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
1. 개요
不可知論, agnosticism
오늘날 철학의 일반적인 용법에서 'agnosticism'은 신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서 명제, '신은 존재한다'(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두 믿음의 자세 - '(전자에 대해) 그렇다(=유신론)', (전자에 대해) 그렇지 않다(=무신론)' - 양쪽을 모두 고려해 본 결과 판단을 유보한 상태, 즉 '''해당 명제에 대해 현재로서 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중간적 입장을 뜻'''한다.
2. 상세
"불가지론"으로 번역되는 개념, 'agnosticism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본래 의미에서 'agnosticism'은 진화론을 선보인 찰스 다윈의 맹우로 유명한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인식론적 일반원리(epistemic normative principle)였다. 즉, 일종의 과학철학적 자세로서 과학적 검증 등을 통해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것(='해당 사실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는 원리이며, 그 자체로 신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었다.
두 번째 의미는 위에 설명 된 헉슬리의 일반원리에 기반한 철학적 회의론(philosophical skepticism)의 일종으로, 하나의 인식론적 명제(epistemic proposition)이다. 이 관점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다 - 즉, '불가지하다' - 는 입장을 취한다. (어느 정도 연관성은 있어도) 오늘날 의미에서 '유신론'과 '무신론'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는 명제이다. 달리 말하자면, 보통 회자되는 '무신론', '유신론', '불가지론'의 의미와는 아예 관계가 없으며, '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아예 별개의 명제다. 'Agnosticism'의 번역어 '불가지론'과 완벽히 의미가 일치함에서 알 수 있듯, 해당 용어는 바로 이 두 번째 의미를 직역한 결과다.
세 번째 의미에서 agnosticism이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이다. 이 용례레서 '불가지론'이란 앞서 개요에 설명된 바와 같이 "신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들에 대하여 유신론과 무신론이 각자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는 답을 내는 것과는 달리, 해당 명제에 대한 확답을 피하고 유보하는 입장이다. 흔히 문외한들 사이에서도 신에 대해 "있다", "없다", "모르겠다"라는 직관적인 세 가지 태도를 관찰할 때, 바로 머지막의 '(아직은) 모르겠다'는, 양자 중 어느 쪽도 거부한 제3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불가지론'이며, 다시 강조하지만 현재 이쪽이 문외한, 철학자 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에 해당된다.
헉슬리적 의미에서 '불가지론'이 다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신무신론" 운동에서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의 일반 용례를 무시하고 잘못 된 규정을 하면서부터였음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미 확립 된''' 무신론을 소위 '약한 무신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에 수반된 것으로, 약한 무신론에서 소위 '거증책임(burden of proof)'을 회피하기 수단으로 '어떤 주의주장도 하지 않는 회의적 태도'로 무신론을 잘못 규정하면서 약한 무신론에 'agnostic atheism'라는 명칭을 부여하여 "신의 여부에 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으므로 신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다 = 무신론이다"는 해석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철학적 용레에서 atheism, theism, agnosticism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들'''이기 때문에 "agnostic atheism"이란 명칭은 성립할 수가 없다. "엄마가 집에 있어?"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 "모르겠다"라는 세 대답에서 두 개를 따와 "그렇다", "모르겠다"나 "모르겠다", "아니다"라는 대답이 말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agnostic atheism'이라는 용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첫 번째/두 번째 의미에서의 '''사장된 개념'''으로서 'agnosticism'을 부활시킨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날 철학의 일반적 용례에서는 헉슬리적 의미, 회의론적 의미에서 '불가지론'이란 용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즉,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의 현대적 재활용은 다분히 오용의 일례에 해당된다. 즉, 본 문서에서 항목 4의 내용은 '''잘못된 설명들'''이며 학문적, 철학적 정합성을 지니지 않은 '''알부 사람들만이 사용되는 자의적 언어'''다.
''' "Agnostic atheism"에 대한 4번 항목과 같은 설명은 현재 철학계에서 잘못된 것으로 간주한다.''' [2][3]
3. 어원
'불가지론'이란 단어는 서양언어의 불가지론이란 단어를 의역한 것이므로 서양언어에서의 불가지론이란 단어의 어원을 알면 불가지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양언어에서 불가지론은, 언어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Agnosti-'와 주의를 나타내는 어미로 이뤄져있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 Agnosticism이고 프랑스어에서는 Agnosticisme이라고 사용한다. 그리스어 αγνωστικισμός(agnosticismos)에서 나온 단어이고 이 단어 역시 '모르는'이란 뜻의 그리스어 agnôstos와 '앎 혹은 지식'이란 뜻의 gnosis, 두 개가 합쳐져서 나왔다.
여기서 앎 혹은 지식이란 단순히 사전적 의미의 앎이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말하는 지식(gnosis)을 말한다.
agnosticismos(불가지론)이란 단어는 토머스 헉슬리가 사용을 하면서 유명해졌다.
4. 신에 대한 관점
불가지론자가 신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은 '''존재 여부를 인간이 아직은 혹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대전제 하나를 제외하면 매우 다양하다. 왜냐하면 불가지론의 핵심은 신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현재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 후의 내용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불가지론의 가장 큰 흐름 두가지를 논하자면, 하나는 1) "이야기를 해보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 "알 수 없기는 하지만,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불가지론자들의 생각이 그야말로 다양하긴 하지만 크게보면 이 두가지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예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은 원론적인 불가지론에 가까운 입장이고, 논의가 필요하다는 쪽은 보통 유신론이나 무신론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입장이다.
구체적으로는 "신적 존재에 대한 증명이 현재에만 불가능한 것인가 아예 불가능한 것인가" 대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인류의 미래를 통틀어서 아예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라고 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 "인식이 논한 수준이 될 때까지 유보한다"가 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논리상 원론적인 불가지론이 된다.
한편 논의를 긍정하는 후자의 불가지론은 유신론과 무신론에서 또 나뉘는데, 무신론적 불가지론은 "알 수 없으니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유신론적 불가지론은 "개개인의 신념에 따라 알아서 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식으로 같은 불가지론이라도 여러가지 부분에서 입장이 갈린다.
위에서 말했듯 불가지론은 일단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라는 게 대전제이고, 무신론적 입장도 많아 불가지론자 중에는 비종교인이 많다. 유신론적 입장이라 할 지라도 비종교인적 입장에 가까운 편이라 비종교인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뭔가 영적인 존재가 있을거라 믿기는 하지만 딱히 종교는 믿지 않는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신론적 불가지론자들을 포함한 모든 불가지론자들이 대부분 자신들에게 동의하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불가지론=무신론'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대로 유신론적 불가지론자도 존재하는 등 불가지론과 무신론이 일부 겹치는 부분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의 무신론, 소위 말하는 '신무신론' 같은 경우엔 '''무신론적 불가지론'''이 주류인 상황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 바탕 위에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내 차고 안의 용 문서 참고. 리처드 도킨스도 무신론적 불가지론자이다. 만들어진 신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입장을 명확히 하기위해서 무신론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불가지론 내에도 다양한 태도들이 공존하고 있으니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불가지론' 하는 식으로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
실질적인 근거와 실험 결과를 중시하고 언제나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하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방법론적 자연주의적인 성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불가지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과학자들 중 불가지론자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물론 양쪽이 완전히 같지는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모두 불가지론자는 아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을 기준으로 스펙트럼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2)가 무신론자, (2)~(4)가 불가지론자, (4)~(5)가 유신론자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즉 무신론, 유신론은 양립불가능하지만 이들과 불가지론은 양립 가능한 교집합하는 관계다.
(3)에 해당하는 입장은 원론적인 의미의 불가지론으로서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등 신적인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물론, 신의 존재 유무조차 알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들은 신적 존재에 대해 알 수 없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굳이 종교를 탐구한다면 종교를 통해 인간이 얻는 심신의 평안 등의 이점이나 '신 앞의 평등'이라는 종교적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천부인권이 설득력을 얻는 등의 사회적 존재 의의, 종교의 기원과 필요성을 생각하는 종교철학과 연관해서 탐구하게 된다.
(2)와 (4)의 차이는 후술한다.
4.1. 무신론적 불가지론
(2)의 입장으로서, 잘 모르니까 신이 없다고 가정하는 쪽이 옳다는 생각을 가진 온건한 무신론이다.
무신론적 불가지론의 경우, 신의 존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부분은 공통이다. 중요한 것은 그 뒷부분이다. 단순히 '모르는 것'이라고만 해두면 실제로 그와 관련된 일이 생겼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 신의 이름으로 학살을 해도 아무런 반대도 할 수 없고 반대로 다른 사람이 신이 없다고 외치면서 종교를 탄압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 유무를 모르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서 무신론적 불가지론에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있다는 믿음을 가져선 안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토성에는 코끼리가 살지만 관측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 토성에 코끼리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주장자여야지 그것의 무존재를 입증하는 게 불가지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러나 일부 근본주의적 종교는 과학자들에게 토성에 코끼리(즉, 신)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주장한다. 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 유무를 알지 못하니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판단하는 것은, 보통 그것이 없다고 믿고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무신론적 불가지론이다. 현대의 선진국에서 무신론이라 하면 보통 이쪽인데, 원래 의미의 무신론과 경계를 엄밀히 나누기는 힘들다. 토론 법칙 중 하나인 긍정측의 증명 우선을 신에도 적용하는 사람들이다.
4.2. 유신론적 불가지론
(4)의 입장으로서, 신의 존재를 믿지만 그것을 위해 예배를 하거나 종교적 의식을 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신이 믿고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신론자이기는 해도 이들도 불가지론적 입장에 따라 기성 종교에는 회의적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언급되는 신은 유일신론에서 이야기하는 신은 아니므로 이 견해는 범신론과도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
유신론적 불가지론의 경우, 신의 존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부분까지는 같다. 다만 신의 존재 유무를 모르더라도 개인이 원해서 믿는 건 가능하다고 본다. 알지도 못하면서 있다는 믿음을 가져선 안 된다고 보는 무신론적 불가지론과 달리, 유신론적 불가지론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이성으로는 신의 존재 유무를 판단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서 신의 존재 유무를 알 수 있다고 하면 그냥 유신론자가 되는 것이지만,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의 경우 그 정도까지 나가지는 않는다. 즉, '''믿지만 알지 못한다'''고 하면 유신론적 불가지론자, '''믿으면 알게 된다'''고 하면 본래 의미의 유신론자라고 보면 얼추 들어맞는다. 물론 양쪽이 칼로 자르듯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5. 통계
미국에서 2014년 통계에 따르면 무종교 성향은 전체인구의 22.8%이다. 이중에서 4.0%p는 불가지론자, 3.1%p는 무신론자이고 나머지는 특정된 성향은 아니다. 2008년 5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캐나다에서 'Harris Décima'사에 의해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된 결과 6%가 불가지론자였다. 2010년 GOdF (Grand Orient de France)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인들의 6%가 불가지론자이고 40%가 무신론으로 나타났다.
6. 오용
그런데 사실 동양에서 불가지론이라는 단어에 대한 흔한 오해가 있다. 바로 불가지론 = 무신론 이라는 것. 앞서 소개한대로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한편 유신론적 불가지론자를 보고 종교는 없지만 종교에 호의적인 사람을 말하는 단어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불가지론자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깔고 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기성 종교들이 내세우는 신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고, 종교라는 것도 그들이 보기에는 그냥 하나의 문화나 사회 현상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신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며 그냥 가능성만 열어 놓고 있을 뿐이지만, 좋게 말하면 중립적이지만, 종교인이 보기에 모든 불가지론자는 자신들의 신을 부정하기(긍정하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자와 외양이 같아서 적대적으로 보일 수 있다. 반대로 그들이 신이 없다는 얘기는 안 하는 사실을 이용해서 "유명한 모 과학자도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라고 거짓 선전을 하기도 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서양에서는 종교적-비종교적의 구분보다 신자-무신론자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다. 북유럽, 서유럽쪽은 조금 특수한데, 심지어 70% 이상의 영국인은 본인은 기독교인이지만 동시에 무신론자/불가지론자라고 여긴다. 이들에게 종교는 문화의 일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경에서 스스로를 무신론자로 분류해버리면, 종교인 입장에서는 종교에 적대적인 태도로 인식되기가 쉬워서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라고 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논쟁을 회피하는 방어적 태도로써의 불가지론이 많다보니 불가지론은 '''게으른 자의 무신론이다''' 같이 비꼬는 경우도 상당하다.
그런데 사실 불가지론은 '인간은 신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또는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입장에 가까우니, '신의 존재를 명백한 사실로 믿는 인간'인 신자 입장에서는 무신론만큼이나 도전적인 사상일 수도 있다. 앞서 말한 '개인적인 불가지론'을 표현하고 싶다면 비종교인(not religious)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낫다.
7. 대표적 불가지론자
- 과학계
- 종교계
- 댄 바커[7]
- 철학계
- 신학계
- 플로이드 해밀턴(Floyd E. Hamilton)
- 사회학계
- 정치계
- 리콴유[13]
- 로버트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l):당대의 유명한 불가지론자이자 사실상의 무신론자. 1959년작 영화판으로 유명한 소설 '벤허'의 원작자가 소설을 집필하게 된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한다. '벤허'의 원작자인 루 월리스는 평범한 크리스트교 신자였다. 그런데 잉거솔과 만나서 종교에 대해 대화한 뒤, 자신이 종교와 신앙에 대해 아는게 매우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참에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는 심정으로 집필한 것이 바로 소설 벤허이다. 출판 후 월리스가 이 일화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14]
- 살바도르 아옌데
- 프랑수아 미테랑
- 정규재
- 하늘궁을 만들기 이전에는 불가지론자였다.
8. 이야깃거리
버트런드 러셀이 반전운동을 벌이다 수감되었을 때 일화다. 감방의 간수가 이 거물(?)을 극진히 대접하다가 문득 종교를 물었다. 러셀이 불가지론자(Agnostic)라 대답했다. 간수는 이 생소한 단어의 철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더니,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작은 오해(?) 덕분에 러셀은 무척 즐거웠다고 한다. 참고로 "I am a gnostic."이라 하면 "나는 영지주의자요."라는 뜻이 된다. 더불어 a가 뒷 단어를 강조하고자 사용될 때는 '어'가 아닌 '에이'로 읽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철자를 설명해도 잘 모르던 사람이라면 'Agnostic'이 아니라 'A Gnostic'으로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다.(…) 아님 그냥 간수가 뭔지 몰라서 신흥종교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고.세상엔 여러가지 종교가 있습니다만, 제 생각엔 결국 다 같은 신을 모시고 있는 겁니다.
또한 버트런드 러셀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받고 답장을 쓴 적이 있다.
친애하는 러셀 씨… 나는 지금 열렬한 무신론자와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무신론에 대한 당신의 명확한 의견은 무엇인가요? 그 무신론자는 당신을 틀림없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회의론을 강조하거나 신앙을 한심한 것으로 보는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은 오히려 불가지론자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메자 씨, 3월 9일자 편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를 무신론자로 불러야 할지, 불가지론자라고 불러야 할지에 대해 당신과 그 무신론자가 논쟁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때론 무신론자로, 때론 불가지론자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철학적 입장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물질적인 대상의 실재를 의심하거나, 세계는 단지 5분 동안만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거나 하는 차원에서 보면 나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실제 의미에서 말하면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나는 올림포스의 신들과 발할라의 신들이 실재한다고는 좀처럼 믿지 않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신의 실재 따위도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지구와 화성 간의 타원형 궤도를 돌고 있는 도자기 찻병이 없다고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이 실제로 충분히 증명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기독교의 신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1958.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