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 차펜다스
영어: Dimitri Tsafendas
그리스어: Δημήτρης Τσαφέντα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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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14일 ~ 199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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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 차펜다스는 모잠비크 출신의 흑백혼혈[1] 이다. 그는 후에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이주해 총리의 연락원이 되었고 총리 헨드릭 페르부르트를 암살했다.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그리스 출신 선원과 흑백 혼혈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 때까지는 모잠비크에서 살았고 그 후에 트란스발로 가서 미들버그 초등학교를 다녔다. 1930년에 그는 다시 모잠비크에서 대안학교를 다녔다.
차펜다스는 이른 나이부터 정치와 관련이 있었는데, 그의 친가 쪽이 크레타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때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을 도왔다. 1941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미국의 해군과 관련된 배의 선원이 되었다. 종전 이후 차펜다스는 미국에 정착 하려 했으나 과거에 사회주의 성향 정당에 있었던 것과 그리스 공산당과 연줄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추방된다.[2]
미국에서 추방당한 이후, 차펜다스는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돌아와 거기에 정착한다. 그는 법적으로는 백인이자만 모계에 흑인 혼혈이 있어 흑인의 외모가 나타났고, 그는 오히려 자기를 컬러드나 흑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법원에 자기를 컬러드나 흑인으로 재분류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그 이후 그는 남아공 총리인 헨드릭 페르부르트의 연락원이 되었다. 1966년 9월 6일 그는 페르부르트를 흉기로 난도해 암살했고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증언 중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하면서 정신병이 확정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차펜다스는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이후에도 살아있었으나 세상에서 잊힌 채 계속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199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차펜다스가 믿던 그리스 정교 장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사제가 미사를 보았으며 고작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차펜다스가 정말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암살 직후부터 논란이 거셌다. 일단 차펜다스 본인이 살아온 인생을 봐도 그냥 미쳐서 벌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에서 공산당 및 사회주의 입당, 권위주의나 독재에 저항하는 모임에 들어가 암살도 참여하고 차펜다스 본인은 사전에 페르부르트에 대하여 조사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암살했다. 그래서 차펜다스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미쳤다고 조작한 거 아니냐고 한 것이다.[3] 차펜다스도 살아있는 동안 "내가 미쳤다고? 벌레가 그 놈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웃기는 소리다." 라고 부정했으며 죽는 날까지 백인들은 멀쩡한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차펜다스가 수감 중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도 논란이 되어 왔다.
2018년에 남아공에서 그가 미쳐서 벌인 짓이라고 발표한 사건 당시 백인 조사원들이 서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미개한 검둥이같은 그를 정밀 조사할 거 없다'라는 식의 인종차별적 태도로 서술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뒤 남아공에서도 백인 정권이 그를 일부러 미쳤다고 비하하며 진짜 동기를 감췄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현재 남아공에서는 그를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열사로 인식하고 있어, 그를 기리는 연극이나 책도 나온 바 있다.
그리스어: Δημήτρης Τσαφέντα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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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월 14일 ~ 199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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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미트리 차펜다스는 모잠비크 출신의 흑백혼혈[1] 이다. 그는 후에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이주해 총리의 연락원이 되었고 총리 헨드릭 페르부르트를 암살했다.
2. 생애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그리스 출신 선원과 흑백 혼혈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 때까지는 모잠비크에서 살았고 그 후에 트란스발로 가서 미들버그 초등학교를 다녔다. 1930년에 그는 다시 모잠비크에서 대안학교를 다녔다.
차펜다스는 이른 나이부터 정치와 관련이 있었는데, 그의 친가 쪽이 크레타 혁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때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을 도왔다. 1941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미국의 해군과 관련된 배의 선원이 되었다. 종전 이후 차펜다스는 미국에 정착 하려 했으나 과거에 사회주의 성향 정당에 있었던 것과 그리스 공산당과 연줄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 추방된다.[2]
미국에서 추방당한 이후, 차펜다스는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돌아와 거기에 정착한다. 그는 법적으로는 백인이자만 모계에 흑인 혼혈이 있어 흑인의 외모가 나타났고, 그는 오히려 자기를 컬러드나 흑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법원에 자기를 컬러드나 흑인으로 재분류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계속 거절당했다.
그 이후 그는 남아공 총리인 헨드릭 페르부르트의 연락원이 되었다. 1966년 9월 6일 그는 페르부르트를 흉기로 난도해 암살했고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증언 중 "몸 속에 있는 거대한 벌레가 페르부르트를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하면서 정신병이 확정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차펜다스는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된 이후에도 살아있었으나 세상에서 잊힌 채 계속 정신병원에서 살다가 1999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차펜다스가 믿던 그리스 정교 장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사제가 미사를 보았으며 고작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가했다고 한다.
3. 정신병 관련 논란
차펜다스가 정말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암살 직후부터 논란이 거셌다. 일단 차펜다스 본인이 살아온 인생을 봐도 그냥 미쳐서 벌였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미국, 그리스, 포르투갈에서 공산당 및 사회주의 입당, 권위주의나 독재에 저항하는 모임에 들어가 암살도 참여하고 차펜다스 본인은 사전에 페르부르트에 대하여 조사하고 모든 준비를 하여 암살했다. 그래서 차펜다스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러 미쳤다고 조작한 거 아니냐고 한 것이다.[3] 차펜다스도 살아있는 동안 "내가 미쳤다고? 벌레가 그 놈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웃기는 소리다." 라고 부정했으며 죽는 날까지 백인들은 멀쩡한 자신을 정신이상자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차펜다스가 수감 중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도 논란이 되어 왔다.
2018년에 남아공에서 그가 미쳐서 벌인 짓이라고 발표한 사건 당시 백인 조사원들이 서술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는데, 이 보고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미개한 검둥이같은 그를 정밀 조사할 거 없다'라는 식의 인종차별적 태도로 서술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뒤 남아공에서도 백인 정권이 그를 일부러 미쳤다고 비하하며 진짜 동기를 감췄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4. 기타
현재 남아공에서는 그를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한 열사로 인식하고 있어, 그를 기리는 연극이나 책도 나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