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스 페레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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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gas Feraios (Ρήγας Φεραίος)[1]
1757년 ~ 1798년
1. 소개
18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사상가이자 작가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그리스인들에게 전파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발칸 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혁명을 계획한 사람이다.[2] 급진적인 사상으로 실존주의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리스 현대 철학의 근간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는다.
2. 생애
1757년 테살리아 지방 벨레스티노의 아로마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향을 떠난 뒤, 콘스탄티노플에서 수학하며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비서로 있었다. 그 이후엔 왈라키아로 건너가,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의 저작에 어울리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접하고 '용사찬가'라는 혁명사적 시를 그리스어의 민중문자로 쓰게 된다.
1796년 빈을 방문했을 때 자유주의를 접한 리가스는 『 인권 선언 』의 번역이나, 『루멜리아, 소아시아 에게해 제도 및 몰다비아, 주민의 새로운 정치 제도』등의 책을 그리스어로 써내기도 했다. 그 책에는 분명히 프랑스 혁명 헌법의 영향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뒤를 이을 혁명 국가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종교에서는 터키인을 포함한 모든 민중들이 평등하다는 뜻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공용어는 그리스어를 사용한다는 뜻을 펴면서 그리스인 중심의 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뒤이어 그는 '발칸 연방'의 형성을 지향하고 그리스인 학생 및 상인들과 규합했다.
그는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래서 빈에서 비밀리에 책을 3,000부 인쇄시켜서 트리에스테에 보내고 민중을 선동해서 발칸 반도 전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797년 12월 그리스인인 협력자 디미트리오스 이코메노스 코자디티스가 그를 배신하는 바람에, 트리에스테 도착 직후 체포되었다. 그를 체포했던 오스트리아의 경관은 그와 지지자의 신병을 베오그라드에서 오스만 제국에 넘겼다. 그와 그의 협력자들은 1798년 6월 24일에 교살형에 처해졌고, 그의 시신은 사바 강으로 버려졌다.[3]
그럼에도 그의 사상은 그리스 독립을 목표로 결성된 비밀 결사 '친우회'(Φιλική Εταιρεία)로 이어져서 그리스 독립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만든 시 '용사찬가'는 일종의 국가로 여겨졌다. 과거 그리스에서 사용됐던 200드라크마 지폐에는 그의 초상이 있었고, 지금도 그리스의 10레프타 동전에는 그의 초상이 있다.
3. 철학
그의 철학은 한마디로 새로운 혁명을 선언하는 선언자(選言者)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자기 의식의 추상(抽象)을 배척하고 신체 속에 수육(受肉)되어 타자와 함께 있는 구체적 생활을, 연대에 의한 '새로운 반성'에 의해 공동 존재에 참여하도록 하자는 것이 그의 철학의 주제이다.
4. 어록
"Καλύτερα μίας ώρας ελεύθερη ζωή παρά σαράντα χρόνια σκλαβιά και φυλακή."
한 시간이라도 자유롭게 사는 것이 40년 동안 노예나 포로로 사는 것 보단 낫다.
"Όποιος ελεύθερα συλλογάται, συλλογάται καλά."
자유롭게 사고하는 자가 올바르게 사고한다.
[1] 이전 문서 제목은 '''페라이오스'''였다. 하지만 이는 코이네식 표현으로 현대 그리스어로는 페레오스로 읽힌다.[2] 물론 그의 계획은 그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였고 오스만에 의해 발각되어 결국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3] 참고로 이 당시 리가스 페레오스와 협력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이들을 구하려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스만 파즈반트오울루(Osman Pazvantoğlu)라는 튀르크인 장교였다. 그는 리가스의 친구였는데, 리가스가 사망하고 난 후 불가리아 비딘 일대를 점거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