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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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명의택(明義宅)
생몰
1924년 2월 3일 ~ 2007년 4월 24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중구 다동
사망지
인천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명의택은 1924년 2월 3일 서울시 중구 다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복중학교에 재학하다가 1939년에 동교생 이현상(李賢相), 장의찬(張宜燦), 주낙원(朱樂元) 등과 함께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1941년에 명륜 전문학교로 진학한 뒤 그해 가을에 봉래동에 소재한 주낙원(朱樂元)의 집에서 동지들을 모아놓고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했다.
흑백당의 기본 강령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 비밀, 책임완수 등을 정했으며, 명의택은 행동책의 직임을 맡았다. 그후 흑백당원들은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고 일본인이 밀집하여 살고 있는 욱정(旭町) 일대를 방화해 일본인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이를 위해 방화에 필요한 휘발유를 준비해 은닉했다. 또한 흑백당원들은 일제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고 조국 광복이 가까웠다는 내용의 격문을 각처에 뿌렸으며,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돌려 향후 거사에 써먹으려 했다.
그러나 1943년 10월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창흠(金昌欽)이 귀향도중 열차 안에서 일제를 욕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택수색을 당하던 중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면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에 흑백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국내 활동이 어려워졌으니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한 대한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고, 일단 당원 김성근(金盛根)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43년 12월 초부터 2~3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명의택은 최고와 한 조를 이루어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사전에 이들의 계획을 탐지한 일제 경찰은 1944년 1월 만주 등지에서 흑백당원 전원을 체포하고 국내로 이송했다. 이후 명의택은 동지들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지만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그러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공군 대령 까지 올랐고 대한항공 전무, 한국항공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진그룹서 근무하다가 2007년 4월 24일 인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명의택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이틀 후인 2007년 4월 26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