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잘린드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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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salind Elsie Franklin'''
1920.7.25~1958.4.16
1. 개요
2. 탄소연구
3. DNA 발견 관련 이야기
4. 바이러스 연구
5. 여담


1. 개요


영국의 생물 물리학자. 20세기 유전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받는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구조라는 사실을 발견한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나 당시에는 묻혀졌던 과학자다.
제임스 왓슨의 저서 <이중나선>을 통해 사진51과 관련된 업적이 알려져 세간에는 비운의 과학자로 자리매김 했는데 사실 DNA 사진은 프랭클린 업적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서구권에서는 흑연과 바이러스에 관련된 연구로 더욱 유명하다.

2. 탄소연구


1953년 발표한 연구[1]를 통해 이흑연화성 탄소재료 난흑연화성 탄소재료의 구조해석과 정의를 이끌어냈다.
또한 인조흑연,천연흑연의 결정구조를 분석해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는 탄소재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이 논문들은 탄소 연구의 기본으로서 리튬이온전지의 발명,탄소 나노튜브,그래핀의 발견 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구들이기 때문이다.#

3. DNA 발견 관련 이야기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 런던에 합류한 이듬해인 1952년 X선 회절 실험을 계속 하던 중 B형 DNA 사진 중 가장 선명하게 찍힌 51번 사진을 찍게 되는데, 이 자료는 DNA의 구조가 나선형으로 되어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A형 DNA에 대해 더 연구하고자 했고 그녀의 발견을 정리하는 논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을 잠시 미뤄두었다. 그런데 모리스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이 51번 사진을 프랭클린의 허락 없이 왓슨과 크릭에게 보여주게 되었고,[2] 왓슨은 그 사진을 보고 DNA가 나선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형 구조에 대한 논문을 써 1953년 4월 25일네이처에 게재해 공로를 선점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DNA 문서 참고.
이 때문에 프랭클린의 연구업적이 왓슨과 크릭에 의해 도둑맞았다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 있다.[3]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자료를 보기 전에 이미 이론을 완성한 단계였었고 이를 입증할 증거 마련에 고심 중이었다. 그러다가 프랭클린의 자료를 보고 그것이 자신들이 그토록 고민하던 증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론 위주였던 이 두 사람과는 다르게 프랭클린은 실험 위주의 관점을 가졌고, 그래서 더 많은 실험을 통해 자료를 더 수집한 후 이론을 세우자는 입장이었다. 즉, 모델을 미리 만드는 것보다 객관적 증거를 먼저 모은 다음 그에 기반한 모델을 만들자는 것이 프랭클린의 입장이었다. 나중에 프랭클린은 두 사람의 모델을 보여달라고 요청했고, 모델을 검토한 후에도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4]
요약하면, 프랭클린이 DNA 구조 해석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그를 위한 이론을 실제로 세운 것은 왓슨과 크릭이 맞고, 프랭클린 본인은 그 입증에 필요한 증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증거는 프랭클린이 스스로 고안한 카메라 장치와 전문적인 해석 능력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왓슨과 크릭, 프랭클린 중 어느 쪽이 더 핵심적인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왓슨과 크릭은 타이밍 있게 모델을 먼저 발표한 덕분에, 나중에 다른 근거들이 보충되고 모델이 보편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을 때 모델의 제창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이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던 상황에서 프랭클린 본인이 요절하는 바람에 그 수혜를 입지 못한 것이 비극이라고 하겠다.
이후 프랭클린은 버크벡 칼리지로 옮겨 17편이나 되는 논문을 썼고 최초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의 가운데 구조가 빈 튜브 모양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1956년 그녀는 난소암에 걸렸고 결국 투병한 지 2년 후인 1958년에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몇년 후인 1962년, 프랭클린은 사망해 노벨상을 받지 못했고 대신 프랜시스 크릭제임스 왓슨, 그리고 공동저자가 된 모리스 윌킨스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노벨상의 공동수상은 평화상을 제외하면 3명이 최대이기에 이때 로잘린드가 살아있었다면 윌킨스의 자리에 프랭클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4. 바이러스 연구


담배모자이크 바이러스와 관련된 연구를 통해 인류 최초로 바이러스 구조를 규명해냈다.

5. 여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영향으로 유대인으로써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다만 신념은 유대교가 아닌 불가지론자였다고.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연구에 매진하고 이성 친구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대신 프랑스인 지도 교수나[5] 미국인 동료 연구자랑 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치적인 발언도 곧잘 하곤 했는데 정치인 선거 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엔 윈스턴 처칠을 싫어했으나 연설을 보고 철회했다고 한다.
2022년 ESA에서 발사할 예정인 화성 로버의 이름을 여기서 따왔다.
[1] Graphitizing and Non-Graphitizing Carbon Compounds. Formation, Structure and Characteristics’, Brennstoff-Chemie, 1953, 34, 359–361[2] 굳이 변명하자면 당시 프랭클린은 버크벡 칼리지로 옮기기로 이미 결정하고 그 때까지의 연구자료를 당시 소속이었던 킹스칼리지 연구소로 넘기는 과정이었다. 원래 과학 연구계에서 업적은 개인에게 남더라도 자료의 소유권은 연구소에 남는다. 그래서 프랭클린의 동료였던 윌킨스가 자료를 그 둘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자료 자체는 프랭클린 본인의 노력과 전문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었기 때문에 논문 게재를 위한 자료 공유는 윌킨스도 거부했다. 다급했던 왓슨과 크릭은 결국 프랭클린의 논문이 실리는 시점에 맞추어 자신들의 논문을 발표하고 그 "영감"을 프랭클린의 연구에서 얻었다는 식으로 언급한다. 언급된 프랭클린의 논문을 본 사람들은 당연히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이 둘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3] 사실 거의 묻혀버린 프랭클린의 기여가 널리 알려지고 업적 도난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바로 왓슨 본인이 쓴 이중 나선이라는 책이었다.[4] 일부 증언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왓슨과 크릭의 모델을 두고 "참 예쁘긴 한데, 이걸 어떻게 입증할 생각일까요?"라는 평을 했다. 즉 이치는 맞지만 입증에는 한참 모자란다고 생각한 듯. 실제로 왓슨과 크릭의 모델이 과학자 일반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증거가 필요했다. 링크[5] 상당한 바람둥이였는데, 로잘린드가 수술 직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