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마라드 공화국

 

1. 룬의 아이들의 설정
1.1. 건국 과정
1.2. 쇠퇴
1.3. 멸망
1.4. 사후정리
2. 평가
3. 유산


1. 룬의 아이들의 설정


룬의 아이들 윈터러, 데모닉 데모닉에 등장하는 국가.
975년에 건국되어 985년에 멸망한 아노마라드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 국가 수반은 당스부르크 전 백작. 한밤중의 봉기로 아노마라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도를 점령했으나 왕국 각 지역에서 살아남은 왕족과 귀족들의 반격으로 불과 10여 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아노마라드 왕정이 복고되었고 아노마라드 왕국은 공화국 시절을 기점으로 지도층이 크게 바뀌어 구 왕국와 신 왕국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1.1. 건국 과정


975년 당시, 구 아노마라드 왕국의 최후의 국왕 엘반트 3세는 절대왕권의 신봉자로 본인의 변덕스러운 성격까지 겹치며 왕권을 가히 남용하며 왕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국왕은 아무 예고도 없이 왕국의 귀족들을 수도로 호출하여 연회를 가지곤 했는데 먼 지방에 사는 귀족들은 이런 국왕의 호출을 무시할 수도 없고, 매번 일일이 호출에 응해서 상경하는 것도 고역이었다.[1] 결국 대부분의 귀족들은 지방에 위치한 자신의 영지 운영을 가족에게 일임하고 아예 수도 켈티카에 자택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서 왕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 거의 모두가 켈티카 혹은 인근 지역에 기거하기에 이르렀고 이 꼬락서니에 히스파니에 폰 아르님은 '''주머니에 구슬을 너무 많이 담았다'''라며 정세가 뒤집힐 사건이 터질 것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왕국 북부 지역에 영지를 둔 당스부르크 백작은 지병을 이유로 국왕의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국왕 엘반트 3세는 이에 크게 불쾌해하였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고 백작을 내버려둔 채 다른 귀족들과 연회에 골몰하기만 하였다. 시간이 흘러 국왕의 탄신일, 귀족들이 모두 연회장에 모여 이를 축하하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는데[2] 그간 영지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당스부르크 백작이 연회장에 나타났다. 그동안 자신의 부름을 무시하던 백작의 등장에 국왕의 심기가 불편해졌을 때, 느닷없이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이 연회장에 나타나 귀족들을 인질로 붙잡는 것을 시작으로 '''수도 켈티카 전역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알고보니 당스부르크 백작은 지병을 핑계로 영지에 틀어박혀있으면서 영내에서 '''공화주의파''' 조직 민중의 벗을 창설하여 왕국내에 공화파를 양성하면서 수도 켈티카의 동향을 면밀하게 파악하며 봉기의 때를 노리고 있었다.[3][4] 국왕 탄신일 기념 연회로 왕국 귀족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이자 백작은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민중의 벗을 이끌고 상경, 단원들을 수도에 몰래 들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훗날 이를 '''그믐밤의 배신'''이라 부른다.
백작과 민중의 벗은 연회장의 왕가 일원과 왕국 귀족들을 모두 인질로 붙잡은 것은 시작으로 수도 켈티카의 관문을 점거하여 수도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수 일 뒤에는 켈티카 인근 지역의 약 4분의 1 가량을 모두 점령하였다.
한편, 지방 영지에서 가주 대신 영지를 경영하던 남은 귀족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게 위해 힘을 합치기는 커녕 수도에 억류되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 귀족들의 재산을 뜯어먹는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5] 결국 왕당파는 봉기의 초기 진압에 실패하였고 민중의 벗은 수도와 인근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는게 성공한다. 이는 국왕 일가와 수 천에 달하는 대귀족들이 모두 체포되어 귀족들의 구심점이 와해되어버렸고 왕권을 남용하던 엘반트 3세의 실정까지 겹친 것이[6] 그 원인으로 이 덕분에 공화파는 봉기를 성공시키고 기선제압에도 성공한 것이다.
당스부르크 전 백작은 국왕 엘반트 3세와의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아노마라드 왕국의 멸망을 선언하고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 스스로 공화국 수반에 오른다.

1.2. 쇠퇴


세상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다. 공화국의 건국 이후 수도에 억류된 귀족들에게 남은 것은 비참한 최후뿐이였다. 권력을 잡은 공화파는 단 3일 만에 귀족 대부분을 제거하였다.[7] 대대적인 공개 처형식에서 목이 달아나거나, 겨우 처형은 면했으나 수감되거나, 일부 귀족은 아예 공화국에 전향 의사를 밝혔고 곧 수도의 귀족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된다.[8][9]
새로 건국된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곧 남은 왕국의 잔재를 치우고 아노마라드 전역을 석권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티카 점령 이후 향후 방침을 두고 공화국 수뇌부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고 이를 중재해야할 국가 수반 당스부르크가 중병에 걸려 집무 수행이 불가능해지면서 공화국의 운명에 악운이 드리운다.
결국 왕국 각 지역에서 유산을 둔 권력다툼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아노마라드 공화국에 대한 왕당파의 대대적인 반격이 개시되었고 공화파는 이에 맞서 수도 켈티카가 지닌 천혜의 요새지형에 기대어 희망 없는 '''소모전'''을 강요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고 말았다.
공화파는 말만 공화국이지 소수의 귀족들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트라바체스 공화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국민총투표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켈티카에서만, 그것도 단 1번 실시 할 수 있었고 일반 민중에게 공화주의의 희망을 보여주기는 커녕 내분에 왕당파에 의해 궁지에 내몰리기까지 하자 공화국은 곧 켈티카에서도 '''지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공화국이 당장 멸망하지 않는 이유는 1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켈티카 인근까지 몰려든 왕당파 사이에서 차기 왕권을 두고 유력 주자간 경쟁이 벌어져 공격이 조금 늦어지고 있을 뿐. 아노마라드에 사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켈티카의 일반 시민조차도 곧 공화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다.
최후에는 수도에 남아있던 모든 귀족들을 처형하여 민중의 봉기를 유도하자는 강경파들의 부질없는 주장이나 나돌고 있었고 공화국 인사들의 내부 권력다툼으로 자멸해가는 꼴에 일부 공화주의자들의 선민의식까지 겹치며[10] 일반 민중 대다수가 공화정부에 등을 돌려 버린다.[11][12]

1.3. 멸망


공화국이 내부 자멸로 알아서 죽어가던 시기, 켈티카 공략전만을 남겨둔 왕당파는 엘반트 3세의 종조부인 아미센 대공과 엘반트 3세의 조카인 파리나크 백작 사이 벌어진 차기 왕권 경쟁에 귀족들이 양분되며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 귀족들은 셈법을 더해가며 가문의 미래를 위해 고심하였고 공화국의 숨통을 끊어버릴 최후의 공격은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했다.[13][14] 이 상황에서 왕국의 가장 유력한 대귀족 중 하나였던 폰티나 공작은 어디에도 협력의사를 밝히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어 이런 혼란을 더했다.
그러던 중 파리나크 백작 지지파인 엘란 대공이 지키던 로젠 관문에 별안간 렘므 왕국의 공격이 개시되어 왕당파가 크게 당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이 와중에 그간 침묵을 지키던 폰티나 공작이 아노마라드 왕조의 방계에 속한 '체첼 타고르크'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고 홀로 '''수도 켈티카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폰티나 공작은 사실 체첼 타고르크를 차기 국왕으로 등극시키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타고르크와 비밀리에 혼인을 맺어두고 물밑에서 장대한 구상을 세우고 있었다. 원래대로면 더 시간이 필요한 계획이었으나 공화국의 예정된 멸망 이후 가문의 운명을 걱정하던 아르님 공작이 폰티나 공작의 이런 구상을 알아채고 은밀하게 접촉하여 밀약을 맺었다.[15][16] 폰티나 공작의 최선의 수는 바로 다른 두 세력들이 눈치채고 움직이지 전에 먼저 수도를 점령하고 왕위에 등극하여 모든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수도의 신속한 점령과 정통성이 필요했다. 그런 와중에 아르님 공작의 제안은 이 두 가지 전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17] 아르님 공작가가 공화국 내부에서 여러 중요한 정보를 폰티나 공작에게 전달하였다.
이렇게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 헛된 꿈을 꾸고 있을 때 체첼 타고르크는 폰티나 공작이 준비해준 군대를 이끌고 아르님 공작이 전달해준 정보를 바탕으로 고작 '''나흘'''만에 공화국의 방어선을 뚫고 수도 켈티카를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아무리 공화국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어도 켈티카 지역의 방어선은 사력을 다해 구성해두었는데 타고르크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전격전을 펼쳐 공화국의 마지막 꿈을 분쇄해버렸고 이 시기의 일화는 훗날 '''전격의 나흘'''로 불리게 된다.
수도가 포위당한데다가 중병을 앓던 당스부르크마저 사망한 공화국은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 최후까지 저항하였으나 아르님 공작이 건네는 중요 정보를[18] 바탕으로 타고르크는 단 3일 만에 켈티카를 함락시키며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멸망하고 만다.

1.4. 사후정리


체첼 타고르크는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초대 국왕으로 등극. 신 아노마라드 왕국의 '체첼 다 아노마라드'로 즉위하였다. 폰티나 공작과 아르님 공작은 신왕국의 최고공신으로 권력을 인정받았고[19] 체포된 공화국 인사와 공화국에 항복하고 전향한데다가 최후에서도 왕당파로 돌아오지 못한 전직 귀족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이들의 사형 집행으로 수도 광장은 한동안 피가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
아미센 대공과 파리나크 백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켈티카로 진군했으나 이미 체첼 타고르크가 모든 상황을 정리해버린 다음이었고[20] 아미센 대공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저항하다 반역자로 몰려 제거되었다.

2. 평가


'''반쪽짜리 혁명'''
국왕 엘반트 3세가 실정으로 공화파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문제는 일반 민중의 상황. 국왕의 통치는 귀족들에게는 피로했으나 일반 민중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그믐밤의 배신 이후 일반 민중의 시각으로는 그저 집권층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정도에 불과했고 되려 공화파의 '혁명'으로 일반 민중의 삶이 더 복잡해지기만 하며 공화주의에 대한 거부감만 커져갔다.
아노마라드 왕국은 대외적으로든 내부적으로든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없었다. 트라바체스 공화국에서 온 보리스는 아노마라드 왕국을 딱 '''풍요 그 자체'''로 묘사했고[21], 극빈계층으로 태어나 마을 주민들의 수확물을 서리하고 다니던 막시민조차 개인이 못 살아서 그렇지 결국 굶어죽지도 않고 그럭저럭 빌어먹고 살았다.[22] 결국 공화파는 멀쩡한 왕국을 뒤엎어버렸으니 민중의 벗이 민중과 반복하는 일이 벌어진 것.[23] 왕당파가 재산을 두고 다투고, 차기 왕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음에도 수도 지역만 겨우 차지하고 있다가 왕당파의 일개 파벌 하나의 공격에 그대로 멸망한 것도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다.

3. 유산


공화국의 소멸로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민중의 벗의 소수의 단원들이 살아남아 아노마라드 전역으로 흩어졌고 지하조직으로 개편되어 물밑에서 또다른 혁명을 준비하고 공화주의자들을 육성하고 있다. 또한 공화국의 '의회'도 망명의회로 개편되어 지하에서 은밀히 공화국의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현 시점에서는 또다른 혁명을 대비하기 위해 왕국 8군 등을 창설한 왕국의 경계망을 피해 살아남기 급급하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이엔나 다 아마란스등이 여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고, 1부와 2부의 주인공이었던 보리스 진네만조슈아 폰 아르님 또한 언젠가는 이 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24] 룬의 아이들 3부의 쟁점 중 하나가 공화파 vs 국왕파 일테니 공화국의 재건이 관심사항이 될것으로 보인다.

[1] 아노마라드 왕국은 대륙의 4분의 1을 점유하고 있는 대국으로 작가는 독자와의 질의에서 하이아칸에서 켈티카 까지의 거리가 대충 루마니아에서 파리까지의 거리라고 했으니 아노마라드 왕국의 면적은 대략 현재 서유럽 국가 전체에 달한다고 보면 된다.[2] 그런데 당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단 한명의 데귀족이 있었다. 바로 왕국 굴지의 대귀족 폰티나 공작가의 폰티나 공작.[3] 현 체제에서 가장 큰 해택을 보고있는 귀족 본인이 공화주의자가 된 것이 의아해보이나 역사적으로 귀족처럼 의식주를 보장받고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류층에서 혁명가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쿠바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는 귀족 가문 출신의 부유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도 변호사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대학 교육까지 받았었던 인물이다. 멀리 안 가고 룬의 아이들 세계관 내에서도 스초안 오블리비언 같은 경우도 있다.[4] "실제 역사(특히 유럽 문화권의 서양사)에서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상류층 출신이었다" 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기는 하나, 이는 좀 더 조심스럽게 이해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 체 게바라등이 이런 '상류층 출신 혁명가'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지만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상류층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으로써 시민 계층(중류층)의 상위, 즉 부르주아지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다. 근대를 거치면서 봉건적 혈통귀족의 입지 자체가 크게 축소되고 그 자리를 부유한 시민계층이 대체하였으며, 특히 계급 없는 현대 민주사회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흔히 "평범한 서민보다 더 상류계층이니 같은 상류층, 귀족 아니냐"는 식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계급정서가 있던 시대의 유럽 문화권에서 '귀족'(특히 영주귀족)과 '부유한 시민'은 '''명백히 다른''' 계급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영지를 가진 영주귀족이 급진주의 혁명을 주도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굳이 찾자면 프랑스 혁명 당시 평등공 루이필리프의 사례 정도겠지만, 이 역시 부르주아지 주도로 일어난 혁명에 '지지를 표한' 것이지 본인이 혁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다.) 당장 위에서도 체 게바라나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가 변호사나 의사였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유럽 문화권의 계급구조에서 의사나 변호사같은 전문직은 귀족의 직업이 아니다. 따라서 영지를 가진 귀족인 당스부르크가 공화주의 혁명을 주도한 것은 실제 역사에 비추어봐도 특이한 일이 맞고, 또한 후술된 아노마라드 공화국의 빠른 쇠퇴 역시 영주귀족이 쇠퇴하고 새로운 체제를 지탱할 시민계층이 성장한 후 발생한 실제 역사의 비교적 성공한 혁명들과 달리 아직 전근대적 영주제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스부르크 개인의 활약으로 이뤄진 혁명이기에 당스부르크 사후 정착에 실패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5] 룬의 아이들 세계관 형성에 모티브가 된 중세 서양에서는 장자 단독 상속이 원칙으로 차남 이하 자식들은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고 알아서 먹고 살아야하다보니 재산을 놓고 가족 사이의 다툼에 싸움까지 벌어졌다. 갖은 모략과 계략이 판치는 것은 물론 살인까지 벌어졌고 왕위 계승 전쟁처럼 유산의 규모가 국가 단위까지 커지면 전쟁까지도 일어났다.[6] 귀족들을 허구헌 날 호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귀족 소유의 사병을 몰수하여 왕국군에 편입시키는 행위를 너무 자주 벌였다. 왕국군 보강으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은 좋으나 왕국군 부대 편제가 너무 자주 변경되다보니 훈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7] 귀족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일반 민중이 대귀족 자택에 몰려들어 귀족들을 잡아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일부 귀족들은 자택 사병들을 모아 이에 저항했으나 공화파가 장악한 수도 한복판에서 소수의 사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의미 없는 발악 뿐이다.[8] 이 난리통 속에서 살아남은 '귀족'은 오직 아르님 공작가 뿐이었다. 아르님 공작가는 켈티카에 남은 귀족들 중 가장 거물급으로 원래대로면 귀족들의 세상을 뒤집으려는 공화파들의 제1 척살목표가 되어야 했으나 가문 역사 대대로 일반 민중들을 상대로 억압 한 번 한 적 없고 민중들이 어려운 시기에는 친히 나서서 도움을 배풀었기 때문에 공화파가 장악한 켈티카 한 가운데에서 일반 민중들의 대대적인 지지 속에 생명은 물론 '''가문과 재산 모두''' 보장받게 되었다. 상세한 것은 프란츠 폰 아르님 항목 참조.[9] 사실 거물급 귀족들 외에 공화국에 반항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살아남은 중소귀족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이후 '진격의 나흘' 때 체첼 타고르크가 켈티카에 입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아르님 공작가를 따라 그의 편에 붙었다.[10] 어린 조슈아 폰 아르님은 이런 부류를 '''공화귀족'''이라고 평했다.[11] 그믐달의 배신 이후 1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켈티카에 남은 귀족들은 거의 공화국에 순종하기로 한 소수의 귀족들 뿐이다. 협조 의사를 밝힌 귀족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그 누가 공화국에 협조할 것인가? 전향을 거부하고 수감된 귀족들이 있었다고 해도 이들을 인질로 써먹을 가치를 생각해보면 귀족 처형은 하책 중의 최악의 하책이다.[12] 수도의 귀족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왕당파는 아무 거리낌없이 켈티카 탈환에 나설 수 있다. 인질도 없으니 공화국은 공세를 늦출 협상의 여지를 모두 잃고 더구나 이 시점에서 왕당파 주류는 체포된 귀족들이 살아남으면 향후 재산 문제가 또 불거지므로 오히려 죽어버리는 것이 더 편해진다.[13] 당연히 누군가가 먼저 켈티카를 쳤다가는 다른 한쪽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거기다 만약 공화국의 힘이 강력했다면 먼저 손을 잡고 공화국을 쓰러뜨렸겠지만 상술되었다시피 공화국의 힘은 수도 인근밖에 힘이 미치지 않았고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로 여겨졌다.[14] 란지에가 아미센 대공비의 시동이었던 때가 아마 이즈음인 것으로 추측된다.[15] 이대로 가면 공화파는 수도에 남은 귀족들을 전부 처형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슈아가 내놓은 가문을 보전할 수 있는 계책에 따라 가문을 보전하기 위해서 아르님 공작은 공화국에 살아남은 귀족들을 모아 세력을 만들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기 활용하기 위해 폰티나 공작에게 연락한 것이다.[16] 폰티나 공작으로써도 아르님 공작과 손을 잡는 것 최선의 선택이었다. 섣부르게 공격을 감행했다간 체첼 타고르크의 존재가 발각되어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계승 구도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릴 것이고 자칫 장대한 구상이 어그러지거나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 신속하고 정확한 행동만이 가문의 운명을 결정지을 상황에서 아르님 공작가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제안이었다.[17] 또한, 아르님 공작의 제안은 폰티나 공작의 계획에 걸리는 시간을 크게 앞당겨 주었고 성공률도 높여주었다.[18] 특히 아르님 공작은 당스부르크의 사망으로 공화국이 혼란에 빠져 외부 공격에 취약해지는 시점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19] 물론 최고위 공신은 폰티나 공작이고, 아르님 공작은 그 다음가는 위치를 보장받았다.[20] 특히 아르님 공작은 수도에 남은 귀족들을 끌어모아 체첼 타고르크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여 새로운 국왕 즉위에 대한 정통성을 부여하고 수도의 권력구도를 깨끗하게 정리해주었다.[21] 참고로 당시 시점은 신 아노마라드 건국 직후다. 아노마라드 공화국이 실질적으로 켈티카 내에서만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구 아노마라드 체제에서 바로 넘어온 시기인데도 자원이 철철 넘치는 풍요로운 환경이다. 심지어 아무리 생산지의 변경백급 영주라고 해도 송로버섯을 며칠거리로 먹을만큼 사치스러운 상황.[22] 막시민에게 수확물을 서리당한 마을 사람들도 막시민의 서리에 그다지 크게 분노하지도 않았고 그럭저럭 성가신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는 막시민이 정해진 선을 넘지 않았던 것도 크다.[23] 앙시앵 레짐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왕국의 부조리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마저도 민중이 민중을 때려잡으며 혼란을 거듭하고 왕정이 복고되고 다시 공화정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당시 프랑스는 세입 50%가 국채 이자만으로 소모되는 빚더미에, 영국에게 밀리는 경제력에, 소빙하기에 따른 식량부족 등이 겹친 상태라서 민심이 개판이었다. 민중 입장에선 어차피 굶어죽을 거 뭐라도 하고 죽자는 세기말 사고관이 퍼진 상황이었는데, 아노마라드는 그딴거 없고 그냥 적당히 먹고살던 와중에 별 듣보잡들이 내전을 일으킨 셈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화국에 대한 민중의 지지따윈 없고, "저놈들은 어디서 뭐하던 놈들임?"정도의 반응 뿐이었다.[24] 보리스는 란지에에게 빚이 있고, 조슈아는 현재 히스파니에와 프란츠 폰 아르님이 계획 중인 '아르님 왕국'의 첫 포석이 될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엮이게 된다. 게다가 2부 마지막에 란지에가 네냐플에 편입하는데 하필 배정받은 기숙사가 주인공들이 있는 도토리 빌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