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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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고(崔杲)
생몰
1924년 4월 19일 ~ 1988년 8월 23일
출생지
경성부 소격정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고는 1924년 4월 19일 경성부 소격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복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39년 동교생 이현상·장의찬·명의택·주낙원(朱樂元)·성익환·홍건표 등과 동지가 되어 조국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포섭 등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그후 목적완수를 위해 계획을 진행하다가 1941년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고 동지들도 각각 전문학교에 진학하게되자 이들은 동년 가을에 당시 봉래동(현재 만리동)에 있던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학생결사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하였다.
기본강령으로는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 절대비밀, 책임완수 등을 정하였으며 이때 그는 남상갑과 함께 자금책의 일을 맡았다. 이들은 우선 실천행동 방략으로써 친일파 처단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일인이 밀집하여 살고있는 당시 욱정(旭町 : 현재 남산동 부근)일대를 방화하여 일인을 섬멸하는 계획도 세웠다. 또한 이들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가까왔음을 알리는 격문을 각처에 뿌려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는데 그는 남상갑(南相甲)과 함께 격문의 문안을 맡았다. 한편 흑뱅당은 특공대를 조직하여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2자루와 실탄 및 총검을 빼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인 1943년 10월 흑뱅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의 김창흠(金昌欽)이 귀향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택수색을 당하던 중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모임을 갖고 국내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었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당원들은 일단 당원 김성근(金盛根)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그는 명의택과 한 조를 이루어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의 추적으로 최고를 비롯한 선발대원들은 1944년 1월 만주의 베이징, 심양, 신민, 승덕 등지에서 전원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다. 이후 최고는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소설가로 활동하다가 1988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