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Domus Nerva-Antonina
'''
96년 ~ 198년
'''성씨'''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ianus)
안토니누스(Antoninus)
'''창건자'''
'''네르바''' (96 ~ 98)
'''주요 황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의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다섯 황제의 해
1. 개요
2. 역대 황제
3. 역사
4. 왕조 가계도상의 특징
5. 평가
6. 여담


1. 개요


로마 제국의 세 번째 세습 왕조. 도미티아누스암살되어 단절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96년부터 198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다. 흔히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여러 칭호 중 가문명을 붙여 부른 존칭 안토니네에서 그 이름을 따서 안토니네 황조라고도 부른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가 이 왕조에 속하는 황제들이며, 여기서 루키우스 베루스콤모두스만 빼면 그 유명한 오현제다. 또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모두 양자 관계로 황위가 계승됐기 때문에 양자 왕조(Adoptive dynasty)라고도 불린다. 이처럼 혈연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자를 양자로 맞이하여 제위를 계승했던 것이 이 시기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끈 원동력으로 꼽히곤 한다.[1][2]

2.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네르바
96년 9월 18일 ~ 98년 7월 27일
2대
트라야누스
98년 7월 27일 ~ 117년 8월 8일
3대
하드리아누스
117년 8월 10일 ~ 138년 7월 10일
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년 7월 11일 ~ 161년 3월 7일
5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 3월 8일 ~ 180년 3월 17일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161년 3월 8일 ~ 169년
6대
콤모두스
180년 3월 17일 ~ 192년 12월 31일

3. 역사


  • 자세한 내용은 오현제 항목 또는 각 황제들의 항목을 참고할 것.

4. 왕조 가계도상의 특징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가 개창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여러 부분에서 왕조 가계도상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두 왕조 모두 입양형태로 친양부자 관계를 통해 제위를 잇고, 그 혈연관계 속에서 진행된 근친혼의 모습이 드러나거나 계획된 경우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단일 가문 가계였던 플라비우스 왕조나 여타 동양 왕조와 달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처럼 크게 두 가문이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루키우스 베루스로 이어지는 네르바 가문 라인이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가문 라인이다.
이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입양 형태로 제위계승을 했으면서도 일정부분 황실 구성원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으면서도,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대를 잇기 위해 활용한 친양자 제도와 고대 로마귀족들의 족벌주의 문화 아래에서 두 왕조는 끊임없이 혈연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아그리피나, 폼페이아 플로티나, 대 파우스티나, 도미티아 루킬라, 루킬라 등 황실여인들의 입김은 강했고, 이들이 황제의 제위계승이나 프라이토리아니(친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 수도장관 등 주요관직 임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도 많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두 왕조 모두 이렇게 확보한 적합한 후계자’들 중 제위에 오른 황제들,즉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암군이나 폭군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평이 좋지 못하며 멀쩡하고 유능한 후계자들은 대개 요절하거나 친위쿠테타로 제위계승권이 무산되고 비극 속에 죽는 일이 벌어져 중간에 제위계승구도가 꼬이는 상황도 연출됐다. 그리고 두 왕조 모두 이런 특징 가운데 정통성이 확보된 황실 황족들이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서게 되고, 이 과정 중 황제 암살 미수건으로 잡음이 일어나면서 균열이 생기고 종국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문이 하나의 새로운 가문이 된 뒤 공동운명체로 완전히 멸문했다는 부분도 연구자들에게 공통점으로 언급된다.
아울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 가문이었던 플라비우스 왕조와 달리 수도 로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집정관급 원로원 계급에 속한 두 가문이 법적, 혈연적으로 결합된 형태의 이성이 같은 성씨가 되는 형태의 이중 가문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의 스페인, 프랑스 남부 지방이 나오지만, 이들은 모두 최소한 아버지 대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하고 속주 총독 등 요직을 맡아 온 제국의 최상위 지도층 출신이었다.
왕조의 명목상의 시조인 네르바 가문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세습귀족 가문이었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본가 역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노빌레스 계급이었다. 또 황가의 두 성씨 중 안토니네 일가라고 불린 안토니누스의 외가 역시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빌레스에 속했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갈리아 혈통의 친가(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를 두고 있다고 해도 피우스의 친조부부터가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집정관 2회, 로마 도시 장관(urban prefect)까지 지낸 인물이었고 황제 본인은 외조부의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 또한 트라야누스의 조카손녀인 아내를 통해 황실과 인척관계에 있었으며 집정관 3회와 도시 장관을 지낸 당대의 엘리트였다. 따라서 이 왕조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 로마와 이탈리아 본적의 로마귀족가문의 황실이라는 점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차이점도 있다. 가계상 차이를 보면, 비슷해보여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실질적 창건자 트라야누스의 적통을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하나의 가문을 무리해서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찌되었던 간에 모두 트라야누스 친누나의 친혈육이거나 인척이었고, 이들의 결혼정책은 종국적으로 하나의 혈통을 만들려고 했던 정황이 보인다고 한다.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적합한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가이자 양자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의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왕조 지속 내내 인위적으로 하나의 가문으로 만들고 대를 이었다. 즉, 창건자 생전부터 황조 시작부터 지속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혈통을 얻고, 궁극적으론 다른 성씨의 가문을 '''하나의 가문(카이사르 가문)'''으로 결합해 완성했다. 그래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로마인들에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이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당대부터 지금까지 두 가문은 멸문 직전까지 하나의 가문이었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듯 이 왕조의 가계는 계속되는 근친혼과 복잡한 입양관계 등으로 거미줄처럼 상당히 복잡하다.
이런 특징은 같은 세습왕조이자 입양관계가 많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가장 큰 차이인데, 사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기본계획[3]이었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왕조처럼 연이은 근친혼으로 복잡해졌고 긍극적으로는 ‘아일리우스 가문=안토니누스 가문’이 됐을 것이다 추측하는 주장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의해 바뀌게 되었는데, 그래도 조카 루킬라와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간의 결혼을 봤을 때 드러나듯 두 가문의 혈연적 결합 시도는 나타나고 있다[4].
또 두 왕조는 이탈리아와 로마에 기반을 둔 세습귀족 왕조였고, 황실이 이탈리아 귀족적 성향을 보였다고 해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고대 로마 파트리키 가문들의 친인척간의 족벌주의 연합체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차이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5. 평가


정치적으로는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호하였다.[5]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우선 왕조의 설립자인 네르바 본인이 원로원의 승인에 의하여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황제들이 전반적으로 원로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었던 점도 컸다. 다만 유일한 예외인 하드리아누스의 경우 즉위 직후 원로원의 요인 네 명을 반란 혐의로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 해버린 데다가, 재위 기간 내내 속주 순방에만 열심인 채 본진인 로마는 비워둬서 원로원과 사이가 개판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적 권력의 측면으로 보자면 원로원의 기능 쇠퇴가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원로원은 더이상 주요한 인적 풀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황제들은 측근 관료층이라고 부를 만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당장 로마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가 공직상으로는 별다르게 한 게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이들 기사계급도 능력이 출중하거나 황제에게 잘보여서 황제관료로 생활 한 후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 의석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로원 계급으로 들어갔다. [6]
군사적으로도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영토를 확보하여 안정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참패를 앙갚음 한 데 이어, 파르티아 원정까지 감행해서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해버리기까지 한다.[7]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와중에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이상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역량을 감안할 때 무리수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르티아에서 군사를 철수하였으며[8]이후로 로마는 팽창 정책보다는 철저히 국경 수성에 몰두하게 된다.[9] [10]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재임 기간 내내 게르만 족의 외침에 시달린 나머지, 재임 말기에 게르마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속주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도중에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고 후임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서 무산됐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포기한 동기는 아마 그냥 막사생활이 지겨워서(...)였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재정 상황이나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명한 결정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군사적 안전성을 바탕으로 제국 각지에서 활발한 물자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경제력의 절정을 맞이함과 동시에 지나친 식민도시 개발 및 농작지 확대로 인해서 서서히 경제적인 엔트로피의 고갈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이 시기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여러모로 황금 시대(Saeculum Aureum)이라는 표현이 걸맞았던 시기'''.

6. 여담


  • 다른 양자 사이와 달리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사이의 나이 차이는 10살밖에 안 됐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입양법을 개정해야했다고 한다. 그전의 입양법으로는 그 정도 나이 차이로는 양자관계가 성립이 안 됐다.
  •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인데 이 왕조에는 또다른 황제가 한 명 있다.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인물로, 하드리아누스의 첫 후계자였다가 병사한 아일리우스의 아들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양자로 받아들여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같은 양아버지를 둔 형제 사이로 형제 간의 우애가 친형제 이상으로 좋았다. 사실 본인은 황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완강한 요청에 따라 원로원이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면서 로마 역사상 최초로 공동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전부터 사람은 온화하고 예의바르지만, 지나치게 쾌락을 추구한다고 평가받은 사람답게 황제 즉위 후에도 낙천적으로 유흥을 즐기고 살았던 멋쟁이였다. 그러나 조카처럼 아예 국사를 내팽쳐치고 놀고 먹는 사람은 아니었고, 낙천적이고 화려한 사생활 때문에 원로원과 공동황제 마르쿠스에게 걱정을 끼쳤어도 업무에 지칠대로 지친 을 나름 잘 보좌해주고 맡은 업무는 완벽히 처리해낸 나름 괜찮은 황제였다. 베루스는 조카인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된 이후, 살아생전 철없고 화려한 이미지 탓에 놀고 먹다가 사망한 방탕한 황제로 후대 로마인들에게 기록되기도 했고, 종종 조카가 까일 때 형 내외와 함께 거론돼 비난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169년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공을 방어하고 로마로 회군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가 혼수 상태로 로마 귀환 후 과로로 사망했다.[11]
  • 콤모두스가 암살될 당시, 그에게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계보는 완전히 단절됐다. 그러나 내전 당시, 도나우 군단의 추대로 황제를 자처하고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어거지로 안토니누스 가문의 계보가 이어졌다.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정통성 확보와 권위를 위해 폭군으로 단죄돼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콤모두스를 복권시키면서 자신과 장남 카라칼라를 안토니누스 가문에 셀프 입양했다[12]. 이 때문에 카라칼라가 모든 속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안토니누스 칙령, 카라칼라가 도입한 2데나리우스 은화인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 등에 안토니누스 가문의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다.
  • 가문의 대는 콤모두스를 끝으로 단절됐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 약혼녀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누나 케이오이아 피비아의 아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남성 황족 등 방계황족들은 살아있었다. 또 케이오이아 파비아의 여동생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가 되는 케이오이아 플라우티아 역시 그녀가 낳은 딸이 리키니우스 발부스와 결혼해 대를 이었는데 이 두사람이 낳은 아들이 바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 유니우스 리키니우스 발부스이다[13].
이중 흔히 플라우티우스라고 하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결혼해 안토니네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장인과 처남 콤모두스 시대동안 두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는 여러 사위 중 그를 적극 밀어줬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장인 사망 당시 국장 수행멤버였는데, 그럼에도 아내의 언니 루킬라가 콤모두스 암살사건을 일으킬 당시 개입하지 않아 마르쿠스의 사위 중 목숨을 건졌다.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 암살 당시 안토니네 왕조의 몇 없는 남자황족이자 마르쿠스의 사위임에도 제위에 욕심을 안 냈는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돈으로 사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군을 동원해 로마로 진군하자 이런 모습을 보고 아예 은퇴선언을 해버리고 가족들과 시골별장에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가 자신의 진군 당시 국법에 따라 이는 절대 안되는 행동이라고 반대한 것을 빌미삼아 205년 사형을 명령한 뒤 그를 살해했다.

[1] 다만 이게 정말로 중요한 원동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이전 로마 역사에서도 플라비우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양자 관계로 권력이 세습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 우선 카이사르부터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양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모두 훌륭하게 통치를 수행해냈다. 또한 오현제 시기 황제랑 같은 해에 집정관이 된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황제와 인척, 친척이다. 오현제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었으며 같은 인물이면 측근, 같은 측근이면 친척, 같은 친척이면 가족을 더 선호하였다. [2] 그리고 사실 양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게 아우렐리우스 이전 황제들은 모두 친자가 없었다. 즉 왕위를 세습하고 싶어도 세습할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양자가 아니더라도 족보를 펼쳐보면 네르바 빼고는 직간접적으로 다 연결되어있다.[3]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이 후계자로 입양했다가 요절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키려고 했다.[4] 이렇게 된 원인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짜놓은 결혼 계획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이다.[5] 양호해야지 좋은 황제로 칭송된다. 명군이거나 어느 정도 있음에도 원로원과 대립각을 너무 세워서 폭군 취급받는 황제도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티베리우스.[6] 2세기쯤 되면 공화정 시기부터 명문 귀족은 많이 남지 않았고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의 가계도를 올라가면 기사계급 출신이 많았다.[7] 여담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한 후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내가 젊었으면 인도까지 갈 텐데.."'''였다고 한다. [8] 시오노 나나미가 까일 부분이 많은 건 맞지만 이건 로마 사학자들의 전반적인 시각이다.[9] 원수정 시기에 제국확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애초에 라인 도나우 강도 국경선이 아니었고 강을 따라 방어하지도 않았다. 로마군의 요새는 강 너머 깊숙이까지 있었고 주둔한 흔적도 꾸준히 발견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요새들을 강화한 것뿐이었으며, 이후 로마는 능력만 되면 확장하려고 했다. 상황과 관리 역량이 부족했을 뿐.[10]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 '너무 국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국경 밖 게르만족의 세력 구도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을 놓쳤고, 이로 인해 후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똥을 치워야만 했다.'라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항목 참조.[11]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급성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밤낮이 자주 뒤바뀌는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되고 있다.[12] 이 입양선언은 정치적 정통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고, 이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간의 내전이라는 특수성도 고려해보아야 한다.[13]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가 명문귀족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부관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이 발부스가 맞는지 불분명하며, 이 주장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장일 뿐이다. 현대학자들은 이 기록이 워낙 위서인데다 이런 명문가 귀족이 친부라면 당장 로마인들의 관습과 전통상 풀네임에 그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발부스의 아들이 고르디아누스3세라는 이야기는 고르디아누스 가의 정통성을 위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