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크릭
센트럴 도그마를 제창하였으며, 코돈을 밝혀낸 '''분자생물학의 거두'''. 1962년 DNA 구조를 함께 밝혀낸 J.D.왓슨,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영국 출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박사 학위는 아직 취득하지 못한 채 물의 점성 연구 같은 것을 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크릭은 군에서 레이더 및 어뢰 연구 등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전쟁 중 하필이면 크릭의 연구실 천장으로 폭탄이 떨어져 연구실은 박살이 났고 그에 따라 전후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군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의 영향으로 관심사를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돌렸다. 전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생물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고, 바로 이곳에서 왓슨을 만난다. 참고로 크릭의 사후에 나온 기사에선 약을 빨고 '''이중나선 구조'''를 생각해냈다고 한다. [3]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951년에서 1953년까지의 3년간의 공동 연구 이후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크릭은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분자생물학연구소와 소크 생물학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나간다. 소크 연구소는 연구소 자체의 높은 수준으로도 유명하지만, 더욱 유명한 것은 건축물 그 자체이다. 위대한 건축가 루이스 칸의 작품으로 중앙 정원에서 라호야 바다를 마주하는 경이로운 건축물이다.#
DNA의 구조 발견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긴 후에도, 무시무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현대 분자생물학의 최강자로 군림하였다. 예를 들어 어댑터 가설을 제창하여 RNA에서 아미노산을 날라올 어댑터가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던진다. 어댑터는 후에 tRNA로 밝혀진다. 그리고 단백질 합성의 아이디어를 내고 유전 암호를 생각해낸다. 이는 '아미노산은 스무 개 가량이고, 염기 서열이 암호일 거 같은데 스무 개의 코드를 만들려면 염기는 4개니까 4*4*4=64니까 3개의 염기 정도면 될 거 같은데? 겹치는 거 몇 개 있을 거고 시작하고 끝내는 거 있겠지 뭐.' 이런 사고의 흐름으로 뚝딱 나온 아이디어다.
망언과 험담으로 악명높은 제임스 왓슨에 가려졌지만, 이 작자는 우생학 옹호론자였다. 그래서, 유전자적으로 나쁜 부모는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느니 그도 망언으로 만만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