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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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ames Francis Edward Keith'''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성. 키스 공작. 일생 동안 영국,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프로이센의 장성으로서 활동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야곱 폰 카이트(Jakob von Keith)라고 불렸다.
2. 일생
2.1. 자코바이트
에드워드는 1696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 피터헤드 인근의 인베루지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9대 마리샬 백작 윌리엄 키스였고 어머니는 제4대 퍼스 백작 제임스 드러먼드의 딸 메리 드러먼드였다. 그의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와 연관되어 있었고 제임스 2세의 폐위에 반발한 자코바이트에 가담해 하노버 왕가가 수립된 영국에 맞섰다. 1715년, 에드워드는 자코바이트 반란에 가담해 영국군과 맞섰고 11월 13일 셰리프미어 전투에서 탁월한 용맹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자코바이트 세력의 대패로 끝났고, 에드워드 가족은 프랑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2.2. 프랑스군과 스페인군 장성
프랑스로 망명한 에드워드는 파리에서 수학, 기하학, 군사학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를 여행했다. 1719년, 에드워드는 프랑스 육군에 입대하여 비고 전투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마드리드 궁정으로 가서 리리아 공작의 후원을 받아 아일랜드 여단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러다가 1728년경, 에드워드는 리리아 공작의 초대로 러시아군에 들어가 중장에 임명되었다.
2.3. 러시아군 장성
에드워드는 1728년부터 1747년까지 러시아군에 복무하며 뮈니히 장군의 휘하에서 여러 공적을 세웠다. 러시아-오스만 전쟁이 한창이던 1737년 오차코프 공방전에서, 에드워드는 8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요새 공략에 크게 기여했으나 그 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리로 여행을 떠났고, 회복된 후에는 런던을 방문했다. 이때 조지 2세는 자코바이트 반란에 가담했던 그를 너그러히 용서해주고 러시아군 장성으로서 환대해줬다.
1741년 러시아로 돌아온 에드워드는 8월 23일 스웨덴과의 전쟁 도중 발발한 빌만스트란드 전투에 참가해 러시아 측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 후 그는 우크라이나의 총독이 되었고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가 1740년 차르에 즉위한 엘리자베타 여제는 에드워드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위군 3만 병력의 지휘관으로 삼았고 스웨덴과의 전쟁에 선두로 세웠으며, 스웨덴과 러시아가 평화 협정을 체결한 후에는 에드워드를 스톡홀름 대사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는 옐리자베타 여제의 측근들로부터 의심을 샀고, 결국 1747년 사임한 뒤 러시아군을 떠났다.
2.4. 프로이센군 장성
1747년 7월 러시아군을 떠난 에드워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호소했다. 대왕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 베테랑 장성을 기꺼이 받아줬고, 1747년 9월 18일에 야전군 원수로 임명했다. 1749년, 에드워드는 베를린 주지사가 되어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사적으로도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에드워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작센 침공 작전에 가담했고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서도 활약했다. 1757년 5월 6일 프라하 전투에서도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분전했고, 같은해 하반기에 라이프치히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758년 초, 에드워드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프로이센군의 모라비아 침공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을 즈음에 물러났다. 같은 해 가을 건강이 회복된 그는 군대에 복귀했고 10월 초 오스트리아군이 주둔한 호크키르히 마을 서쪽에 군대를 배치하려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류했지만 대왕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10월 14일 새벽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기습하면서 호크키르히 전투가 발발했을 때, 에드워드는 군대를 어떻게든 수습해 적에게 맞서 싸우려 했다가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향년 62세. 그는 처음엔 호크키르히 마을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가 1759년 베를린 교회 지하실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