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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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87년에서 1791년 혹은 1792년까지 존속한 프랑스의 왕국. 역대 왕조로는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가 있다.
2. 역사
일반적으로는 카페 왕조가 왕위에 선출된 987년 시기부터 프랑스 왕국의 시작이라 보지만, 일부 시각에 따라서는 서프랑크 왕국도 프랑스 왕국의 역사의 일부라 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저 위의 왕조에 카롤루스 왕조도 껴놓아야 한다는 말.
카롤루스 가문의 마지막 국왕인 루이 5세가 자식 없이 사망한 후, 결국 카페 가문이 귀족들의 추대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대귀족들 사이에서 선출된 왕이었고 카페 가문의 정통성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했다. 기존의 지배자인 카롤루스 왕조와는 모계로 친척 관계였으나 부계로는 혈통이 닿지 않았고, 프랑크 왕국 시절부터 파리 백작을 역임하긴 하였으나 당시의 내로라는 명문가들에 비하면 역사가 짧았다. 그렇기에 초창기의 카페 왕조는 자칫 실수 한번 하면 그대로 목 날아가는 위험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당시 남부와 서부 동부에는 카페 왕조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큰 영지를 지닌 영주들이 있었고 카페 왕조는 이들의 명목상 왕일 뿐이지 제대로 된 실권은 없다시피하였다.
다행히도 계속해서 적장자를 낳으며 점점 가문의 정통성을 쌓아가고 결혼 상속, 때로는 과감한 영지 몰수 등을 강행하여 점진적으로 왕권 강화를 꾀하였으나 1066년, 휘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가 갑자기 잉글랜드로 쳐들어가더니 그곳의 왕 윌리엄 1세로 즉위하고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스 서북부 일부를 통째로 가지고 날라버린다.[9] 명목상으로는 윌리엄도 프랑스 왕의 신하였으나 프랑스 왕으로서도 윌리엄과 그의 후손들을 쉽게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 루이 9세와 같은 명군들을 배출하여 지속적으로 대영주들과 잉글랜드 왕의 영향력과 권력을 조금씩 빼앗아 왕의 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대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에 투자했다가 파산하여 몰락하는 등 프랑스 왕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 따라준다. 그렇게 야금야금 잉글랜드 왕과 대영주들을 견제하던 와중 샤를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부계''' 분가인 발루아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며 그 당시 잉글랜드 왕이던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으로 인하여 백년전쟁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백년전쟁은 잔 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의 완승으로 끝났으며, 그 결과로 잉글랜드 국왕은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10] 그리고 백년전쟁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소비되었으나 오히려 이는 새로이 집권한 발루아 왕조에게는 호기가 되었다. 끝없는 전쟁에서 결국 승리해냄으로 그 누구도 의문을 품을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고, 몰락한 영주들을 일방적으로 깨부셔 그들의 영지를 빼았고 관료들을 등용해 절대 왕정의 체제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발루아 왕조는 마지막 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해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빙하기가 끝나고 작황사정이 호전됐고, 명군 앙리 4세가 국채 경감·농민층의 세금 부담 완화·화폐개혁 등 일련의 경제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은 절정에 오른다. 특히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해서 무역으로 꽤나 많은 부를 프랑스에 선사했다. 부르고뉴 공국도 17세기 말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대 군주들이 차곡차곡 쌓은 과실을 달콤하게 따먹은 인물이 바로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 활발한 대외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의 호화 사치를 핵심으로 하는 루이 14세의 정책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인두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도입한다. 한편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 장관이었던 콜베르는 각종 공업을 왕실 차원에서 유치하면서 외국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보호무역를 실시하여 외국 상품의 프랑스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앙으로의 세금 징수 및 전국적인 물산 유통의 원활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의 교통망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콜베르의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워낙 돈을 흥청망청 써댔고, 설상가상으로 1685년에는 낭트 칙령을 폐기하자(퐁텐블로 칙령)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그노들이 국외, 특히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으로 탈출하기 시작한다. 이들 위그노들은 프랑스 내 상공업인들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이탈은 프랑스 경제에는 그야 말로 뼈아픈 타격이었다. 결국 루이 14세의 사망 무렵(1715)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만다.
다행히 루이 15세 시기에는 경제가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는가 싶었다.[11] 그런데... '''루이 15세 말기 7년 전쟁이 터지면서(1756)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7년 전쟁으로 빚은 빚대로 졌는데, 전쟁까지 지면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들 대부분을 잃으면서[12] 프랑스의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벌 영국을 어떻게든 엿먹여보겠다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적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물론 신생국 미국이 승리하면서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 시점에서 정부의 부채는 이미 통제 내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버렸고(...) 계속해서 흉년이 일어나고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중들, 특히 수도 파리의 빈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당시 국왕 루이 16세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등용하면서 세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본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국 개혁의 마지막 노력들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수백 년에 걸쳐 쌓인 모든 모순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만다.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루이 18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으나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밀려 잠시 부르봉 왕조가 종식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다시 퇴위한 이후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함으로 십여년간 부르봉 왕조가 지속되었으나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구 시도가 결국 7월 혁명을 촉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방계인 루이 필리프 1세가 즉위하게 된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 1세도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로 인해 2월 혁명으로 퇴위, 이후 프랑스는 제2공화국으로 바뀐다.
3. 행정
루이 14세를 필두로 한 절대왕정 시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 시기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및 전문관료들의 등장은 사실이 아님을 1960년대 이후 연구 결과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행정 조직은 인원이 제대로 갖춰져 있기는커녕 기본적인 조직 틀조차 정립되지 않아서 푸케, 콜베르와 같은 초기 관료들이 골머리를 앓게 했다. 또한 과세, 사법[13] , 입법 등 많은 행정 영역에서 실제적인 통치는 국왕보다는 귀족과 가톨릭 사제들의 의중에 의하여 행해졌으며, 몇몇 도시들(가령 몽펠리에)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도 각종 봉건적인 특권을 보유하고 있기까지 했다.
한편 지방 통치의 경우 샤를 6세 시기였던 15세기 초부터 국왕은 총독(gouverneur)이라고 불리는 행정관을 지방에 파견했지만 그것조차 전국적으로 파견된 것은 아니었으며, 왕의 대리인이라는 규정과 달리 이들은 왕의 의사를 멋대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의중대로 지방을 통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총독직을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세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심지어 17세기 무렵 총독들이 각종 정치적 음모를 계속 꾸미자 이에 질려버린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과세, 사법 각종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인들을 파견했을 정도. 그리고 이게 먹혀들어서 관리인 파견 이후 총독들의 힘이 대폭 약화됐다.
3.1.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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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9년의 행정구역.
왕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프로뱅스(Province)라는 단위를 사용하였다. 프로뱅스는 '지방'이라는 뜻으로, 레지옹과 동의어이다.
프로뱅스의 기원은 중세시대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영지들로서, 과거에 같은 위치에 있던 국가나 영지와 비교해보면 대충은 들어맞는다. 기원이 이렇다보니 시간이 흘러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서 프로뱅스로 개편된 이후에도 지역의 유력 귀족이 여전히 영주처럼 군림하고[14] , 지역별로 법률, 조세제도, 문화 등등이 상이한 상황이었기에 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제1공화국 정부는 이것이 프랑스의 통일성을 저해한다고 보고 폐지해버렸다. 그리고 탄생한게 바로 지금도 레지옹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는 데파르트망.
4. 인구
그 당시 웬만한 유럽 강국 두세 개를 합친 걸 넘는 인구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와 비슷하게 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제후국들로 분열된 상태였던 신성 로마 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프랑스가 대부분의 영토를 확립한 시기에 프랑스의 인구는 15,000,000명에 달했고 1685년에는 21,500,000명으로 늘었다. 이는 유럽에서는 제정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수준이었고 주요 경쟁국들인 영국,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보다는 2~3배, 나머지 국가들에 비해서는 몇 배는 되는 인구였다. 수도였던 파리는 1600년에는 220,000명이었고 1685년에는 510,000명이나 되어 런던 다음으로 유럽에서 인구가 많았고, 마르세유와 리옹 같은 도시들도 무역 및 금융업의 중심지로 번성해나갔다.
5. 경제
프랑스는 이미 르네상스 시기에 국토 대부분이 광활하고 비옥한 평지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각종 다양한 농산물[15] 을 재배하는 한편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중요성이 증대한 광업 및 대장간과 같은 가내 수공업을 바탕으로 유럽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국가였다. 다만 이 시기의 농공업 기술은 전반적으로 후진적이었던 중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그로 인해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측면이 강했다. 이는 단지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전 유럽,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6. 역대 국왕
역사 관련 정보/프랑스 역대 군주 항목 참조.
7. 기타
- 부르봉 왕가 시기의 국왕들은 뛰어난 정력과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다. 정부(情婦)를 둠은 거의 기본 스펙급이고 심지어 근친상간과 같은 루머들까지도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왕실의 사생활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척도. 예외가 있다면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만을 사랑한 루이 16세지만 루이 16세 고자설과 마리 앙투아네트 악처설만 번져 왕가에 대한 평판이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여주었다.(...)
- 당시 프랑스에서 프랑스어(오일어의 파리 방언)는 파리와 그 일대에서만 통하는 정도였고 지방으로 갈수록 각종 방언과 기타 언어들이 통용되었다. 오크어, 브르타뉴어,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알자스어, 왈롱어 등등. 심지어 절대왕정 시기를 통해 한 세기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거친 뒤인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마르세유에서 온 대표단이 파리에서 행한 연설을 파리 시민들이 도통 못 알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8. 관련 문서
[1] 1791년부터 1792년까지는 '프랑스 입헌왕국/Monarchie constitutionnelle française'[2] 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조 시대의 어기.[3] 부르봉 왕조 시절에 나바르와 동군연합하며 쓰던 국장. 왼쪽의 노란색 백합 배경의 푸른 문장은 프랑스를 상징하고 오른쪽의 윷판(?)같이 생긴 그림 배경의 빨간 문장은 나바르를 상징한다.[4] 남부에 뚫려 있는 곳이 바로 아비뇽인데, 1789년 프랑스 왕국이 몰수하기 전에는 교황령이었다.[5] 1791년 이전[6] 1791년-1792년[7] 베르사유 궁전 건설 이후 왕족들이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에 거주하면서 1682년부터 1789까지는 베르사유가 사실상 수도의 역할을 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파리에 있는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궁전이 본궁이었고 베르사유 궁전은 별궁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일어나면서 반강제적으로 왕족들이 파리로 복귀하면서 다시 파리가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8]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으로 인해 루이 16세가 파리로 돌아오게 된 이후, 여러 정책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9] 다만 이는 노르망디 공작이 잉글랜드 국왕을 겸하게 된 것이며, 노르망디 공국이 잉글랜드 왕국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봉건제, 동군연합 문서 참조.[10] 다만 칼레는 백년전쟁 종전 이후인 1558년 메리 1세 재위 시까지 잉글랜드 왕령지로 남는다.[11] 화폐가치의 안정이나 생산과 인구 같은 내용을 이런 시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것들은 정책적인 사안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물가의 상승과 임금의 상승은 서로 상쇄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가 잘못되었다.[12] 그나마 당시 설탕과 커피 수출로 프랑스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던 생도밍그 등의 카리브 해의 섬들은 건지는 데 성공해 최악은 면했다.[13] 대체로 북부지방에서는 관습법을, 남부지방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의 법에 의거해서 재판이 행해졌다고 한다.[14] 물론 어느 정도의 봉건제가 유지되던 전근대 국가였던 만큼, '''진짜로''' 영주인 곳도 많았다.[15] 특히 16세기부터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감자, 담배 등을 재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