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습

 

繆襲
(186 ~ 245)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자는 희백(熙伯). 아들 무열(繆悅), 손자 무파(繆播)과 무윤(繆胤)[1]이 있다.
동해 난릉 사람으로 재능과 학식이 있으면서 많은 문장을 썼으며, 어사대부를 지냈고 시중에 올랐다가 이후에 관직은 상서, 광록훈까지 이르렀다. 중장통을 만난 적이 있는 상림과 함게 중장통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 평가는 전한의 가의, 동중서, 유향, 양웅 등의 뒤를 이을 재능을 가졌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조예가 즉위하면서 화흠의 작위를 올려 박평후로 봉하면서 식읍 5백호를 늘리면서 이전 것과 합쳐 1,300호가 되게 했으며, 또한 태위로 임명했다. 화흠이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면서 관녕에게 자신의 직위를 넘기려고 하면서 조예가 허락을 하지 않았으며, 무습은 이 때 산기상시로 있다가 조서를 받들고 그 뜻을 화흠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때 무습은 화흠이 일어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는 명을 받아 결국 화흠은 조예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2]
세설신어에는 조예가 외할머니를 위해 진씨의 땅에 저택을 지었다가 완성되자 친히 가서 둘러보면서 신하들에게 저택의 이름을 짓는 것을 물어볼 때 시중으로 있던 무습이 폐하의 성사는 옛 성군에 짝하시고 부모를 사모하는 지극한 효성은 증삼이나 민자건보다 더 하다면서 이 저택을 지으신 것은 그 정이 외삼촌에게 모인 것이니 위양[3]으로 짓는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위서에는 조예가 진상의 어머니를 위해 저택을 지었다고 하는데, 진상의 어머니는 조예의 외할머니가 아니라 조예의 외숙모라고 한다.
[1] 둘다 309년에 사마월에게 피살당함.[2] 1997년에 출간된 김원중 역에는 여기서 돌아오지 말라는 명을 받은 것을 두습이라고 해석했다.[3] 진(秦)강공이 어머니를 사모하는 노래인 위양의 시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