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1. 개요
봉건제는 토지를 통해 주군과 봉신(封臣) 간에 관계가 형성되는 제도를 말한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대비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본 문서는 봉건제도, 봉건제, 봉건주의 등으로 번역되는 서유럽의 Feudalism 위주로 설명하되, Feudalism 이 한자어로 봉건제로 번역된 이유 및 세계의 유사 Feudalism에 대해 설명한다.
2. 서유럽의 봉건제
2.1. 발생
서양에서는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beneficium)가 결합하여 봉건제도(Feudalism)가 나타났다.
고대 게르만족은 자유민은 곧 무장을 갖춘 전사로 자기 자신과 일족을 지키는 자였다. 게르만족의 관습에서는 이러한 자유민들이 주군을 모셔 종사가 되고, 주군이 전투력이 필요하면 종사들을 소집하여 싸우게 하는 대신, 그 대가로 전리품을 분배받는 종사제도가 존재했다. 이러한 종사제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전사 계층이 허스칼이다.
한편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AD 9세기, 서유럽에 샤를마뉴 제국(Carolingian Empire)이 탄생하자 황제가 종사(봉신)들에게 봉토(fief)를 '분배'하면서 봉건제도가 탄생했다.
사실 이 분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황제가 땅을 '나눠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정도. 개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지역의 유력자인 게르만 부족장이 샤를마뉴 제국에 항복하면, 그 부족장이 다스리던 땅을 황제가 가지고, 황제는 부족장의 군사적 충성을 대가로 다시 그 부족장에게 받았던 땅을 그대로 '하사'했다. 즉 충성을 대가로 자치권을 그대로 보장받은 것. 이러한 서양의 봉건 제도에서는 주군과 봉신이 원래 똑같은 자유민으로서 원칙적으로 신분이 평등했다. 따라서 주군과 봉신이 서로 맹세-황제의 종사인 봉신들은 주군에게 군사적 의무를 져야하고, 주군인 황제는 봉신들의 이권을 유지 시켜줘야할-를 지켜야 할 신의성실의 의무를 가진 계약 관계를 토대로 봉건 제도가 수립된 것이다. 이 점이 동양의 봉건 제도와는 다른 역사를 갖게 된 원인이다.
이후 카롤링거 제국이 계승자들은 자기들끼리 땅 갈라먹는데만 몰두하고, 바이킹과 헝가리인들의 침입 등에서 아무런 손을 쓰지 않자,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프랑스도 카롤링거의 후손이 끊겨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카페 가문은 겨우 파리의 백작에 지나지 않아 각지의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1]
원래 각지의 자유민들은 황제 혹은 왕을 주군으로 모시는 자유민 전사였지만, 황제나 왕들이 야만족의 침공에 손을 쓰지 않자, 차라리 더 가까운 세력가들과 사적인 봉건 계약을 맺어서 자신을 의탁하는 길을 선택한다. 지방 귀족들 역시 게르만의 종사제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유지 및 은대지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영역제후령 또는 자유 토지령을 형성해서 영주로 변화하여 지방민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영주(중세) 항목 및 봉토 항목, 작위/유럽 항목, 농노제 항목도 참조.
이러한 지방 권력들은 군주권과 로마보편법을 무시한 비합법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약해진 군주권은 이러한 비합법적 지방 권력의 확산과 성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서 영주들과 귀족들은 무엇보다 무력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군사력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각지에서 무기와 갑옷, 공성 및 수성 기술, 축성 기술, 전술이 발달하게 되었고 각 지방은 사실상 각각의 군사적 소국가가 되어갔다. 당시 문헌 자료들이 봉신을 의미하는 vasus와 전사를 의미하는 miles를 동의어로 사용하기까지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군사적 조력은 봉건제의 일부, 충성 맹세로 인해 생성되는 의무가 되었다.
초기의 성주들은 주로 목책과 참호로 둘러싸인 망루로 이루어진 초보적인 성채를 건설했지만, AD 11-12세기에 돌로 지어진 성채들이 널리 퍼지면서 봉건 제도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9세기 이후부터 진행된 이 봉건제도의 발전에 등자과 중무장 기병의 탄생이 얼마나 연관이 있다는 주장도 일각에 존재한다. 등자가 발명되어 중무장 기병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중장기병의 무력이 급상승했고, 황제를 위시한 영주들이 봉신들에게 중무장 기병을 부양하기 위한 땅을 분배한 것이 봉건제도가 진행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를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고 일컫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꽤 유명한 떡밥. 하지만 서양 봉건제의 시작 자체가 '''밑에서부터 권력이 모여 위로 올라가는 형태'''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좀 더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원인이 존재했고 등자와 중장기병의 탄생은 어느 정도의 원인이 됐을 뿐 결정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기는 어렵다.[2]
2.2. 발전
사실 봉건제의 발생과 발전 양상은 같은 카롤링거 제국 지역에서도 국가별로, 지역별로 차이가 크다.
프랑스의 경우는 카롤링거 왕조의 단절로 카페 왕조가 들어서자 왕의 권위가 한방에 대추락한 덕에 위에서 설명한 왕의 실권이 거의 없는 전형적인 봉건제가 바로 성립했다. 카페 왕조의 근거지인 북부와 남부의 거리가 상당해서 북부에 비해서 남부에 더 지역 영주들의 불법적인 난립이 성행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은 카롤링거 가문의 제위가 단절됐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고, 교황에 의해 대관 받은 로마 황제라는 권위는 제후들의 난립을 상당히 방지하였다. 공작, 백작 등의 작위가 황제가 내린 관직이라는 명분이 오랫동안 살아있었고 그 명분을 바탕으로 황제는 여러가지 실권을 행사했다. 황제는 드문드문이나마 제국의회를 소집했고, 제국 의회에서는 제국 전체에 통용되는 국가 공법을 입법할 수 있었다. 또한 프랑크족의 자유민 배심원 법원이나, 황제가 파견한 법관에 의한 법원 등이 유지되었다. 한편 제후들이 가진 사유토지와 영지도 대강이나마 구분되었고,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 같은 경우는 하인리히 사자공의 거대한 공작령을 몰수한다던가, 듣보잡 백작이었다가 벼락출세한 루돌프 1세는 보헤미아 왕인 오타카르 2세에게서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삥뜯는다던가 충분한 권한을 행세했다. 다만 제후들의 사유토지도 무지막지 넓은 경우가 많아서(...) 그게 자체로 영역제후령을 이뤄 영방국가로 변하기도 했다. 흔히 유럽사를 프랑스사 중심적으로 이해해서 '중세에는 봉건제로 왕의 실권이 약했고 중세 이후에 절대왕정이 열린다'고 일컫지만, 신성로마제국의 분권화는 오히려 중세를 거치면서 서서히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왕권 차이는 징집법을 예시로 들어서 확인할 수 있다. 국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예로 들자면, 프랑스의 경우 그 병사들은 봉토를 수여받아 그 봉토에서 농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해당 지역의 영역제후가 자기 필요를 위해서 소집한 가신들이었지 왕의 명령으로 소집된 군은 아니었다. 반면 독일이라면 그 요새 주변에 사는 자작농이 제국 공법에 따라 1년에 40일의 복무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이 경우도 직접 명령권자 자체는 해당 지역의 변경백이지만, 변경백 직위 자체가 황제가 임명한 작위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저 자작농은 명목 상이나마 황제 휘하의 제국군이었다.
11세기경부터 카롤링거 왕조 적부터 내려왔던 보호의 위탁 의식, 즉 봉신 맹세 의식이 3단계로 자리잡았다.
- 첫 번째로 신하가 되어 따를 것을 맹세하는, 봉신이 양손을 군주의 두 손 사이에 집어넣고(immixtio manuum), 항상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복종과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volo)을 했다.
- 두 번째로 성경 또는 성유물을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
- 마지막으로 군주의 입술 또는 칼에 입맞춤(osculum)을 했다. (굳이 입술에 하진 않았겠지만) 봉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의식은 양도한 봉토를 상징하는 한 줌의 흙덩이와 나뭇가지, 또는 홀을 군주가 수여하는 것으로 끝났다.
봉건제를 이루는 토대들을 오직 관습법과 구전에 의존해서 수백년이나 유지했던 프랑스와 달리, 이탈리아는 봉건제를 이루는 제도들이 이르게 입법 및 성문화 되었다. 11세기 초 밀라노의 군주였던 대주교 아리베르토(Ariberto da Intimiano)휘하의 봉신들과 그들의 배신(陪臣)[3]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아리베르토는 롬바르디아 철관을 신성로마황제에게 주는 대가로 밀라노 교구의 우월성을 인정받은 대영주로, 당대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를 제일 크게 위협하는 라이벌이었다. 배신들은 중간 봉신들에게 수여받은 토지를 사유재산으로써 세습받는 것을 요구했고, 반면 아리베르토 휘하 봉신들은 토지가 당대에만 수여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배신들은 동맹을 조직해서 반란이 계속 확대되었고, 결국 황제가 직접 개입하게 된다. 황제 콘라트 2세는 아리베르토를 견제하기 위해 하급 귀족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고, 1037년에 교회가 봉신들에게 수여한 봉토는 세습이 가능하다는 법을 입법한다. 여기서 봉토에 관한 칙령(Edictum de beneficiis) 또는 봉토법(Constitutio de feudis)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이런 성문주의 경향으로 인해, 상기한 봉신 맹세 의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봉신 계약에는 저런 거창한 의식보다는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양상은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카롤링거 왕조 권역 또는 영향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우리가 익히 알듯 유럽은 스칸디나비아나 동로마, 폴란드 등 다른 국가들이 있고 이들의 봉건제는 또 다르다. 이슬람의 제도도 봉건제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1000년을 이어간 중세의 모든 정치 체제는 발전 과정에 따라 비슷한 요소들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봉건제라 규정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2.3. 특징
설명이야 주군과 봉신관계라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권력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 모아 올라간 군사력과 정치 제도가 완전하게 결합한 형태로써 소규모 무장 집단에 의한 힘의 균형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출현한 제도다. 생산력이 극히 부족한 상황이므로 잉여 생산물과 화폐로 기능하는 관료 제도가 발생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서구의 봉건제는 봉건 제도 이후 또는 그 이전에 출현한 왕과 왕의 이름으로 기능하는 관료 집단이 통치하는 '제도'가 아닌, 왕, 귀족, 기사라고 불리는 무장집단들 간에 형성된 어정쩡한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상황'''에 더 가깝다. 서양 봉건제에서의 상하 관계란 결코 쌍무적 계약 관계나 충성 관계 같은 간단한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 황제/왕과 대봉건 봉신(강력한 봉신)이 있다면 대봉건 봉신 휘하의 소봉건 봉신(영지를 가진 자작, 남작 등)이 있고, 또 다시 도시의 코무네나 장인 조합, 주교령, 실질적 주교령, 수도원 등 각지의 세력이 법적으로, 사적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다양한 관계를 생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한 기사의 입장을 서술하면 이렇다. 기사 하나가 여러 영지를 소유했는데 그 영지마다 각기 다른 주군과 계약을 맺어 여러 주군을 동시에 모시거나, 혹은 영지마다 지위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주군이 여럿일 경우, 그 주군들이 서로 싸우거나 동시에 소집령을 내리는 경우도 있기에, 두 명 이상의 주군이 동시에 군사적 봉사(군사 지원)를 요청할 경우 한쪽 주군에게 먼저 간다는 내용의 '특정 영주에 대한 충성 서약(liege homage)'이라는 게 도입될 정도였다.
이런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귀족들의 상하관계는 무척 복잡하게 꼬였다. 기사였던 레프고의 아이케(Eikie von Repgow)는 저서인, 작센의 관습법을 서술한 작센의 거울(Sachsenspiegel, Specchio sassone) 에서 봉건제가 6개의 등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표현했다. 왕이 1등급이고, 주교와 수도원장, 수녀원장이 2등급, 평신도 제후가 3등급, 자유 영주가 4등급, 수사판사와 자유영주의 봉신 또는 그러한 자격 보유자가 5등급, 봉신의 봉신들이 6등급이었다. 이것만 보면 마치 상위 등급이 하위 등급의 상관자, 명령권자처럼 보이지만 이 등급은 정치적 제도 또는 상하관계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회적 계급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한국사에서 조선 시대에 선비가 중인보다 윗등급이지만 선비가 의사나 역관에게 바닥을 기라고 명령할 권리는 없었던 것과 같았다. 왕-봉신-봉신의 좁은 국면에서 보자면 상하 관계가 성립되긴 하지만 명령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소급적 봉신(봉신의 봉신)에 관한 관계 또는 의무를 규정한 문서는 그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도 봉신의 봉신에 대한 명령권이나 충성의 강요를 법적으로 실행한 예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상 자신의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봐도 무방한데, 1330년대의 한 법학자에 의해 공식화된 표현인 "누군가가 당신에게 나의 봉신의 봉신이 내 사람이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시오"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왕이 국가의 최상위 등급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실질적인 권력은 무척 제한되었다. 말하자면 왕은 각 영지들의 대표인 동시에 좀 큰 영지를 가진 대영주 정도의 위상 정도이다. 즉 1:1로는 다른 영지를 발라버릴 수 있겠지만 좀 힘센 영주 서넛이 뭉치면 힘든 수준. 그리고 1:1 뜨고나면 이미 만신창이라서 다른 대영주한테 발린다. 그 예로 카롤링거 왕조 후기~카페 왕조 초기 프랑스 국왕은 아키텐이나 노르망디 공작 등을 감히 건드리지 못했고, 신성로마제국은 반란으로 황제가 영주에게 무릎을 꿇거나 감옥에 갇히는 등 많은 수모를 당했다.
봉건사회 동안에는 '싸움은 귀족의 일'이라는 관념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프랑크 시대의 '자유민은 곧 농민이자 전사'라는 관념과 징집법도 동시에 존재했다. 때문에 중세의 전투가 기사들만의 싸움이었을거란 인식과 달리 일반 자유민들도 징집되어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기사들의 전력이 워낙 막강했을 뿐더러, 대규모 보병을 위한 대규모 군수물자를 멀리 나를 교통 능력이 부족했던 관계로, 봉건 계약에서는 거의 대부분 기사의 동원만이 명시되었다. 물론 보병은 어떤 이유에서건 계속 필요했던 관계로 기사가 대동하는 종사들, 직할령이나 전장 근처 현지에서 징집한 자유민, 그외 교회에서 동원한 자유민 등이 보병으로 활용되었다.
봉건 사회에서는 타유(taille)세라는 독특한 세금이 발달했다. 원래는 '선물', 혹은 '부조'라는 뜻이었다. 주군이 돈을 갑자기 많이 써야하는 등의 일이 있을 때 가신들이 주군을 위해 부조의 성격에서 기부하는 것이었다. 주군의 자식이 결혼할 때, 영주가 포로가 되어서 몸값을 내야할 때, 영주가 토지를 강제로 구매해야할 때 등의 상황에 적용되었는데, 유래 상으로는 기부였으나 세금으로 정착해버린다.
사회적 상황이 아닌, 제도의 관점에서도 서양 봉건제를 규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샤르트르의 주교 퓔베르는 아키텐의 기욤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신은 무엇보다 자신의 군주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조언과 원조를 줌으로써 선행을 베풀어야만 하고, 군주는 그의 보사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굳이 비틀어 보자면 군주가 봉신의 충성에 보답할 의무를 성실이 이행하지 않는다면, 봉신은 군주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던 대응할 권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백년전쟁 때 플랑드르나 부르고뉴 공작 등이 프랑스 왕에게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왕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러한 명분이 통했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제를 군주와 신하간의 관계로 이해하려고 들면 동아시아에는 그 유사한 정치체제도 없었기 때문에 동아시아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봉건제 내에서 왕에게 적대적인 가문들은 비밀도 아니었고 반란도 수없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적인 가문도, 왕도 자신들이 봉건계약관계로 주군과 신하인 것은 인정햇으며 군사력까지 동원한 내란급의 역모가 실패해도 가문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고 당사자마저도 손쉽게 풀려났다.
왜냐하면 내란을 진압한 후 상대가문이 아무리 미워도 작위박탈. 혹은 처형을 선택하면 내전에서 자신에 편에서서 이기게 해준 모든 봉신들과 자신의 아들.형제들마저 그것은 말도 안되는 폭정이라고 생각하여 반감을 품을 것이고, 봉건적 질서를 무시하는 왕으로서 곧 자신의 권위와 생명마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반면 역모가 성공해 국왕군을 격파하고 왕을 포로로 사로잡았다할지라도 내란군의 대의명분에 따른 안건 몇건을 강요할 수 있을 뿐. 국왕을 살해하거나 왕조를 갈아버리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서양사를 읽다보면 수많은 군주들이 신하들에게 격파당해 포로로 억류되는 일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정치체제에서 역모는 곧 사형과 집안말살에 해당하는 큰 범죄였고 만약 역모가 성공했다면 후일을 걱정해서 왕을 하야시키는 것은 물론 왕의 일가친척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인 것과 비교하면 크나큰 차이가 있다.
오히려 현대 회사의 이사회와 유사하다고 하면 이해가 쉽다. 프랑스사는 파리 백작 본인 지분 3%와 일드 프랑스 공작령내 봉신들의 친척 지분 8%+ 부르봉 공작등 우호지분 20% 를 가진 대주주이니 사장인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반면 프로방스 백작은 지분이나 명분으로는 밀리지만 마르세유 백작 5%와 친척,우호지분등을 가지고 있는 유력임원인 대주주 상무가 된다. 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는 없지만 둘다 서로 사장과 사원간의 관계라는건 인정한다.
다시말해 주군과 신하라기보다는 말단 대리급들까지 일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 이해하는게 오히려 이해가 쉬우며 이들은 직계라인에 따라 총무과 과장인 프로방스 백작에게는 충성하나 기획팀과 사장에 대해서는 반감을 공유한다. 이런 시스템을 비교하는게 터무니 없지않은 것이 이 이사회 시스템의 원본이 자금을 가지고 지분을 평가한다는 것만 다를 뿐 중세 봉건제의 법률을 기본으로 이탈리아에서 발달했기 떄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회에서 임원들간 찬반이 격심하게 갈려서 내전이 발생하는게 이사회 표결 수준으로 종종 일어났고 그에 따라 사장이 이기건 상무가 이기건 안건만 조정할 수 있을 뿐 안건과 직접 연결되어있지 않은 지분의 변경은 위법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이를 거스르는건 대주주인 본인 지분부터가 위협받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2.4. 붕괴
중세 말부터 진행된 서유럽의 중앙집권화 경향 및 사회문화적 변화에 의해서 근세에 이르면 고전적인 형태의 봉건제는 붕괴된다.
- 화폐경제의 발달 : 기본적으로 봉건제와 장원제는 화폐 경제 발달의 미비로 현물 조세를 중앙까지 옮기기는 어려우니까, 현지에서 나오는 식량/부역/병역을 관료에 대한 급여이자 행정 비용으로 지급하는 성격이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함으로써 돈을 통한 조세를 중앙으로 걷을 수 있게 되자 저런 봉토 지급도 사라지며, 영역제후 귀족들에게 걷지 않았던 조세도 걷기 시작한다.
- 장원의 붕괴 : 화폐 경제와 상업과 해외 교역이 발달하자 토지에만 기반한 경제를 유지하는 영주들은 상대적으로 재정난에 시달린다. 사유재산의 성격이 강했던 장원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팔려나가거나 분할, 임대되는 일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 용병의 등장 : 기사 신분이 세습 계급화 되어서 군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점점 떨어지는데다가 비용이 높아 비효율적인 봉건 가신들의 역할을 용병이 대신하게 된다.[4]
- 법학, 관료제의 발전 : 특히 프랑스의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한 법학의 발전은 전 유럽에 법치주의를 전파했다. 게르만의 종사제 관습에 기반해서 지역권력을 휘두르던 영주의 입지는 갈수록 줄었고, 농민들은 관습에 따라 임의로 부과된 의무를 철폐하고 문서화된 의무 증서에 따라서 세금을 매길 것을 요구했고, 국왕은 영주가 휘두르던 재판권을 자신이 파견하는 관료와 법관에게 수여했다. 백년 전쟁 시기 동안에만 프랑스에서는 세네샬, 바이이(대법관) 등 다양한 직위의 관료가 신설되었다.
- 민족, 국가 의식 등장: '영역'의 성격이 강했을 뿐 주권-국민-영토가 결합된 '국가'라는 개념이 부족했던 중세적 관념이 타파되고 근대적 국가 의식이 생겨났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중세 동안에는 제국이나 왕국조차도 '사람 딸린 토지'로 영역이나 심지어 사유재산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데, 그런 개념이 종결되는 것이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을 통해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
2.4.1. 영국
영국은 윌리엄의 정복 이래로 상당히 강한 관료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둠즈데이 북이 그런 문서화된 관료제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백작과 공작 등 샤를마뉴 봉건관료제도가 이식됐음에도 불구하고, 백작은 백작령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재판 수입 가운데 일부만을 받는 것과 징집된 군인들을 지휘할 권한 뿐이었다. 백작령에서 재판권, 군사징집권, 징세권은 국왕의 대리인인 셰리프(sheriff)가 행했다. 이 셰리프들은 징세청부업자처럼 국가에 선금을 지불한 다음에 그 대가로 직위를 사는 형태였다. 셰리프를 맡는 주 계층은 기사이거나 남작 정도의 영지를 가진 하급 귀족이었다. 이들은 상당수는 세습에 성공했으나, 국왕이 임의로 물갈이 하는 것도 쉽게 가능했다. 군사에 대해서 징집권은 있는데 지휘권은 없으니 반항할 힘이 없었던 것(...).
유럽 본토의 봉건제는 (마치 조선의 과전법처럼) 봉급으로써 행정 구역의 토지 일부에 징세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중앙 정부가 맛이 가자 행정군사관들이 행정 구역 전체를 소국가처럼 다스린 것이 시작이었으나, 영국은 재판군사징세권을 전부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료에 의해 통제하다보니 영국의 봉건제는 오직 '군사적' 부분에만 치중했고, 시골의 조그만 남작령 장원 하나하나에도 최소한 몇 명의 기사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계약이 아닌 중앙정부의 규정으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제'는 정복왕 윌리엄부터 이미 둠즈데이 북으로 청사진이 만들어졌고, 그의 아들인 헨리 1세 때에 이미 틀이 잡혀졌다.
실제로 영국왕이 영국 내부의 영지 상속으로 골머리를 썩거나, 대영지를 가진 영주가 독립을 시도하는 것 같은 지방분권적으로 나아갈만한 사건 자체가 노르만 정복 이후의 영국 역사에 없다. 영역의 절반 가량이 상속만으로 뜯긴 프랑스랑 대조적이다. 심지어 귀족들에게 세금 걷기가 어려웠던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달리 초기부터 귀족들에게 세금을 걷었다. 귀족들 전체가 연합해서 국왕에게 세금 적당이 뜯어가라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 자체가 이런 맥락 속에서 가능했다.
카르타(헌장)에 대해서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은 저러한 카르타가 일부 영지, 일부 도시 등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흔했으나 영국은 '귀족을 포함한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마그나 카르타가 존재했다. 의회 역시, 게르만족의 풍습으로써 전 서유럽에서 항상 행해졌으나, 지방 단위의 의회가 아닌 국가 단위의 대의회가 꾸준히 열린 것은 영국 뿐이다. 국가 조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권력을 두고 싸울 때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를 걸고 싸운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윌리엄 정복왕 이래로 영국은 항상 통일된 국가 관료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2.4.2. 프랑스
영국과 백년전쟁을 겪으면서 프랑스도 비슷하게 영지 단위를 넘어선 단위의 국가, 국민, 애국심 등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카페 왕조 이래로 왕권이 바닥부터 시작한 입장이라서 오히려 중앙집권이 가능했던 면이 있다. 샤를마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봉건제에 의한 관료제, 즉 공작과 백작을 중심으로 한 봉건관료제에서는 프랑스 왕은 그냥 백작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아서 바로 동쪽의 신성로마제국 같은 강한 왕권을 휘두르는 것은 꿈도 못 꿨다. 그래서 프랑스 왕들이 선택한 방법은 샤를마뉴식 관료제가 아닌, 직할지 관료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백작령이나 공작령이 후계가 단절되어서 왕에게 돌아갔을 때, 혹은 세습을 통해서 영지를 획득했을 때 프랑스 왕들은 새로운 백작이나 공작을 임명하는 대신 왕실 직할지로써 계속 다스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바이이)나 지사(세네샬) 등 국왕이 임의로 임명하는 '직할지 관료' 조직이 발전했다.
흔히 프랑스의 중앙집권 과정을 프랑스 통일이라고 표현하나, 사실 이러한 점진적인 합병은 통일이라기보다는 얼기설기 긁어모아 이어붙인 형태에 더 가까웠다. 프랑스 왕권이 워낙 시궁창이다보니 각 영지마다 다른 법이 마구 생겨났는데, 프랑스 왕은 저렇게 긁어모아진 영지들의 법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 경향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왕국 전체의 의회, 즉 삼부회가 자주 열리지 않은 것은 역설적으로 이 프랑스 왕의 권력이 매우 미약한 것에서 기인한 것인데, 왕권이 워낙 약하니 왕국 전체에 통용되는 법을 만들 수가 없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왕국 전체의 의회가 아닌 각지의 지방 의회는 꾸준히 계속 열렸다.
중세 말~근세 초기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가속화 시킨 것은 백년전쟁이 원인이라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전쟁의 난리통에 기사들과 귀족들이 대거 갈려나갔는가 하면[5] , 농민들이 흩어지기도 했다. 백년전쟁 자체로 인한 피해가 여러모로 장원을 무너뜨리는 데에 한몫 했다.[6]
2.4.3.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도 경제 활성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으며, 마을과 도시가 커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봉토를 추가로 내리기보다는 그냥 돈으로 세금을 걷고 월급을 주고 관료를 만드는 등 프랑스와 똑같은 방식의 중앙집권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은 샤를마뉴의 봉건관료제의 고향이다보니 그 구습이 해체되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도 저 샤를마뉴식 봉건관료제의 틀 내에서 개혁을 더하거나, 귀족-교황-황제의 균형속에서 주도권을 잡아서 권력을 일시적으로 강화하는 것만 가능했을 뿐 근본적인 개혁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선거제로 인해 황제 가문이 획획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황제들은 제국 전체의 중앙집권을 추구하기보다는 그냥 자기의 세습 가능한 직할지 내에서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때문에 봉건제의 지방분권 경향, 즉 관료 지위가 토지와 일체화되는 경향은 계속 진전되었고, 결과적으로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으로 발전한다.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이란, 즉 영지를 가진 각지의 제후별로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에는 성공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롬이라는 제국 전체로는 중앙집권 이룩에 실패한 것이고.
이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 현상의 결과로,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정치적 실체로써 제국은 사실 상 소멸하게 된다. 명목 상의 황제위를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은 직할지인 오스트리아 등지를 다스리는데에 집중하게 만든다.
2.4.4. 이탈리아
일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리소르지멘토 이전까지 딱히 '이탈리아 왕'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7] 물론 온갖 공국들과 백국, 변경백국 등이 난무하지만, 다들 신성 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교황, 프랑스 국왕 등 각각 충성하는 주군 자체가 달랐으며, 여기에 따라서 해당 영지의 특징이 갈렸다.
그나마 좀 독특하고 파고 들 만한 게 통일 직후의 시칠리아 왕국인데,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이 신성 로마 제국과 아랍 세력을 아니꼽게 여기던 교황의 사주를 받은 노르만인들에 의해 궁극적으로 '시칠리아 왕국' 으로 통일되고 난 뒤, 그 안에서 또 땅을 나누어 받은 귀족들에 대한 언급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로저/루지에로 2세는 처음에 시칠리아 왕국을 통일할 때부터 교황을 등에 업고 월등한 권력을 휘두르며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봉건제하면 생각하는 왕과 영주들 간의 팽팽한 대치관계 같은 것은 없었다. 왕, 상급 영주, 하급 영주들 간의 이해관계도 처음부터 돈에 의한 것으로 출발했다. 시칠리아 섬 자체가 워낙 비옥한 땅인 데다가 지중해 날씨 덕분에 생산량이 차고 넘치는 것도 한몫 했다.
2.4.5.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레콩키스타'''라는 특수 상황이 결속력을 강하게 해주었다.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마지막 보루로 삼은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그 근원이었고, 그에 따라 프랑크 제국식 행정에 근원을 두는 봉건 제도는 애초에 발전하지도 않았다. 백작(count)과 공작(dux)는 존재했으나 그것은 로마법을 공통된 근원으로 둔 것 때문에 이름이 겹친 것이지, 프랑크 왕국의 것들과 성격이 같지는 않았다.
왕 밑에 토지를 하사받아 다스리는 귀족들 밑에 또 토지를 하사받아 다스리는 등의 체계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지만 백작 이상이라 하더라도 비세습인 경우가 더러 흔하게 있었기에 서로 이런 저런 세력을 가진 영주들이 팽팽하게 대치한다든지 하는 구도 자체가 나오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정년퇴직 없는 도지사에 더 가까웠다[8] . 물론 독립하겠다고 난리친 영주들이나 세력면에서 라이벌을 이룰 만한 다른 영지나 독립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는 결혼 동맹, 상속 문제에 따른 암투, 그리고 전쟁이 가장 큰 주제가 된다.
게다가 레콩키스타가 활발히 진행된 중세 동안에는 유난히 기사수도회의 활동이 도드라졌으며, '기사 계층'에 대한 수요는 주로 이들이 가져갔기에 흔히 생각하는 '왕/귀족-기사-피지배계층' 피라미드 자체가 그렇게 견고하지 않았다.
3. 유사 봉건제도
봉건제도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의 기준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단순히 '행정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세금을 부여하지 않는 토지를 바탕으로 사적으로 자율성이 높은 집단을 만들어두는 제도'를 봉건제로 본다면, 봉건 제도와 유사한 형태는 중국, 로마, 조선 등 고도의 관료제를 발달시킨 나라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장 조선에는 과전법이 있었고, 명청시대 중국에는 실제로 봉건 왕이 존재했다. 청나라의 봉건왕이 사고를 친 것이 바로 삼번의 난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대다수 국가들은 모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가 존재했고,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봉건제와 유사한 지방 분권 체제가 존재한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해서 '''개인의 친분'''에 따른 유사 봉건제가 유지되기도 했는데,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로마-게르만 제국인 카롤링거 왕조에서 발달한 '개인과 개인 간의 계약'에 바탕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봉건제로 본다면, 프랑스-독일-이탈리아-영국을 제외하면 전세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중세 유럽사의 거장인 마르크 블로크의 경우 후자에 더 무게를 두어서, 카롤링거 제국 + (윌리엄에 의한 영국 정복 이후)영국 외 타 지역에서는 비슷한 제도조차 발생하지 않았다고 본다.
현대 학계에서는 전근대 국가 특유의 지방분권적 제도를 봉건제로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학계에서는 feudal 를 번역할만한 마땅한 대체 번역이 없기 때문에 feudal 을 '봉건'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봉건이란 말이 단순히 '구시대적 사회상'을 부정적으로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만들고 있다.
봉건이라는 단어를 구시대상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 사회 경제 사학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특히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알려진 백남운 등은 '아시아적 봉건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조선 시대가 이 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쉽게 말해 조선의 지주-소작농 관계를 농노제를 비롯한 서양의 봉건제에 끼워맞춘 것에 가깝다. 이는 애초에 서양의 마르크스주의 유물 사관[9] 을 한국사에 도입하여 한국사의 보편성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지만, 한국 사학에서 조선을 더 이상 봉건 국가로 설명하지 않게 된 지금도 이러한 표현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심지어 교과서조차도 그런데, 구 국사 교과서를 비롯한 한국사 교과서들이 조선 자체를 봉건 국가로 설명하지는 않으면서도 조선 후기 동학 농민 운동의 성격에 대해선 항상 '반(反)봉건'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링크) 또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봉건적'이란 말에는 본래 의미의 봉건제도에 관한 뜻 외에도 '신분이나 지위 등의 상하 관계에 따른 질서만을 중히 여기어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란 뜻이 있다. 물론 이것은 봉건제도에서 유래한 '봉건적'이란 말이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오용/혹은 마르크스식으로 사용되면서 그런 의미가 굳어진 것을 사전편집자가 포착하여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전에 그렇게 적혀있으니 써도 되겠네?'라는 식으로 교과서나 다른 책들에 싣는건 인과관계의 앞뒤가 뒤바뀐 아이러니한 일.
굳이 '구시대적 사회상'을 가리키는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봉건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전근대' 또는 '전근대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물 사관을 바탕으로 한 북한 사학은 지금도 조선을 '리조봉건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식으로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나라들이 모두 봉건 국가이긴 하지만, 조선에 대해서는 아예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이기에[10] 이때의 '봉건'도 정확한 의미의 봉건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봉건가정', '봉건유물', '봉건잔재' '봉건통치' 등 봉건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 일부가 북한어로서 등재돼 있는데, 대한민국 표준어에서는 한 단어가 아니므로 한국식 맞춤법으로는 '봉건' 다음을 띄어 써야 한다.
4. 동아시아의 봉건제도
4.1. 중국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주나라가 사용한 제도다. 이를 방국에 봉지를 내려 나라를 이룬다는 뜻으로 '봉방건국(封邦建國)'이라 했고, 그를 축약해 '봉건(封建)' 제도라고 불렀다. 즉 봉방건국(封邦建國)제도의 약어이다.
천하의 주인인 천자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를 봉(封土)하여 나라를 세우게 한다(建國)는 개념이다. 왕은 중앙의 직할지(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세~근세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여지는 Feudalism 통치와는 전혀 다른데, 사실 이 봉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주나라의 땅이 아닌, 화하족이 아닌 이민족이 들끓는 낮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즉,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기 가서 식민지를 세워라. 잘 세워지면 대대로 거기 지배권을 줄게' 하는 것. 이렇게 분봉된 제후는 주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즉 종법 질서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원이었으므로, 동성 제후라고 불린다.
한편 주나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성 제후라고 불리며 가문은 다르지만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 중심의, 중국 특유의 천하관에 끼어들게 된다.
4.2. 일본
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로써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써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번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되며, 봉건제 당시 유럽 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일본의 농노제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11]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5. 평가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중세까기 풍조로 인해서, 수백년 간 '''봉건제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쁜 것'''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평가되었다.
특히 근대의 프랑스 혁명 때 혁명 정부는 '봉건주의의 철폐'를 선언했으나, 사실 루이 16세 시절에는 이미 중세에 성행한 봉건주의 계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장원은 해체된지 오래고, 농노들은 이미 다 법적인 지위는 자유민이 된지 오래였다. 작위를 가졌다고 영지를 수여받지도 않았고, 땅이란 계약서에 서명해서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었다. 기사는 없었고, 평민들도 총병과 보병으로써 군복무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뭐가 봉건제냐고? 농민들과 평민들을 괴롭히는게 바로 봉건제야."라는 순환논법으로 별 의미도 없이 봉건제 철폐를 선언한 것.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은 중세 유럽의 모든 것을 나쁘게 평가하려 들었지만, 막상 현대에 와서는 중세 봉건제가 차라리 더 나은 부분들이 있었다는 점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의외로 중세 농노의 삶이 19세기 영국등 산업혁명기 유럽의 도시 노동 빈민보다 오히려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많은 휴식, 더 많은 사회적 보호 장치를 누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는 등 중세의 여러 단면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중세 영주가 영지 내의 농노들에게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만큼의 노동시간을 강요해봐야 이익이 없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들이 휴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씩 일했던 것은, 이는 공장이 오래 돌아갈수록 생산품이 많아지고, 식민지라는 안정적인 구매처가 있기에 생산량이 많을수록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을 2배 더 일시키면 2배의 생산량,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부들을 2배 더 일하게 한다고 농작물이 2배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다 같이 농사만 짓는 사회에서 농작물을 많이 수확한다고 해도 창고만 차지하지 딱히 이득이 있는게 아니다. 노동자들을 무한으로 부려먹기 시작한 것은 상업이 발달되며 잉여생산물을 사치품으로 교환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쓸모가 없어지면 자르고 새로 고용하면 됐던 산업혁명 시기와는 달리, 중세의 농노는 외부에서 충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악독하게 혹사 시킬 수도 없었다.
이후, 중세시대가 무조건 암흑시대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걷혔으며, 유럽 역사학계에선 이에 대해 아직 논쟁 중에 있으며, 당시 유럽의 산업 구조와 생산력, 전반적인 기술력으로는 이 이상의 체제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식민지화를 하기 전의 여러 '봉건제의 사회 구조'와 동시대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를 갖춘 군주제 국가'를 비교해볼 때, 봉건제는 내부적으로 광범위한 부조리, 잦은 전쟁과 약탈, 폐쇄적인 신분제 등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기에, 과연 봉건제가 그 당시에 있어서 최선이었냐라는 의견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 부분도 중앙 집권 국가들도 보였던 모습인 만큼 저걸 도식적인 이분법으로 봉건제만의 문제였다고 할순 없다. 경제학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야기하는 "시장이냐, 국가냐" 의 논쟁처럼, 이는 정치의 문제로 바라보는게 바람직하다 보여진다.
마르크 블로크는 주저 《봉건사회》에서 저항권의 주요한 기원이, 서양 봉건제도에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6.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
동양에선 근현대 이후 한국, 중국처럼 중앙집권적 관료제가 발달한 나라들은 오히려 중앙과 지방 간 불균형과 이로 인한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히는 데 비해 유럽, 일본의 지방분권 성향은 그야말로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지방분권의 전통이 강한 나라들의 수위도시 집중 경향이 중앙집권 전통 국가들보다 약하고 그 부작용도 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전근대 시절 봉건제는 현대의 지방 자치와 달리 무력을 갖춘 지방 토호들의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오히려 시민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전 자유주의자들은 봉건영주와 대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몽 전제군주에게 협력해 봉건영주를 타도하고 절대왕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한다.
일본 같은 경우도 오히려 봉건제를 극복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세력을 떨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근대국가 정비에 중앙집권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를 동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시대적인 변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중앙 집권의 폐단이 심하지만 비슷하게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한 중국의 현재 모습을 보면, 나라가 너무나 커서 한국과 달리 정치적 중심지인 베이징이 경제적 중심지까지 맡는 게 아니고 상하이나 광저우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중앙 집권이라고 다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경제적 문제도 그러한데 굳이 일본의 군마현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경제발전에는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벌어지기 때문에 경제적격차는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있으며, 이때 중앙집권 성향인 경우 중앙의 힘으로 억지로라도 균형을 맞춰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집권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12]
7. 현대의 봉건제
안도라 공국은 '''1993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영국 왕실의 직할영토인 채널 제도의 사크 섬은 '''2006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놀랍게도 사크 섬의 주민들은 자신들은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면서 대부분 봉건제 철폐에 반대했다.
8. 서브컬처
양판소의 판타지 국가들도 이러한 봉건제를 통해 국가를 유지...하고 있나? 판타지 및 양판소에서 괴이하게 열렬히 선망하는 제도이다. 아무래도 멋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환타지의 배경인 중세 서양의 봉건제도를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한 덕분인 것 같긴 한데, 역시나 양판소답게 봉건제를 충실하게 고증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국왕이 수십만의 상비군을 유지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또 영주들은 영주들대로 병력이 있지를 않나, 뭔가 절대왕정과 봉건제를 어설프게 섞어놓은 경우가 흔하다.(대충 일본의 에도막부를 떠올리면 된다. 봉건제이긴 하지만 중앙의 힘이 영주들을 어느정도 압도하는...) 동로마 제국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상비군을 동원하는 자체부터가 장원이 저절로 없어질 만큼 압도적인 경제력과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이 경우 봉건제는 악의 축으로 나오며 망한 뒤 뜬금없이 공화정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Warhammer(구판)의 브레토니아는 이 봉건제로 운영되는 국가들이다. 문제는 브레토니아라는 진영 자체가 봉건제, 기사도, 농노제를 까려고 만든 블랙유머로 가득한 진영이라는 것. 사실 브레토니아 외에도 다른 진영인 제국(Warhammer), 드워프(Warhammer), 하이 엘프(Warhammer)도 국가가 봉건제도로 유지되고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2는 중세 봉건제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아주 잘 구현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중세 봉건제를 이해하기에는 좋은 게임이다.
9. 관련 문서
[1] 그나마 카페 왕조의 창시자인 위그 카페는 단순한 백작이 아니라 모계 조상이 샤를마뉴 대제였고 스스로 프랑크 공작에 오를 정도로 강한 세력이었다. 그렇기에 그나마 국왕으로 선출되고 국가를 그럭저럭 끌고 간 것이다(...)[2] 이 점은 노르만 정복 전까지 독자적으로 봉건제가 성립해가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중세 초에는 후대의 독일 지역이 그러하듯, 부족제적 제후인 prince에 대응하는 "ealdorman"과 그 가신 전사들이 존재하였으나, 7왕국 간 전쟁과 더불어 특히 노르드인의 침공으로 거치면서 국왕 아래로 ealdorman/earl(데인로 성립부터 앵글로-노르드 왕조까지의 영향으로 전자에서 후자로 대체. 초기에는 대륙의 공작에 가까운 지위였으나, 노르만 정복 직전에는 이미 대륙의 백작과 같은 위치에 있었음)과 shire reeve(=sheriff)를 비롯한 다양한 국왕 대리인(reeve), 왕의 thegn(king's thegn), 기타 지역적 thegn(일반적으로 대륙의 남작과 비견되는 위치. 흔히 종사나 호족으로도 번역됨)과 허스칼 등으로 이어지는 위계가 형성되었다. 잉글랜드 내 기마문화는 노르만 정복 이후에 도입되었으므로, 봉건제 탄생에서 등자와 중장기병의 탄생이 중요 요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3] 봉신의 봉신, 프랑스어 : Vavasour, 유럽 봉건제에서 배신은 남작 아래에 봉토를 수여받은 최하위 비자유 귀족, 기사를 말한다.[4] 다만 이들 용병이 기사와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이유에서 기사 신분이라도 용병으로 활동하는 사례는 빈번했다. 나눌 재산이 부족하거나 아예 장자상속이 정착되면서, 기사나 영주의 차남 이하는 가문을 경영하게 될 장남의 관료로 봉사하거나 근방의 주교·수도원장을 지망하는 게 아닌 이상 기회를 찾아 떠돌았고, 많은 경우 용병으로 활동하였다. 혹은 토지를 가진 경우라도 배신(봉신의 봉신)이거나 소규모 봉토의 남작 혹은 기사라면 더 많은 수입을 위하여 보수를 받고자 전장을 전전하였다. 즉, 여기서 언급하는 용병의 대두는 기사가 직업적·군사적 정체성 대신 사회계급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직접 군역을 수행하기보다는 방패세(scutage) 등을 지불하고 영지 경영에 전념하였던, 화기의 발달 훨씬 전부터 진행되었던 현상을 의미한다.[5] 푸아티에 전투, 크레시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6] 특히 영국이 백년전쟁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아보면 어떻게 프랑스의 봉건제가 그렇게 근본적이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는지 볼 수 있는데, 백년전쟁은 영국 본토에서는 전쟁터라기보단 일종의 위험한 골드러시처럼 받아들여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기사, 귀족들을 붙잡아 몸값을 챙기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프랑스는 푸아티에, 크레시에서 엄청난 수의 중기병들이 궤멸당했고 제대로 된 대처가 불가능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슈보시(chevauchee)를 시행했는데, 이는 건물이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싹 다 불태우고 죽여버리는 행위를 의미했다. (북구인들보다도 더하지만 명예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병력이 쉽게 분산되기에 엄청난 피해를 입지만, 적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가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흑태자가 이끈 어마어마한 규모의 슈보시가 있다.[7] 굳이 말하자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난 뒤 '이탈리아 왕' 칭호를 얻었다가, 돌고 돌아서 이탈리아를 침략한 프랑크인들과 카롤링거 왕조와의 관계 때문에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해당 칭호를 가져가게 된다.[8] 대표적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전신 중 하나인 카스티야 백작령이 바로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9] 이에 따르면 사회 발전의 단계는 원시 사회 - 고대 노예 사회 - 중세 봉건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5단계로 나뉜다. 다만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동양 경제사를 이 과정에서 벗어난 '아시아적 생산 양식'으로 설명했었다.[10] 한국도 60~70년대 교과서에서는 이런 표현을 볼 수 있었다. (링크) [11] 물론 실질적인 석고는 조금 달라서 예시를 들면 대마도는 실제 석고는 1만이 안 되었지만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암해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고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으로 수익을 냈기에 마찬가지로 1만석 격으로 인정되어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이 외에는 많은 번들이 개간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실제 석고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다. 심지어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는 공식 석고보다 실제 석고는 3배 가까이 되었을 정도[12] 특히 지방 토호들의 폭력과 부패를 근절시킬수 있는것이 큰 장점이다. 중앙집권으로 중앙정부의 힘이 강하면 지방 토호들이 정부를 무서워하며 함부로 행패를 부리지 못하나 중앙정부의 힘이 약한 봉건제와 지방분권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대놓고 부패하며 행패를 부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