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4세
1. 개요
프랑스어: Louis IV (루이 4세)[1]
라틴어: Ludovicus IV (루도비쿠스 4세)
루이 4세(Louis IV)는 936년 즉위해 954년 사망한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었다. 태어난 후 아버지 샤를 3세 단순왕이 폐위되자 잉글랜드의 공주인 어머니 에아드기푸(Ēadgifu)는 루이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달아났다. 이후 서프랑크 귀족들의 추대로 돌아왔기 때문에 해외왕 루이(오트로메르 루이, Louis the Outremer; 라틴어 : 루도비쿠스 트란스마리누스(Transmarinus)[2] 라고 불린다.
2. 생애
920년 샤를 3세 단순왕과 잉글랜드 웨식스 왕국의 왕 대 에드워드의 딸인 에아드기푸 사이에서 태어났다.
922년 아버지 샤를 3세가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고 로베르 1세의 사위인 라울이 서프랑크 왕이 되자 어머니 에아드기푸는 루이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936년 라울이 사망하자 샤를 3세를 지지했던 서프랑크 로트링겐과 노르망디 귀족들에게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해 6월 랭스 대성당에서 주교 아르탕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대관식을 가졌다. 샤를 3세 이후 카롤루스 왕조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랭스 대주교는 이번에도 루이 4세를 충실히 지지했다.
하지만 당시 서프랑크는 로베르 1세의 아들인 파리 백작 위그 르 그랑(大위그: 위그 카페의 아버지)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샤를 3세 단순왕에게 적대적인 네우스트리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대위그를 지지했다.
루이 4세는 위그 르 그랑을 제어하기 위해 동프랑크의 국왕 하인리히 1세와 결혼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에 하인리히 1세의 딸이자 로트링겐 공작 기셀베르트의 미망인이었던 게르베르가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위그 르 그랑도 하인리히 1세의 딸 작센의 헤드비게와 결혼했다.
동프랑크에서 하인리히 1세가 죽자 루이 4세는 자신의 아버지 샤를 3세가 공략했던 로트링겐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동프랑크 국왕은 오토 1세였다. 오토 1세는 괘씸한 루이 4세를 혼내기 위해 940년 위그 르 그랑과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가 루이 4세와 레온에서 전투를 벌일때 군대를 제공해 루이 4세를 대파하게 했다.
942년 11월 루이 4세는 오토 1세와 화친을 맺었다. 이는 오토 1세가 위그 르 그랑을 견제하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는데 화친을 맺은 루이 4세는 943년 에르베르 2세를 공격해 그를 사로잡고 교수형에 처했다. 에르베르 2세는 아버지 샤를 3세를 사로잡아 7년간 감금한 뒤 굶어죽게 한 불구대천지의 원수였다.
이어 945년에는 노르망디를 공격했는데 여기서는 대패하고 에르베르 가문에게 사로잡혀 위그 르 그랑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루이 4세는 1년간 파리에 감금당했다. 그러자 루이 4세의 아내 게르베르가는 민첩하게 오빠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토 1세는 대위그에게 압력을 넣어 루이 4세를 석방케 했다.
돌아온 루이 4세는 다시 위그 르 그랑을 공격해 946년 랭스를 되찾았으며 949년에는 레온을 수복했다. 위그 르 그랑과는 계속 반목했는데 오토 1세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루이 4세와 화해하지 않았던 위그 르 그랑은 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왕국 전역에서 파문을 당했다. 위그 르 그랑은 파문에도 굴복하지 않았지만 오토 1세가 지속적으로 루이 4세를 지지하고 그의 영향력을 키워주자 결국 951년 루이 4세와 화해하고 봉신이 되었다.
954년 루이 4세는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 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