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드 메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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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리 드 메디시스
(Marie de Médicis)
'''출생'''
1573년
토스카나 대공국
'''사망'''
1642년
쾰른
'''배우자'''
앙리 4세
'''자녀'''
루이 13세
엘리자베트
크리스틴
니콜라 앙리
가스통
헨리에타 마리아[1]
1. 개요
2. 생애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섭정 왕비이자 앙리 4세의 부인. 루이 13세의 어머니.

2. 생애


토스카나의 대공 프란체스코 1세오스트리아의 여대공 요하나 폰 외스터라이히의 딸로 태어났다. 1600년 앙리 4세와 결혼해 여섯 명의 아이를 두었다. 이 결혼의 성사로 메디치 가문에게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던 부르봉 왕가는 어느 정도 재정적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질투심이 강했던 마리 드 메디시스는 호색한이였던 앙리 4세[2] 자주 충돌했고,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하였다. 1610년 앙리 4세의 서거 이후 뒤를 이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아들 루이 1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마리 드 메디시스는 야망이 큰 왕비였으며 하급 귀족 출신의 콘시노 콘시니를 총신으로 앞세운 정치를 시도했지만, 포용력이 부족하고 방탕했던 콘시니는 프랑스 기존 정치 세력으로부터 원성을 산다. 프랑스 귀족들은 이를 명분삼아 반발하고, 특히 앙리 2세 콩데 친왕은 마리 드 메디시스와 잦은 분쟁을 겪는다. 1617년 성인이 된 루이 13세는 비트리 후작 등,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등에 업고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콘시니를 암살하고, 모후에게 자신이 직접 프랑스의 왕으로 군림할 것을 선언한다.
이때 마리 드 메디시스는 블루아 성에 유폐되었으나 1619년에 블루아 성에서 탈출해 앙굴렘 성으로 피신해서 자신의 차남이자 루이 13세의 남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손잡아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반란은 루이 13세의 반격으로 너무나도 맥없이 진압되었다. 그나마 루이 13세의 총신인 리슐리외 재상의 중재(앙굴렘 협정)로 루이 13세와 화해하고, 오를레앙 공 가스통도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관대하게 용서받아 52살로 천수를 누렸다.[3] 그렇게 아들과의 갈등이 가라앉나 싶었으나 재빨리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세력을 모아 2차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2차 반란은 퐁드세 전투로 빠르게 진압된다. 이후 제 3차 반란을 우려한 루이 13세는 모후인 마리를 궁전으로 불러들인다.
파리로 재입성한 마리 드 메디시스는 다시 정계로 발을 들이고 세력을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1630년 리슐리외 재상의 너무 강한 영향력을 눈엣가시로 여겨 왕에게 리슐리외를 내칠 것을 요구한다. 루이 13세는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나 다음 날 리슐리외를 궁으로 불러들이면서 재상으로써의 자리를 공고히 해준다.(Journée des Dupes, 속임수의 날) 아들 루이 13세에게 버림받은 마리 드 메디시스는 당시 스페인령이였던 브뤼셀로 도망간다. 루이 13세는 마리 드 메디시스가 프랑스의 원적인 스페인으로 도망친 것을 이유로 삼아 자신의 모후인 그녀를 파문한다.
이후에도 해외에서 군대를 빌려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까지 잡았으나 번번히 여러 사정으로 실패했다. 결국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국과 네덜란드를 전전했다. 1642년 독일 쾰른에서 늑막염으로 과거 자신이 후원한 화가인 루벤스가 임종을 지킨 가운데[4] 사망했다.
[1] 영국 찰스 1세의 아내.[2] 앙리 4세는"Le vert galant"(호색왕)이란 이명을 지닐 만큼 여자를 어마무시하게 밝혔던 걸로 유명하다.[3] 다만 가스통은 루이 13세가 죽고 나서도 왕이 되기 위해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가 패하여 체포되었고, 블루아 성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사망한다. 말이 좋아 천수를 누린거지 사실상 죽을 때까지 죄인 취급을 받으며 성에서 감금당한 채 살았던 거다.[4] 그녀가 사망한 곳도 쾰른에 있는 루벤스의 저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