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월

 


司馬越
사마월

시호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
작위
동해왕(東海王)
최종직위
승상(丞相)
성씨
사마(司馬)

(越)

원초(元超)
아버지
친아버지:사마태(司馬泰)
생몰기간
? ~ 311년
동해왕 재위기간
291년 ~ 311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미디어 믹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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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 사마의의 넷째 동생인 동무대후(東武戴侯) 사마규(司馬馗)[1]의 손자이고 고밀문헌왕(高密文獻王) 사마태(司馬泰)[2]의 맏아들이다. 자는 원초(元超).[3] 봉토는 동해군(東海郡), 시호는 효헌(孝獻), 작위는 왕(王)으로 모두 더해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이다.
팔왕의 난을 종결시키고 최종 승자가 되었지만 이미 내전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국운이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본인도 전횡을 저지르다 자기가 옹립한 황제에게 찍혀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 생애


서진 초대 황제 사마염에 의해 기마도위 양준, 동안왕 사마요와 함께 황태손 사마휼의 교육을 담당했으며, 산기시랑, 좌위장군, 시중을 지내고 291년 동해왕에 봉해졌다. 하지만 동해로 내려가지 않고, 수도 낙양에서 관직을 역임하던 사마월은 팔왕의 난이 발발한 후에도 조용히 지냈고, 서기 302년 황위를 찬탈한 사마륜을 주살한 대사마 사마경에 의해 사공 겸 중서감에 임명되었다.
서기 304년 1월, 사마월은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의 대군에게 포위된 낙양에 있었다. 당시 낙양을 수비하고 있던 장사왕 사마예가 황제를 진심으로 보필하고 정무에 전념하면서도 병사들을 잘 이끌었기에, 낙양 수비군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고, 사마영과 사마옹은 사마예에게 거듭 패해 낙양 공략을 거의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사마월은 낙양의 식량난이 갈수록 심화되고 물자가 궁핍해지는 상황을 보고 앞날을 근심한 끝에 계해일에 좌위장군 주묵과 더불어 전중에 있는 제장들을 이끌고 사마예를 급습해 다른 관청에 감금했다.
이후 사마월은 혜제에게 계문을 올리며, 사마예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금용성에 가두었다. 이후 사마월은 성문을 열어놨는데, 전중에 있던 장사들은 외부에 있던 적군이 많지 않음을 보고 후회하며 사마예를 다시 빼내 사마영에게 대항하려 했다. 이 분위기를 감지한 사마월은 사마예를 죽이려 했다. 이때 황문시랑 반도(潘滔)[4]가 반대했다.

옳지 않습니다. 장차 스스로 그 문제를 조용하게 만들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사마월은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사마옹의 부장 장방에게 사람을 파견해 서둘러 낙양에 입성하라고 독촉했다. 이에 장방은 낙양으로 들어와 심한 약탈을 실시하는 동시에 사마예를 잡아 자신의 영내로 데리고 와 화형에 처했다. 그 후 사마월은 수상서령[5]의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마영이 사마옹과 더불어 정권을 독점하고 심한 사치를 일삼으며 정사를 그릇되게 하자, 사마월은 우위장군 진진과 사마예의 옛 부하인 상관사 등과 함께 사마영을 토벌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304년 7월, 사마월은 사마영이 업성에서 향락에 빠져 사느라 수도 낙양을 비워둔 틈을 타 진진에게 군대를 이끌고 운용문을 통해 궁궐을 장악하게 한 뒤 삼공과 백관들, 그리고 전중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서 계엄령을 내리고 사마영을 토벌하게 했다. 이후 사마월은 7월 3일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사마영이 폐위시켰던 황후 양씨와 태자 사마담을 복위시켰다.
사마월은 수도를 장악한 뒤 황제를 대동한 채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업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사마영의 부하 석초가 5만 명을 이끌고 기습을 가해오자 대패하여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황제를 내버려둔 채 하비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주 도독 겸 동평왕 사마무가 받아들이지 않자, 사마월은 지름길로 동해로 돌아갔다. 사마영은 사마월의 형제 사마등, 사마략, 사마모가 종실의 촉망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사마월과 화해하려 했지만, 사마월은 이를 듣지 않고 다시 군대를 일으켜 사마영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전 분위장군 손혜로부터 여러 번왕들과 연합하여 황실을 보필하라는 편지를 받은 사마월은 손혜를 기실 참군으로 삼았다. 또한 사마영에게 반기를 든 유주제군사도독 왕준에게 동생 사마등을 보내 선비, 오환족과 연합하여 사마영을 치게 했다. 사마영은 이에 맞서 흉노족과 연합했으나 흉노족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왕준, 사마등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업에서 달아났고, 왕준은 업성에 입성한 뒤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그 후 사마옹이 사마영의 관직을 삭탈하고 자택에서 근신하게 한 뒤 권력을 독차지한 후 황제와 신료들을 장안으로 옮기자, 동해국 중위 유흡은 사마월에게 군대를 일으켜 사마옹을 토벌하라고 권했다. 이에 사마월은 7월에 산동에 있는 정, 진, 주, 군에 격문을 보냈다.

의로운 군사를 규합해 천자를 받들어 영접하여 돌아와 옛 도읍을 회복시키려 한다.

동평왕 사마무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다가 장사 왕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주를 사마월에게 넘겼다. 이후 사마월은 범양왕 사마효, 유주제군사도독 왕준과 연합해 낙양을 향해 진군했다. 사마월은 갑옷을 입은 병사 3만 명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소현에 주둔하고, 범양왕 사마효가 허창에서부터 형양으로 가서 주둔했다.
이후 사마월은 예주자사 유교를 기주 자사로 삼고 사마효에게 예주 자사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지만, 유교는 천자의 명이 아닌 이상 받들 수 없다며 따르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사마월을 공격했다. 여기에 사마무도 변심하여 유교와 연합해 사마월과 대립했다. 한편 사마옹은 사마월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사마월 등에게 각자의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사마월은 듣지 않았다. 여기에 유흥이 사마월과 유교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의 원한을 풀고 군대를 해산시키라고 요구했지만 둘 다 듣지 않았다. 이에 유흥이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신은 의당 하루 속히 사마월 등에게 밝은 조서를 내리시어 쌍방이 혐의하는 일을 풀어버리고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상황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지금부터 그들 가운데 조서를 받지 않고 멋대로 병마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그를 치게 하십시오.

하지만 사마옹은 유교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하고 있어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후 유흥은 장방이 잔학하고 포악해 사마옹이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판단하고 마침내 참군 유반을 파견해 도호로 삼고 여러 군사를 통솔하면서 사공 사마월의 통제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낙양의 분위기는 한층 악화되었고, 305년 11월 입절장군 주권이 정변을 일으켜 양황후를 복위시켰다. 그러자 낙양 현령 하교가 주권을 공격하여 죽이고 다시 양황후를 폐위시켰다. 사마옹은 양황후를 죽이기로 작정했지만, 사예교위 유돈 등이 거부해서 그러지 못했다.
이후 사마월의 부장 유곤이 사마효와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형양에서 낙양을 점거한 사마영의 부하 석초의 목을 베었다. 사마효는 뒤이어 유곤과 전휘를 파견해 사마무를 치게 하니, 사마무는 연주로 도망쳤다. 유곤, 전휘는 동쪽으로 가서 사마월을 영접하고 유교의 아들 유우를 초에서 격파해 주살했다. 유교는 아들이 죽고 군대가 와해되자 평지로 달아났다. 사마월은 그동안 자신을 가로막던 유교와 사마무의 무리가 와해되자 전진하여 양무에 주둔했고, 왕준은 휘하 장수 기홍을 파견해 선비족과 오환족으로 구성된 마갑 기병을 인솔하여 사마월의 선봉이 되게 했다.
이후 사마월은 장안으로 무파, 무윤을 파견해 사마옹에게 황제를 낙양으로 돌아오게 한다면 섬현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사마옹은 무파 형제를 중히 여겨 이를 따르려 했지만 부장 장방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통제를 받으려 하냐며 반대했다. 사마옹은 장방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가 사마옹의 참군 필원에게 꼬드김을 받은 질보가 장방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밀고하자 끝내 장방을 죽였다. 사마옹은 황제를 낙양으로 돌려보내고 장방의 머리를 사마월에게 보내 화의할 것을 청했지만 사마월은 무시했다.
306년 4월, 사마월은 병사를 이끌고 온에 주둔해 사마옹을 압박했다. 사마옹은 그제야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장방을 죽인 걸 후회하고 질보의 목을 벤 뒤 홍농 태수 팽수와 북지 태수 조묵을 파견해 사마월의 선봉을 맡은 기홍 등을 막게 했다. 그러나 5월 7일 기홍 등이 팽수, 조묵을 격파하며 서쪽으로 진군해 함곡관을 공략하고 사마옹의 장수 마첨과 곽위를 패수에서 패퇴시켰다. 사마옹은 태백산으로 도망쳤고, 기홍 등은 장안에 들어가 선비족 병사들로 하여금 장안을 약탈하게 하니 2만 명이 살해되었고 백관들은 흩어져 달아나 산속으로 들어가 도토리를 주워 먹었다.
6월 1일 황제가 낙양에 도착하자, 사마월은 양 황후를 복위시키고 신미일에 대사면령을 내리며 연호를 광희로 고쳤다. 그 후 사마월은 사마옹의 장사 양등이 주인을 배반하고 귀부한 덕분에 관중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 그해 8월 태부 겸 녹상서사에 임명된 사마월은 여러 인사들을 임명했는데, 특히 그동안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유여, 유곤 형제를 중용해 유여를 좌장사로 삼아 군사와 국가의 업무를 모두 위임했고 유곤을 병주 자사로 삼았다.
11월 17일 밤, 혜제 사마충이 사마월이 올린 떡을 먹고 18일에 현양전에서 급사했다. 사마월은 사마치를 황제로 옹립하고 양황후를 높여 혜황후로 삼아 홍훈궁에 거주하게 했으며, 회제의 어머니 왕재인을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그리고 12월에 사마옹에게 사람을 보내 사도로 임명할 테니 복귀하라고 권했다. 사마옹은 여기에 응해 수도로 향하다가 사마월에게 밀명을 받은 남양왕 사마모가 보낸 양신에 의해 낙양 서쪽 신안에서 목이 졸려 죽었고 사마옹의 세 아들 역시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팔왕의 난 최후의 승자가 된 사마월은 307년 1월 2일에 대사면령을 발표하고 연호를 영가로 고쳤다. 이때 이부랑 주목[6]이 자신의 매부인 어사중승 제갈매와 더불어 사마월에게 건의했다.

주상이 처음에 황태제가 되었던 것은 장방의 뜻이었습니다. 청하왕(사마담)이 본래 태자이니 공께서는 의당 그를 세우셔야 합니다.

사마월은 이를 듣지 않았고 두 사람이 재차 권하자 화가 나 그들의 목을 베었다. 그 후 2월에 왕미가 청주, 서주를 노략질하고 스스로 정동대장군이라 하면서 2천석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에 사마월이 공령거 국선을 동래군 태수로 삼아 왕미를 토벌하게 했지만 왕미가 그를 공격해 죽였다. 그 후 황제가 굵직한 정치적인 일을 살펴보고 보통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자, 사마월은 이를 기뻐하지 않고 번부로 나가기를 굳게 청해 승낙을 얻어낸 뒤 허창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사를 주관했다.
306년 5월, 사마영의 옛 부하 급상[7]이 갈족의 영수 석륵에게 투항한 뒤 위군 태수 풍숭을 격파하고 업성을 공략했다. 당시 업성을 지키고 있던 사마월의 동생 사마등은 업성이 공략되자 도망치다가 급상의 장수 이풍에게 살해되었다. 업성은 곧 불길이 치솟아 열흘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고 병사와 민간인 1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사마월은 이를 크게 두려워하며 구희와 왕찬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석륵과 구희는 평원, 양평 사이에서 몇 달동안 대치하며 3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승패를 주고받았다. 사마월은 그를 돕고자 7월에 관도에 주둔하면서 낭야왕 사마예를 안동장군 겸 도독양주강남제군사로 삼아 건업에 주둔하게 했다. 그해 8월, 구희가 급상을 쳐서 동무양에서 대파하자, 급상은 물러나 청연으로 후퇴했다.
구희는 급상을 추격해 그의 여덟 개 보루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살해했고, 급상과 석륵은 한나라 영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12월 2일 각지를 정처없이 떠돌던 유민 전견, 전란, 박성 등이 무리를 모아 사마등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며 급상을 공격해 낙릉에서 죽이고 사마영의 관을 우물에 버렸다.[8]
그러던 중 전 북군중후 여응, 탁지 교위 진안 등이 사마담을 태자로 삼을 것을 모의한 일이 있었다. 사마월은 이 일을 알게 되자 그들을 주살하고 사마담을 금용성에 가두었다. 또한 의형제 사이였으며 이번에 적을 대파한 공을 세운 구희를 정동 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고 도독청주제군사를 덧붙이며 청주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는 공을 보상해준 것이었지만 실상은 그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외지로 보낸 것으로, 본래 구희는 연주를 맡았으나 "연주는 요충지이고 위무제(조조)가 여기서 창업을 했는데 구희같이 순수한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닌 사람을 그곳에 오래두어서는 안 된다."는 사도 반도의 간언을 받아들여 청주로 보낸 것이다.
구희는 이때부터 사마월과 틈이 생겨 그를 모해할 마음을 품었다. 그는 청주에 이르자 엄격하고 각박하게 하면서 매일 사람의 목을 베니 청주사람들은 그를 '사람백정 자사'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도구 태수 위식이 무리 5~6만 명을 일으켜 연주 지역을 크게 노략질하자, 구희는 무염에서 이들을 토벌하고 연주를 사실상 장악했다.
308년 2월, 사마월은 사람들이 자꾸만 황태자로 추대하려 했던 사마담을 죽였다. 이후 그는 3월에 허창에서 견성으로 이동했고 왕미가 수만 명을 일으켜 청주, 서주, 연주, 예주 네주를 공략해 구희를 격파하고 4월에 허창으로 들어오자 사마 왕빈을 파견해 갑사 5천 명을 인솔하여 낙양을 호위하게 했다. 이후 7월에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 군대가 평양을 공략하고 하북 일대를 석권하려 들자, 사마월은 8월에 견성에서 복성으로 옮겼다가 얼마안가 형양으로 이동해 이들을 막을 방안을 모색했다.
308년 9월, 한의 왕미, 석륵이 업성을 침략하자 화욱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사마월은 예주 자사 배헌에게 조서를 내려 백마에 주둔해 왕미를 막게 하고, 거기장군 왕감에게 동연에 주둔하여 석륵을 막게 했으며, 평북장군 조무에게 대양에 주둔해 한나라의 추가 공세를 대비하게 했다. 그러나 석륵이 3만 명을 이끌고 위군, 급군, 돈구를 침략했을 때 이를 저지하지 못했고, 석륵은 뒤이어 위군 태수 왕수를 삼대에서 살해했다.
309년 3월, 사마월은 형양에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그는 거듭된 패전으로 자신의 권위가 추락했다고 여겨 근심하고 있었고 조정의 신하들이 자신에게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측근 유여, 반도가 사마월에게 무파 등을 죽이라고 권고하자, 사마월은 마침내 무파 등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무고하고 3월 26일에 평동장군 왕병을 파견하여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인솔해 궁궐로 난입해 황제의 눈앞에서 무파 등 10여 명을 끌고 가 참수했다.
회제 사마치는 황태제였을 때 무파와 친하게 지냈고, 즉위한 후 무파를 중서감으로 삼으며 무파의 동생 무윤을 태복경으로 삼아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사마월이 그들을 황명을 사칭해 멋대로 죽여버릴 때 이를 막지 못하고 단지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또한 사마월은 최근 들어 사건을 일으킨 것은 대부분 궁전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궁궐에 숙위하는 사람 가운데 후작을 가진 사람을 전부 파면시켰으며 자신의 부하인 하륜과 왕병에게 동해국의 군사 수백명을 맡겨 궁궐에서 숙위하며 황제를 감시하게 했다.
309년 여름 한나라 황제 유연왕미, 유총, 석륵에게 낙양 공략을 맡기자, 사마월은 이를 막기 위해 회남 내사 왕광, 장군 시융, 조초를 파견해 그들을 막게 했다. 왕광이 황하를 건너 적을 공격하려 하자 시융이 말렸다.

저들은 험한 지역의 틈새를 보아가며 나오니 우리는 비록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지만 오히려 한 부대만이 적을 맞게 됩니다. 마땅히 물로 막으며 견고하게 하면서 형세를 헤아려 보고 그런 다음에 그들을 도모해야 합니다.

왕광이 화를 내며 말했다.

그대는 많은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하는가?

시융은 물러가면서 말했다.

적은 용병을 잘하는데 왕광이 사태의 형세에 아둔하니, 우리들은 오늘 반드시 죽겠구나!

과연 그 예상대로 태행사에서 적과 맞붙은 왕광의 군대는 유총에게 대패했고 시융과 조초는 전사했다. 이후 유총은 둔류, 장자를 격파하고 1만 9천 명에 달하는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후 8월에 유총이 낙양으로 진군하자, 사마월은 평북장군 조무 등에게 이를 막게 했지만 유총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유총이 거듭된 승리에 오만해져 방비를 해두지 않다가 9월에 홍농태수 원연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밤에 유총의 군대를 습격해 대파시킨 덕분에, 사마월은 가까스로 낙양을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왕준이 기흥과 선비족인 단무물진을 파견해 석륵을 비룡산에서 공격해 격파했다. 이에 한나라 황제 유연은 10월에 유총과 왕미, 유요, 유경을 파견해 5만 기병을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사마월은 이들을 상대로 결사적으로 항전해 승리를 거두고 적의 장수 호연랑의 목을 베었다. 이에 유연은 아직 낙양을 공략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렇듯 외적을 상대로 분투해 낙양을 지켜낸 사마월이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빗발쳐 진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는 갈수록 관중 일대를 잠식하며 낙양을 위협했으며, 사마월로부터 낙양으로 올라와서 국가를 수호하라는 지시를 받은 각 봉국의 왕들은 이를 무시했다. 사마월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석륵을 치겠다고 건의했다. 이에 회제 사마치가 물었다.

지금 흉노 오랑캐가 침입하여 경기 지역 근교를 압박하여 사람들은 굳건한 의지를 갖지 못하고 있소. 조정과 사직은 공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멀리 나아가 뿌리를 외롭게 할 수 있겠소?

사마월이 대답했다.

신이 출동하여 다행히 적을 격파하면 나라의 위엄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니 오히려 앉아서 곤궁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후 사마월은 11월 15일에 갑옷 입은 병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허창으로 진군하면서 아내 배씨와 세자 사마비, 용양장군 이운, 우위장군 하륜을 낙양에 남겨뒀다. 또한 구희에게 명령해 왕미, 석륵을 공격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구희는 청주로 진군하여 왕미의 부하 조억을 공격했으나 311년 1월 14일 조억에게 패배해 고평으로 달아났다. 이에 하남윤 반도, 상서 유망 등이 구희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참소하자, 이 소식을 접한 구희는 화가 나 표문을 올려 반도 등의 수급을 내놓으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마원초(사마월)는 재상이 되어 공평하지 아니해 천하를 혼란스럽게 했는데, 나 구도장(구희)이 어찌 옳지 않은 사람에게 부림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구희는 마침내 격문을 여러 주로 보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며 사마월의 죄상을 늘어놨다. 이때 회제 사마치 역시 사마월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며 조명을 어기는 걸 싫어했고, 앞서 자신의 측근들을 자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해버린 만행을 보며 사마월에게 원한을 품었다. 게다가 사마월이 남겨놓은 장수 하륜 등이 신하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공주들을 능욕하는 짓까지 저지르자, 황제는 마침내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비밀리에 구희에게 서신을 보내 사마월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구희가 자주 황제와 문서를 주고받자, 이를 의심한 사마월은 유기에게 이를 엿보게 했다. 마침내 황제와 구희가 밀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마월은 구희의 죄상을 폭로하는 격문을 각지에 보내고 종사중랑 양모를 연주자사로 삼고 서주자사 배순과 더불어 구희를 토벌하게 했다. 구희는 이에 맞서 기병을 파견해 반도를 잡으려 했으나 반도가 도망쳐버려 무위에 그쳤고, 대신 상서 유증, 시중 정연을 잡아 목을 베었다.
사마월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신을 황제가 모살하려 했다는 것에 분노하다가 중병에 걸려 311년 3월 19일 사망했다. 낙양에 있던 사마월의 심복 태위 왕연, 용양장군 하륜, 이군 등은 사마월의 미망인 배씨와 함께 사마월의 상중을 감추고 그 아들 진군장군 사마등을 받들어 동해로 가려고 했다.
이때 귀족, 고관, 백성, 군사 등 10만여명이 함께 낙양을 탈출하여 동해로 떠났는데, 도중에 석륵에게 습격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노예로 팔린다. 사마월의 관도 부서지고 시체는 끌어내어져 불태워졌다. 배씨는 노예로 팔렸으나, 도망쳐 사마예에게 의탁했다. 사마예는 동진을 건국한 후 사마월에게 시호로 효헌(孝獻)을 내리고 자신의 3남 사마충(司馬沖)을 동해왕에 봉해 사마월의 양자로 삼았다.

3. 평가


팔왕의 난의 최종 승자라고 하지만, 서진의 관뚜껑을 닫아버린 것도 사실 이 사람으로 인함이었다. 물론 여기저기 간보며 승자편 들며 살던 종친으로는 사마융이 있고, 이놈 저놈 간보며 이용해먹고 뒷통수치기로는 사마옹도 상당했지만, 저 두 가지를 더 사악하게 해 먹은 인간으로는 둘 다 사마월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낙양에서 잘 버티고 있있던 장사왕 사마예의 뒷통수를 제대로 친 것도 이 사람이요, 지방 세력에 이민족까지 끌어들여서 성도왕 사마영의 뒷통수를 제대로 친 것도 이 사람, 그리고 장방만 죽이면 타협을 할 것같이 해 놓고 하간왕 사마옹의 뒷통수를 친 것도 이 사람이었다. 이런식으로 자기 권력을 위해서 여기 저기 음모꾸미고 통수를 쳐 댄 결과로, 이 자가 실세가 된 이후 서진은 정말로 제대로 남은 게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방 군벌들은 거의 반쯤 독립해서 나가버리고, 이민족 군대는 중원 한 가운데로 들어와서 개판을 만들고, 거듭되는 외침과 내전으로 나라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버리는 등....
회제 즉위 이후 밀려들어오는 유연과 유총의 흉노 군대를 막느라 고군분투했다지만, 이게 순전히 자기가 싸 놓은 똥의 댓가를 치루는 거라서 대단하게 봐 줄 것도 못 된다. 그리고 이 인간이 사직을 생각해서 그랬다기 보다도 어차피 잘못되면 자기가 죽으니 그랬을 거라는 점에서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유곤이나 왕준이나 구희가 자기 나와바리 지키려고 석륵이나 유총, 왕미를 필사적으로 막은 것과 비교해서 별로 나을 것도 없는 행위라는 것.... 진짜 사직을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애시당초 장사왕 사마예를 그렇게 죽이지도 않았고, 성도왕 사마영을 친다고 선비족을 대거 끌어들이지도 않았을테니 변명거리도 없다. 애시당초 자기 권력욕 때문에 여기 통수치고 저기 척지고 해가면서 서진을 콩가루를 만들어서 영가의 난 때 이민족 군대가 대규모로 침공해왔음에도 지방 군벌들이 중앙 정부를 도와줄 생각을 안 한 것도 애시당초 이 인간이 했던 악행에 대한 결과였다. 이 인간이 했던 여러 통수 짓거리들을 보면서도 얘를 믿고 군대를 보내 줄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테니.... 회제가 구희에게 이 인간 토벌하라고 밀서를 보낸 일을 가지고 '사직을 지키려는 사마월의 뒷통수를 쳤다' 라고 하기도 힘든 것도, 이 인간이 괜히 회제의 측근들을 죄다 죽여버리면서 회제의 손발을 자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놔 뒀으면 유총 석륵보다도 더 회제에게 생명의 위협이 되었을 인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저랬으니, 석륵에게 잡혔을 때 임성왕이었던 사마제가 사마월의 관을 태우면서 "세상이 이 꼬라지가 된 건 다 너님 때문임..."이라고 극딜한 건 아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 그냥 저게 딱 당시 서진의 지배층들에게 보인 사마월의 평가였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자기 권력을 잡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며 이기적으로 행동했지만, 그 행동의 결과로 수많은 사람들한테 원한을 사 자신에게 돌아올 파이를 극단적으로 줄여버린데다, 자신도 분사해 버린 케이스이니 인과응보라면 인과응보가 제대로 이뤄진 셈이다.

4. 미디어 믹스



4.1. 토탈 워: 삼국




4.2. 김진명 고구려




5. 둘러보기




[1] 자는 계달(季達)[2] 자는 자서(子舒)[3] 원(元)은 고밀문헌왕의 아들들에게 돌림이름처럼 붙은 것이고 초(超)는 이름과 뜻이 같다.[4] 자는 양중(陽仲)[5] 대리 상서령[6] 사마월의 고모의 아들이다.[7] 사마영의 관을 꺼내 수레에 싣고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를 아뢰었다고 한다.[8] 사마영의 관은 후에 사마영의 옛 신하들이 거두어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