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완 1세
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4대 칼리파. (684년 3월 ~ 685년 4월)مروان بن الحكم
마르완 이븐 알 하캄
2. 마르완 왕조의 개창자
어린 칼리파 무아위야 2세가 자녀 없이 요절하였을 때에 마르완 이븐 하캄은 우마이야 가문의 웃어른이었다. 그의 부친인 알 하캄과 무아위야 1세의 아버지 아부 수피안끼리 사촌 지간이었으니 가족을 중시 여기는 아랍 사회에서 마르완은 계승권이 인정되었다. 한편, 무아위야 2세의 동생 할리드가 있긴 하였지만 아직 세습제가 자리잡지 못한 아랍 세계에서 부족장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1] 따라서 연장자를 지도자로 받드는 아랍 전통에 따라 나이가 지긋한 (당시 약 60세) 마르완이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2]
3. 내전
한편, 마르완이 즉위함과 동시에 쿠파에서는 반우마이야 봉기가 일어나 후세인을 죽인 우바이둘라를 쫓아냈다. (684년 봄) 쿠파 남쪽의 바스라 총독인 압달라 이븐 하리스는 집압을 시도하기는 커녕 이븐 주바이르 편으로 전향해 버렸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마르완을 칼리파로 인정한 것은 우마이야 가문과 바누 칼브 뿐이었고 자지라의 카이스 부족과 이븐 주바이르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684년 7월, 카이스 부족은 반란을 일으켰고 마르완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마르완은 다마스쿠스의 국고에서 가져온 금으로 카이스 병사들을 매수하여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고 나서야 마르완은 대관식을 치렀다.
아직 이븐 주바이르는 이집트, 히자즈, 이라크 남부의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684년 말, 쿠파에서는 쉬아 무슬림 4천여명이 후세인을 배신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봉기하였고 북진하였는데 685년 1월에 후세인 이븐 누마이르가 이끄는 정부군에게 전멸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685년 초, 마르완과 칼브 군대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에서 주바이르 군을 격파, 이집트를 회복하였고 아들 아지즈를 총독으로 앉혔다. 한편, 주바이르의 세력이 약화되자 시아파인 무흐타르가 쿠파와 바스라를 차지하고 독립하던 시기에 마르완은 사망하였다.
4. 죽음
마르완은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야지드 1세의 과부와 결혼하였는데, 동시에 그녀의 아들이자 무아위야 2세의 동생 할리드도 다마스쿠스로 왔다. 마르완은 할리드를 견제하였고 어느날 공개적으로 그를 비판하였다. 자신의 아들에 대한 모욕에 분노한 어머니는 자신의 새 남편을 잠든 사이에 베개로 질식시켜 죽였다고 한다. (685년 4월) 하지만 마르완은 이미 친아들인 아브드 알 말리크를 후계자로 임명해 놓은 터라 그가 즉위하며 마르완 왕조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1] 기어코 세습을 성공한 야지드 1세 대에 엄청난 반발이 있었고 결국 2차 피트나로 이어진 것을 생각해보자[2] 현재도 아랍 부족장은 '셰이크' 라고 부르는데, 연장자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