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선조관동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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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기타
4.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6호


1. 개요


晩翠先祖關東日錄. 조선시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던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盖國, 1548년 ∼ 1603년)이 1596년 1월 19일부터 1599년 2월까지 약 3년간 쓴 일기. 현재 영주시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김개국이 남긴 다른 고문적들과 함께 2003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으로 활약, 그 공적으로 1595년 예빈주부(禮賓主簿)에 특배되었던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盖國)이 1596년 1월 19일부터 1599년 2월까지 약 3년간 겪었던 매일의 일상을 붓으로 남긴 일기이다.
일기를 쓴 연도와 달은 광곽 밖에 적혀있는데 일기의 처음 부분에는 ‘병신정월(丙申正月)’로 표시되어 있다. 이후 일기의 날짜는 일기 본문과 동일하게 연속적으로 적고 있으나 약간 굵게 표시하여 구분해 놓고 있다. 특히 광곽 밖에는 해당 달 뿐만 아니라 김개국이 이동했던 해당 지역까지 확인해서 표시해 놓고 있다. 이를 통해서 김개국이 구체적으로 해당 날짜에서 활동한 지역이 어디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지역이 표시되고 있는 곳으로는 2월의 원주를 시작으로 평창, 청심대, 강릉, 삼척, 울진, 평해, 간성, 고성, 금강산, 통천, 흡곡, 금성, 이천 등이다
일기 내내 전란의 상황 속에서 겪은 비참한 내용과 상심을 자세히 토로하고 있다.

“회현(檜峴)을 넘어 안흥역(安興驛)을 지났는데 단지 쑥대밭의 아무것도 없는 빈터를 보았다. 운교역(雲交驛)에 도착하였는데 단지 두 셋의 띳집뿐이었다. 방림역(芳林驛)에 도착하니 평창(平昌) 수령이 나와서 기다렸다. 평창군의 피폐함을 심하게 말하였다. 늙은 몸으로 어려운 형편을 극복하려는 책임이 마치 임무를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여 불쌍하였다.”[1]

- 1596년 3월 1일

“오늘이 답청절(踏靑節)인데 답청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답설(踏雪)의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벼슬살이의 쓴맛을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 더욱 경험하게 된다” - 1596년 3월 3일

“호남이 한 번 왜적의 변란을 겪고서 인심이 환산되었다. 전주 남원에 바야흐로 천병(天兵)의 거진(巨鎭)(절제사)의 진영(陣營)이 있었는데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도로에 즐비하였다. 경작할 때에 머리에 이고 등에 짐을 지고 서로 서로 붙들고 손을 잡고 가는 피난민들의 상황이 눈에 가득하여 참담하였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짐을 자세히 보니 기울어진 상자에 텅 빈 섬이었다. 장차 어디에 가서 밥을 먹을지 알 수 없다.”[2]

- 1598년 6월

주로 임란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전라도충청도 지역의 주요 전황과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특히 유 제독이 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하했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충청도에 끼친 어마어마한 물질적 피해와 이로 인한 조선 농민들의 처참한 광경을 불만스러운 생각으로 적고 있다.

“천병이 충주, 직산, 공주 세 곳에 나누어 주둔하여 둔전의 계획으로 삼았다. 추수가 끝나고 백성들의 힘이 조금 쉬는 때를 기다려 양남(兩南)이 힘을 합쳤다면 만에 하나라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터인데 먹을 식량의 유무를 돌아보지 않고 가벼이 스스로 남하하여 겨우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운반하는데 온 힘을 다 사용하게 하고 소와 말이 모두 폐사하고 도로에 발이 부르트고 어깨가 헐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엎어지는 상황이 심각한데도 능히 큰 일을 성사시켰다고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다.”[3]

- 1598년 7월

“천조(天朝)의 장관(將官)이 서남쪽으로부터 모두 철회(撤回)하였고 일행의 마부와 말이 거의 삼백여에 이르렀다. 충청도의 일을 목도하니 참담하여 차마 보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저 남방은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간혹 접반사(接伴使)를 위하여 쇄마(刷馬, 지방에 배치했던 관청용 말)를 사용하는 것이 10번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으니 무슨 물건을 실어야 할지 모르겠다. 인민의 생활이 이 때문에 거의 다했다.”[4]

- 1599년 1월

그 외에도 천장(天將)이 서쪽으로 내려갈 때 사용할 마부와 말을 조정 또한 충청도에서 뽑아 보내라고 명령한 내용이 있었다고 하면서 충청도의 백성들이 장차 붙잡고 하소연 할 곳조차 없을 것이라고 동정하고 있다.

3. 기타


김개국은 이 외에도 같은 일기류 서적으로 만취선조예조일기를 남겼다.
원래 김개국의 종중으로써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위치한 연안김씨좌군사정공파영주문중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그의 후손 김향회가 영주시에 기증하여 영주시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2003년 4월 14일에 김개국의 다른 문적 147건과 함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4.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6호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연안김씨 좌군사정공파 영주 문중에서 보관해 온 전적류 및 책판이다. 김개국(金盖國)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연안, 자는 공제(公濟)·공징(公澄), 호는 만취당(晩翠堂)이고 박승임(朴承任)의 제자이다. 예조좌랑(禮曺佐郞),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옥천군수(沃川郡守) 등의 관직을 지냈다.

8종 3책 112점 32매이다. 시권(試券) 6매, 교지·교첩(敎旨·敎牒) 29매, 소지(所志) 32매, 호구단자 43매, 명문 1매, 상찰찬(上札贊) 1건, 책판 32매, 서책 3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서책 《관동일록(關東日錄)》은 김개국이 강원도도사를 지낼 때 있었던 임진왜란에 관련된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며, 《동문선(東文選)》과 《사마방목(司馬榜目)》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서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취당문집(晩翠堂文集)》 책판은 1774년에 판각한 것으로 시, 제문, 일기가 들어 있고 부록에는 가장(家狀),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없어진 목판이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제작 당시의 제작양식을 연구하는 데 꼭 필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03년 4월 1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


[1] 踰檜峴, 過安興驛, 但見蓬蒿沒墟, 且到雲交驛, 只有茅屋兩箇, 馳到芳林驛, 平昌倅出待, 昌倅極言其郡之殘弊, 見其 爲人老拙.[2] 湖南一經賊變, 人心渙散, 全州南原, 方有天兵巨鎭, 而流離之人, 連絡道路, 當此耕作之時, 負戴扶携, 滿目慘然, 詳視其 所負戴, 則只是傾筐空石也, 不知將就食於何地邪.[3] 天兵分住於忠州稷山公州三處, 以爲屯田之計, 待秋成民力稍歇之時, 而合勢於兩南, 則可以收效於萬一, 而不顧粮餉之 有無, 輕自南下, 使孑遺之民, 盡力於轉運, 牛馬皆斃於道路, 肩赬足繭人多顚仆而死, 如此而能濟大事, 未之聞也.[4] 天朝將官, 自西南盡爲撤回, 而一行夫馬, 幾至三百餘, 目視忠淸道之事, 慘不忍見, 況彼南方, 何以堪過, 或有爲接伴使 者, 用刷馬, 多至十餘, 不知載何物邪, 人民之生, 以此而盡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