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토리아니

 

[image]
Praetoriani (Praetorian Guard)
1. 개요
2. 역사
2.1. 기원
2.2. 창설
2.3. 정치군인
2.4. 전장에서의 역할
2.5. 쇠락 및 폐지와 그 이후
3. 편제와 규모
4. 예니체리의 대선배?
5. 유명한 근위대장들


1. 개요


로마 제국의 황제를 호위하는 최측근 친위대로,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존속한 '''제국의 엘리트 부대다.''' 다만 용어 자체는 공화정 시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활동할 때부터 로마군 장군들의 직속 호위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영어로는 프레토리언 가드(Praetorian Guard)라고 부른다.

2. 역사



2.1. 기원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프라이토리움', 즉 군의 지휘관들이 사용하는 지휘용 막사에서 유래한 단어로, 속주 총독을 맡을 수 있었던 법무관(프라이토르) 수준의 군지휘관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병사들을 뜻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공식적인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으로 편제하기 전에도 로마의 이름난 장군들은 특별히 선발한 병사들 내지는 신임하는 정예부대를 이러한 직속부대로 활용하곤 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친위대라고 거명하고,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호위대로 대동했던 제10 에케스트리스 군단[1]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2.2. 창설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절대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자신이 직접 제어할 수 있는 직속 무력집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9개 대대로 편제되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최초로 편성하게 되는데, 초기에 각 대대의 병력은 500명 정도였지만, 이내 2배에 달하는 1,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여기에 각 대대별로 약 30기 정도의 기병이 배속되어 10,000명이 조금 못 되는 규모였다. 구성원은 모두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즉 창설 당시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출신들로만 구성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던 셈이다.
비록 이렇게 친위부대를 편성하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일단 카이사르 이래로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져있던 공화정을 부활시켰다는 형식을 취하면서 권력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이 시민들과 원로원에 필요 이상으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창설 초기에 근위대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3개 대대 1,500명에서 3,000명 정도가 로마 시내에 상주했고, 나머지는 로마 근교에 배치되었다. 그 임무 또한 황제의 궁전과 주요 시설들을 순찰하거나 요인들을 경호하는 데 그쳤다.

2.3. 정치군인


그러나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직속부대이자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내 유일한 무력집단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특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속된 말로 맛을 들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래는 냉혈한이었고 차가운 얼음 같았음에도 표면상으로는 늘 온건한 지도자 이미지로 치세 대부분을 일관했던 아우구스투스는 통치기간 내내 프라이토리아니를 정치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최대한 억제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비슷했고 10대 시절부터 이미 황제로 갖춰야 할 정치력과 행정가, 군인으로 그 능력이 뛰어났던 그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후임황제로 즉위하면서 이런 경향은 바뀌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양부와 판박이 수준으로 성향이나 성격이 비슷했고, 무척 성실하면서도 책임감이 강했으며 그 능력은 당시 로마 인재풀 내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래부터 낯을 많이 가리고, 폐쇄적인 성격과 과묵하면서도 인간미가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뛰어난 정치력과 행정능력, 10대 후반부터 검증된 군사적 능력과 별개로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배려하는 정치 감각이 부족했던 냉혈한에 가까웠다. 이런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고 얼마되지 않아 두 명의 근위대장 중 한명이 죽고 그의 신임을 독차지한 세야누스가 사실상 단독 친위대장이 되면서[2] 프라이토리아니는 점차 로마 정계에 일정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티베리우스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능력은 인정받았고 한 사람으로 본다면 훌륭한 황제였다. 하지만 즉위 이전부터 비정하고 이성적인데다 지나치게 솔직하면서 상대방의 호의도 아부로 생각할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원로원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즉위 이후에는 상호 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원로원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하고, 황실 내에서는 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여자 황족들과 계속 트러블이 생기면서 결국 인내심마저 바닥이 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자 모사꾼이던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틈새를 노려 신임을 굳히고 티베리우스가 스스로 카프리 섬에 별궁을 짓고 은둔해버리면서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프라이토리아니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은둔 통치를 시작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가 이끄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원로원과 잠재적 정적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이때 세야누스는 악명을 떨치게 된다. 세야누스의 지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일종의 비밀경찰 내지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위대로 활동하게 되는데, 로마 시에 근위대가 상주하는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근위대 기지)를 건설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0,000명에 가까운 황제 직속군이 눈에 띄는 형태로 로마 시내를 활보하는 상황에서 원로원을 비롯한 황제 주위의 정치세력들이 느꼈을 위압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 과정에서 동복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들을 비롯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혈육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한 세야누스의 음모 아래 거진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되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자체의 혈통이 끊기기 직전까지 치닫게 된다. 설상가상 결국 세야누스가 제위를 노리고 티베리우스까지 위협하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면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를 새로운 근위대장으로 내세우고 소방대와 프라이토리아니를 모두 포섭해 세야누스를 숙청한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정책은 황제 자신과 그의 가문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당장 티베리우스의 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후계 수업을 받은 황태자 소 드루수스가 죽은 뒤 황권을 목표로 정치적 야심을 키워나가던 세야누스를 숙청할 당시에도 세야누스의 심복으로 변질된 프라이토리아니의 움직임을 티베리우스 자신이 경계할 정도였고, 황실은 티베리우스 본인과 그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1세 외에는 모두 프라이토리아니의 개입으로 전멸해버린다. 더군다나 세야누스 제거 이후에는 마크로가 등장해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에 황제와 황실을 위해 반역죄를 이유로 로마를 한바탕 뒤집어 엎으면서 공포분위기가 이어졌고, 이런 후유증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가이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와 같이 사는 동안,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마크로와 동맹 관계를 맺고, 그와 프라이토리아니의 도움 아래 후계자로 입지를 굳히며 사촌동생과의 공동즉위임에도 불구하고 단독 제위계승을 하게 됐다. 이후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부터 위세를 떨친 마크로와 그 세력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끊임없이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하려고 했는데 이런 그의 행동은 프라이토리아니 내 일부가 칼리굴라 황제를 배신해 그를 암살하는 사건으로 치닫게 됐다[3]. 프라이토리아니는 칼리굴라 황제 암살 전에 자기들 입맛에 맞게 휘두를수 있다고 판단된 클라우디우스 1세를 미리 황제의 명령이라고 하고 방에 가둔 뒤 황제 암살을 한 뒤, 그를 옹립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1세는 이런 프라이토리아니의 충성을 받아내기 위해 병영 도착 후 로마 황제 중 최초로 충성 명목의 하사금을 약속해 지지를 얻고 황제 암살범들을 인도받아 처형해야만 했다. 즉,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황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간섭하는 빈도가 갈수록 커지게 됐고,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황제가 그들에게 목숨을 잃고 충성을 받기 위해 돈까지 지불하는 선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네로 시대는 티베리우스 시대 이후 정치 개입을 시작한 프라이토리아니를 황제가 악랄하게 활용하고 이용하는 무기로 일상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급사하고 세네카아그리피나가 친위대장 부루스와 연합해 네로를 친위쿠데타로 옹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친아들이 있었고, 어린 정통후계자의 징검다리로 예정되지 않았던 네로를 앞세운 율리아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부루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궁정쿠데타에 성공했다. 이후 그녀는 부루스,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데리고 간 뒤 하사금을 지불한 전임자의 선례를 활용해, 병영으로 찾아가 충성에 대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이는 황제 암살과 원수정 체제 존속 문제로 벌어진 보너스 지급처럼 엄청 특수한 경우가 아닌 터라 이후 황제들이 해야 할 전통처럼 되게 된다[4].
이후 네로는 아내, 어머니, 고모 등을 제거하는데 프라이토리아니를 활용했다. 또 그는 근위대장 부루스의 죽음과 세네카의 정계은퇴 이후, 함량미달 수준의 티겔리누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5] 같은 인사들에게 프라이토리아니를 맡기고 이를 비밀경찰 조직으로 대놓고 활용해 비밀공작까지 벌이면서 계속 황족들과 원로원 의원, 유명인사들에게 죄를 덮어 씌우고 숙청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하고 '네 명의 황제의 해'라고 불린 내전이 벌어지게 된 뒤에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연이어 등장했는데, 네로 몰락 당시에도 갈바는 황제를 자처한 뒤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 보너스를 올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네로 몰락의 결정타를 날렸다. 하지만 네로를 실각시킨 갈바 역시 로마로 돌아온 뒤 “난 전임자처럼 돈으로 충성을 사지 않겠다”면서 연례행사처럼 지급된 충성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고, 갈바 등극의 1등 공신이지만 토사구팽당한 오토가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지 아래 갈바를 몰락시켰다. 하지만 오토 역시 게르마니아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자처한 비텔리우스에게 몰락했고 내전의 최종 승리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장으로 끝나게 된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오현제 시대라고 불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까지는 황제들이 워낙 유능했거나, 아니면 근위대 자체가 쉴새없이 전선에서 활약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정치군인적 모습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네르바 황제 시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네르바를 연금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범들을 독단적으로 참살한 사건이 있었다.[6]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콤모두스 시대까지 정치군인 모습을 지양한 프라이토리아니는 콤모두스 후임인 페르티낙스 암살에 근위대장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황제들 대부분의 죽음과 등극에 프라이토리아니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된다. 친위세력이라고는 하는데, 오히려 그 '친위세력' 때문에 제명에 못 죽은 황제가 그렇지 않은 황제보다 많을 정도니 말 다한 셈.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를 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총독 시절 황제 참칭을 하고 로마로 진군해 무력으로 정식황제로 승인받은 직후,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프라이토리아니를 굴복시킨 다음 기존 부대를 해산시키고 아예 판노니아 출신의 부하들로 부대 전체를 물갈이해버린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물갈이 수준이었을 뿐이었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의 권한과 권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면서 황제의 최측근이 근위대장 자리를 계속 차지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황태자이자 공동황제였던 카라칼라가 현직 근위대장인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를 205년 직접 죽인 일이 벌어졌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217년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이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한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일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그들의 추대로 즉위하는 일 등이 벌어졌다. 또 엘라가발루스가 근위대를 이용해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프라이토리아니가 자체 판단 아래 도리어 명령을 내린 황제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하수구에 버리는 일이 터지는 등 세베루스 왕조 존속 내내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235년부터 일상화된다. 따라서 3세기때 황제들 중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갈리에누스 등은 프라이토리아니 또는 근위대장 손에 목숨을 잃었고 내전이 벌어질 때마다 근위대장과 프라이토리아니는 새 황제 선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근위대장을 2인 공동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사례라든지, 차기 황제가 될 아들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했던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이 이끌던 판노니아 군단의 정예병들로 프라이토리아니를 물갈이해버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예 프라이토리아니 자체를 폐지해버린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치도 이런 정치세력으로서의 프라이토리아니가 가지고 있던 위험성을 경계한 시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전장에서의 역할


하지만 어쨌든 프라이토리아니의 본분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던 황제를 호위하는 엘리트 부대였던 만큼, 이들은 전장에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 별다른 활동 기록이 없지만, 그의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파르티아아르메니아와의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고문단을 편성해서 파견될 당시 여러 명의 백인대장과 세야누스 등 젊고 유능한 군인들을 따라 보냈던 것을 볼때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호위부대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직후,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군단들을 선무하기 위해 정부 대표로 아들 소 드루수스를 보낼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2개 대대와 게르만 기병들이 드루수스를 호위했다.
이런 흐름은 티베리우스 이후 칼리굴라 시대부터 달라지는데, 기록에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갈리아 출정과 클라우디우스 1세의 브리타니아 원정에는 황제가 장기간 이탈리아 밖으로 떠난 만큼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동행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도 전장에서 직접 활약했는지는 불확실한데 오토 황제가 직접 출전했던 베드리아쿰 전투나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황제가 전선에 나설 경우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군의 최정예 전력으로 활약했고, 그 지휘관인 근위대장들 또한 전선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도미티아누스 시절 다키아 족과의 전쟁에서 근위대장 푸스쿠스가 지휘를 맡았다가 전사하는 등, 프라이토리아니가 겪은 손실 또한 만만찮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에도 열심이었지만, 황제를 따라 광대한 전선을 누비며 꾸준히 활약했다.
다만 그리 전선의 군단병들에게는 항시 전시인 자신들과 달리 로마에서 편히 지내면서 월급도 더 받는다고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2.5. 쇠락 및 폐지와 그 이후


그러나 제국군의 최정예 엘리트 부대라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등장과 함께 쇠락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여러 정예 기간병들을 빼내서 '''요비아니'''(제우스)와 '''헤르쿨리아니'''(헤라클레스)라는 황제 호위부대를 새로 편성했기에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과 규모 그리고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소위 4두 정치(테트라키)를 실시하면서 황제들이 각 전선 근처에 상주하게 되었고, 그 전선들에 배치된 군대를 직속부대로 거느리게 되자, 이탈리아와 로마 방위가 주된 임무가 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직속부대라는 존재가치와 제국 최고의 정예부대라는 명성을 잃게 되었다.
수많은 황제를 갈아치우거나 살해해온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서기 306년에 막센티우스 황제를 옹립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폐위시킨 것이었다.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계속되고 있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의 프라이토리아니 해체 작업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이후 6년간 프라이토리아니는 막센티우스 황제 치세하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고 로마로 입성하면서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7]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에 있던 근위대 기지를 철거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폐지한다. 다만 그래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살아남은 프라이토리아니들의 경우, 비록 그에게 적대하긴 했지만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모습엔 크게 감동하여 목숨만은 살려주었고, 게르마니아 방면 국경으로 이동 배치해서 현지 리미타네이로서 먹고 살게 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그곳 지역에서 크게 용맹을 과시했다고 한다. 한편 어찌어찌 남은 일부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새로 창설한 근위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의 기간병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정황은 있으나, 이는 리미타네이로 활약한 기록이 분명히 있는 전자와는 달리 확고한 근거는 없어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추측만 할 뿐이다.
한편 'Praefectus Praetorio'[8]라는 칭호는 여전히 존속했지만, 무관적 성격은 신설한 Magister Peditum(보병)/Equitum(기병)/밀리툼(통합 -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에게 넘어감으로써 완전히 사라져, 지방관의 성격을 일정부분 갖게 되었다. [9] '''즉 'Praefectus Praetorio(Praetorian Prefect)'는 같은 용어라도 제정 초기와 후기 때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확실하게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는, '근위대장'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절대 안 되며, 대강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인식하면 되지만,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익숙한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또한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전혀 아니었고, 중앙정계에도 힘을 발휘하는 자리였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영역에 포함하고 있는 동방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총리 내지는 수석 각료(first minister)로서, 동로마 전체에서 넘버 2였다고 한다.[10]
반면 이탈리아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마기스테르 밀리툼(군 총사령관)에 밀려서[11] 동방의 프라이펙투스만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숙군 작업 등으로 동로마에서는 일종의 문민통제가 잘 유지된 반면, 서로마에서는 문민통제가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본인 스스로가 군 지휘능력을 갖추고 친정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서로마 내내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군 지휘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세로 자리매김했었기 때문이다.
한편 위와 같이 전통적인 근위대였던 프라이토리아니가 해체되었고, 그 수장이었던 프라이펙투스의 성격이 변했다고 해서 근위대가 없어진 건 전혀 아니며, '''스콜라이 팔라티나이'''(Scholae Palatinae)를 새로운 근위대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설했고, 레오 1세가 또 다시 새로 창설한 부대가 '''엑스쿠비토레스'''(Excubitores)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서 레오 1세까지는 100여년 밖에(?) 안 됐는데 왜 또 새 부대를 창설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유는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연이 전혀 없이, 당시 군부의 실권자 아스파르에 의해서 그의 '''부하장수'''였던 레오 1세가 옹립되어서 기반이 약했고,[12] 그래서 동로마 군부 내 게르만 세력이, 테오도시우스 왕조 시절에 비해 제어를 받지 않아 지나치게 강해졌던 것에 대한 조치로서, 非게르만계 로마 본국인으로만 구성된 새 근위대를 창설했던 것이었다.
향후 사위이자 로마 국내에서는 매우 오지였던 이사우리아의 부족장 제노가 황제가 되고 나서는 동향인 이사우리아인 위주로 엑스쿠비토레스를 거의 채웠었던 적도 있었다. 이사우리아는 전술했듯이 아주 오지라서, 200여년 전의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과 이에 따른 민족/종족 구분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취급은 반쯤 이민족 취급이라서, 선황 레오 1세의 창설 취지였던 '非게르만계 로마 본국인만의 부대'라는 점에 있어서 이사우리아인으로 근위대를 채웠던 것은 거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로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이후 아스파르와 일가에 대한 숙청으로 게르만 세력이 군부에서 정리되었고, 이사우리아인도 황제의 출신 종족(?)으로서 제노 시절 기득권을 누리다가, 온전한 로마 본토인이었던[13] 아나스타시우스 1세 들어서 기득권을 뺏긴 나머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됨으로써[14], 이민족의 영향이 사라졌고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 이 점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본인이 군사령관으로서 친정했던 적이 전혀 없고, 장군들에게만 대외 원정을 맡기면서, 지휘관 교체와 경질을 마음대로 했는데도, 반란 등의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방증된다.
그렇다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엑스쿠비토레스의 창설 후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자제들이 친목질하는 의장대(parade-ground display troops)로 변하여 실질 전투력은 사라졌다. [15]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부대도 원정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운을 뗐다가 귀족 자제들이 충공깽 멘붕에 빠져서 결국 단념하고서는, 도리어 편제된 정원 외의 순전히 매관매직용 추가TO(supernumerary)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존의 매관매직 관행을 아예 제도화시켜서(...) 국가재정에 보탰다.[16]반면에 엑스쿠비토레스는 실질 전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1081년 노르만인과의 디라키움 전투 때 전멸하면서 부대 자체가 통째로 증발했다.

3. 편제와 규모


최초 창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보병 9개 대대와 각 대대에 약 30기 정도로 편성되는 소규모의 기병대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 병력은 초기에는 500명, 이후 대부분의 기간 중에는 1,000명으로 편성되었지만, 때로는 1,500명까지 증강될 때도 있었다.
대대의 숫자도 부침을 반복해서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47년에는 12개 대대까지 증강된 적이 있었고, 비텔리우스 황제는 아예 16개 대대까지 증강한 적이 있었다. 물론 비텔리우스 사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하면서 프리아토리아니는 다시 9개 대대로 감축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프라이토리아니 보병은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반도 출신으로 충당하는 것이 대체적인 관례였지만, 비텔리우스 시절에는 황제 자신이 신임하던 라인 강 전선의 군단에서 병사들을 끌어와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를 편성한 적이 있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아예 프라이토리아니를 판노니아 군단에서 선발한 정예병으로 물갈이해버린 적이 있다. 사실 세베루스의 경우는 이전 프라이토리아니의 부대 깃발을 모독하는 공식 행사까지 로마에서 버젓이 거행하여 모욕감을 느낀 그 전 프라이토리아니 대원 일부가 자살할 정도였고, 해당 부대원들은 전원 강제 제대당해서 세베루스 이후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전 프라이토리아니와는 직제에서든 인원에서든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
다만 의외로, 세베루스 당시의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가 군단장으로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 출신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나 이후로는 이탈리아 본국 출신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결국, 적어도 '3세기의 위기' 중엔 다시 이탈리아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로 회귀했다. 의도적으로 한 조치는 아니었고, 부대가 로마에 주둔하다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젊은이들을 뽑아 채우게 된 게 필연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다. 때문에 4두 정치 말기 막센티우스 황제 시절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인들의 부대가 되어 있었다.
기병 전력의 경우, 이들은 '''황제 경호 기병대'''(Equites singulares Augusti)로 따로 분류되었는데 기병은 양성 자체가 어려우니만큼 딱히 출신 지역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각지의 이민족들로부터 특별히 선발한 정예기병 720기로 근위기병대를 크게 증강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는 약 1,000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다시 2,000기까지 증강했으며, 이 부대의 지휘관은 통상 9개 대대로 편제되는 프라이토리아니의 10번째 대대장, 즉 대대장 대우를 받았다.
황제 직속부대인만큼 대우도 특별했다. 봉급도 일반 군단병보다 많이 받았고, 정기적으로 보너스도 받았으며, 복무기간도 짧았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는 군의 최고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개선식도 정식 개선식은 황제가 독점하게 되면서, 이들은 의장대 역할도 수행해야 했으니, 장비나 복장도 화려했다. 여담이지만 영화에서는 1950년대 헐리우드 기독교 대작 사극 영화에서부터 검은색 '로리카 세그멘타타' 갑옷을 입고, 검은 망토를 두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로 작용했으며, 2000년대 작품인 《글래디에이터》, 2014년 작.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도 이 클리셰가 유지되었다. 검은색 갑옷 클리셰를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이 입었던 검은 제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1867년에 그려진 그림에도 프라이토리아니가 검은색 갑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나름 역사가 오래된 클리셰다. 그러나 이 그림에 묘사된 것은 검은 갑옷이 아니라, 로마식 사슬갑옷을 묘사한 것에 가깝다. 《쿠오바디스》 이래 할리우드 사극에서 이들이 검은 복장을 하는 것을 나치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것은 오해가 아니라 상당수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다(Cyrino 2005).
실제로는 수도 로마에서 황제를 경호하는 업무 중에는 토가 차림의 평상복으로 근무했다. 요즘 경호원들이 정장 차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토가가 일반 평상복이 아니라 로마인의 정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확한 비유다. 토가 자체는 활동성이 좋은 옷이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칼을 차기에는 아주 편리한 복장이기도 하다. 수도권이나 대도시 부대에서 장병들이 전투복이 아니라 근무복을 입는 것과도 비슷하다. 갑주는 전투시에만 착용했다. 최근에 발매된 '라이즈 선 오브 로마'라는 성인용 액션게임에서는 군단병과 비슷하지만 보라색 갑주에 동방 제국처럼 얼굴가리개를 내린 투구를 쓴 근위병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보면 군단병보다는 더 멋있다. 토탈워 시리즈에도 갑주가 다른 로마군 유닛보다 더 멋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보여준 검은색 갑옷과 아티카식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근위병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악의 근위대? 같은지 쉽게 평가할 수 없을 정도.
근위병의 급여나 병영여건이 좋았던 대신 그만큼 정예부대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훈련은 더 극심했다고 하는데, 국경 지대에 상주하는 일선 군단과는 달리, 화려한 로마 시가지를 곁에 두고 있었던 만큼 전투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더 엄격한 군율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한다.

4. 예니체리의 대선배?


평시에는 황제 최측근 의장대로, 그리고 전시에는 황제를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다가 권력 맛을 본 후로는 오히려 자신들이 황제를 폐위하거나 옹립하는 등의 깽판을 치고 정국을 주무르며 국가 전체를 몰락시키가다 결국 황제의 반격으로 몰락, 해체되어 사라진 모습이 마치 오스만 제국예니체리와 흡사하다. 때문에 간혹 인터넷에서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예니체리의 대선배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으며 예니체리가 창설될 때에도 프라이토리아니를 참고로 하거나 어느 정도 의식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일단 이 둘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먼저 프라이토리아니와는 달리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Devshirme)라는 고유의 모집 및 교육 과정을 거쳐 선발되었으며, 예니체리가 무슬림이 아니라 2등 신민 취급이었던 '짐미'(Dhimmi), 즉 비(非) 무슬림 가운데 선발된 점을 봤을 때 프라이토리아니보다 보조병(Auxilia)에 훨씬 가깝다. 또 예니체리 군단장은 로마 제국의 근위대장만큼 중시되지 못했다.[17] 그 밖에 예니체리는 평시에 소방관 겸 경찰관 역할까지도 수행했으며, 지방 총독들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대도시들에도 주둔했다는 점도 다르다. 즉 예니체리는 이래저래 프라이토리아니와 다르며, 오히려 맘루크와 유사한 면이 훨씬 많다.[18]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보면 예니체리나 맘루크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실상 2등 시민인) 비 무슬림(짐미)이나 노예와 같이 스스로는 정치세력화할 기반이 없고, 다른 유력자들과의 연계도 없는 이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군사조직이었다. 즉 군주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다른 정치적 유력자'와의 연계가 없기에 고용주인 군주에게만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육성하여 친위대로 활용한 것.
이에 비하면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나 로마 시 출신으로 편성된 특성상 스스로 로마 제국 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클리엔텔라 관계를 생각하면 본국 출신 병사들 중 거물 정치인과 연줄이 있는 이들이 섞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 황제까지 폐위시키고 옹립하며 깽판을 치고 정국을 주무른 것을 예니체리와 프라이토리아니의 공통점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예니체리는 스스로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고 황제에게만 복종하는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만 그 조직이 오랫동안 유지되다 보니 중앙 정계 내에서 조직 자체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고 무능한 황제가 연이어 등극하면서 이걸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나머지 정치적 영향력이 없어야 하는 친위대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져버리는 사태가 벌어진 것.
반면 로마 제국의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특성상 창설자인 아우구스투스 사후, 2대 티베리우스 시기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빠르게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여 친위대장이 황제의 비서 내지 재상의 역할을 차지하는 등 사실상 처음부터 정치색을 배제하지 않은(또는 못한) 조직이었다. 비텔리우스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에 황제 자신이 즉위 전에 지휘하던 외지 군단병 출신으로 근위대를 물갈이해 버린 것 역시 기존 근위대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호위해야 할 대상을 오히려 위협한 면모는 막장 테크를 타는 근위대라면 왕왕 찾아볼 수 있는 일로, 프라이토리아니와 예니체리 외에 러시아의 스트렐치나 이슬람권의 맘루크도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면만으로 비교를 하려 든다면 스트렐치와 맘루크도 프라이토리아니와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한다.

5. 유명한 근위대장들


  • 세야누스 : 로마 제국 존속 기간의 역사상 최악의 간신, 권신. 근현대학자들에게도 '가장 파렴치하고 악랄한 로마인' 이라고 불리며, 그 악랄함은 로마 전체 역사에서도 세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로마 공화정, 제정 프라이토리아니 역사상 최초로 지휘관 자격으로 자신의 권력을 악용했으며, 프라이토리아니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로마인들에게 제대로 각인시켰다. 따라서 연좌죄가 흔치 않는 고대 로마에서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으로부터 숙청 후 기록말살형을 받고 그 일가는 집안 노예, 자유민 외에도 전처(前妻)와 그 일가까지 모조리 연좌죄로 엮여 일족 전체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세야누스 잔당 제거는 꽤 오랜 시간동안 계속 되었다고 한다.
  • 마크로 : 풀네임은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 세야누스를 몰락시키기 전 티베리우스가 임명한 인물로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초반까지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악랄함과 잔인함에 있어서는 세야누스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능가했다고 하며, 가이우스 즉위에도 일정부분 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가이우스에게 토사구팽당했고, 몰락 후 자살했다.
  • 카시우스 카이레아: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를 암살한 근위대장이다.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병 출신으로 백인대장을 거쳐 프라이토리아니에 들어가 근위대장까지 오른 로마군 장교 출신이다. 41년 1월 자신이 모시던 가이우스 '칼리굴라'를 황궁에서 전차경기장이 통하는 통로에서 암살한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멸문시켰다. 황제 암살 전 장애가 있던 황숙 클라우디우스 1세에게 황제의 명이라고 속여 그를 황궁에 가둔 뒤 황제를 암살했지만, 모든 프라이토리아니 대원들과 황제 경호를 직접 담당한 게르만족 친위대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알려져있다[19]. 따라서 이후 즉위한 클라우디우스 1세로부터 황제 암살 혐의를 적용받고 부하들과 함께 처형됐다.
  •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 네로의 모후 소 아그리피나, 친구 세네카와 함께 궁정쿠데타로 네로를 옹립한 근위대장, 네로 초기의 권신이다. 왼팔이 없었다고 하며, 클라우디우스 1세 생전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근위대장이 되었다.
  • 티겔리누스 : 세야누스와 함께 악랄하고 파렴치한 로마인이 언급될 때 항상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 동시대, 후대 역사가들에게 악마같은 파렴치한 천재로 불렸다. 매우 비천한 출신이었는데 네로의 오랜 친구였던 이유 때문에 부루스 사망 후 근위대장이 됐으며, 네로의 악행을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한 간신으로도 악명을 떨쳤다. 근위대장 이전부터 네로의 첫 부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비롯해 황태후 아그리피나 살해에 가담한 것으로 유명하며, 근위대장 취임 후 정적 제거를 위해 증거조작, 고문을 직접 실행에 옮겼다. 따라서 네로의 사촌형이자 동서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처형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살해에도 직접 개입했고 네로에게 여러 인사 숙청명령을 지시받고 이를 직접 지휘했다. 또 그는 로마 대화재 당시 기독교 탄압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그는 네로가 코르불로 장군에게 자살을 명령한 편지를 직접 전달한 사람이기도 하며, 피소 음모 당시 세네카를 비롯한 로마 내 유명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해 고문하고 죽였다[20]. 네로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를 악랄하게 지휘했으며, 네로와 함께 악랄한 행동을 멈추지 않아 로마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네로 몰락 전 동료 근위대장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도주했다가 갈바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잠시 잠적 후 부하들과 함께 원로원 편에 섰다. 이후 오토 편에 가담하려고 뇌물을 썼지만, 실패하자 69년 면도칼로 목을 스스로 찔러 자살했다.
  •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 네로 시대의 후반기 당시 티겔리누스의 새로운 파트너로 악명을 떨친 근위대장. 황제를 꿈꾸며 스스로를 "나는 칼리굴라의 사생아다"고 해서 한때 논쟁이 있기도 했다. 검투사 아버지와 그리스인 자유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외조부는 칼리굴라에게 자유를 얻은 그리스인 해방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네로 사후 자신을 외조부의 옛 주인 칼리굴라의 사생아로 주장했다. 아내는 네로의 아내 중 해방노예였던 스포루스였다. 그는 동료 티겔리누스와 함께 네로를 버리고 원로원 편에 서면서 네로가 자살을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네로 몰락 후 갈바를 지지했기에 권세를 유지했지만, 결국 황제가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68년 부하들에게 살해됐다. 반란 당시 스스로를 칼리굴라의 사생아로 자처했지만 애당초 거짓말이라서 호응을 얻지 못했다.
  • 페레니스 : 콤모두스 시대의 근위대장이자 권신.
  •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아이밀리우스 레토) : 아프리카 속주(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출신[21]. 콤모두스 재위 말 단독 근위대장을 시작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동안 황제 2명을 제거했고, 2명을 권좌에 올린 권신이자 황제 자리를 경매를 통해 돈을 받고 판 근위대장으로 악명을 떨쳤다. 콤모두스 암살에 가담했으며, 페르티낙스에게 처음 접근해 콤모두스 암살 소식을 알리고 그를 제위에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새 황제와 갈등을 빗다가 자신이 올린 페르티낙스 황제를 암살했으며, 이후 부하들과 함께 황제 자리를 경매 방식으로 돈을 받고 팔았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명으로 처형됐다고 알려져 있다.
  • 가이우스 풀비우스 풀라우티아누스 : 세야누스, 티겔리누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페레니스, 레토와 함께 나쁜 쪽으로 유명하다. 악랄함과 잔인함, 부정부패로 악명을 떨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근위대장, 권신으로 악명은 세야누스, 티겔리누스, 레토와 비슷할 정도였다고 한다. 세베루스 황제의 외사촌이자 동향 친구로 카라칼라의 장인이기도 했지만, 사위에 의해 반역 혐의로 제거됐다.
  • 울피아누스 :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활약한 법학자 출신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근위대장으로 있었다.
  • 카루스 : 원로원 의원이기도 하며, 근위대장 출신 황제 중 전임자 암살에 관여하거나 사주하지 않고 즉위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로부스 황제가 병사들의 폭동으로 암살되자, 이를 수습하고 즉위했다.


[1] '승마 군단'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임하면서 제10군단 병사들에게 말을 태워 호위대로 편성했는데, 이때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친위대로 여기겠다더니 한술 더떠 자기들을 에퀴테스(로마의 기사계급이며 군제개혁전까지 기병이었다)로 만들었다며 농담을 던졌다[2] 본래는 세야누스와 그의 아버지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한 친위대장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를 설득한 세야누스가 단독으로 이를 이끌었다.[3] 칼리굴라는 암살되기 전 자신을 처내려고 한 2명의 집정관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고, 프라이토리아니에 영향이 컸던 마크로 등을 계속 숙청했음에도 암살 위험을 계속 받던 상황이었다.[4] 클라우디우스 1세 즉위 당시의 보너스 지급은 칼리굴라 암살과 원로원의 공화정 복구선언이 벌어진 상황, 그리고 원로원이 카이사르 가문의 멸문을 논의하면서 혼란해진 상황 수습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새 황제로 옹립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사태 수습을 위해 지급한 보너스였다. 하지만 네로를 앞세운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부루스는 자신들의 정권 획득과 공개된 유언장 무시를 위해 프라이토리아니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충성 맹세 보너스를 지급한 것이었다.[5]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의 경우에는 네로가 몰락한 직후, 숨었다가 원로원 편에 붙었고 이후 뜬금없이 "내가 칼리굴라의 사생아다!"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황제를 참칭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거짓말인게 뻔한 까닭에 호응도 받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끔살당한다.[6]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근위대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7] 다만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큰 자비를 베풀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그런 그가 완전히 이긴 전투에서 이렇게 강하게 저항해서 아군에게 크게 손해를 입힌 적군을 용서해준 건 적어도 그 사건 이전엔 사례가 없었다.[8]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9] 영어 위키백과Praetorian prefect를 보면 'the office was much reduced in power and transformed into a purely civilian administrative post(순수한 문민 행정 직위), while under his successors, territorially-defined praetorian prefectures emerged as the highest-level administrative division of the Empire. The prefects again functioned as the chief ministers of the state, with many laws addressed to them by name.'와 'Under Constantine I, the institution of the magister militum deprived the praetorian prefecture altogether of its military character but left it the highest civil office of the empire.'등의 내용이 나온다.[10] 영어 위키백과Praetorian prefecture of the East 중, 'the praetorian prefect was the second most powerful man in the East, after the Emperor, in essence serving as his first minister.'등의 내용이 나온다.[11] 좁게는 이탈리아 관구나 대관구, 넓게는 서로마 전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5세기 서로마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가 없는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리키메르 등이다.[12] 아스파르는 일종의 귀화한 게르만 부족장 1세대라서 본인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귀화 1세대라,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어서, 캘리포니아 지사를 지내고 나서 충분히 도전해볼 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으로 막혔던 것을 생각해보면 유사하다.[13] 부계 직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형제를 통해서 콘스탄티우스 1세의 7대손이었다.[14] 이외에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 때에는 반란이 여럿 있었는데, 로마 본토인이었던 점은 좋았지만, 나이가 많았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갖추지 않은 순수 문관 출신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단성론자였던 점이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15] 영어 위키백과Scholae Palatinae 문서 중, 'they degenerated to parade-ground display troops: as it became possible to buy an appointment into the ranks of the scholae, and the social status and benefits this entailed, the units were increasingly filled with by the capital's well-connected young nobility.'[16] 마찬가지로 영어 위키백과의 Scholae Palatinae 문서 중, 'Emperor Justinian is said to have caused panic amongst their members by proposing that they be sent on an expedition. Justinian also raised four "supernumerary" scholae of 2,000 men purely in order to raise money from the sale of the appointments. It seems that this increase was reverted by the same emperor later.'[17] 굳이 연관성을 찾아야만 한다면 오스만 황제의 기병 근위대였던 카프쿨루 시파히(Kapikulu Sipahi)가 프라이토리아니에 더 가깝다. 시파히 제도를 완성한 메메드 2세는 '제국 내에 영지를 가진 투르크인 지주들' 가운데에서만 선발토록 했는데 이는 로마 시민들만이 프라이토리아니로 선발되는 것과 유사하며, 카프쿨루 시파히 부대 가운데 하나인 '실라타르'(Silahtar)의 대장은 황제의 무술 스승이자 황제가 친정에 나설 때 그의 무구를 준비하는 역할도 담당했지만 황제와 재상 사이의 소통이 원활한지 살피는 일도 했다는 점에서 원칙상 예니체리 군단장보다 정치적인 역할이 더 컸다.[18] 피지배층을 데려와 훈련한 다음 군사로 만든다는 점, 군주의 친위대라는 점, 나중에는 호위를 해야 할 상대에게 검을 겨눴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특히 상술한 데브시르메 제도는 맘루크를 훈련하는 제도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19] 암살 직전 칼리굴라는 "나는 살아있다"를 외치며 노예들과 함께 저항했는데, 이를 들은 게르만 친위대가 "황제를 보호하라"라고 외치며 합류해 황제를 살해한 카이레아 부하들과 가담된 것으로 추정된 원로원 의원, 관료 몇명을 죽였다고 한다.[20] 심지어 자신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솔한 공동 근위대장 루푸스까지 체포해 고문 후 처형시켰다.[21] 공화정 말 레피두스에게 시민권을 받은 북아프리카인의 후손이므로 같은 속주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같은 속주 출신인 세베루스가 콤모두스 시대때 승진하는 것에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