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민
賤民
1. 개요
고려, 조선 시대의 신분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을 가리키는 말.
2. 상세
'''상놈''' 또는 '''상것'''이 천민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상민이라고 하면 원래 일반 백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양반-중인-상민-천민 이라는 식이 된다. 법적 신분제인 양천제에서는 양인-천민 구별이다. 즉, 상것은 원래 양반이 평민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에 가깝다. 다만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양반 인플레이션을 통해 양반이라는 표현이 '이 양반 저 양반'하는 식으로 떨어진 다음에, 상민이라는 표현도 같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천민은 곧 노비이다. 노비제도가 갑오개혁으로 공식 폐기 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적 신분제는 양천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양인들에게 천시되는 계급은 노비에만 그치지 않았다. 법적 신분이 진짜 천민인 노비가 아니더라도,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힘들고 괴롭다면 이것도 천민으로 취급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량역천으로, 일반적으로 천민하면 떠오른 직업군은 대부분 여기 속한다.
천민의 범위는 시대별로 달랐다. 한국사에서 가장 부침이 심했던 것은 승려 계층으로, 신라, 고려까지는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상위 계층이었고 왕가와 귀족가에서도 출가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조선이 건국되고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승려는 단숨에 천민의 지위로 떨어지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조선시대 왕족이나 관료, 양반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보다 하층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나이를 가릴 것 없이 무조건 말을 편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나이가 어린 사람이 양반의 자식이라고 하면, 나이가 늙고 많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천민의 속박에 있다면 존댓말이나 우대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천민이라도 나이 80세를 넘으면 얘기가 달라져서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면천되는 효과를 얻을수있었다.
양반이라도 대역죄로 몰락하였을 때는 무조건 천민으로 격하되며, 그 후손도 마찬가지로 천민으로 격하되어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 공로를 세웠거나 왕에게 충성을 다 바쳤던 행적이 인정된 경우, 국왕의 어명하에 면천(免賤)되어 신분이 상승하는 경우도 있다. 광해군/인조대의 무신이였던 정충신도 본래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점을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면천을 받아 양인이 되었고, 이후 무과에서 급제해 양반이 되기도 하였다.
외국에서도 비슷한 개념은 있었다. 중국의 경우 세습은 되지 않지만 노비 계급이 있었고,[1] 일본은 노예가 없지만 천민은 조선과 비슷하게 존재했다.
일본의 천민들은 일반인의 눈을 피해 특정한 지역에 서로 무리를 지어 살았는데 이들을 일컬어 부라쿠민이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 후예들은 오늘날까지도 일반인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서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는 그 대우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마치 인도에서 아직도 불가촉천민 출신들을 탄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일본 사회에서는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아직 은근히 남아 있다.
서유럽에서도 카고라는 천민 비슷한 계급이 20세기 중반까지 남아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사라졌다. 주로 사형 집행인과 같은 천대받는 직업군이 카고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성인인 성 요한 보스코 신부는, 생전에 아는 신자의 집에 가려다가 집을 착각해서 망나니의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마침 망나니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청하지 않았는데도 신부가 자기네 집에 와주었다는 사실에 그들은 대단히 고마워했다. 그 바람에 요한 보스코 신부는 "잘못 들어왔습니다" 라는 말을 못하고 그대로 눌러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신부조차도 차별하는 존재라는 뜻이니, 망나니들을 포함한 카고에 대한 사회적 천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지역 공동체 사회의 붕괴와 이촌향도로 인한 농어촌 인구의 급감으로 족보를 따지는 일부 집안을 제외하고는 천민을 따지지 않으나, 저소득층이나 이공계, 3D업종에 대한 백안시와 천대에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차별의 뿌리를 볼수 있다.
3. 천민 집단 사이의 관계
이 계급은 일단 같은 천민으로 묶이기는 했지만, 팔천의 신분 서로 간에 연대의식은 희박하고 서로가 서로를 천시하기도 했다. 사극 등에서는 현대적인 계급 의식이 반영되어 "우리는 다 같은 천민이잖아?" 라는 식으로 서로 연대의식을 드러내는 묘사가 많지만, 실제로는 천민들끼리도 부류에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멸시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인도의 카스트도 마찬가지다.
천민이라고 한데 묶여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천시당하는 이유'도 '생활 양식'도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연대 의식을 가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개화기 때 해방운동이 벌어질 때도 각각의 집단을 대표하는 조직은 별도로 활동했지 "천민 계급으로서"의 연대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개화기에 형평사(옛 백정 출신들의 단체)에서 잔치를 열고 기생들을 불렀지만, 권번(기생조합)에서 "지저분한 백정 놈들 술 따라주는 것은 싫다!"고 거부하고 가지 않아서 형평사와 권번이 충돌한 사건도 있다.
4. 고려시대의 차별계층
향, 소, 부곡민 들을 천민이 아니라 양민으로 보는 이상, 고려시대에도 노예를 제외하면 천민이라고 할 계층이 없다. 다만, 이들도 실질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4.1. 향, 소, 부곡민
향과 부곡민들은 농업, 소의 주민들은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했는데, 군현민들에 비해서 명백하게 차별을 받았다. 조세와 노역의 부담도 훨씬 컸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으며, 과거 응시도 제한되었고, 국자감 입학 자격도 없었다.예종(睿宗) 3년(1108) 2월 판(判)하기를,
“경기(京畿)의 주현(州縣)에는 상공(常貢) 이외에도 요역(徭役)이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百姓)들이 이를 괴롭게 여겨 날로 점차 도망치고 유망하고 있다.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계수관(界首官)에 그 공역(貢役)의 많고 적음을 물어 참작하여 정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동소(銅所)·철소(鐵所)·자기소(瓷器所)·지소(紙所)·묵소(墨所) 등의 여러 소(所)에서 별공(別貢)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과중하게 징수하여 장인(匠人)들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여 도피하고 있으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바치는 공물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다시 정하여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4.2. 신량역천
말 그대로 신분은 양인이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는, 조선시대 천인들의 프로토 타입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힘든 일이 많다보니 수공업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거주구역만 소가 아니었지 실질적으로 소에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취급은 비슷했지만, 신량역천이라는 명칭이나 아래 직역명들은 조선시대 초에 만들어진 예가 많다.[2] 다만 조선시대 초인 세조 때에 간이나 척이라는 차별적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면서, 염부, 어부, 목자, 봉수군 등으로 부르게 했다. 하지만 인식이나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명칭만 바꾼다고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 조선시대에도 사실상 천민취급을 받게 된다.
- 도척(刀尺) = 지방관아 소속 요리사
- 목자간(牧子干) = 목동
- 묵척(墨尺)[3] = 먹을 만드는 사람
- 봉화간(烽火干) = 봉화대를 지키던 봉수꾼
- 생응간(生鷹干) = 고려시대에 매를 기르는 응방에서 일하던 유목민 후손[4] 들로, 고려시대에는 시파치(時波赤)라고 불렸다.
- 수유간(酥油干) = 북방 지역에서 낙농을 하면서 주로 우유를 만들던 이들로, 역시 유목민 후손이다. 이들 역시 고려 시대에는 수유치(酥油赤)라고 불렸다.
- 수참간(水站干) = 조운에 동원되었던 뱃사공
- 수호간(守護干) = 문지기
- 양수척(楊水尺) = 버드나무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인물. 조선시대의 고리백정
- 역척(驛尺) = 국가의 관영여관인 역을 지키는 인물
- 염간(鹽干) = 소금 만드는 사람.
- 진척(津尺) = 나룻터에 있는 뱃사공
- 철간(鐵干) = 철광이나 탄광 등의 광부
- 화척(禾尺) = 수척(水尺)이나 무자리라고도 했다. 가죽제품이나 유기 제조를 했던 이들.[5] 조선시대의 유기백정이나, 갖바치에 해당한다.
5. 팔반잡류와 팔반사천
공적인 일이 아닌 사사로운 위치에서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법률 기준으로 이 사람들은 천민이다라고 노비와 같은 취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량역천이라고 해서 일에 따라서 천민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이다.
사실 8천이라고 하면 말은 쉽지만 뭐가 어디에 속하느냐는 굉장히 말이 다르다. 단적으로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는 팔반잡류(八般雜類)라고 해서 마을에 출입을 금지시켜야 하는 천인을 꼽는데,
- 우파(優婆) = 남사당.
- 창기(娼妓) = 매춘하는 기생
- 주파(酒婆) = 떠돌아다니면서 술 파는 여자
- 화랑(花郎) = 무당의 남편이라고 하는데, 광대라는 이야기도 있다.
- 악공(樂工) = 연주하면서 재주를 파는 사람
- 뇌자(牢子) = 일명 초라니. 상이군인이나 관노 들이 중심이 되어서, 가면극을 벌이고는 돈을 강제하던 패거리
- 마조(馬弔) = 도박패.
- 도사(屠肆) = 백정
이 외에 팔반사천(八般私賤)을 꼽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 승려(僧侶) = 말 그대로 승려. 고려시대까지는 오히려 존중받는 계층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서 천민 취급을 받았다[6] .
- 영인(令人) = 앞에 언급된 초라니, 혹은 악공과 같은 부류
- 재인(才人) = 광대 혹은 창을 하던 판소리꾼. 이 때 윤서인은 이것을 이용해 문재인을 페이스북에서 비난했다.
- 무당 = 말 그대로 남녀 무당
- 사당(捨堂) = 남사당패
- 거사(擧史) = 강사, 혹은 강담사라고 해서 이야기 해주는 사람.[7]
- 백정(白丁) = 주로 화척이라고 불렸던 동물 잡는 전문.
- 혜장(鞋匠) = 갖바치라고 불렸던, 가죽 백정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런 식으로 분류할 때는 진짜 천민인 노비는 언급이 되지 않고, 풍수를 보는 지관이나 하늘을 보고 점치는 천문관, 그외에 각종 장인(철물은 상황 따라서 제외), 의관 등은 중인으로 분류하므로 신량역천도 아니다.
6. 칠반공천과 칠반천역
이쪽은 공적인 일과 엮여 있는데, 웃기게도 더 복잡하다. 칠반공천(七般公賤)에는 진짜 오리지널 노비인 공노비와 도망죄인이 포함되어 있고, 칠반천역(七般賤役)은 일반적으로도 양인 아닌가 싶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일단 팔반사천과 비교되는 칠반공천부터 언급하면,
- 기생(妓生) = 이쪽은 소위 말하는 관기를 의미하는데,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매매춘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기생은 당연히 국가의 통제를 받았던 존재로, 몸을 파는 유녀, 혹은 팔반사천에 언급되는 창기와는 비교되었다.
- 나인(內人) = 궁중에서 일하는 궁녀들.
- 이족(吏族) = 관아에서 잡일하는 사람들
- 역졸(驛卒) = 말 그대로 역을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 여기서 역이라면 당연히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통통신 시스템인 역원제 하에서의 역을 의미한다. 사실 역리라고 하면 이것도 중인 신분인데, 세종실록에 이미 죄를 지은 향리를 외진 곳의 역에서 일하게 하라는 소위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이 나온다.[8] 심지어 향리가 이 법 기준으로 유배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면, 다른 도의 외진 역에 보낸다라는 처벌규정까지 있다.
- 뇌령(牢令) = 아래 언급되는 나졸 가운데서, 감옥 관수
- 관비(官婢) = 공노비
- 유죄도망자(有罪逃亡者) = 말 그대로 죄를 짓고 도망친 사람이다.
그리고 칠반천역은 칠반공천보다 더 상위로 중인인 아전급 직책에 가깝다. 하지만 속대전에서도 부터 대놓고 신량역천 취급한다.
- 조례(皂隷) : 아전들 중에서, 중앙 군대에서 일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끝발이 좀 높은 사람들을 군교라고 부르고, 그보다 아래를 나졸이라고 부른다. 조례는 경아전으로 중앙관서 및 종친들에게 배속되는 헌병, 혹은 당번병에 가깝다.
- 나장(羅將) : 경찰, 순라, 옥졸 역할을 맡은 병사가 위에 언급된 나졸이다. 그리고 이 나졸이 포도청에 배속되면 포졸이 된다. 그리고 이 나졸들을 다스리는 사람이 바로 나장이다.
- 일수(日守) : 지방 관청에서 일하는 외아전.
- 조군(漕軍) : 세금을 걷는 조운과, 그 조운선을 관리하는 직책.
- 수군(水軍) : 조선 수군(지금의 해군.)
- 봉군(烽軍) : 봉화를 담당하는 봉수꾼.
- 역보(驛保) : 역에 배속되어서 그냥 대를 이어서 일하는 위치.
7. 유명한 천민출신의 인물
8. 해외의 천민 계급
8.1. 중국의 천민 계급
중국에도 세습 노비와 천민이 존재했고, 심지어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에까지 존재했다.
조선과 같은 시대인 중국 청나라에서도 엄연히 가생자(家生子)라고 하여 세습노비가 존재했다. 참고로 청나라 시대 노비들은 주인이 하녀를 첩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한테 첩으로 넘겨주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민과 결혼할 수 없으며, 노비가 낳은 아이는 가생자가 되어 역시 부모의 신분을 물려받아 노비가 되었다. 아울러 청나라의 옹정 황제는 동화록(東華錄)에서 노비 관계를 “하인(노비)들은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하인의 신분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라고 옹호했다.[9]
또한 중국 청나라에는 타민(惰民). 세부(世仆), 반당(伴當), 단민(蛋民) 같은 세습 천민 계급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옷차림과 가옥 등에서 모두 엄격한 규제를 받았고, 규모가 작은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을 뿐, 지식인이나 농민이나 장사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글을 읽을 수도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으며, 양인과 결혼하지도 못했다. 이 천민계급들은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시대에 되어서야 비로소 없어졌다.[출처2]
아울러 건륭제 36년인 1771년, 청나라 정부는 천민 호적에서 벗어난 사람이 과거시험을 보려면 먼저 자격을 심사해야 하는데, 4대(증조부, 조부, 아버지, 본인)에 걸친 성분을 모두 조사하여 본 가족의 직계친속이 모두 청백해야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으며, 만약 그들 중 제 1대와 2대 및 삼촌 이내의 사람들이 여전히 천민들의 직업인 취고수나 심부름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면 과거 응시 자격을 주지 않겠다고 규정했다. 당시 대다수 천민들은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서 천민 시절의 직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대부분이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 예로 소주의 걸호(거지들)들은 봄을 맞을 때 할 수 없이 심부름꾼으로 일하거나 취고수로 일해야 했다. 안휘성 남부에서의 세부들도 청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중화민국 초기 시절까지 계속 있었으며, 절강성의 타민들도 여전히 배를 집으로 삼고 살면서 육지에 오를 때는 신발을 신지 못했다.[출처2]
8.2. 일본의 천민 계급
8.3. 인도의 천민 계급
8.4. 서유럽의 천민 계급
[1] 다만 이는 법적으로는 세습이 불가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노비 계급이 세습되었다. 주인이 노비의 자식들을 자기 가문에 입적시켜서 계속 노비로 부려먹던 방법도 있고, 외국에서 조공이나 선물로 보내 온 노예나 군대에서 부리는 노비들은 대대손손 부려먹었다. 자세한 것은 부곡, 노비 종모법을 참조.[2] 예를 들어서 아래 언급된 목자간은, 원래 몽골의 목장에서 일하던 사람(牧子)들이었는데 여기에 '간'만 붙여서 만든 명칭이다.[3] 조선시대에는 '먹자'라고도 불리는 사헌부 소속 나장의 별칭으로 쓰였다. 이들은 주로 체포와 수색 업무를 했는데, 입고 다닌 옷이 검은색이라서 저렇게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죄인으로 확정되면 그 집 대문에 먹칠을 했다고 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4]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는, 이들이 스스로 달단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해당 문서를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이 시기 조선 기준으로 달단이란 그냥 북방오랑캐라는 말로 대신해도 될 정도로 쓰이고 있었다.[5] 도살업도 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식적으로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대놓고 하지는 않은 듯.[6] 물론, 말이 천민 취급이지 1950년대까지 승려나 무속인들은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대단히 존중받았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왕의 성향에 따라 대우를 받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은 보우나, 임진왜란 당시의 국가적 영웅들인 사명당과 서산대사의 일화들, 그리고 김동리의 소설인 무녀도의 주인공인 모화가 작중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7] 일본의 만담가처럼 중국에도 비슷하게, 이야기 해주거나 책 읽어주고 돈 받는 사람이 있었다.[8] 이는 향리가 수령을 모욕한 경우도 처벌 대상에 넣었기 때문에, 부민고소금지법과 함께 중앙집권화 과정으로 보면 된다.[9] 출처1 한 권으로 읽는 청나라 역사 (하)/ 따이이 저/ 전영매, 김선화 공역/ 김승일 감수/ 경지출판사(27~30쪽)[출처2] A B 중국을 말한다 14/ 멍펑싱 저/ 김순림 역/ 신원문화사(248~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