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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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9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중심의 추축국에 의해 발발하고, 이에 미국과 소련 중심의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5년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두 번째로 일어난 세계 대전으로,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최악이자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평가된다.
2. 영향
2.1. 인권 의식의 대두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를 모두 합하여 약 7,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 숫자는 최소 5000만에서 최대 1억 2천만 명까지 잡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서구권에서는 그동안 사회 주류였던 집단주의가 물러나고 개인주의가 득세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야 말로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하나가 인류에게 보낸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후로 인권에 경직된 사회에 대한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개개인의 존엄성, 자유의지 등을 존중해주는 방안들이 적극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개인 심리학 또한 크게 개선되고 발전하였다. 이 덕분에 인류는 냉전이 시작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탕트를 맞이하기도 하고, 60~90년대에 걸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화적 번영을 누리게 된다.
또한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만이 아닌 전 국민이 겪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계를 전쟁으로 이끈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에 비해 터부시당하게 되었다. 전 세계인들에게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도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런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2.2. 현대 국제정세의 확립
모호하게 전쟁이 종결되어 불안불안했던 질서가 유지되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전간기와는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상대적으로 선악구도가 명확했고[3] 결정적으로 확실하게 승패가 갈렸기 때문에 앞으로의 역사와 세계 질서를 완전히 결정짓게 되었다.
특히 2차 대전으로 인한 가장 중요한 국제적 영향은 세계 패권의 중심이 기존의 서유럽에서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가장 강력했던 강대국인 대영제국은 이 시기부터 하락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전쟁 중 유럽 대륙 전역이 히틀러의 수하에 떨어지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자, 영국의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식민지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은 것이 한 원인이었다. 미국이 1941년 참전하면서부터는 전장의 주도권마저 미군이 가져가게 되었다.
특히 1941년 미국의 대추축국 선전포고 전까지는 영국이 혼자 대나치전을 수행하다시피 했기에 경제적 타격이 컸다. 그나마 인도라는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생존조차 힘들었을 정도로 휘청이고 있었으며, 미국이 참전하면서 숨을 돌리기는 했으나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전쟁을 수행하면서 영국은 미국의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이 세계 대전을 끝으로 대영제국의 패권은 완전히 몰락했으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가 본격화되었다.
냉전 체제에서 미국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소련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라는 각각 진영에 여러 국가들을 가담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소련은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까지 체제 경쟁을 승리하고 극초강대국으로 나아갈 목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였다
간혹 대리전의 형태로 전쟁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2차 대전 후 세계 각국은 과거 국제연맹의 문제점과 과오를 되새겨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을 다시는 벌이지 않기 위해, 세계적 통합과 협력, 평화을 위해 유엔이란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였고 이는 지금도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2.3. 현대 국민국가들의 탄생
각 열강들이 가지고 있었던 식민지들이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민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들어낸 전쟁이기도 했다. 예컨데 대한민국의 독립 또한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서 하나의 식민지로 묶여있었던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민족, 종교, 사상 갈등이 일어나 많은 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 전쟁을 기점으로 수많은 국가의 정치 체제나 정책이 바뀌었고 나라나 쟁권이 멸망하거나 재탄생하기도 하였다. 독일 제3제국,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은 나라가 연합국한테 점령당한 뒤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독일은 나라가 분단되어 자유진영 서독과 공산진영 동독으로 나뉘었으며, 일본은 GHQ를 통해 미국화된 시스템이 도입되고, 이탈리아는 공화정으로 변모한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동유럽 등지의 국가들도 엄청난 국가의 변화, 정권 변화를 겪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강세력의 통치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다만 동유럽은 승전국의 하나로서 지역구 정리에 들어간 소련에 의해 공산화 되거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 중국도 중일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운 마오쩌둥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중국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4년 후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 공산화 된다. 한국의 독립과 분단도 2차 세계대전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한다. 종전 5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2.4. 전쟁의 규모
유럽 일대로 전쟁 영역이 국한된 제1차 세계 대전과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은 말 그대로 전 세계가 전장이 되었다.[4] 유럽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동아시아, 오세아니아(호주)의 국가까지 개입하였고 아메리카 대륙 또한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을 제외해도 해안가나 주요 항로가 추축국 잠수함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렸다.
현재 공식적으로 생존해 있는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은 세계에 100만 명 이상 남아 있다. 2020년 기준 미국에만 30만 명 이상 생존하고 있다.[5]
3. 전쟁 당시 전황
4. 발단
5. 주요 사건 목록
5.1. 전간기
- 1935. 3. 16. 독일, 베르사유 조약 파기 및 재군비 선언
- 1935. 6. 18. 영국-독일 해군조약
- 1935. 10. 5.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몇몇 학자들은 이 시점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으로 본다.
- 1936. 3. 7. 독일, 라인란트 재무장
- 1936. 7. 17. 스페인 내전 (~1939. 4. 1.) - 몇몇 학자들은 이 시점을 시발점으로 본다.
- 1936. 11. 25. 방공 협정
- 1937. 7. 7. 루거우차오 사건, 중일전쟁 발발(~1945. 8. 15.) -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폴란드 침략을 전쟁의 시작으로 보지만, 일부 시각에서는 중일전쟁부터 이미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국이 연합국에 가입한 것은 진주만 공습 뒤인 1941년 12월 9일이다.
- 1937. 8. 13.~ 11. 12. 제2차 상하이 사변
- 1937. 10. 12.~1938. 1. 16. 트라우트만 공작
- 1937. 12. 3.~ 12. 13. 난징 전투
- 1937. 12. 12. 파나이 호 사건
- 1938. 4. 10. 독일, 오스트리아 병합
- 1938. 7. 29. 하산 호 전투
- 1938. 9. 30. 뮌헨 협정
- 1938. 11. 2. 빈 중재
- 1939. 3. 15.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 1939. 5. 11. 할힌골 전투
- 1939. 8. 23. 독소 불가침조약
5.2. 1939년
유럽 동부
- 독일의 폴란드 침공 (폴란드 서부 전선, 1939.9.1. ~ ) - 1939년 9월 3일에 연합국을 구성하는 영국(영연방 포함)과 프랑스가 추축국인 독일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으로 본다.
-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1939.9.1. ~ ) - 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첫 전투.
- 비츠나 전투 (1939.9.7. ~ )
- 브주라 전투 (1939.9.9. ~ )
- 바르샤바 전투 (1939.9.8. ~ )
- 소련의 폴란드 침공 (폴란드 동부 전선, 1939.9.17.~ )
- 소련의 핀란드 침공(소련-핀란드 전쟁/겨울전쟁) (1939.11.30. ~ )
- 수오무살미 전투 (1939.12.7. ~ )
- 만네르하임 선 전투
5.3. 1940년
유럽 북부
유럽 서부
유럽 동부
- 소련의 발트 3국 침공 (1940.6.15. ~ )
- 라트비아 침공 (1940.6.15. ~ )
- 리투아니아 침공 (1940.6.16. ~ )
- 에스토니아 침공 (1940.6.16. ~ )
5.4. 1941년
유럽 서부/대서양
유럽 동부
유럽 북부
-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 (1941.6.25. ~ 1944.9.19.)
5.5. 1942년
유럽 동부
유럽 서부/대서양
- 영국 해협 돌파작전(2. 11.~2. 13.)
- 디에프 상륙작전(8. 19.)
- 마다가스카르 전투 - 교전 지역은 남아프리카 인도양이지만, 교전 당사국이 서방 연합군과 독일이므로 유럽 서부전역과 함께 분류한다.
유럽 북부
- 바렌츠 해 해전(12. 25.~1943. 1. 9.)
- 실론 해전
- 자바 해전
- 둘리틀 특공대
- 산호해 해전(5. 7.~ 5. 8.)
- 미드웨이 해전(6. 4.~6. 7.)
- 코코다 트랙 전투(7. 21.~11. 16.)
- 과달카날 전투(8. 7.~1943. 2. 9.)
5.6. 1943년
이 시기의 회담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이미 승리를 확정지은 시기다.
유럽 동부
-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2. 19.~3. 14.)
- 쿠르스크 전투(7. 5.~8. 23.)
- 스몰렌스크 전투(8. ?.~10. 7.)
- 드네프르 저지대 공세(8. 24.~12. 23.)
유럽 북부
- 노스케이프 해전(12. 26.)
태평양
5.7. 1944년
유럽 동부
-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1. 24.~2. 16.)
-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3. 22.~4. 5.)
- 바그라티온 작전(6. 22.)
- 바르샤바 봉기(8. 1.)
- 부다페스트 공방전
유럽 북부
태평양/아시아
- 임팔 작전(3. 15.)
- 대륙타통작전
- 사이판 전투(6. 15.)
- 필리핀 해 해전(6. 19.)
- 카미카제 (~1945. 8. 18)
- 펠렐리우 전투
- 레이테 만 해전 (10. 23.)
- 일본 본토 공습 (~1945. 8. 15.)
-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및 발키리 작전(7. 20.)
5.8. 1945년
유럽 서부
- 독일 본토 항공전
- 드레스덴 폭격(1945. 2. 13.~2. 15.)
- 이터성 전투(5.5) - 서부전선 말기, 그것도 히틀러 사후에 벌어진 전투다. 1945년 4월에 벌어진 루르 포위전 이후 서부전선에서는 대규모 독일군 부대의 조직적인 저항은 없어졌고, 독일군 장병들의 행보는 투항 혹은 최후 항전으로 갈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독일군은 투항을 택하고 싶어 했지만, 광적인 나치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전후 벌어질 전범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을 것이 두려운 일부 독일군 장병들은 소련군은 물론이고 그나마 온건한 서방 연합군 상대로도 최후의 순간까지 싸웠다. 이터성 전투는 그 사례 중 하나로, 전투 자체의 규모는 작았으나 이 전투가 상기한 다른 전투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독일 국방군 부대(와 몇몇 항복파 무장친위대 대원)가 적군인 미군과 연합하여 동족 군대인 무장친위대 부대와 싸웠다는 것이다.
-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 봄의 새싹 작전
- 베를린 공방전 - 이 전투를 끝으로 유럽전선의 승리는 연합국에게 돌아간다.
- Elbe day(4. 25.) - 엘베 강에서 서방 국가 군대와 소련 군대가 조우한 날이다.
- 아돌프 히틀러가 지하 벙커에서 당일 결혼한 에바 브라운과 동반 자살(4. 30.) - 실질적인 유럽 전쟁 종식일로 본다.
- VE day (5. 8.~9.) -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서방연합국에 먼저 항복하고 다음 날 소련군한테 항복한다. 독일 최종 항복
- 이오지마 전투(2. 18.)
- 람리 섬 전투(2. 19.)
- 도쿄 대공습 (3. 9.~3. 10.)
- 오키나와 전투(4. 1.)
- 올림픽 작전 입안
- 오보에 작전
- 구레 군항 공습 (7. 24.~7. 28.)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8. 6., 8. 9.)
- 만주 전략 공세 작전(8. 9.) - 만주국과 관동군에 내린 사형명령장의 집행.
- 궁성사건(8. 14.~8. 15.)
- 일본 덴노 히로히토의 옥음방송(8. 15.) - 실질적인 2차 대전의 종식 선언으로 본다.
- 슘슈 섬 전투(8. 20)
- VJ day (일본의 공식항복)(8. 15, 9. 3.) - 영국과 영연방은 전자, 미국(시차상 9월 2일)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은 후자를 기념한다.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9. 전후/미실행
- 페이퍼클립 작전
- 언싱커블 작전
- 몰락 작전(1945.11.1/1946.3.1)
- 지퍼 작전(1945.9.9) - 영국의 말라야 반도 탈환 계획. 원래 1945년 9월 9일에 크랑 항과 딕슨 항에 영국군이 대규모로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남쪽으로 진격해 싱가포르를 되찾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였다.
- 조석 작전 - 영국의 싱가포르 탈환 계획이었다. 지퍼 작전의 취소로 말라야 반도 주둔 일본군을 설득해 항복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리슐리외급 전함 한 척이 가벼운 손상을 입고 일본군 300명이 할복자살하는 피해가 있었다.
- 결호작전
6. 주요 전선
7. 참전국
8. 피해와 전쟁 범죄
9. 전후 상황
9.1. 연합국
연합국은 매우 많지만 일단 전쟁 중 파시스트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던 소련(현 러시아),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미국, 중화민국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소련은 2차대전 전만 해도 러시아 제국보다 영토가 더 축소된 나라였지만 전쟁의 승리로 잃어버렸던 영토들을 어느 정도 되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발트 3국을 병합하고 동부 폴란드(비아위스토크 지역은 전후 반환했다), 베사라비아, 당시 핀란드의 영토였던 페첸가, 카렐리야, 살라를 되찾았다. 심지어 제국 시절에는 타국의 영토였던 지역들까지 획득했는데, 동부 폴란드에는 동부 갈리치아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키면서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뺏어왔고, 베사라비아를 반환받을 때 북부 부코비나를 함께 획득했는데, 이 영토들은 모두 옛 오헝제국의 영토들이었다. 그리고 한때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클라이페다(메멜) 지역과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건사하는 데 성공했었던 동프로이센 북부까지 차지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700만이라는 사상자를 냈지만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8] 미국하고 같이 초강대국이라는 타이틀에 오르면서 종전 후 적어도 유럽 전체 내에서는 소련에게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는 등 나라 자체가 너무 약해져 있었고 군사력도 얼마 없었다. 영국은 그나마 나았지만 섬나라 특성상 육군은 소련군보다 너무 약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전쟁이 끝날 갈시에 '''13'''전선군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은 서유럽이 소련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의 도움 없이는 자기나라 방어조차 거의 불가능했단 말이다. 그리고 약 1948년부터 자본주의의 총본산인 미국하고 냉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2700만이 죽고 국토가 망가졌지만 그 대가로 미국하고 유일하고 대등한 군사력을 가지게 된 소련이다.
영국은 승전 이후 전후 복구와 재건에 힘썼다. 타 유럽 국가보다 영국 본토와 영국민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이은 또다른 괴멸적 전쟁으로 영국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영국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원칙에 따른 복지국가론에 따라 국가를 재건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복지국가 개념이 실현됐다. 또한 이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식민 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영연방이라는 국제 기구로 재편하게 된다. 이 영연방을 통해 영국은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은 물론,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과거 피식민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의 전후 복구는 이 영연방 각국의 지원과 협력, 영연방 경제 연합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 시기 영연방 각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부족한 일손을 채웠다. 1972년 전까지 영연방 각국 사이에는 자유 무역과 자유 이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연방이라는 기구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려, 그리고 영국 문화의 소프트 파워 덕에 영국이 초강대국에서 물러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복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었는데 과도한 복지 때문에 오히려 영국이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주장이 있다. 자세한 것은 복지병 참조.
프랑스는 전장이 된 국토를 수습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다.다행히 바르샤바와는 다르게 수도 파리가 나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초토화시키는 것을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막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정치적인 영향력 덕분에 영국과 함께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는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했고, 식민지 정책에서 무리수를 둔 측면이 크다.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수에즈 전쟁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고, 식민제국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욕심을 버리지 못한채 알제리와 베트남을 침공해 식민지 전쟁을 벌였지만 이 전쟁들의 실패로 인해 프랑스는 연쇄적인 식민지에서의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드골주의와 사민주의의 극렬한 좌우대립과 허무주의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도 프랑스 특유의 보편적 복지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전후 경제 복구와 유럽의 평화 체제 정착, 그리고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느꼈다. 이 때문에 훗날 유럽 연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최초의 유럽 공동체인 유럽석탄철강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날 독일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두 주축이 된다.
폴란드는 이후 소련군과 그에 협력한 폴란드 공산당에게 넘어가 소련의 위성국화 된다. 소련과 폴란드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웠던 망명정부 및 폴란드 국내군 소속 장교들을 서방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시키는 희대의 잘못를 저지르고 만다. 이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를 위시한 소련의 간섭을 겪다가 이에 반발한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고 후반기 경기 침체로 쫓겨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으로 마침내 1989년 공산당 독재가 종식된다. 폴란드는 냉전이 끝나자마자 바로 NATO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등 서방 세계로 화려하게 다시 돌아온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뮌헨 협정으로 독일에게 빼앗긴 국권을 나치가 패망함으로써 되찾았으며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의 활약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온 소련군과 소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공산당의 지배하에 들어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스탈린 사후 공산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등 개혁파 세력들이 집권하여 이후 체코 내부에서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으나 소련이 체코에 대한 군사개입을 일으켜 반정부 세력들을 진압하였고 둡체크의 개혁정책에 반발하던 체코 공산당내 보수파 세력들이 소련의 군사 개입을 등에 업고 둡체크를 몰아내면서 실패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정부 운동 진압 이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등이 이끄는 반 공산 세력들의 반정부 투쟁이 이후에도 지속해서 이어졌고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바람을 틈타 벨벳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마침내 야케스 공산당 서기장과 후삭 대통령이 퇴진하고 이후 실시된 민주 다당제 대선에서 반공 운동 지도자였던 하벨이 당선되면서 마침내 공산당 독재 체제가 종식되었다. 그리고 1993년 벨벳 이혼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갈라지게 된다.
네덜란드는 추축국에서 해방된 이후 연합국 자격을 얻었지만,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하려고 하자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물간 식민주의 대신 새로운 신예인 인도네시아를 자국의 동맹으로 끌어들이길 원했던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전승국들의 압박으로 금방 데꿀멍하고 인도네시아에게서 상당량의 돈만 받고 독립시켜줘야 했다. 이후엔 수리남과 같은 해외 식민지가 모조리 잘려나가고 아루바 등 소수만 남긴 채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하고 현재는 조용히 살고있는 중이다. 그래도 전범 재판 관련 대해서는 어느 정도 주장할 수 있어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자신들이 처형한 일본 전범이 사실은 다른 전범에 의해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일본에 소환을 요구했고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보내버렸으며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를 재판에서 무작정 기관총으로 총살시켰다.
미국은 전쟁시에 영국, 프랑스, 소련과는 다르게 본토의 피해가 거의 없었던 이유로[9] 강대국에서 '''초강대국으로 탈바꿈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패망시킨 덕에 미국은 '''태평양 전역과 서유럽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고 기존 유럽의 열강들은 '''압도적인 생산량과 군사력 그리고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까지 얻은 미국의 요구에 절대적으로 굴복하거나[10] 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핵개발에 뛰어들거나[11] 둘 다 하는 수밖에 없었다.[12] ''' 해리 트루먼 행정부 체제를 통해서 전세계적인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힘쓰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군사는 물론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제사회에 대한 미국의 입김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을 제치고 남을 수준으로 어마어마해졌으며 사실상 국제연합을 비롯한 현재의 국제질서가 정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동유럽의 '''이단세력'''의 또다른 초강대국인 소련하고 정치적 대립, 곧 냉전을 시작하게 된다. 동시에 말뚝들과 장교들은 5년 후에 또 큰 전쟁을 겪어야 했다.
중국은 일본 제국 대신 아시아의 주도 국가로 자리매김할 뻔 했으나 겨우내 봉합했던 국공내전이 금세 또 재발발하여 공산혁명으로 기존의 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하면서 철수한 뒤[13] 빈 자리를 채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바로 미국과 소련 양쪽에 밉보여 1970년대까지 고립된다. 그동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제사해 운동같은 충격과 공포의 OME급 사건을 겪다가 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자리를 또 다시 채운 후 야심차게 등장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은 사실상 허울뿐인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이후 천안문 사태와 같은 우여곡절 끝에 경제성장, 우주개발에 성공하고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아 구 제국주의 시절의 치욕을 씻는 등 겨우 21세기를 좋게 맞이하고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된다. 다만, 아직까지도 그 당시의 공산주의 사상이 남아있는 세대와 정치가들 및 정치체계가 아직 남아있어서 중국은 아직까지 미국을 따라잡기는 어렵다라는 의견도 많다. 거기다 중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 민족들이 점점 인본주의와 서양에서 밀려오는 사상 때문에 독립하고 싶다는 민족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다가 결국에는 소수 민족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부 지역의 위구르와 티베트.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승전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5개국이라 평가받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 중화민국은 UN 상임이사국으로서 현재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단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자리는 1971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빼앗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9.2. 추축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했고, 추축국들이 현대는 물론 당시의 기준으로 봐도 심각한 수준의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추축국의 상당수는 기존 정부가 붕괴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특히 독일, 일본은 연합군이 영토 전체를 점령하는 등 일시적으로 국가가 소멸한 후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수준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UN의 규칙 중에 옛 추축국이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연합국이나 기타 국가가 선전포고 없이 바로 기습적으로 전쟁을 개시해도 무방하다는 조항'이 남아있을 정도다. (해당 조항은 유엔헌장 53조와 107조로 이곳을 참조) 현재는 사문화된 상태이다.
1943년 조기에 항복한 추축국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이 붕괴한 후에 신정부가 들어서서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행정은 연합군이 세운 군정부에 위탁하고 무솔리니가 북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정부와 독일군을 상대로 1945년 5월까지 전투를 벌였다. 1946년에 들어서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유지했던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 공화정으로 전환하여 새로운 이미지로 전환하고 전범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솔리니 정권에 의해 1936년에 탈퇴했던 국제연맹의 후신 UN에도 1955년에 공식 가입하였다. 추축국 3대 국가 중 피해는 제일 적은 편이다.
독일은 1945년 5월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카를 되니츠가 후임자가 된 다음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군이 베를린을 정복하며 전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되니츠 정부가 해산 당하면서 국가가 일시적으로 소멸했다.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연합통치를 받으며, 동부 독일 쪽 영토[14] 를 많이 잃어서 독일 민족 국가 중 역사상 가장 작은 국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국토는 동서로 분단되어 이른바 서쪽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동쪽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다. 독일군은 원래 해체될 예정이었지만 냉전으로 인해 부활했다. 이후에 베를린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0년 10월 드디어 재통일을 이루었다. 이후에는 전범 이미지를 털어내기 위해서 옛 나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전범들을 잇따라 체포하는 등 전범시절 청산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전쟁 때 침략했던 국가들에게 사죄와 보상을 했다. 그리고 독일이 동유럽에 독일인을 이주시키고 전쟁범죄를 일으킨 것의 반동으로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가 일어났고,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포메른 등 폴란드와 소련에 합병된 구 독일령의 독일계 주민들이 대량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쫓겨나 실향민들이 되었다. 다만 집시 학살이나 과거 식민지에 대한 사과가 미진하다는 비판이 있으며, 이를 의식한 듯 2016년에는 나미비아의 헤레로족 학살 등을 사과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꽤 남아있어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 있는데, 그 이유는 냉전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과는 애초에 관계 회복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후에 독일을 감시하던 국가들이 대부분 자본주의 진영이었으니... 그리고 70년대까지만 해도 나치 인사들과 지지자들이 그대로 요직에 올라 있는 경우가 많아 전범 처벌이 굉장히 미진했다고 한다.
일본 제국은 위의 두 국가가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옥쇄를 결의하며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와 손실이 예상되자 덴노의 명의로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최소한 중일전쟁 이전에 넓힌 영토만큼은 보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실질적으로 반쯤 본토 취급하던 조선과 대만, 본토 일부였던 사할린 남부까지 전부 날아갔다. 1945년 미 군정은 덴노제 지속을 승인했고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경제적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급격한 경제발전과 50년이 넘게 자민당이 득세를 하면서 일본에서는 전범세력들의 후손들이 민주적으로 정치권력의 주류가 되었고, 과거사 청산 및 단절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채 우경화되었다. 따라서 한일기본조약 등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하고 호소카와, 무라야마 등 역대 일본 총리들의 담화를 통해 공식적인 사과도 했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무색하게도 정치인, 특히 우익 계열 정치인들의 과거 전쟁 범죄에 반성하려 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독도, 쿠릴 열도, 센카쿠 등 영토분쟁으로 러시아,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 대립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전쟁을 치룬 중국과의 갈등이 가장 심한데 과거에는 냉전 때문이었지만 현재는 보통 국가화를 지향하는 일본의 군사력을 경계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10. 기타
- 워낙에 거대한 전쟁이다보니 세계 최대에 이름을 올린 것들이 많다.
11. 관련 어록
12. 관련 인물
-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1944년 7월 20일)
- 귄터 블루멘트리트 - 살아남아서 아르덴 대공세를 지휘하기도 했다.
- 루드비히 베크
-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 에리히 펠기벨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 한스 슈파이델
13. 창작물
※ 창작물이 너무 많아서 개별 문서가 존재하는 창작물만 나열.
13.1. 영화
13.2. 게임
13.3. 만화·애니메이션
13.4. 소설
- 감벽의 함대
- 기신병단
- 내가 히틀러라니!
- 높은 성의 사나이
- 당신들의 조국
- 메피스토#s-2
- 반딧불이의 묘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 양철북
- 여왕폐하 율리시즈호
- 유녀전기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조커 게임
- 최후의 신조
- 파리대왕
- GOSICK
- The War That Came Early
- World War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
-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13.5. 기타
- 2차대전 전차개그
- 디젤펑크
- G.I. Joe(1세대) -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초창기 G.I. Joe는 이렇다할 테마가 없는 밀리터리 피규어로 발매되었는데, 주로 제2차 세계대전 시대의 군인들을 다루고 있다.
14. 관련 영상
- 국방TV - 제2차 세계대전: ##
15. 관련 문서
- 제2차 세계 대전/도시전설
- 8월 13일의 신나는 뇌조 사냥
- 노르망디의 한국인
- 둘리틀 특공대
- 플라잉 타이거즈
-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 마지노 선
- 무기대여법
- 세계 대공황
- 얄타 회담
- 에니그마
- 에반-에마엘 요새
- 전격전(기동전)
-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 지크프리트 선
- 태평양 전쟁의 원인
- 카미카제 특공대
- 파르티잔
- 레지스탕스
- 행정명령 9066호
- 227호 명령
- 군함/배수량별 목록/1914년~1949년
- 보병 무기/세계 대전
- 지상 병기/세계 대전
- 해상 병기/세계 대전
- 항공 병기/세계 대전
[1] 발발일자에 대해 다른 소수의견(중일전쟁 발발일인 1937년 7월 7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 존재한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베르사유 체제와 국제연맹의 안전보장 기능이 점차 무력화되며 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고 본다. 자세한 내용은 발단문서 참조. 세계사학계의 주류 견해는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9월 1일을 공식 개전일로 본다.[2]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이 아닌,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 조약에 서명한 날인 9월 2일을 종전일로 본다.[3] 물론 한쪽이 완전한 선이라기보다는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자유 진영과 파시즘의 대결에 가까웠다. 냉정하게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범죄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국가는 스위스처럼 간접적으로 참여한 중립국을 제외하면 '''전무'''하다고 보는 게 맞다.[4] 제1차 세계대전은 그야말로 유럽이 주무대였음에도 당시 서구권의 시선이 반영된 까닭에 세계대전이라고 불린 것이다.즉 당시의 개념으로서의 '세계'란 유럽이 중심이 된 지역의 통칭이었다.[5]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같은 드라마도 이들 생존한 참전용사들 덕택에 드라마화 될 수 있었다.[6] 붉은 색은 추축국에 항전하는 나라, 푸른색은 추축국 및 추축국에 점령된 나라들이나 동맹국이다.[7] 붉은 색은 추축국에 항전하는 나라, 푸른색은 추축국 및 추축국에 점령된 나라들이나 동맹국이다.[8] 물론 여기서 달콤하다는 의미는 비유적 표현이다.[9] 일본군 잠수함이 함포로 미국 본토의 정유시설을 포격한다던가 일본 잠수함에서 이륙한 수상기가 미국의 숲에 폭탄을 투하해 대규모 산불을 유발하려는 등의 간혈적 수준의 본토 공격은 있었지만 미국의 전쟁 수행능력에 타격을 줄 순 없는 매우 경미한 수준이었다.[10] 독일과 이탈리아, 서유럽의 소국들이 이에 해당한다.[11] 프랑스와 소련이 이렇게 했다.[12] 영국의 사례이다.[13] 중국 공산주의 세력의 항일운동은 보잘 것 없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주로 국민당 계열의 군대가 일본군과 박터지게 싸우는 동안 뒤에서 세력이나 키웠다는 비아냥도 듣는다. 현재는 공산당이 얼마나 기여를 했든 어쨌든 국민당보다는 기여를 못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4] 브란덴부르크 1/3, 포메른 반이상, 슐레지엔 거의 대부분, 동프로이센 전부, 일부나마 남아있던 포젠과 서프로이센 전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