막장짓까지 저질렀는데, 왕평의 사자후 한 번으로 위연군은 흩어졌다.[1] 이렇게 비교적 시의적절한 조치가 취해져 북벌군이 전멸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양의는 마대를 보내 위연을 처단했는데 위연의 수급이 양의에게 도착하자 이를 짓밟으며 욕을 했다고 하며,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자신이 앞장서서 위연의 남은 일족들까지 숙청시켜 버렸다. 위연이 막나가긴 했지만 양의 본인도 매번 위연과 대립했기에 이 사태의 책임에서 별로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에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은 양의다운 짓이었다.
북벌군이 돌아온 뒤, 장완이 제갈량의 뒤를 이어 상서령으로 임명되며 정무를 승계받았다. 그런데 양의는 자신이 고작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어 여전히 한직에 머무르자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군사는 예전에 유염이 맡던 자리로 군사직 가운데선 제일 높긴 하지만 애초에 하는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사실 양의 본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애초에 제갈량은 양의의 능력을 아껴 중히 쓰긴 했으나 양의를 후계자로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2] 양의는 성미가 급하고 편협하여 성품이 후덕한 장완에게 뜻을 두고 있었던 것. 제갈량은 양의에게 그저 북벌군 퇴각작전의 공동 지휘를 맡긴 것에 불과했지만, 양의는 제갈량이 어쨌든 자기 능력을 아꼈고 병력들을 무사히 복귀시켰으며 반기를 든 위연을 죽인 공도 있다며 혼자서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의가 불평불만을 늘어놓든 말든, 원래 대인관계가 나빴던지라 여기에 호응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나마 원만하고 호탕한 성격으로 양의를 비롯한 많은 문무백관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중재자 역할을 했던 후군사 비의만이 찾아와서 양의를 위로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리는데 '''"차라리 그때 위씨(魏氏)를 따랐으면 이런 푸대접은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여기서 위씨란 위나라를 뜻하는데 비슷한 예로 원술이 세운 중나라 역시 중씨(仲氏)라고 불렸다. 물론 진짜로 반역할 생각은 없었겠지만 대놓고 역적이 되겠다는 소린데, 대한민국 군인에 비유하자면 장교가 진급누락됐다고 상관 앞에서 푸념하다가 '월북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라고 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양의와의 관계를 유지했던 비의조차도 이런 희대의 개소리는 묵과할 수 없었고, 그 즉시 이와 같은 양의의 발언을 유선에게 상주했다. 원래는 사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양의의 공적을 생각해서 사형은 면하게 해달라는 장완의 진언 덕분에 서민으로 강등되어 한가군으로 귀양가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귀양지에서 계속 서찰을 올려 주변 사람들을 쓸데없이 비방했다. 이에 진노한 유선은 즉시 양의를 체포하여 압송하게 하였다. 이렇게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자 양의는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처세술과 인격, 좁은 소견으로 인해 인생을 망친 케이스로 진수 역시 자신의 결점으로 패망한 자들의 열전에 양의를 집어넣는 등 정사에 남겨진 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의할 점은 양의와의 대립 때문에 위연이 억울한 충신으로 동정받는 경우가 있는데 진실은 위연도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고 심각한 국가위기를 불러오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저 남말할 처지가 못되는 양의가 위연을 하도 무자비하게 처리해서 불쌍하게 보일 뿐.
여담으로 아직 위연과 양의가 살아있을 무렵 오나라에 비의가 사신으로 갔을 때, 손권이 두 사람에 대해 전해듣고 평한 말이 있다. 정확하게는 술에 취해서 한 말인데 다음과 같다.
비의는 이렇게 대답했다.양의와 위연은 소치는 목동이어서 일찍이 당시 해야할 일에 있어서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정도의 보탬을 주었지만(=즉 활동이 미비했다는 말) 그들에게 일을 맡겼으니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 만약 어느날에 제갈량이 없게 되면 반드시 화란이 일어날 것인데, 제군은 심란하기만 하여 이런 일에서 생기는 염려를 막을 줄도 모르는데 어찌 자손에게까지 끼칠 꾀를 내겠는가?
쉽게 말해 손권이 '둘 다 당장은 제갈량이 써먹고 있긴 한데 제갈량 없어지면 문제 생기지 않겠냐?'고 물은거고, 비의는 '두 사람의 문제는 단순 성격 탓일 뿐 당장의 강적(위나라)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어찌 안 쓰겠나'라고 반박한 것. 결과적으로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당장은 저 둘의 재능이 중히 쓰이긴 했고, 제갈량이 없어지자 정말로 순식간에 둘 다 차례로 문제를 일으키며 피해를 입히고 자멸해버린 것.양의와 위연이 협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사사로운 분노로 인한것 뿐이고 경포나 한신처럼 황제를 어렵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강적을 소제하고 화하를 하나로 하는데 있어서 공로는 재주를 가지고 이룩하고, 업적은 재주로 말미암아서 넓어지는 것이니 만약 이 사람들을 버리고 맡기지 않는다면 그들의 후환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풍파를 막으려다가 거꾸로 배를 못 쓰게 하는 것과 같으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결과적으로 유비는 자신을 싫어했지만 몸조심을 할 줄 알았던 유파보다 만족을 모르며 불평을 일삼는 양의의 성정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둘과의 싸움에서 양의를 배제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니 가히 그 인물 보는 심모원려가 대단했다고 하겠다.
정사 촉서 양의전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이 양의의 말과 행동이 절제되지 못함을 두려워해 감히 따르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후군사(後軍師) 비의(費禕)가 가서 그를 위로했다.'라 기록되어 있다. 양의가 그 성격탓에 얼마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피대상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기록임과 동시의 그런 사람도 호방하게 대한 비의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3]
이렇게 하여 제갈량의 왼팔과 오른팔 같았던 두 유능한 인물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이었기에 그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유능한 인재였지만, 그들의 성격적 결함은 그런 장점마저 죄다 가려버릴 정도로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즉 유비나 제갈량 정도는 되어야 다룰 수 있는 위험한 인물들이었던 것.
뛰어난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뛰어넘는 저열한 품성을 지닌 자들. 마치 서로를 거울에 비춰보는 것과 같았던 위연과 양의. 아이러니한 점은 일찍 요절한 양의의 형 양려는 덕행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진수도 유팽요이위양유전(劉彭廖李劉魏楊傳)의 평에서 냉정하게 '양의가 잘못된 것은 자기자신의 잘못 때문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정확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계한보신찬의 평가도 짜다, 양희는 '위공(양의)은 마음이 좁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다른 것을 취했다. 한가할 때에는 논리를 따랐지만, 위급할 때에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침해했다. 도리를 버리면 흉한 데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주역에서 말한 것이다'라고 그를 비판했다.양의는 담당한 관직으로 인해 현달되고, 유염은 오래전부터 섬기었으니, 이들 모두가 귀하고 중하게 쓰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며 규준,예법를 되짚어 보건대 화(禍)를 부르고 허물을 취함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위연과 반목했다는 이유로 많은 버프를 받아 수혜자가 되었다. 가정 수비에서 마속을 대체해 참전할 장수로 자진해 나선 것이 첫 등장이었고, 막장이던 인간관계 부분은 거의 다 삭제되고, 손권이 위연과 더불어 소인배라고 평가했던 내용[4] 도 위연이 반역할 것이라는 일방적인 지적으로 바뀌었다. 아예 제갈량의 꾀주머니 하나를 받아 위연에게 '누가 나를 죽이겠느냐?'라고 세 번만 말하면 군권을 넘겨주겠다고 말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다만 제갈량 사후의 부분에 대해서는 정사에 충실한 편. 비의가 양의의 발언을 그대로 유선에게 고하자 유선은 '''격렬하게 화를 내며 양의를 처형하려 한다.'''[5] 연의에서 그 물렁하고 아둔하게 묘사되기로 유명한 유선이 격노하는 모습은 이 장면이 유일할 정도다.
고사 수화불상용에서 나오는 인물 중 하나. 다른 인물은 위연이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냥저냥 쓸 만한 내정형 무장이다. 삼국지 3에서는 전 능력 70 전후의 지극히 개성 없는 능력치였으나, 삼국지 9 이후의 시리즈 기준으로는 통솔력이 70 전후, 무력은 낮고(40~50 사이) 지력과 정치력은 80 전후, '''매력 바닥(25 미만)'''을 찍는 어설픈 군사형 무장이 된다. 매력이 너무나 처참하기 때문에 다른 문관형 장수와 동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매력이 매우 낮아 항상 누군가의 부하로 붙여줘야 하며 독립된 행동[6] 을 시키면 절대로 안 된다. 또한 전통적으로 의리가 낮기 때문에 지속적인 충성도 관리가 필요하다. 역사적 행보 탓에 문관치고는 매력이 매우 낮은 점도 아쉬운 부분. 냉정하게 능력만 보면 문관과 무관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90대 전후 능력치를 지닌 위연과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지만, 양의 자신의 능력치는 비교적 높은 수준이므로 후기 촉에서는 충분히 쓸 만한 무장이다. 의리가 낮을 뿐 상성 자체가 유비나 유선과 크게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촉 소속일 때에는 충성도 관리도 비교적 어렵지는 않다. 이는 위연도 동일하다. 하지만 매력이 어느 정도 있는 위연과는 달리 양의의 매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양의는 위연과는 달리 태수를 삼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리고 양의는 매력이 저지경이기 때문에 절대로 군주를 시키면 안 되며 양의를 군주로 삼으면 '''제아무리 위나라같이 거대한 세력이어도 하드코어한 미친 난이도를 체감하게 된다.''' 부하들의 충성심 관리가 어렵다 못해 곤란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양의는 이런 고로 게임 시스템에 따라 핸디캡을 크게 받는데 매력이 존재하는 시리즈마다 피를 본다.
삼국지 3에서는 후기 삼국지 시리즈와는 달리 지력이 약하고 무력, 육전지휘, 수전지휘, 매력이 모두 70대 초반이라 장군으로 등용이 가능했지만 군사가 되지는 못했다. 육전지휘 73/수전지휘 70/무력 70/지력 61/정치력 72/매력71에 야망 8, 운 7, 냉정 7, 용맹 7로 전혀 양의같지가 않다.
삼국지 6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54/지력 69/정치력 75/매력33의 능력치로, 시궁창 쓰레기 같은 인간성이 그대로 반영되었는지 다른 능력치가 죄다 50~70대인 와중에 매력만 33이다. 그나마 연의상으로 제갈량이 죽고 위연이 난을 일으킨 것을 진압한 것 정도만 반영돼서 바닥은 모면했지만 역시나 매력이 양민 이하인 것은 변함이 없다. 얼굴은 문흠과 비슷하며 바라보는 방향 정도만 다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6/무력 49/지력 83/정치력 76. 투석, 혼란, 덫, 매도를 가지고 있다. 제법 높은 정치 덕에 재야 장수를 등용하는 걸 보면 참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8/무력 44/지력 82/정치력 79/매력 17. 지력이라도 높고 유인, 진정이 있고 통솔력 68이면 후기장수치고 아주 구리진 않으나, 촉 1군에 끼긴 무리가 있다. 농업, 상업 특기가 있으니 내정용으로 굴리는 것이 무난하다. 다만 매력이 워낙 낮은지라 양의로 재야인재를 등용할 생각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특기는 농업, 상업, 진정, 유인, 반박으로 총 5개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8/무력 40/지력 82/정치력 79/매력 23으로 역시 매력이 바닥인 것은 여전하다. 특기는 없어도 지력이 80대를 찍으므로 계략 방어용으로는 그럭저럭 괜찮으나, 위연#s-1과 혐오무장 관계라 위연의 지력 보충용으로는 쓸 수가 없다. 또한 유파와도 혐오무장이나 둘 다 문관이므로 별 의미는 없다. 또한 친애무장으로 제갈량이 있다. 위연이나 유파와의 혐오관계와는 달리 양의만 제갈량이 친애무장이다. 일러스트는 투구를 쓴 모습이다.
위연과 마찬가지로 의리는 낮고 야망은 매우 높지만 상성이 맹획 쪽이라 맹획으로 플레이할 때 위연과는 달리 충성 100 상태에서도 포획 시 한방에 등용이 된다. 삼국지 11에서 의리가 낮고 상성이 가까운 장수는 설령 충성 100이라도 포획시 바로 등용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양의 상성 61, 위연 상성 80, 맹획 상성 60이라 이런 일이 일어난다. 비슷한 원리로 손견이나 손책도 태사자나 감녕 등의 장수를 쉽게 등용할 수 있으며 조조도 허저나 전위를 쉽게 등용할 수 있다. 물론 태사자, 감녕, 전위, 허저 등은 의리가 양의 따위와는 비교 안되게 높다.
삼국지 12에서는 통솔력 68/무력 40/지력 82/정치력 79의 능력치로 등장하며 병종은 궁병에 전법은 파괴력약화, 특기는 병기 하나뿐이다. 병종과 능력치를 고려하면 파괴력 약화 소유 무장 중 손환 다음으로 좋은 무장이며, 지력 80이 넘으므로 제조소에 넣기에 딱 좋은 무장이다. 일러스트는 찌질하지만 절묘한데 자세히 보면 두 손을 펼치면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갈량 사후 철수 대행 내용을 위연에게 알려줬을 때 위연이 들을 생각이 없다고 알린 것을 들은 반응을 묘사한 걸로 추측된다. 매력 삭제 최대의 수혜자로, 유비가 매력 삭제의 피해자인 것과 비교된다. 기껏해야 10~20대 수준의 매력이었던 양의는 이로서 바닥 능력치인 분야가 없어졌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8/무력 40/지력 82/정치 79로 삼국지 12 때와 동일하다. 병과적성은 C/C/B. 특기는 상업 1, 농업 3, 문화 2, 설파 7, 언변 5로 후반기 문관 중에서 꽤 훌륭하다. 전수특기는 설파이며 전법은 궁병동요. 성격을 반영했는지 의리가 경시, 물욕이 탐욕으로 설정되어있다.
삼국지 14에서는 12~13 일러를 우려먹었다. 능력치는 통솔 68, 무력 40, 지력 82, 정치 79, 매력 19이며 개성은 절약, 운반, 절감, 소심, 나약, 주의는 명리, 정책은 시설개발 Lv 4,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도발, 매성, 진정, 정란, 친애무장은 제갈량, 혐오무장은 위연, 유파다. 절약은 자부대 군량소모를 줄여주고, 운반은 수송부대일 때 기동상승 효과를 주지만 마이너스 개성인 나약은 퇴각 중 자부대 모든 능력 저하가 있기에 웬만하면 보급 셔틀로만 쓰는 것이 좋다.
삼국지 공명전에서는 왕평, 마충과 같이 궁병으로 등장한다. 셋 중 제일 늦게 등장하는 만큼 제일 쓸모 없다. 일기토도 없고. 그저 육손의 뒤치기 때 미성에 남기고 가는 존재일 뿐. 실제 역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초상화가 자상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라 심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사실 왕보의 일러를 살짝 고친 것. 그래도 플레이 중간 북벌 시기에 제갈량한테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이 한 번 나오긴 한다.
[image]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도 등장한다. 위연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정말 충신처럼 표현되었다. 위연이 죽고나자 바로 소인배같은 연출이 이루어졌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오란고교 호스트부의 오오토리 쿄우야로 나왔다. 위연과는 시종일관 싸웠고 제갈량이 죽었을 때 다른 촉군은 전면철수를 하는 와중에 위연 혼자만 사마의에게 공격을 감행하려 하자 장완과 비의등이 양의에게 위연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양의는 이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위연을 죽여버렸다'''. 위연을 죽이고 나서 중군사가 되었는데 촉한의 중신들이 바보는 아니였는지라 양의에게 계급장만 높게 달아주고 병력은 양의에게만 유일하게 단 한명도 배치하지 않았다. 결국 비의 앞에서 사마의에게 갔으면 자신이 중용되었을 거라는 헛소리를 하고 만다. 결국 그나마 비록 이름뿐이지만 그래도 관직이였던 중군사에서마저 쫓겨나자 악플러가 되었고 이로 인해서 양의는 처형당했는데 양의의 묘비가 키보드다.
드라마 삼국에선 특유의 그 성격은 나오지 않는다.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에 동행해 사마의에게 제갈량이 보낸 서찰과 여인의 옷을 전달해주는 사자 역할을 수행한다. 주변 장수들은 분노하지만 사마의는 담담하게 여인의 옷을 걸치고 어울리냐고 묻고, 양의는 자기가 봐도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리곤 '이렇게 화려한 옷을 본 건 처음이다'라고 한다. 이어 사마의가 제갈량의 안부를 묻자 사실대로 '과로를 해서 건강이 좀 걱정된다'라고 답한다. 이후 접전이 벌어질때마다 상황에 따라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보이다, 상방곡에서 위군이 화공에 몰살 직전에 몰릴땐 제갈량과 함께 기뻐하기도 한다. 물론 비가 내려 도루묵이 되자 안타까워 하는 것은 덤.[7] 제갈량이 죽기 전 강유와 함께 위연에 대한 우려를 간언한다. 제갈량 사후 장례식에서 그의 뒤를 이어 군권을 맡기로 했다가 본색을 드러낸 위연에게 잠시 뺏기기도 했지만, 미리 제갈량에게 지시를 받은 마대의 활약에 다시 되찾는다. 원래의 그 더러운 성격이 아닌 정 반대로 조금은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 미화된 감이 없지 않다.
3. 후한 말의 인물
陽儀
생몰년도 미상
요동에서 관리를 지냈고 유의와 함께 공손도와 친했는데, 190년에 공손도가 중원 지역을 혼란스러운 것을 알고 한 왕조의 운명이 끝나려 하므로 왕을 칭하겠다는 야망을 듣는다.
3.1. 미디어 믹스
소설 삼국지 금왕 진오에서 진오의 군사와 맞서 싸우기 위해 양의는 2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북평으로 가려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진오가 첩보를 보내 양평성의 허실을 이미 알았기에 심복인 한유를 시켜 양의를 추격하게 했다.
한유가 이끄는 부대는 상단을 위장해 양의보다도 빠르게 가서 양의가 머물 곳으로 추측되는 무려현 경계에 있는 객잔에 대기해 객잔 자리를 거의 차지했으며, 양의는 객잔에서 음식을 시켜 먹다가 한유 등이 몰래 약을 타놓았기에 잠들었다. 양의와 병사들 중에서는 양의를 포함해 장교 이상은 한유 등에게 사로잡혔다.
토탈 워: 삼국에서는 공손도 휘하의 초기 장수로 186년부터 임관한 것으로 되어있고, 190년 시점의 나이는 36세.
유형은 선봉장, 칭호는 자사, 특성은 허영심, 이해심, 너그러움. 능력치는 최대 200을 기준으로 전문성 35, 결의 49, 책략 32, 본능 81 권위 54.
삼국지: 한말패업에서 등장해 군사 39, 무용 22, 지모 46, 정무 43, 인사 46, 외교 58의 능력치로 168년 생으로 나온다.
[1] 왕평이 무슨 무협지 기술을 쓴 건 아니고(...) 애초에 위연의 명분이 매우 부실한 상황에서 왕평이 그 점을 제대로 지적하자 굳이 위연과 함께하며 반역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던 군사들이 위연을 버린 것이다.[2] 화양국지에 따르면 제갈량이 유선에게 은밀히 표를 올려 양의의 성정은 성급하고 마음이 좁으니, 만약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면 장완이 이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다.[3] 얄궂게도 비의의 호방한 성품은 훗날 독이 되어 항장을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주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았다가 암살당하며 촉에게는 비극이 됐다.[4] 양양기와 자치통감 같은 사서에도 등장한다.[5]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같이 비의가 '위연이 그렇게 된 건 위연의 잘못도 있지만 양의의 잘못도 큽니다'라고 이전 행적까지 한꺼번에 몰아서 까는 작품도 있다.[6] 태수나 전쟁에서의 총대장 등. 당연한 얘기지만 '''절대로 군주를 시키면 안 된다.'''[7] 이 장면의 패러디 영상인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에선 제갈량에게 형아라고 부르며 사마의 팀을 신나게 까다 서버렉에 당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