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티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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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헬리우스 페르티낙스
(Publius Helvius Pertinax)
생몰년도
126년 ~ 193년
재위 기간
193년 1월 1일 ~ 193년 3월 28일 (87일)

그는 폭 넓은 경험을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한 번에 개혁할 수 없다는 것, 특히 국가가 회복되는 데는 시간과 지혜가 두루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ㅡ 디오 카시우스

1. 소개
2. 해방노예의 아들에서 집정관으로
3. 제위에 오르다
4. 개혁의 실패와 몰락
5. 평가


1. 소개


콤모두스 사후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 2세기 말 내전 시기 로마 제국황제 중 첫번째 황제.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 형제 공동통치기때 개인이 가진 뛰어난 능력만으로 출세해 로마군 장군, 원로원 의원과 집정관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즉위 당시부터 콤모두스의 악폐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미숙한 정국운영과 자신을 밀어준 프라이토리아니와 황실 해방노예 관료들을 개혁 대상으로 삼은 부분 등으로 갈등을 야기해 재위 3개여월 만에 자신을 옹립시킨 근위대장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에게 암살됐다.

2. 해방노예의 아들에서 집정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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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서부의 도시 알바폼페이아(오늘날의 이탈리아 알바)에서 해방노예 헬비우스 수세스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시대 동료 원로원 의원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2]에 따르면, 페르티낙스는 북이탈리아에서 해방노예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입대 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30줄이 되어서야 출세를 위해 스스로 입대해 군 생활을 했는데, 꽤 늦은 나이에 일개 병사로 시작했지만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고 있던 부모의 옛주인 일가 사람들이 파트로누스로 큰 도움을 주면서 마침내 군단 대대장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는 일개 병사에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로마군 계급을 차근차근 올라갔는데, 파트로누스들의 도움 외에도 능력이나 인품이 상당히 괜찮은 탓에 161년 벌어진 파르티아 전쟁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페르티낙스는 철인황제와 그 동생 루키우스의 신임 아래 원로원 의원직을 거머쥐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 당시, 페르티낙스는 장군이자 총독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는데 그가 거친 곳은 시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의 라인강, 도나우 강 전선 등 로마군 주요국경 일대였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 당시 누명을 뒤집어쓰고 법정에 소환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는데, 이런 시련은 금방 끝나고 오히려 황제와 원로원에게 신임을 계속 받았다. 따라서 마르쿠스 황제는 마르코만디 전쟁을 치룰 당시, 자신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돕기 위한 핵심장군으로 페르티낙스를 선정해 그를 마르코만니 전쟁에 소환했다.
이렇게 페르티낙스는 서유럽과 영국, 동유럽 그리고 근동까지 돌아다니며 공을 세웠는데, 이중 169년 게르만 족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그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았다. 이에 마르쿠스 황제 시절인 175년 그는 처음으로 집정관에 올랐으며, 황제의 신임 아래 185년까지 시리아, 다키아, 모이시아 일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에 올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80년 죽고, 콤모두스가 단독황제가 된 이후에도 페르티낙스는 신임을 받았고, 182년 루킬라가 주도한 황제암살미수사건 이후 흑화된 콤모두스가 정치를 내팽겨치고 제국 내 주요장군들을 반역죄로 소환될 당시에도 그 신임이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페르티낙스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권신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고, 185년경 소란 사태로 시끄러워진 브리타니아로 임지를 옮겼다.
브리타니아로 건너갈 당시, 페르티낙스는 무질서 상태에 빠진 브리타니아 주둔 병사들의 군율을 엄격히 다뤘고 군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렇지만 이 시기 단독근위대장 페렌니스는 이미 그를 위험인물로 찍고 경계한 탓에, 페르티낙스가 페렌니스와 콤모두스를 상대로 시위를 일으킨 것을 제압했음에도 그 공이 과거처럼 황제의 신뢰로 연결되지 못했다. 브리타니아에서 병사들의 시위를 제압한 공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185년 페렌니스가 콤모두스에게 반란 음모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새로운 단독근위대장으로 해방노예였던 황실침실시종 클레안데르가 올랐다. 그런데 클레안데르는 부패했어도 능력이 있던 페렌니스보다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간신인 탓에 결국 페르티낙스는 185년 브리타니아 군단병들의 시위를 진압한 것이 너무 강압적인 군율을 적용해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공격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3여년 만인 187년 불명예스럽게 사직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페르티낙스는 로마군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늘 담당한 장군이자 충신이었기에, 원로원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페르티낙스를 총애하진 않아도 중용해줬다. 그 결과, 그는 콤모두스의 동료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고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다.

3. 제위에 오르다


페르티낙스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한 190년 무렵, 콤모두스는 네 차례의 암살 음모와 클레안데르 몰락 사건을 체험한 이후 통제불능 수준의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과대망상 증세에 시달린 탓에 완전히 맛이 간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과 광증은 황제가 스스로 검투사이자 로마의 헤라클레스가 되어 콜로세움에 데뷔하면서 그 정점을 찍게 되었다. 따라서 로마 재건 이후 대대적인 피의 숙청이 황제의 계획 아래 준비되었는데 192년 12월 31일 모두의 분노를 샀던 콤모두스가 극적으로 애첩 마르키아, 근위대장 라이투스, 황실관료 에클렉투스, 레슬링 개인교사 나르키수스 손에 암살됐다.
콤모두스가 암살될 당시 공모 주도자들인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에게는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들은 황제의 시신을 싸구려 침대보로 싸서 빨랫감으로 위장해 믿을 만한 노예 두 명을 시켜 콤모두스가 그날 밤을 보냈던 장소에서 가지고 나가게 했다. 한편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는 로마 거리를 지나 명망이 높았던 페르티낙스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콤모두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페르티낙스에게 알리고 그에게 황제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근위대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페르티낙스는 각각의 근위병에게 1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하고 그들의 지원을 얻었다. 페르티낙스는 군대와 민중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둑어둑한 거리를 지나 원로원 의원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원로원 의원들이 콤모두스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소리치는 상황이었고 페르티낙스는 상징적인 의미로 한 번은 사양한 후 관례에 의해 모든 권한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음으로써 황제로 선포되었다.
처음에는 전망이 밝은 것처럼 보였다, 새 황제는 별다른 반대 없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했고 현명하게 통치를 해 나갈 듯했다. 그러나 고작 3개월 후에 그가 빠른 죽음을 맞이하면서 심각한 내란이 유발되었고, 이후 몇 년간 무려 4명의 후보가 제위를 놓고 각축전은 벌이기 시작했다. 혼란했던 69년과 마찬가지로 내전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국경 지역 주둔군의 힘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전역을 총괄하는 확고한 통치력을 거머쥘 만한 인물이 출연하기까지는 아직 4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4. 개혁의 실패와 몰락


페르티낙스는 과거 갈바처럼 젊은 시절엔 능력이 뛰어났고 로마에서 가장 성공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하지만 즉위 당시에는 확고한 정통성도, 확실한 지지세력도 없었다. 또 계획 없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위만을 생각해 중요한 세력 기반들을 모두 놓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즉위는 사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처음 콤모두스 암살 소식을 듣고, 황제 제안을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에게 받았을 때 확실히 황제 자리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약속했다. 이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병사 일인당 만 2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돈으로 확실한 지원을 약속받은 뒤 병사들과 자신의 지지자들의 호위 속에 원로원에 출석할 수 있었고 모든 원로원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는 무일푼에서 제 힘으로 지금 자리까지 올랐다는 성공신화를 자랑스럽게 여긴 사람이었으며,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리를 지킬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특히 그가 문제가 된 부분은 민중들의 지지를 확인하자 모든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겼다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자신을 도와준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질서 회복을 위해 개혁대상으로 선언하고 대립했으며, 그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자신이 약속한 돈까지 지불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페르티낙스는 약속 이행을 요구한 병사들에게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을 지시하고 모욕까지 줬으니,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의 불만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월 3일, 새 황제가 무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즉위 직후부터 갈수록 비대해지는 프라이토리아니와 이들을 이끈 근위대장의 지나친 권력을 통제하려고 시도한 일은 사단을 낳고 만다. 페르티낙스의 근위대 개혁 조치는 콤모두스 아래에서 피로감을 느낀 원로원과 일반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지만, "한놈만 팬다"는 식으로 자신을 지지해줬던 프라이토리아니를 절대악으로 몰아붙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근위대는 이에 맞서 원로원 의원 중 한 사람을 황제로 선포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황제로 선택된 당사자는 이 사실을 페르티낙스에게 알리고 로마를 떠나버렸고, 첫 반발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페르티낙스는 또 다시 적을 만들고 대립했다. 그는 즉위 직후 세금감면과 인구 급감지에 10년간 면세혜택을 부여하고 토지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계획이 없고 이런 선심성 조치들은 국고 정상화에 큰 도움이 안 된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과 별개로 페르티낙스는 즉위 후, 황실의 자유민들, 즉 궁정 관리로써 행정의 많은 부분을 맡아서 보던 해방노예들을 횡령으로 고소하고 이들을 공개석상에서 범죄자로 몰아붙여 비난했다. 즉, 페르티낙스는 궁정 내 행정관료로 있던 해방노예들만 콕 집어 낸 다음 이들이 황실 재정의 부실을 초래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 또한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은 이를 반겼지만, 페르티낙스의 이런 방법은 그가 원한 콤모두스 시대와의 작별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근위대와 궁정 관리 양측의 반대에 부딪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도덕적으로도 큰 실수를 벌이면서, 과거 갈바가 제 명을 단축시킨 전철을 그대로 밞았다. 바로 황제가 콤모두스 시대의 악폐를 정리하고, 국고를 안정화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비난한 콤모두스가 한 것처럼 매관매직을 하고, 이중 고위직을 비싼 돈을 매겨 팔고 그 수익으로 국고를 채우는 방식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개혁대상으로 욕을 먹던 황궁 관료들과 큰 기대를 했던 원로원에게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고, 원로원 내에서는 이런 그의 인기가 빠르게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는 당시 존재하던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내 남성황족들을 적극 활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협력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앞세웠다. 따라서 처남 콤모두스의 막장극에 질린 나머지 잠시 원로원을 떠났던 폼페이아누스, 어떻게든 정신상태 불안으로 광증이 심해진 처남을 돕기 위해 아내와 함께 황궁에 남아 도왔던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새황제 페르티낙스 정권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즉,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가 저지른 것을 수습하면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던 이들을 적으로 계속 돌리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 페르티낙스가 오스티아에서 중요한 곡물 선적 상황을 시찰하고 있는 동안 심각한 쿠데타 기도가 있었는데 이 배후에는 근위대가 있었고 그들이 추대한 인물은 집정관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Quintus Sosius Falco)였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팔코는 사면받았지만 병사 몇몇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몇 주 후 근위대장 레토 주도로 일어난 쿠데타는 성공했다.
3월 28일 페르티낙스가 그날의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궁에 있었는데, 갑자기 300명의 군사들이 궁정 문으로 밀고 들어왔으며 보초를 서던 호위병들도 황실 관료들도 그들을 막지 않고 황제를 죽이라고 뒷통수를 쳤다. 이때 페르티낙스 황제 주위에 사람들은 그에게 달아나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권유했지만 페르티낙스는 그 자리에 남아 칩입자들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는 황제로서 자신의 지위와 위엄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진압하려고 했는데, 애당초 그는 과거 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트라야누스처럼 제 힘만으로 경쟁자들을 누르고 제위를 차지한 황제가 아닌 터라 모두 허사가 되었다.
디오 등의 이야기에 따르면, 페르티낙스는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이 궁 안으로 밀고 들어온 상황에서, 자신의 풍모와 과거의 업적들을 이용해 그들을 위압하려고 하고 언변으로 설득하려고 직접 대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무모하고 멍청한 행동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병사들에게 위엄과 설득이라는 언변술은 이미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가 말을 하던 도중 병사 한 명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병사들이 보낸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그를 칼로 내리쳤고 이에 다른 병사들이 가세하는 비극으로 이날의 사건은 끝나고 말았다.
이때 병사들은 66세의 페르티낙스에게 "병사들이 보낸 칼이나 받아라"라고 소리친 다음 칼로 내리쳤고, 고령의 황제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하며 비참하게 죽였다. 그렇게 피폐한 제국 재정을 개선하고자 각종 경비와 군사 예산을 삭감하려던 것이 군의 반발을 사서, 결국 황제가 된지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다른 이들도 아닌 근위대에게 암살당한 모양새로 죽었으니, 순교자 이미지를 띠게 되었지만 본인 스스로 적을 많이 만든 탓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그렇게 페르티낙스의 통치 기간은 고작 87일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제위는 돈으로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후 같은 해 황제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난 뒤, 페르티낙스의 신원을 복구하여 정통성을 인정하고 살해자들을 처벌했다는 점이 그에게는 저 세상에서나마 그나마 위안.

5. 평가


무일푼의 거지였던 해방노예 아들로 태어나서 맨주먹으로 자수성가해 황제까지 오른 성공스토리 드라마 주인공 같은 인생사, 제위 등극 후 악폐로 지적받은 프라이토리아니와 단독근위대장의 끝없는 갈등 속에서 열정을 쏟다가 비참하게 살해된 황제라는 스토리, 그리고 뒤에 등장할 후임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내세운 명분 탓에 고대전승기록들에서 페르티낙스는 순교자 이미지의 매우 뛰어난 황제 중 한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와 달리 그는 당대와 후대 사람들에게 실패한 군주의 전형으로 더 많이 평가받고 있다. 즉, 페르티낙스를 옆에서 직접 지켜본 디오 카시우스의 말처럼 막장군주 콤모두스가 저지른 악폐를 정리하는데 최선을 다한 황제인 것은 맞지만, 과거 네 황제의 해 당시 갈바처럼 계획없이 지나치게 본인의 능력과 경험만을 앞세워 끝내 실패한 황제로 평가받는다.
이 사람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더라도 사회 밑바닥에서 최상류층까지 올라간 성공신화를 쓴 훌륭한 인물로, 인생사만 놓고 보면 굉장히 매력이 넘치는 드라마 속의 멋진 주인공이었다. 특히, 그가 살던 시대가 난세도 아닌 로마 최전성기였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더라도 페르티낙스라는 사내가 존경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대 사람이자 원로원 동료였던 디오 카시우스를 비롯해 근현대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는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앞세운 나머지 실패했고, 실패한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통치자가 설령 좋은 행동으로도 미움을 받지 않아야 하는 이유의 예시로 이 황제를 거론하기도 했으며, 디오 역시 페르티낙스의 인품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콤모두스의 폭정을 막겠다면서 지나치게 개혁 속도를 올리고 다른 상황을 무시한 행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즉, 설령 좋은 의도로 개혁을 시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오판으로 미움을 받아 몰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가 바로 페르티낙스였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페르티낙스의 최대 실수로 지적받는 부분은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먼저 그는 디오, 마키아벨리의 평가처럼 정치력과 상황 파악능력 모두 떨어졌다고 평가받는데, 실제 그의 개혁 추진은 명분과 본심은 훌륭했어도 너무 급진적이었고 문제 해결 방법도 무계획적이며 밀어붙이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옆에서 지켜본 디오의 표현처럼 훌륭한 의도와 달리 빠르게 몰락하게 됐다.
이를 좀 더 깊게 살펴보면, 페르티낙스 황제가 가장 먼저 간과한 부분은, 콤모두스 시대와의 절연을 지나치게 원칙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전개한 나머지 100년을 지배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즉 안토니네 가문 사람들을 활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거론된다. 또 정치력도 경력과 명성에 비해 많이 미흡한 황제였고, 최대 개혁대상으로 프라이토리아니와 황실관료들을 직접 겨냥한 다음, 자신을 제위에 올려준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 세력을 적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세트로 거론된다. 이는 정통성이 없고 무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르지도 않은 황제가 저지른 최대실수였다고 지적받고 있는데, 실제 그의 선량한 의도조차 안토니네 가문의 황금기를 그리워한 이들에게도 결국 미움을 받게 만들었다.
당시 로마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가 있었다. 페르티낙스에게 남성황족들은 공동황제 제도 등을 이용해 더 확고한 정통성을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특히,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는 폼페이아누스와 루킬라의 아들이었고, 이 청년의 부친 폼페이아누스는 은퇴 후 복귀하긴 했지만 여전히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 속주총독들에게 차기 황제로 지지를 받고 있던 안토니네 집안 맏사위였다. 그런데 페르티낙스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폼페이아누스나 온화한 성품의 올곧은 황족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협력을 요구했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즉, 그는 정통성도 없고 제 힘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한 황제가 아님에도 100년 넘게 로마를 지배한 안토니네 가문 사람들을 사실상 배제한 채 자신의 인기와 민중들의 기대, 지지 아래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다음으로 그가 저지른 실수는 먼저 언급한 것과 같이 자신의 즉위에 도움을 준 인사들을 개혁 대상으로 돌려버린 부분을 보면, 비교대상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커녕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보다 많이 미숙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자신을 도와준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를 배제하거나 에클렉투스로 대표되는 해방노예 출신 관료들을 처내는 과정에서 개혁대상들로 지적받은 이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뿐, 타협점 따윈 제시하지도 않았다. 이는 과거 베스파시아누스가 오래된 친황실세력인 네르바 등을 활용한 전례나 네르바가 군부의 지지를 받는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은 선례와 매우 대비된 행보였다.
당시, 페르티낙스의 진단처럼 프라이토리아니는 문제가 많았고 라이투스나 에클렉투스 모두 콤모두스 시대의 악행을 생각하면 처리해야만 했다. 그래서 원로원과 민중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이들의 도움으로 즉위한 황제였고, 내전 당시의 베스파시아누스처럼 제 실력으로 경쟁자들을 이기고 공인된 황제가 아니었다. 또한 페르티낙스는 즉위 당시 콤모두스를 까고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을 씹어대면서도 정작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병사 일인당 1만2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제안하고 원로원에 들어가 제위를 얻은 모양새로 즉위한 탓에 이 부분에서도 꼬투리를 본인이 제공한 꼴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즉위 후 "내가 문제투성이 범죄자들인 니들에게 왜 그런 돈을 다 줘? 훈련이나 빡세게 하고 말이나 잘들어"라고 한 다음 가혹한 훈련까지 지시했으니(...).
다시 말하면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와 해방노예 관료들의 지지 속에서 동료들까지 제압하는 형태로 즉위한 황제였음에도,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우군을 오히려 개혁대상이자 적폐로 지목하고 대립했다. 따라서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 입에서 "돈 주고 제위를 보장받은 인간이 우리한테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약속도 안 지키고 오히려 등에 칼을 꽃아?"라고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갈바의 전철을 프리패스로 밞는 것은 당연했다.
또 이 사람은 국고를 벌충하는 과정에서 계속 실수했는데, 더 중요한 것은 열정만 있을 뿐 계획도 없었다. 당시 그는 망가진 국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콤모두스가 모았던 막대한 재물을 경매로 풀었는데, 본인이 개인 호주머니에 안 챙기고 그 수익을 국고에 채워 넣었다는 점에서 이 황제의 행동들은 진심이었다. 또 세제감면 같은 조치들도 취해준 조치 역시 민심을 수습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히 할 조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국고 정상화에서 계획 없이 선심성으로 해준 세금 감면 조치와 질서 회복을 목적으로 인구 급감지에 10년간 면세혜택을 그냥 부여한 것은 결론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황궁 내 재정 관련 관료들과 원로원 내 인재들까지 싸잡아 "니 녀석들이 그때 콤모두스가 망치고 있어도 제대로 안 했으니까 그런거다. 니들 모두 횡령으로 처벌이나 받아라!"하고 공개적으로 욕을 했으니 모양새도 떨어지는 악수를 두루 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또 그는 후임자 중 한명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영악하면서도 능수능란하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동년배의 라이벌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처럼 타협점을 제시하는 유연성도 떨어졌고 다른 황제들이 쓰지 않은 더러운 방법까지 어설픈 방법으로 사용했다. 바로 자신이 그토록 비난한 관직 매매까지 벌인 건데, 고위 관직이 더 비싸게 팔림을 이용해 콤모두스때처럼 관직을 팔아치웠다. 이렇게 그가 벌인 일들은 그에게 기대를 했던 동료 원로원들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를 하지 않게 했다. 따라서 원로원과 황실관료들까지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결과는 설령 프라이토리아니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어도, 과거 갈바처럼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또 페르티낙스는 화폐 가치 하락 문제와 곡물 수급 문제 등에서도, 열정만 있을 뿐 일차원적으로 나섰다고 비판받고 잇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표면상으로는 고결하고 열정이 가득한 황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교자 이미지와 달리 여러 부분의 개혁에서 열정만 높았을 뿐 계획도 없이 필연적으로 실패의 길로 향했던 군주였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거 갈바처럼 본인은 암살되고 이후 로마의 상황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장 전까진 내전의 심화로의 귀결이었다.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동향친구, 외사촌이자 최측근인 가이우스 플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흉상이라는 견해도 있다.[2] 역사가로 잘알려져 있지만, 그가 역사책 저술을 한 시기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반강제로 정계은퇴를 한 뒤 말년동안 고향 니케아에서 한 것이 전부다. 오히려 디오는 앞세대인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타키투스처럼 2세기 로마 원로원 내에서 상당한 요직을 두루 거치고, 집정관을 두 번이나 역임한 베테랑 행정가이자 중진 의원이며 로마군 지휘관까지 지낸 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