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1. 개요
2. 상세
3. 예시
4. 관련 문서


1. 개요


봉건사회농가 혹은 양반의 집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하며 품삯을 받으며 일하고 사는 사람. 천민노비와는 달리 양인이 자발적으로 부유한 집에 들어가 임금과 숙식을 제공받고 일을 해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동지에 일년치 봉급을 한꺼번에 받는데 이를 새경이라 한다. 행랑아범, 행랑어멈과도 다른데 이들은 행랑채에 얹혀사는 더부살이들을 일컫는 말이라 머슴과는 다르다.

2. 상세



앞서 말했듯 노비와는 신분이 다르다. 타인에게 고용된 노동자이긴 하지만 신분상으로는 엄연한 양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때에 따라서는 조락한 명문가문 출신 양반들도 제법 있었다. 양반이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젊은 시절 잠깐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했다. 현재로 따지면 막노동 정도일 것이다. 고용주 일가에 대한 호칭도 연령에 따라 탄력적이었다. 가령 노비라면 그 집안의 나이 어린 소년도 '도련님'이라고 불러야했지만 머슴은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소년 쪽에서도 머슴이 나이가 많으면 당연히 존대했다. 머슴을 자기 딸이랑 혼인시키고 하는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돌쇠야, 이리 와서 쌀밥 좀 먹으려무나."할 때의 돌쇠나 마당쇠 같은 쇠자 돌림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머슴으로 착각하는데, 이들은 천민인 노비다. 머슴일 경우엔 같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부터 봐온 사이라든가 하는 특수한 관계가 아니면 고용주 집안의 젊은 여성이 함부로 하대할 수 없었다.
그 집에 나이든 노인이 없을 경우 그 집에서 가장 잘먹을 뿐만 아니라 농번기 같은 경우 유일하게 쌀밥을 먹는 존재일 수도 있었다. 머슴은 고된 육체 노동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잘 먹어야 했고 고용주가 같이 중노동을 하지 않는 경우 머슴만 쌀밥을 먹고 집안의 나머지 사람들 심지어 가장조차 잡곡밥을 먹었다 하는 경우는 아주 흔했다. 토지를 가지고 있지만 집안에 농사일을 할 장정이 없는 경우는 거의 대부분 머슴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게 되는 데 이런 경우 그 집안에서 머슴이 밥을 가장 잘 먹었다. 식사가 나쁘게 나오면 다음 해 부터 머슴을 고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잘먹여야하는 점도 있었다.[1]
머슴은 중종 대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도 언급되는 등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갑오개혁 이후 많아졌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노비들이 해방되자, 양반가나 시골의 대지주들은 일을 시키기 위해 머슴을 고용했고, 많은 노비들도 머슴으로 전환되었다. 구한말~일제시대에는 농업노동의 주요 원천이었으며[2], 대개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인 1960년대쯤까지 머슴을 흔히 볼수있었으나[3][4][5], 1960년대 말 후로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로 노동력이 몰리면서 머슴의 수가 줄기 시작, 1970년대 후반에는 농업노동력 전체의 1% 남짓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1980년대에는 농업노동력 전체의 0.5% 이하로 줄어들면서 소멸되었다. 현재는 농촌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과거 머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3. 예시



4. 관련 문서


[1] 이것이 유래가 된 단어가 '''머슴밥'''이다. 간혹 나이많으신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걸 들을수 있는데, 주로 '''큰 밥그릇에 하얀 쌀밥을 고봉밥으로 채운걸''' 말한다.[2] 1930년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만2908명에게 머슴 53만7432명이 고용되었다.링크[3] 광복 후에도 머슴은 존속되어 1950년에는 남한에 27만578명의 머슴이 있었다. 심지어 1960년에도 머슴의 수가 24만 4557명에 달할 만큼, 여전히 많았다.링크[4]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무렵에도 여전히 시골에서는 머슴들이 많았다. 이 머슴들은 공교롭게도 토지 분배를 받지 못해서 불만이 높았는데, 때마침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머슴들한테도 땅을 나눠준다고 약속하자 많은 수가 북한군에 협력하였다. 링크 아울러 한국전쟁 무렵, 황해도 신천군에서도 빈민층과 머슴들이 북한군에게 협력했다고 한다. 링크[5] 이승만을 찬양하는 뉴라이트 같은 극우 지식인들은 1950년 3월에 있었던 토지개혁 때문에 남한에 신분제가 없어지고 사회가 평등해졌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토지개혁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60년에도 24만 명이나 머슴들이 있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남한의 머슴을 없앤 결정적인 원인은 토지 개혁이 아니라,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작된 공업화로 인해 도시로 일자리를 구하러 머슴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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