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당스부르크
1. 개요
룬의 아이들 시리즈의 등장인물.
풀 네임은 '''마르틴 당스부르크(Martin Danseburg)'''.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수반으로, 원래는 아노마라드 왕가의 친척이자 백작이었다.
2. 작중 행적
아노마라드 북부에 영지를 가진 백작으로, 당대 국왕 엘반트 3세와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엘반트 3세는 귀족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하는등 친목질을 하는 것을 즐겼으나 당스부르크는 항상 와병중이라며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전부 페이크였고, 그는 사실 자신의 영지에서 공화주의 세력을 키우며 나라를 뒤집어 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가 키워낸 조직이 바로 민중의 벗. 엘반트 3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아노마라드 귀족들 대부분이[1] 켈티카로 몰리는현상이 발생하자, 당스부르크는 자신이 세워왔던 거사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구 왕국력 975년, 엘반트 3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아노마라드의 거의 모든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당스부르크도 마침내 얼굴을 비춘다.[2] 이때 당스부르크의 등장에 맞춰 민중의 벗들이 연회장을 점거하여 귀족들을 인질로 잡았고, 켈티카의 관문등 주요 시설들까지 손에 넣었다. 그리고 아파서 거동도 못한다던 당스부르크는 당당하게 두발로 엘반트 3세 앞에 걸어 왔다고 한다. 이 사건은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사건을 '그믐밤의 배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3]
당스부르크는 엘반트 3세를 구워 삶아 아노마라드의 재상으로 임명 되었다. 권력을 쥐게 된 당스부르크는 일단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귀족들부터 제거했고, 이를 시작으로 켈티카 전체에서 반 귀족 폭동이 일어났다. 귀족들의 저택은 약탈, 혹은 압류 당했다. 공화정부는 일주일이 된 후에야 뒤늦게 약탈을 금지했으나 이미 상황은 끝나있었다. 그렇게 몇년이 흐르면서 남은 귀족들은 대부분 숙청당했으며, 그나마 멀쩡한 귀족들은 대부분 혁명 초기 공화파에 붙어서 말단 관리직 같은걸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4]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공화국은 켈티카 밖에 장악하지 못하는 빈약한 국력을 지닌 정권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를 겪었고 있었다.[5]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당스부르크는 차츰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수장이었던 그의 죽음과 함께 공화정부는 내부분열이 가속화 되었으며, 귀족 세력들이 새로 옹립된 체첼 국왕을 중심으로 재반격하면서 공화국은 멸망하고 신 아노마라드 왕국이 세워졌다.
지스카르 드 나탕송은 당스부르크를 가리켜, "홀로 싹터 자란 거목이었지만 메마른 땅에 옮겨심어졌고 곧 시들고 말았다"라고 비유했다.
자녀가 3명 있으며, 작중 시점에서는 이미 공화파 잔당 색출 작업에 걸려서 처형됐다 카더라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3. 테일즈위버에서
별의 전장에서 공화파의 수장으로 나온다.
[1] 정확히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2] 딱 한명 안 왔다. 그 인물은 바로 폰티나 공작.[3] 왕당파는 놀고만 있었냐면 사실 좀 복잡한 사정들이 얽혀있었다. 먼저, 각지의 귀족들이 엘반트 3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사병부대를 바치는 일이 많았고 국왕은 이를 즐겼다. 그런데 국왕 직속으로 편입되었음에도 행정처리를 개판으로 했는지, 통합된 부대들한테 월급도 잘 안나오고 지휘체계도 마구 꼬여서 군대가 명령을 잘 듣지 않았다. 그리고 각지의 귀족들도 자신의 영지에서 구원군이 올거라 생각했으나, 정작 영지에 남은 다른 가족들은 장남이 부재중이니 이제 자신이 작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것에 신나서(...) 오히려 수도의 반란의 모른체 해버렸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왕당파들이 연합되지 않아 결국 켈티카를 구원하러 오지 않은 것이다.[4] 이 시기 유일하게 세력을 보존한 귀족은 바로 아르님 가문 뿐이었다. 원래 아르님 가는 역사적으로도 아노마라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가와 민중들을 위해 헌신하던 전통이 있었고, 현 아르님 공작인 프란츠 역시 비취반지성을 약탈하려던 빈민들에게 먹을것과 잠자리를 내어주는등, 대중친화적 행보를 보여서 유일하게 화를 면하였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공화정부도 주시했으며 나중에 당스부르크는 직접 아르님 공작을 찾아가 협상을 하였다.[5] 행정력이 개판이었는지 켈티카 내에서 국민 투표를 단 한번 밖에 못했다. 지지기반이라 할 수 있는 대중들 역시 그저 왕이 바뀐거로 착각했고 실상 그들의 삶에 공화정부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