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1. 개요
오등작의 세 번째 작위. 유럽의 작위에서는 count, Earl 등이 백작으로 번역된다.
2. 역사
2.1. 중국의 백작
춘추시대의 백작은 실질적인 천승지국(千乘之國)으로 대접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요한 척도로 사용된다. 적어도 백작이 맡고 있는 영지는 보통 전차 1000승을[2] 운영할 수 있을만한 규모이며 황하에 가까운 요충지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춘추시대의 백작위는 그다지 높은 위치에 있는 작위가 아니다. 주나라 왕실에서 일하는 경대부들의 기본작위 정도에 해당하는 수준이라 서주시절에는 사실 별 볼일 없었지만 왕실이 무너지고 제후들의 힘이 강해진 동주시대에는 회맹을 함에 있어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될 수 있었으므로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된다. 일례로 오왕 부차가 진(晉)과의 회맹에서 "나는 왕이니 가장 먼저 삽혈해야 한다"고 했던 주장에 진(晉)이 "주나라 제후들이 주왕의 대리인 앞에서 회맹하는데 겨우 자작위 가지고 깝치지 마라"라고 했을 정도. 사가들로부터 춘추오패는 아닐지라도 준패자 정도로는 여겨지는 부차가 여기에 꼬리를 말 정도로 강력한 명분이었음은 분명하다.[3]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찌른 이후 중원지역을 왕족에게 분봉함으로써 봉건제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이렇게 세워진 제후국을 왕과 성이 같은 제후들이라 하여 동성 제후국(同姓諸侯國)이라 하였다. 중원지역에서도 중국 하남성 근처에 백작위를 가졌으면서 주나라에 가까이 위치한 제후국은 진(秦)나라 정도밖에 없다.
- 정(鄭) - 동성 제후국, 주선왕 때 동생인 희우에게 분봉해 줌으로써 세워짐.
- 진(秦) - 진양공때 존왕양이의 공적으로 제수, 첫째는 견융으로부터 왕실을 구한 것이고, 두번째로는 기, 풍 두 땅을 회복함으로써 왕실을 높인 것에 대한 공적
- 조(曹) - 무왕(주)가 은을 정벌한 이후 동생인 조숙진탁(曹叔振鐸)에게 백작위와 함께 중원의 일부를 분봉해 주면서 세워졌다. 이 국가는 춘추시대의 국가로써 삼진의 하나인 조趙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2.1.1. 백작으로 오해받는 경우
- 위(衛) - 후작이다. 사기에는 공작으로 봉해졌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건 사기만의 단독기록이라서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사기에서는 초대 군주 강숙 봉이 위에 봉해졌을 때 백작이었으며, 이후 150여년이 지나 위경후때 비로소 후작으로 봉해졌는데, 후세의 연구에 따르면 강숙 봉 당시에는 아직 오등작이 확립이 되지 않았을 때며, 초기에는 서양식으로 변경백의 의미를 갖는 후작은 경기를 통치하는 위나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였다. 위경후 다음 군주인 위이후의 세자의 시호인 공백(公伯)의 이름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위나라 작위에 대해 헛갈려 하는 듯 하다.
- 진(晉) - 후작이다. 방백의 지위를 착각해서 벌어진 이야기. 진나라의 공성(公姓)은 희씨, 즉 동성 제후국이다. 이 때문에 성왕(주)의 숙부인 당숙 우가 후작위 - 진나라는 위의 위나라와는 달리 위치가 실제로 변경백에 가까웠다 - 로 분봉받아 진을 세웠고 이후 방백까지 제수받았었는데 여기에서 혼동이 온 듯 하다. 진나라는 원래부터 강국이어서 강태공 이후에도 방백이 왕왕 있어왔었다.
- 진(陳) - 후작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이나 위의 진晉의 일화와 혼동하여 생긴 듯 하다.
2.2. 한국의 백작
현존 사료상 우리나라에서 백작위 봉작은 고려 왕조 때가 처음이다.
개국초 왕작, 공작, 후작이 봉해졌다가 문종 때 오등봉작제가 제정되면서 백작위가 지속적으로 봉해진다. 신하는 남작부터 시작해 백작에 올라가지만(오등작) 왕족은 백작부터 시작이다.(삼등작)
고려 말기에는 원의 제후국으로 강등되어 군호만 사용했지만 이성계, 정몽주가 백작으로 봉해진 기록이 있다. 아마 한국의 백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백작일 듯.
고려 왕조는 백작위를 받은 신하를 "영공 각하(令公 閣下)" 혹은 "상국 각하(相國 閣下)"로 불렀다.[4]
조선 왕조도 개국초엔 신하들이 봉작되었다. 대표적으로 정도전(봉화백), 이색(한산백), 이지란(청해백) 등등. 하지만 오등작은 제후국이 쓸 수 없는 것이라 하여 곧바로 폐지된다.
2.3. 유럽의 백작
유럽 역사에서 실세인 중앙 귀족은 백작이 대부분인데,[5] 이 탓인지 백작 계열의 인물들이 많이 알려져서[6] 현대인들에겐 오등작 중 가장 친숙한 작위이다. 대표적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드라큘라 백작, 존 몬태규 샌드위치 백작이 있다. 남작 지위가 추락하고 작위별 상하관계가 생겨나면서, 백작은 남작령과 주교령, 도시들을 포함하는 규모를 가지는 작위가 되었다.
일단 영어로 얼(Earl)이라는 명칭과 카운트(Count), 그라프(Graf)라는 명칭으로 불려져 왔지만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 당시 황제의 고위 행정관을 지칭한 코메스(Comes largitionum)에서 유래되었다.
대륙의 백작(count)은 프랑크 왕국의 지방사령관 겸 판사를 로마 시절처럼 코메스라고 부른 데서 시작한다.[7] 그 와중에서 변경 군사 요충지인 부중백과 주요 거점인 궁중백이 파생되어 나왔다. 많은 수는 봉건체제가 시작되면서 공작에게 귀속되었으나, 몇몇 백작은 다수의 주(gau)를 흡수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집권화한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고, 백작은 영역제후로서 정치 권력을 상실했으나, 귀족 계급의 일원으로서 누리던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프랑스에서의 백작(comte)은 늦어도 900년까지는 공작의 봉신이었다. 그러나 봉건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관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작은 땅의 세습영주가 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 예로 카페 왕조의 위그 카페는 파리의 백작이었지만 귀족들의 추대를 받을 정도로 유력한 귀족이었으며, 그 외 백작들도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거나 사적인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허나 13세기 초부터 왕의 이름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대법관 제도가 생기면서 프랑스 내 백작의 권한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16세기에 들어서 화폐 주조권마저 잃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 제1제정과 그뒤를 이은 군주정 및 제국주의 시대에는 백작의 지위가 영역 제후의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고 장자상속에 따라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허울 좋은 세습작위가 되었다.
독일에서의 백작(graf)는 10세기 경부터 대부분 세습작위로 변하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으며, 12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백작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치안유지권을 부여했는데, 이 권한은 1100년까지 공작에게 속해 있었다. 그후 백작령이라는 용어는 백작이 생사 여탈권을 갖고 있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고 또한 이미 12세기 초부터 독일 서부에서는 공식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성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백작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드리히 1세 시대에는 보호관(Vögte) 같은 상류층의 일부 자유인들이 백작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후 13, 14세기에는 공작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새로운 백작령이 생겨났다.
한편으로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는 일반백작과 제국백작을 차츰 구별하기 시작했다. 제국백작은 제국의회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백작단(Grafenkollegium)의 일원이 되었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뒤 제국백작의 지위도 한 단계 낮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는 황제 한 사람만의 직속 신하였던 제국백작이 독일 여러 국가의 군주들에게 종속된 지위로 떨어졌다. 그렇기는 해도 연방의회는 1829년 각하(Erlaucht)[8] 라는 특별 존칭을 쓸 수 있는 제국백작의 권리를 인정했다.
영국(잉글랜드)의 백작(earl)은 대륙과는 계통이 전혀 다르다. 영국의 백작은 잉글랜드에서는 바이킹의 야를(Jarl)에서 유래했고,[9]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고유 작위인 모마어(Mormaer)에서 유래했다. 노르드인이었던[10]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야를 작위가 도입되었다. 이때 야를은 오등작에 비추어 번역할 때는 보통 백작으로 번역하기는 하나,[11] 사실상 공작급의 권력과 영역을 가졌다. 이런 특징은 잉글랜드 초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웨식스 백작(earl)이나 노섬브리아 백작, 혹은 머시아, 켄트 백작 등, 백작이라고 하기에는 과거에 왕국급의 규모였던 것처럼 사실상 대륙의 백작과는 다른 공작과 비슷한 작위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웨식스 백작이었던 해럴드 2세(후에 왕이 됨)가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웨식스의 권역만 해도 남부 잉글랜드 전체에 가까우니. 하지만 후에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어서 과거 왕국들의 이름을 딴 권역은 철폐되고 새롭게, 그리고 섞어서 편찬되었다. Earl의 지위가 대륙의 Count와 비슷하게 내려가고, 본래 Earl의 권역은 공작위로 대체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모마어 또한 말이 백작이지 스코틀랜드 국왕의 통제를 벗어나 할거하는 소왕(petty king)이었다. 유명한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모레이 백작(모마어)였다. 스코틀랜드 고유의 모마어 작위는 15개가 있었다.[12]
초기에 잉글랜드 내 백작은 공작처럼 여러 주(shire)에 대해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1066년에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 백작의 활동 범위는 1개 주 급으로 제한되었다. 시간이 흘러 근대 백작의 지위는 더이상 영토와 결부되지 않게 되었고 18세기부터는 작위를 받은 사람의 성(姓)에 백작이라는 칭호만 덧붙이는 관례가 생겨났다. 또한 이렇게 생겨난 백작위들은 '''Earl of 성씨'''라고 표기하는 것이 아닌, '''Earl 성씨'''로 표기한다. 형식적으로라도 영지가 없기 때문으로[13][14] 다이애나 스펜서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가 Earl Spencer로 불린다.
3. 백작 칭호를 가진 인물
- 고려 왕조
- 조선 왕조
- 중국 왕조
- 이여송 : 요동에서 전사한 뒤 영원백(寧遠伯)에 봉해졌다.
- 일본
- 영국
-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 - '미라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미라보 백작이다.
- 기욤 마리 안 브륀 - 초대 브륀 백작.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1인
- 장 바티스트 주르당 - 초대 주르당 백작.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1인
- 벨기에
- 스웨덴
- 러시아
4. 관련 항목
[1] 다만, count만 백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아래 '유럽의 백작' 문단 참고.[2]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하지만, 보통의 경우 전차 1승은 100명의 병사가 딸려있다. 즉 백작은 최소한 약 10만의 군세를 가진 제후이다. . 다만 1승당 탑승자 3명, 보졸 75명, 보급군 22명으로 1백명의 병사가 편제된 것은 전국시대에 확립 된 것이며 춘추시대 혹은 그 이전시대에는 전차 1대당 편제된 병력이 현저히 적었다.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차 1승당 편제된 병력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였다 ex) 상대의 편제는 전차탑승자 3명, 보졸 및 보급군 5명으로 1승당 8명의 편제 춘추시대 대제후국간(초 VS 진(晉)) 유명한 싸움인 필 땅의 싸움을 보더라도 양측 병력은 수만단위였다(보통 3만을 넘지 않는 것으로 봄). 또한 전국시대에도 1천승 미만의 병력으로 왕위에 있는 경우가 있으며, 전국시대에는 기병의 등장으로 전차의 중요도가 점차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제가 엄격하게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ex) BC 4C 연나라 역왕-전차 6백승, 기병 수천기 또한 전차 1천승의 천승제후라는 개념은 실질적인 전차의 숫자를 말하기 보다는 흔히 '백승지경'으로 표현되는 경,대부를 어느정도 거느리고 있는가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3] 여기에 당시의 오나라 내부가 붕괴되고 있어서 빠르게 부차가 귀국했던 이유도 한몫했다.[4] 고려사 형법지 용례, 동국이상국집 19권 참조[5] 주의할 점은 이는 근세~근대에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중세 대부분의 기간동안 백작 대부분은 공작의 봉신이었고, 그말은 즉슨 백작 대부분의 주군이 국왕이 아니었기 때문에(잉글랜드 제외) 백작과 국왕 간에는 큰 교점이 없었다. 분권화된 중세 사회 특성상 강력한 제후들은 공작들이 많았다. 하지만 근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중앙집권화되고 귀족들의 실질적 영지나 군사력등의 권력이 약해지고 장교, 공무원,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자연스레 왕족들이 많은 공작보다 적당한 백작 출신들이 많아진 것[6] 그래서 그런지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도 왕이 되기 전에 각각 앙주 공작과 베리 공작의 작위가 있었지만 각각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7] 고대 로마의 지역단위인 pagus는 프랑크 왕국 하에서 주(gau)로 전환되었고, 각 주에는 행정관으로서 백작(count; graf)이 파견되었으며, 백작의 관할권은 county라고 불렀다. 이 영향으로, 귀족제가 존재한 적이 없는 미국 등에서도 County란 말이 행정구역의 의미로서 살아있다.[8] 영어에서는 Illustrious Highness라고 번역함[9] 노르드인의 영향을 받기 전에는 앵글로색슨 고유의 ealdorman이라는 지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 이상의 주(shire)를 통치하였으며, 초기 부족시절에는 prince에 가까웠으나, 기독교화 및 봉건화 과정에서 duke와 count 사이 즈음의 위치에 자리하였다.[10] 로마화 과정에서 프랑스식 봉건제를 받아들였던 북프랑스의 노르만인과는 다르다.[11] 부족적 성격을 강조할 때는 족장으로 번역한다. 실제로도 덴마크 등에서 봉건제를 받아들일 때 기존의 jarl은 duke(herzog)로 대체되었다.[12] 앙구스, 던바, 멘테이스, 애솔, 파이프(맥베스의 맥더프가 파이프 백작이다), 모레이, 버컨, 레녹스, 로스, 케이스네스, 마르, 스트래던, 캐릭(브루스 가문의 작위였으며, 이후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 1세가 왕이 되면서 캐릭 백작은 스코틀랜드 왕세자의 작위가 된다), 마르, 미언스, 서덜랜드[13] 이는 청나라와 일본의 친왕도 마찬가지로 공친왕 혁흔은 Prince Gong으로 번역된다. 또한 중국의 공작위 중 영지가 없는, 예를 들어 공자의 후손에게 내려진 연성공 작위나 금나라의 황제가 송나라의 휘종에게 내린 혼덕공과 같은 작위 역시 Duke Hunde 등으로 번역된다.[14] 그러나 이는 영국의 경우이고 타 지역에서는 조금씩 다르다. 스페인에서는 성에 칭호만 붙여 만들어진 작위라도 "~~의"를 의미하는 de를 붙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작위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of를 사용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프랑코의 딸에게 내려진 프랑코 공작이 있다. 여담이지만 프랑코 공작위는 제 2대 프랑코 여공작인 프랑코의 외손녀를 거쳐 이후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자 카페 가문 전체의 수장인 루이 알폰소 드 부르봉이 물려 받을 예정이다.[15] 후에 해양후(海陽侯)로 진작.[16] 세 산신을 백작으로 봉했다. 조선 태조실록 2년 1월 21일 기록.[17] 별명도 전차의 백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