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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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의찬(張宜燦)
생몰
1923년 6월 13일 ~ ?
출생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다칠정3 정목 414
사망지
미상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의찬은 1923년 6월 13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경복중학교에 재학하던 중 동창생 이현상(李賢相), 주낙원(朱樂元), 명의택(明義宅), 성익환(成益煥), 최고, 홍건표 등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해 친일파 및 일본인 고관을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동지 포섭 등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1941년 동지들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그는 동년 가을에 봉래동 소재 주낙원의 집에 모여 정식으로 항일학생결사단체인 흑백당(黑白黨)을 결성하고 부서 및 선언문, 강령, 규약 등을 정했다. 흑백당의 선언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단군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조국(祖國)이 악독한 일제의 잔인무도한 질곡 속에서 빈사지경에 이른 현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여기 조국과 민족을 구하고자 흑백당(黑白黨)을 조직한다. 우리는 조국이 광복(光復)을 되 찾는 그날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바쳐 모든 방법을 다하여 일제(日帝)와 투쟁할 것을 삼천만 동포 앞에 엄숙히 선언한다.

흑백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본 당원은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맹서한다.

2. 본 당원은 본당의 조직·이념·행동에 관한 사항을 절대 비밀로 한다.

3. 본 당원은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전력을 다해 완수한다.

장의찬은 이현상을 대표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대표가 되었다. 또한 경성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성근(金盛槿), 이경춘(李慶春)을 포섭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임명했고, 뒤이어 전희수(全熙鑄), 도경(都慶), 김창흠(金昌欽), 이병림(李炳琳), 김연동(金演東) 등을 포섭했다. 흑백단은 일본인 고관 및 거상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서울 욱정(旭町)[1]에 방화하기로 하고, 명의택이 행동 책임을 맡아 휘발유를 준비하여 은닉해두었다. 다음으로 이현상, 홍건표는 모교인 경복중학교 무기고에서 교련용 38식 소총 3자루와 상당량의 실탄, 총검을 빼냈다.
흑색단은 이와 함께 일제의 패망과 민족의 해방이 다가온다는 것과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고 학병을 거부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격문을 만들어 살포할 것을 결의하고, 최고(崔杲), 남상갑(南相甲)이 문안 작성을 맡고, 구체적인 실천은 성익환, 주낙원이 맡되 전 당원이 살포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인 1943년 10월 흑백당의 동조자였던 보성전문학교의 김창흠(金昌欽)이 귀향열차 안에서 우리말로 일제를 욕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택수색을 당하던 중 흑백당에 관한 문서가 발각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에 당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당원들은 김성근의 자형이 있는 만주의 신민(新民)에서 집결하기로 하고 1943년 12월초부터 1∼2명씩 조를 나누어 떠났는데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에 의해 1944년 1월에 만주의 북경·심양(瀋陽)·신민(新民)·승덕(承德) 등지에서 먼저 떠난 선발대원이 체포되었다. 이때 장의찬은 김성근과 한 조가 되어 승덕까지 갔다가 군자금 조달을 위해 다시 서울에 돌아와 있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장의찬은 체포 후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44년 12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병으로 인해 형집행이 정지되었다. 이후 8.15 광복을 맞이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후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언제, 어느 곳에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장의찬에게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현재의 남산동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