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대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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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에 존재했던 군주국이다.
2. 역사
1533년, 메디치 가문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일으킨 봉기는 결국 스페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황제 카를 5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피렌체의 공작으로 임명했고, 피렌체 공화국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친척에게 암살당한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2] 의 뒤를 이은 코시모 1세 데 메디치[3] 는 시에나를 정복하고, 국명을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수정했다. 이후 토스카나 대공국은 리보르노 항구를 영국과 스페인에 제공하는 등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전통적인 수공업과 상업이 뒤쳐지면서 토스카나는 차츰 쇠퇴했고, 귀족들은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토지를 더욱 구매하여 토스카나의 봉건화가 다시 이루어졌다.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가 된 피렌체는 1600년에 인구가 70,000명으로 상당한 인구였지만 정체된 상태였다.
메디치 가문은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함으로써 끊겼다. 잔 가스토네의 누나였던 안나 마리아가 대공위를 계승하게 하여 토스카나 대공국이 외국 왕실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강대국의 압력 속에서 무산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체스코 2세가 자리를 이었다.
이후 토스카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감투셔틀 비슷한 지위로 전락했다. 프란츠 1세, 레오폴트 2세 등 오스트리아 황제는 제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토스카나 대공을 거쳤다. 하지만 군주들이 토스카나에서 계몽주의적 선정을 폈기 때문에 반발은 덜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레오폴도 1세는 농노 등 봉건제도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히 폐기하고, 교역과 산업을 지원하며, 관료제도를 개혁했다. 또한 1786년 형벌개혁이 이뤄져 토스카나는 최초로 사형제도를 폐지한 국가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상공업이 부흥해서 길드가 다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1800년에 피렌체의 인구는 80,000명으로 여전히 적지 않았다. 1801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패배하자 토스카나는 영지를 잃은 파르마의 부르봉 공작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토스카나 대공국은 '에트루리아 왕국' 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스카나는 1807년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에 병합된다. 그리고 토스카나 대공 작위는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가 잠시 차지하게 된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시 대공 작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르마의 부르봉 공작에게 영지를 주기 위해 루카 공작 작위를 토스카나 대공으로부터 분리하여 수여하게 된다. 루카는 1847년에야 다시 토스카나의 일부가 된다.
1859년 리소르지멘토로 이탈리아 민족주의 열풍이 부는 가운데 사르데냐 왕국이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내자 토스카나는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일대 지역과 함께 혁명이 일어났고, 합스부르크 지도자들이 축출되었다. 이후 혁명이 일어난 국가들은 과도기적으로 중부 이탈리아 연방을 구성했고, 국민투표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과 병합했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져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가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