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진)

 


'''진(秦)나라 28대 국군
제2대 왕
무왕
武王
'''
'''생몰'''
기원전 329년 ~ 기원전 307년
'''재위'''
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
영(嬴)
''''''
조(趙)
''''''
탕(蕩)[1]
'''부모'''
부왕 혜문왕, 모후 혜문후
'''형제'''
이복동생 소양왕
'''왕후'''
도무왕후
'''자녀'''
없음
1. 개요
2. 장의와의 관계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4. 허망한 죽음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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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의 제28대 군주이자, 제2대 왕. 혜문왕의 아들이자 소양왕의 이복형. 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젊은 나이에 힘을 과시하려고 구정을 들어올리는 차력쇼를 하다가 구정에 정강이를 찧어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유일한 진나라의 한 글자 시호 왕이다.[2] 하지만 두 글자 시호인 도무왕(悼武王)[3], 무열왕(武烈王)[4], 원무왕(元武王)[5]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마도 무왕이라는 시호는 약칭 시호인 듯.

2. 장의와의 관계


혜문왕이 죽자 그 장남인 그가 이으니 무왕이다. 무왕은 힘센 장사를 좋아하여, 임비(任鄙)와 오획(烏獲)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문사인 장의(張儀)는 찬밥 대우했다.

3.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진 무왕 원년(기원전 310년), 무왕의 속마음을 알아챈 장의가 말했다.
"제나라 왕이 신을 미워합니다. 신은 위나라로 가서 제나라위나라가 서로 싸우게 하지요. 그 틈을 노려 한나라를 치시면 삼천 땅을 통과해 주 왕실을 도모해보시지요."
아무리 장의를 싫어하는 진무왕이었지만 그 말은 그럴 듯 하다고 여겨 장의를 위나라로 보냈다.[6] 그리고 과연 제민왕이 위나라를 쳤으나 장의가 풍희를 보내 설득해 제 민왕은 위나라를 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장의는 위나라로 망명한 지 1년 만에 죽었다. 그리고 촉의 상국 진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주살했다.
진 무왕 2년(기원전 309년), 처음으로 좌우 승상을 두었는데, 우승상에는 저리질(樗里疾), 좌승상에는 감무(甘茂)가 올랐다. 진 무왕이 한나라를 치려할 때 저리질이 위나라와 조나라가 도울 거라며 반대했으나 감무가 위나라에게 구원 요청을 하러 나섰다.
진 무왕 3년(기원전 308년), 감무가 위나라에 구원을 청하는데 성사되어 같이 한나라를 쳤다. 감무가 도중에 되돌아오니 진 무왕이 의심스러워 물었다. 그러자 한나라가 생각보다 수비가 탄탄해서 그랬다고 해명하자 진 무왕은 그 말에 따랐다. 그리고 과연 치면서 함락시키지 못해 반란의 조짐이 일어나자 감무의 말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5만 원병과 장수 오획 등을 보내니 사기가 충천했다.
진 무왕 4년(기원전 307년), 위군은 의양성을 함락시키니 6만 수급을 얻고, 황하를 건너 수수에 성을 쌓았다. 한양왕은 공중을 파견해 진나라에 사죄했다. 무왕은 그것을 받아 주었다.

4. 허망한 죽음


같은 해 8월에 주나라 도읍 낙양을 찾았다가 유명한 역사들인 맹열(孟說)과 임비(任鄙), 오획(烏獲)과 함께 구정 들기 내기를 했다. 오획과 임비는 젊고 혈기왕성한 무왕의 지기 싫어하는 성깔을 잘 알았기에 "저희는 힘이 약해 감히 솥을 들 엄두도 안 난다"며 뒤로 뺐다. 그런데 맹열은 "쟤들은 못 드는 것,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하며 눈치없게 나서서 솥을 들어버렸고, 발끈한 무왕도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정을 들 뿐만 아니라 걸어 보이겠다며 나섰다. 무왕은 구정을 들기는 들었으되 어찌나 힘을 썼는지 눈에서 피가 나왔고, 한 걸음을 떼자마자 힘이 빠져서 '''오른쪽 발 바로 위에 구정을 떨어트렸다(!)'''. 정강이가 잘려나간 무왕은 그날로서 과다 출혈로 죽고 말았다. 향년 23세. 그래서 연나라에 인질로 간 아우 영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양왕이다. 결국 맹열은 사지가 찢겨 죽고 삼족이 멸족당했으며, 무왕을 뜯어말린 임비는 한중 태수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5. 평가


비록 객기를 부리다 어이없이 사망하긴 했으나 아버지인 혜문왕과 이복동생 소양왕 못지 않게 유능한 인물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승상 제도를 도입한 인물이었고 감무를 중용해 한나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시키는 등 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 사기색은(史記索隱) 진본기(秦本紀)에 기록된 이름.[2] 칭왕 하기 전에는 한 글자 시호만 썼다. 진여공공 빼고.[3] 사기 진시황본기(史記 秦始皇本紀).[4] 세본(世本).[5] 월절서(越絕書).[6] 다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안 그래도 장의를 숙청하려고 했는데, 장의가 선수를 치자 그대로 들어준 걸로 봐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