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우스 율리아누스
1. 소개
서기 193년의 혼란기에 페르티낙스 다음으로 제위에 오른 로마 제국의 황제. 황제의 자리를 돈으로 산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1] 로, 선대 황제 페르티낙스를 살해한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에게 막대한 하사금을 지불하고 제위에 올랐다고 한다.
2. 어린시절과 즉위전까지의 삶
부친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디디우스 세베루스는 본국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밀라노 출신, 어머니 아이밀리아 클라라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다. 동시대 동료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133년 1월생으로 부친의 고향 밀라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4세기 작가미상의 후기 로마제국의 믿을 수 없는 역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137년생이라고 하고 있다.
훗날 제위 경장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세베루스 가문 출신이지만 대대로 밀라노의 지역유지였고,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지만 일찍이 로마인이었고 집정관을 배출한 원로원 가문 여인이었다. 위로는 두 형이 있었으며, 성년 이후 비슷한 계급 여성인 만리아 스칸틸라와 결혼해 슬하에 외동딸 디디아 클라라가 있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좋은 집안 태생임에도 원로원 입성 전까지는 세간사람들에게 꽤나 힘들고 하찮게 여겨진 직업들을 여러 개 경험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로마로 건너온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모 도미티아 루킬라 집에서 잠시 살았던 인연으로 안토니네 가문의 보호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면서 곧 출셋길이 열렸다. 그래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이 인연을 계기로 출세하기 시작해 172년경에는 제국 최정예군단 중 하나인 게르마니아 주둔 22군단장에 올랐고, 3년 뒤에는 페르티낙스와 함께 나란히 파트너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후에도 그는 어린 시절 황제의 어머니 집에서 자랐던 덕에 달마티아,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총독을 지낸 뒤, 이후 비티니아 총독을 거쳐 카르타고에서 총독 사무를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특히, 그는 페르티낙스의 후임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동안 부유하고 성공한 원로원 의원이 되었는데, 황실과의 인맥으로 성공하긴 했어도 순수한 개인능력으로 밑바닥에서 성공한 페르티낙스처럼 문무 능력 모두 꽤 괜찮고 유능한 사람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많은 공직을 비슷한 시기에 같이 한 페르티낙스와 비교해 인망이 없었고, 대중들에게도 인기와 존경을 많은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마르쿠스 황제 이후에도 콤모두스 밑에서 꽤 성공했다. 하지만 한때 개인비리로 인해 콤모두스에게 추방형을 선고받기도 했는데, 죄목은 “가난한 본국 이탈리아 시민들에게 함부로 돈을 하사한 혐의”였다. 따라서 그동안 황제에게 악감정이 없던 그는 이 일 이후 서서히 대립각을 세웠는데, 현대의 역사가들은 콤모두스가 부친 생전부터 두루 공직을 거친 그를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정치적으로 내상을 입게 했다고 분석한다. 이후에도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콤모두스 암살 미수 혐의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기소당했는데, 이때도 재판에서 배심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3. 돈으로 황제를 사다
콤모두스 암살 후 자신들이 추대한 황제 페르티낙스를 죽인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와 휘하 병사들은 로마 시민들의 반응이 두려워 페르티낙스의 머리를 장대에 높이 매단 채 진지로 돌아와 병영의 문을 걸어 닫았다. 사실 콤모두스 암살 당시, 로마에는 혈통적으론 안토니네 황족이 소수나마 있긴 했다. 원로원에는 콤모두스의 매형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복귀한 상태였고,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도 있었다. 또 콤모두스의 매형 중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원로원 의원도 있었다. 그는 전직집정관이었고 양심적이고 고결한 명문가 출신 귀족이었지만, 혈통적으로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어머니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옛 약혼녀였고, 아내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차녀 파딜라였기 때문이다. 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손윗동서 폼페이아누스처럼 겸손한 인품과 매우 양심적이고 헌신적 태도로 생전의 마르쿠스 황제에게 여러 사위 중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안토니네 황족들인 세 사람 모두 콤모두스 암살 당시 페르티낙스와 달리 적극적으로 제위를 원하지 않았으며, 망가진 국가 시스템과 정국안정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아내의 동생 콤모두스 생전부터 권력욕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2] ,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던 폼페이아누스 역시 페르티낙스 이후의 다음 황제를 결정할 열쇠를 쥐지 못했다. 그 이유는 '''새 황제와 관련된 결정권을 쥔 실세는 다름 아닌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는 막장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괴상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였다.
이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새 황제를 정하는 일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황제 후보자가 원로원 회의장도 아닌, 근위대 진지에 나타나 '''일종의 경매 방식'''을 통해 군사들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입찰'''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더 웃긴 것은 이때 근위대는 이를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제위 경매에 관한 공고문을 벽에 붙여 놓았다.'''
따라서 안토니네 가문의 사위들인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이런 행태에 혀를 내둘렀고 개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건국 이래 개판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제위를 원한 이들은 있었고 경쟁은 치열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두 명의 경쟁 후보가 남게 됐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였고, 두 번째 후보는 유력한 전직 집정관이자 상당한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리고 경매방식으로 의논된 새황제 최종후보는 결국 군인들에게 막대한 보너스를 약속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로 선택했다. 그런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행동은 디오 카시우스의 당시 현장 목격담에 따르면, 매우 비양심적이고 저급했다고 한다. 또 그는 상대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술피키아누스를 뽑는다면 자기 손으로 페르티낙스 모살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그들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순전히 근위대의 지지 때문이었고 이러한 취약한 입지와 페르티낙스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알고 있던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운명에 대한 불안감으로 첫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 눈으로 지샜다"고 한다. 먼저 그는 막장군주 콤모두스에게 부패혐의로 처벌을 받았을 정도로 세간의 존경은 기대하기 힘든 인사였고, 공공연히 그를 반대하는 로마 시민들에게도 원로원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또 그는 곧 근위대에게 했던 무절제한 선심성 공약을 지키지 못하면서 그들의 지지마저 잃어버렸다.
그 결과, 페르티낙스의 죽음은 국경 지역 주둔군을 휘하에 거느린 3명의 경쟁자 간의 제위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총독이 4월 중순에 시리아의 4개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받고 안티오키아를 임시수도로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라고 자처했다.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자처했다. 그러나 좀 더 강력한 후보자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냉혹하고 영리한 정치가인 그는 곧 무려 16개 군단을 비롯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주둔군 전체의 지지를 얻었다.
4. 몰락과 죽음
페르티낙스가 죽은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4월 19일, 세베루스는 지금의 빈 근처에 있는 카르눈툼에서 자신의 본부에 주둔 중인 군단으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그는 즉시 로마를 향해 진군을 준비했지만 우선은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협정을 맺고 그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었다. 세베루스의 군대가 로마를 향해 남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별에 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다, 그는 근위대를 시켜 로마 주변의 땅을 파서 요새를 만들게 했다.[3]
그러나 이러한 작업에 익숙하지 않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그 일을 회피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써서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즉위 후, 전임자를 살해한 근위대장 라이투스를 제거하지 않다가 뒤늦게나마 처형했는데 이 부분도 그의 근위대 장악능력을 확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 세베루스를 살해하기 위해 암살범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밀착 경호를 받고 있는 세베루스의 보안을 뚫지 못했고, 민중들은 세베루스 진군 직전 니게르를 공동황제라도 올리던지 하라고 항의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 율리아누스는 마지막 절망적인 조치로 원로원에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지만, 로마 가까이 오고 있던 세베루스로서는 권력을 나눠 가질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율리아누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세베루스를 황제로 임명했으며, 페르티낙스에게 신성한 영예들을 수여했다. 관리가 형을 집행하러 갔을 때 율리아누스는 모든 이에게 버림받아 홀로 된 채, 울고 불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죽기 직전에 "그런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누굴 죽였단 말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불과 2개월 만에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판노니아(도나우)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그의 66일의 짧은 치세는 막을 내리고, 곧이어 시작된 세베루스 왕조에 의해 로마는 얼마간 안정을 되찾게 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비참하게 처형됐지만, 그래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또다른 정적들인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달리 그의 유족들인 아내와 외동딸에게 시신을 인도하고 정식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줬다.
5. 평가
사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즉위 과정에서 돈으로 제위를 산 행동과 노골적으로 제위에 욕심을 낸 모습 때문이다. 또 그는 국고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에서도 페르티낙스와 함께 통화가치 하락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따라서 그는 전임자와 함께 로마동전 가치 하락의 책임이 있다고 까이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제위를 사면서 국격을 떨어트린 그의 행동도 욕하고, 초인플레이션 상황을 초래한 황제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재위기간은 66일에 불과했고, 이 기간마저 본인 앞가림하고 무력으로 밀고 내려오는 경쟁자와의 협상, 대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추가로 율리아누스는 돈으로 제위를 샀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제위에 오른 과정을 본인이 판을 짜고 주도해 오른 케이스도 아니었다. 좀 더 그에 대해 살펴보면,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돈으로 제위를 샀다고 해도 '''이미지와 달리 전혀 함량 미달의 황제가 아니었다'''.
즉위 전까지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곁에서 게르만족들로부터 본국 이탈리아를 훌륭히 지킨 공이 있던 장군이었으며, 콤모두스가 막장짓을 시작한 이후에도 자신의 전임자인 페르티낙스처럼 원로원과 군부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거물급 인사였다. 특히, 이 사람의 콤모두스 시대 행적들은 폭군에게 그냥 마음에 안 드는 이버지 시절 주요대신 중 한명이라고 찍힌 까닭에 공격받고 이를 법정 등에서 결백함 등으로 극복한 모습도 보인 탓에 동년배의 라이벌 페르티낙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이는 황제로서의 모습 역시 마찬가진데 재위기간이 짧긴 했지만, 적어도 그는 콤모두스가 망친 로마 상황을 파악해 일처리를 했고 페르티낙스처럼 무리하게 개혁을 시도하고 이를 밀어붙이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속사정을 알고보면 이 사람을 막장으로 치부하기엔 분명 문제가 있으며, 즉위과정에서 보인 행동 탓에 혹평은 들을 수 있어도 3세기의 위기 중 한가지 원인으로 지적받는 초인플레이션 상황까지 그가 모두 책임지면서 욕 먹는 것은 '''본인의 마지막 절규처럼 진짜 억울할 것이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라이투스가 이끈 프라이토리아니에게 '''돈으로 제위를 산 황제'''였고 이런 연유로 인망이 없어진 채 소방수로 투입된 황제였다. 즉, 백번 양보해 자질도 있고 세간의 평과 달리 나쁜 행동은 안했다고 해도 이런 것만으로 면죄부를 얻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제위에 욕심내면서 즉위한 까닭에 국격을 훼손한 당사자 중 한명이 바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분명히 그 평가가 박할 수 밖에 없었고, 황제라는 직위와 위용에 심각한 타격을 준 인물이라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두고두고 씹힐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