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 카시우스

 

Dio Cassius / Lucius Cassius Dio / Cassius Dio Cocceianus
AD 155 ~ 235
1. 소개
2. 생애
3. 로마사

'''콤모두스의 치세는 한마디로 로마 제국의 재앙이었다. 지금 우리의 역사는 금의 왕국에서 철과 녹의 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1. 소개


일반적으로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라고 부르는 루키우스 카시우스 디오(Lucius Cassius Dio) 또는 카시우스 디오 코케이아누스(Cassius Dio Cocceianus)는 로마 제국의 정치가, 행정가이자 역사가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부터 세베루스 왕조 시대까지 살았던 디오 카시우스는 오늘날 터키 니카이아 출신인 그리스 혈통 원로원 귀족이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역임했고, 2번의 속주 총독 경험이 있는 원로원 중진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늘날까지 유명한 이유는 22년간 손수 기록하고 조사를 통해 꼼꼼히 작성한 80권 분량의 <로마사>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저술한 <로마사>는 공화정 후기와 제정 초기, 제정 중기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에게 훌륭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디오 카시우스는 155년 소아시아 비티니아 지방 니카이아(니케아)에서 카시우스 일족 출신인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아시아에 터를 잡고 살던 그리스 혈통의 귀족 가문이었으며, 대대로 로마 원로원 의석을 가진 집안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의 할아버지 또는 외할아버지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 크리스톰(Dio Chrysostom)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 부분은 오늘날까지 확실치 않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아버지인 카시우스 아프로니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밑에서 달마티아와 실리시아 총독을 지낸 사람이었다. 일찍이 고향 니케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건너간 디오 카시우스는 아버지가 사망한 180년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일생의 대부분을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살았음에도 자신의 고향인 소아시아 일대와 고향 니카이아를 “나의 집”이라고 부르며 항상 그리워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오랫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콤모두스, 콤모두스 암살 후 벌어진 혼란기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게타,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를 직접 경험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두 번의 집정관을 지냈으며, 콤모두스 시대부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까지 여러 황제 곁에서 정계에서 활동했다. 이때 디오는 카라칼라가 암살된 뒤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의 명에 따라 페르가몬과 스미르나 행정관에 임명돼 파견되었고, 이 공직을 마친 이후 로마로 귀환해 생애 첫 집정관이 되었다. 디오는 전직집정관 자격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과 달마티아, 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연이어 지냈으며 속주 총독을 역임한 후 다시 로마로 귀환했다.
로마로 돌아온 디오는 정계은퇴를 앞둔 229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 갓 즉위한 어린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생애 2번째 집정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이 관직 경험을 끝으로 고향 니카이아로 돌아가 저술활동을 했다. 그는 235년 대략 80세의 나이에 니카이아의 고향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와 동명이인인 증손자 카시우스 디오 역시 원로원 의원을 지내는 동안 291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

3. 로마사


원로원 실세의원이던 디오 카시우스가 오늘날까지 로마 역사가들과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22년간 손수 기록하고 조사해 완성한 80권짜리 역사책 <로마사> 때문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에 당도한 아이네아스의 상륙부터 시작되는데, 왕정 시대와 BC 1세기 공화정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야기만을 적었다, 하지만 제정이 시작되는 시대부터는 자신의 오랜 공직 경험 및 군인, 행정가, 정치가 경험을 살려 정확하고 솔직한 문체를 활용해 기술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까지 그리스어로 기술한 <로마사>는 이전에 살았던 수에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풍속 등도 기술했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와 달리 그는 제정 시대 황제들을 서술할 때 온갖 풍문을 마구잡이로 적어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와 마찬가지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1]도미티아누스[2]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디오는 원로원 중진 출신으로 있으면서 여러 황제들을 직접 체험했고, 콤모두스를 비롯해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들과 개별면담도 한 상당한 거물급 의원이었다. 따라서 그가 직접 황제들을 만나 경험하고 난 뒤 이를 기술한 내용의 퀄리티가 상당하다. 따라서 그가 로마 원로원 의원 생활동안 경험한 콤모두스 시대나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서술들은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1급 사료로 상당히 높게 평가받고 있다.[3]
하지만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80권은 오늘날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분실되거나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초반부 36권의 경우 사라진 상태이며,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기원전 89년)을 기록한 35권, 폼페이우스의 지중해 해적 토벌 업적(기원전 65년)을 다룬 36권은 일부만 남아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 시대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 중기인 아그리파의 사망(기원전 12년)까지 기술한 37~54권, 토이토부르크 전투(기원후 9년)부터 클라우디우스 황제 사망(기원후 54년)까지를 다룬 56~60권은 현존하고 있다.
다행인 점은 그가 체험한 동시대의 기록인 61권부터 80권이 11세기에 살았던 요안니스 크시필리누스(Joannes Xiphilinus)[4]의 요약 기록을 통해 남아있다는 것이다. 상단의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도 크시필리누스의 기록을 통해 남아있다.

[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을 없애고 세습왕조를 구축한 까닭에 원로원과 이 시대를 살지 않았던 타키투스 등 공화정 회귀주의자들에게 평이 상당히 나빴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이던 카시우스 디오 역시 이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200여년 가까이 지난 시대에 활동한 까닭에 이들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많았던 타키투스 등 바로 앞 세대 역사서들을 많이 참조했으므로 이 왕조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하지 않았다.[2] 도미티아누스는 오늘날 재평가되면서 폭군으로 단죄될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생전부터 사후 로마 세계에서의 평가는 원로원과 로마 상류층에게 최악이었다. 모든 평가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다섯 황제 중 가장 평이 나빴던 네로보다도 안 좋았고, 로마 최악의 폭군이라고 공인된 콤모두스와 동급 수준으로 악평을 받았다. 실제로 콤모두스 암살 당시 디오가 속한 원로원에서 대놓고 그를 악랄하고 잔인하다고 평했다. 또 디오가 참고한 타키투스 등 당대 저서에서도 공과 사 모두 대차게 까였던 사람이 도미티아누스인 탓에 좋게 서술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높을 리 없었다.[3] 그가 체험한 황제들과 당시 원로원 분위기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그가 지방관, 총독, 군사령관을 지내면서 당시 황제들이 내린 결정 등이 실제로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4] 11세기 살았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승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일 7세 두카스의 명에 따라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35~80권 내용을 요약해 기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