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지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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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6년 10월 1일 보헤미아의 로보지츠 (Lobositz. 현재 체코 Lovosice.) 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휘하는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으나 끝내 승리를 거뒀고, 뒤이어 작센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2. 배경


1745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작위를 계승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슐레지엔을 획득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대대적인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는 프로이센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여왕은 지난 전쟁 때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은 영국과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일명 동맹의 역전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게 3면이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영국과 연합해 이 3국 연합에 맞서고자 했다. 이후 양대 세력간의 갈등은 심화되다가 1756년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을 공격하면서 7년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가만히 있다가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협공당할 게 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선제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반 프로이센 동맹의 중심이 오스트리아인만큼 오스트리아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면 동맹이 저절로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협상에 응하지 않더라도 전력 손실이 커서 당분간 프로이센을 노릴 수 없을 테니, 그 사이에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 격파한다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29일 작센을 기습 공격했다. 그는 작센을 점거한 후 그곳을 기점으로 삼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작센군은 프로이센군이 자신들을 먼저 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전쟁 초반에 큰 피해를 입고 피르나 근교에서 방어진을 형성한 채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한편 아직 전쟁 준비가 완료되지 않은 데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선제공격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오스트리아는 적이 작센을 침공했다는 급보가 들어오자 브라운 남작이 이끄는 병력을 서둘러 작센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브라운 남작은 9월까지 6만여 병력을 프라하에 집결시킨 뒤 그 중 3만 4천여 병력을 이끌고 작센으로 진군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군이 접근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일부 병력을 남겨서 피르나 봉쇄를 지속하게 한 뒤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이 오는 방향으로 진군했다. 9월 30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방에서 16km 떨어진 로보지츠에 주둔한 적을 발견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보지츠로 진군해 적과 일전을 벌이기로 작정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투 경과


프로이센 선봉대를 맡은 알트-브라운슈바이크 보병대는 9월 30일 밤부터 10월 1일 새벽까지 오스트리아군에게 점령된 위니츠 마을로 접근했다. 그러던 10월 1일 새벽 2시, 그들은 로보지츠 일대를 순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경기병대와 맞붙었다가 얼마 안가 그들을 격퇴시켰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전 5시 30분쯤 키스 공작, 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와 함께 로스바흐 근처 둔덕에 도착했다. 그후 오전 7시경 날이 밝아졌지만 경 평원 위로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언덕 꼭대기까지 뻗어서 시야가 불과 100m밖에 안 됐다. 대왕은 망원경을 통해 흐릿하게 보이는 적을 필사적으로 살펴봤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스트리아군의 일부 병력에 불과했다.
이때 브라운 남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상당히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했다. 그들은 엘베강 연안의 로보셰(Lobosch)에 언덕에 의지해 방어태세를 갖췄다. 좌익은 몰렌바흐(Morellenbach)라는 작은 개울 뒤에 주둔하고 그 개울에 돌담을 쌓아서 일종의 연못, 저수지, 그리고 늪을 만들었다. 오직 두개의 좁은 다리만이 이 개울을 건널 수 있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이 다리들에 강력한 척탄병들을 배치해 적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중앙은 몰렌바흐에서 로보지츠 시가지까지 이어지는 움푹 파인 능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중포대는 중앙의 오른쪽에 배치되었고, 본래는 우익에 있어야 할 기병대는 해당 위치의 지질이 기병을 활용하기엔 지나치게 거칠고 협소했기 때문에 중앙의 보병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그 대신 우익에는 보병대가 배치되어 로보지츠 시가지에서 엘베강 강둑 근처인 웰호타까지 대열을 형성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어떻게든 적진을 살펴보려고 애쓰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보지츠에 있는 경기병대와 평원에 주둔한 적 기병대는 오스트리아군의 후위라고 판단했다. 그는 브라운 남작이 엘베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샨다우를 거쳐 피르나로 진군해 작센군과 합류할 것을 염려했다. 이에 그는 적을 따라잡기 위해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전진하는 보병대가 기습당하는 걸 막기 위해 페르디난트 왕자에게 슈메타우의 6개 기병 연대를 파견해 보병대의 좌우 측면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7시 30분, 프로이센 선봉대는 로보지츠와 호몰카 사이의 200m 공간을 거의 메웠다. 한편 우익의 보병대는 두개의 대열로 정렬해 호몰카 상단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베베른 공작 휘하의 좌익 보병대는 로보지츠의 비탈길로 전진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기병대는 중앙의 평야에 세개의 대열로 배치되었다.
얼마 후, 프로이센 포병대가 평야에 배치된 1,500명 가량의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로보슈와 호몰카 사이를 진군하는 프로이센 보병대를 향해 포격을 가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포격전이 진행되는 동안 프란츠 울리히 폰 클라이스트 중장과 폰 쿼트 소장이 치명상을 입었고 우익 기병대를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라디카티 장군이 포탄에 맞아 숨졌다. 그 후 오도넬 장군은 오스트리아 우익 기병대의 지휘를 맡았다. 오전 8시, 브라운 남작은 전군에 전투 대형을 형성하게 한 뒤 자신은 지휘소를 우측으로 이동시켜 우익을 직접 지휘했고 좌익의 지휘는 콜로브라트 장군에게 맡겼다. 한편 프리드리히는 호몰카에 본부를 설립했다. 또한 베베른 백작이 지휘하는 좌익 보병대에 소속되었던 3개의 프로이센 연대는 로보지츠의 비탈길을 향해 꾸준하게 진군했다.
안개가 여전히 지속되던 오전 11시경, 프리드리히 대왕은 중앙에 위치한 퀴라시어 남작에게 오스트리아 전선에 대한 무력정찰을 지시했다. 이에 퀴라시어 남작은 3개의 기병연대를 이끌고 안개 속을 뚫고 중앙을 향해 전진했다. 그는 바이로이트 드래곤 연대의 지원을 받았으나 곧 우측면을 술로비츠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에게 공격당했으며, 뒤이어 오스트리아 드래곤 연대에게 역공을 받았다. 하지만 퀴라시어 남작은 바이로이트 드래곤 연대의 지원에 힘입어 적을 격퇴하고 움푹 패인 도로 위로 밀어 올렸다. 그 후 프로이센 기병대는 로보지츠에서 파견된 적 보병대의 역습과 오스트리아 그렌저 연대의 측면 돌격에 직면했다. 결국 퀴라시어 남작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호몰카 기슭까지 밀렸다가 뒤따라오는 아군 보병대의 지원 덕분에 전열을 재정비했다.
오전 11시 30분쯤, 마침내 안개가 걷히면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비로소 적이 어떤 전투 대형을 갖췄는 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프로이센 기병대에게 공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명령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퀴라시어 남작은 13개 기병분대를 추가로 불러들인 뒤 오스트리아 진지를 향한 두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이 1만 명에 달하는 기병대는 눈앞의 적을 유린하며 몰렌바흐로 돌진했다. 그러자 몰렌바흐 개울 반대편에 배치된 오스트리아군 척탄병들이 적 기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퀴라시어 기병 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이제서야 도착한 대왕의 명령을 접수한 퀴라시어 남작은 본대로 퇴각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들을 호몰카에 주둔시키고 남은 전투 동안 후방에서 쉬게 했다.
한편, 베베른 백작은 로보지츠 공략을 맡았으나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애를 먹자 4개 대대를 추가로 파견해 이미 교전하고 있는 7개 대대를 보강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완강하게 저항했고 프로이센군은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로보지츠에서의 전세는 프로이센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 사실을 깨달은 브라운 남작은 척탄병 6개 중대와 좌익의 3개 대대를 로보지츠로 파견했다. 브라운 남작은 뒤이어 좌익을 슐로위츠까지 진격시키려 했지만 호몰카에서 포격을 퍼붓는 프로이센 야전포병대 때문에 애를 먹었다.
오후 1시가 되었을 무렵, 프리드리히 대왕은 적의 맹렬한 저항으로 기병대 돌격이 실패한 것을 목도하고 자신이 전투에서 패했다고 여겼다. 그는 전장을 떠나고 싶어하며 옆에 있던 키스 공작에게 말했다.

이들은 이전과 같은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다.

대왕은 전반적인 지휘권을 키스 공작에게 맡기고 자신은 후방으로 물러나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베베른 백작이 이끄는 보병대가 총검돌격을 감행한 끝에 마침내 로보지츠 마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키스 공작은 즉시 좌익 제2 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을 출격시켜 제1 전선의 아군과 합세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그는 우익에게 1개 대열로 재배치해 로보지츠 북쪽으로 포진하게 했다. 이후 양측의 교전은 3시간 더 이어졌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적의 압도적인 화력과 전투력에 밀려 패퇴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오스트리아군 우익이 붕괴되어 많은 병사들이 엘베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 브라운 남작은 이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오후 5시에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프로이센 기병대는 탈진한 상태로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로보지츠 전투에서 3,3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프란츠 울리히 폰 클라이스트 중장과 폰 쿼트 소장이 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은 2,86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고 418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문과 군단기 2개를 상실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래서 브라운 남작은 일단 물러났다가 전력을 재정비한 뒤 작센을 구원하려 했지만, 피르나의 작센군은 그들이 격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10월 15일에 항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브라운 남작은 보헤미아로 물러났고, 프리드리히 대왕 역시 겨울 숙영지로 물러났다. 그 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듬해인 1757년 봄 보헤미아를 전격 침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