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1. 개요
주를 국가 이름으로 쓴 국가들. 시대 순으로 배열한다.
2. 周
2.1. 선진시대의 주나라
[clearfix]
2.1.1. 개요
周
기원전 1040년 즈음에 멸망한 상나라를 이어, 약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중국에서 존재한 고대 국가다.(기원전 1100년대 ~ 기원전 256년) 통칭 희주(姬周). 중국의 인문주의, 천(天) 사상, 그리고 세계 체제 등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주나라'라고 하면 이 나라를 가리킨다.
역사서 사기에 따르면, 사마천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가 기원전 841년에 주목했던 이유는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828년까지는 공백화가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공화시대(共和時代)라고 칭한다.[4]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았고 사기에 12 제후 연표를 세웠는데, 이 시점부터 연대에 따른 기록은 상세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원전 841년은 중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다.
한편 문헌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발굴의 성과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은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고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주나라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가 기록된 청동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문자로 구성된 기록과 더불어 그 당시 관측되었던 천문 현상도 함께 병기되어 있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록된 천문현상의 날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중국 내외의 수많은 학자들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찌른 연도(무왕극상년)를 추정하고자 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여러 신빙성있는 학설들은 기원전 1100년대를 집중적으로 지목하나, 다른 연대를 추정하는 학설들도 여럿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하여 주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46년으로 산정하였으나, 무왕극상년 외에도 주나라 왕들의 재위 기간에 대한 추정은 쇼우네시 등 구미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맞지 않으므로 공정에 참여한 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인 학자들 그리고 서양 학자들 간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5]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적어도 조선 시대 이후부터) 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00년 앞뒤 정도로 여겼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기인된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교과서에서도 주의 전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세기 초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재미 한국인 사학자 방선주는 기원전 1030년을 주장했다.
2.1.2. 서주: 등장과 통치의 기틀
본래 유목민의 기질을 지닌 세력이 고공단보 대에 중국 서쪽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주문왕 시대에 국(國)으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이후 무왕 시대에 상나라 왕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으며, 주공 단(周公旦)과 성왕(주)의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는 주와 연합한 여러 세력이 함께 행동하였으므로 주만의 우위를 주장하기 어려웠는데, 이는 성읍 국가 단계에 머문 채로 단순히 타 국가의 상위에 서 있던 상과 달리 갑작스레 통치 범위가 넓어진 주로서는 주위의 독자적인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몰아낸 뒤 주나라는 결코 만만치 않았던 은의 잔존 세력을 달래야 했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한데 모아 주나라에 협조적이었던 상나라의 왕족인 미자계에게 공작의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이루게하였고, 송나라를 형식상으로 주나라의 복속하에 넣었다. 나아가 상의 세력이 강력했던 낙읍은 주나라 대에도 제2의 수도로 남았다.
주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고대 국가로서 강력한 힘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중앙 집권 제도를 시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따라서 주나라는 차선책으로 주나라 본국을 지지하는 공신이나 친족들에게 작위를 주어 지방을 통치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유지 및 운영하였다. 이렇듯 주나라는 넓은 영토를 나누어 유력자들에게 영지를 내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도록 하는, 이른바 봉건제도가 시행된 것이었다.
봉건 제도의 기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존재하고, 순서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으로 이루어진 오등작을 유력 세력들과 왕 사이의 친밀도, 전략적인 중요성, 군공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그들을 수순에 맞게 책봉한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후들, 즉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되게 되었다. 이들은 국(國)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후들도 내부의 공신들을 책봉하였는데, 이들은 경(卿) 혹은 대부(大夫)로 불렸으며, 가(家)를 수여받았다. 다시 가 내부에서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서 사(士) 계층이 생겨났고(다만 사 계층은 최하위 계층이었던 만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단순하게 식읍 정도를 수여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주 대에는 읍(邑)이 행정의 최소 단위였으므로 더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주나라의 분봉은 주왕실 일족(동성제후)가 약 56개 국, 그렇지 않은 귀족(이성제후)가 약 70여개국으로 추측된다. 각 제후국은 중심지인 도성을 거점으로 가까운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의 성읍 국가였으며 후대와 같은 영역 국가가 아니었다. 전체 제후국은 약 130~180개국이었다고 추산된다.
한편,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6]
고대 국가의 특성상, '''상나라와 주나라의 교체 또한 기본적으로 국가의 신神의 교체를 불러오게 되었다.''' 본래 상이 숭배하던 신은 제(帝) 혹은 상제(上帝)였으나, 주 대에는 천(天), 즉 하늘이 신으로서 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의 성읍 국가에서 중국 전역을 주관하는 봉건제로 통치의 성격이 달라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신의 성격 또한 '통치 계급만의 신'에서 '세계 질서의 신'으로 재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천은 통치자에게 운명 혹은 사명을 수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명(天命)이라고 하였으며, 왕은 천으로부터 천하(天下)를 수여받아 천자(天子)로서 통치를 수행하게 되었다. 만약 왕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이는 본래 은-주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었으나, 후에 맹자를 위시한 제자백가의 사상의 일환으로 흡수되었다.
물론 왕뿐만 아니라, 각 지위에 오른 모든 통치자는 제 각기 나름대로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수여받았으므로 제 역할을 다해야 하였다. 왕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고, 제후는 국을 다스리며,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고, 사는 식읍을 받아 스스로를 수양하여 국가에 이로운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그들에게 내려졌던 사명이었다. 이를 한자화하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다. 즉, 뒷날에 성리학의 성립에서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을 지니게 되었던 이 말은 본래 주나라의 통치 체계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뜻을 지닌 말이었다.
한편 통치 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도, 상 대의 불분명한 계승을 넘어 종법 질서가 확립된다. 즉 맏아들은 대종(大宗)이 되어 해당 직위를 계승하지만, 그 이외의 아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대종의 신하로만 활동할 수 있게 된다(따라서 실질적으로 계층의 하락이 일어난다). 이러한 가부장적인 계승 체계는 조상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되는데, 이러한 제사의 묘제를 확립하여 실현한 공간이 종묘이다. 형식상 성씨가 다른, 즉 전혀 다른 계통의 제후들도 주나라의 소종으로서 친(親)의 질서 내에 포괄되어 있었다.
천명론과 종법 질서 등의 등장으로, 주의 성격은 '''은대의 신정일치 국가에서 보다 인문주의적인 국가로서 발전한다. 즉 현실 통치가 무력화되면 주의 권위는 신정으로서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통치를 위해 주의 천자는 회맹(會盟)이라는 절차를 통해 군사력을 확보하고, 주 질서에 어긋나는 제후들을 토벌하였다. 이를 통해 초기 3감의 난 등을 진압하면서 주의 통치는 한동안 확고해졌다.
한편 민간에서는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읍락 공동체가 확립된 것으로 생각되며, 토지 신으로서 사(社)를 섬겼다. 또한 읍락 단위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중 9분의 1을 거두는 정전제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그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 시(시경), 서(서경) 등이 존재한다고 하여 은주 시대를 가리켜 시서 시대라고도 부르나, 편집자인 공자에 의해 일부 사료만이 취합되거나 변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2.1.3. 동주#s-1
2.1.3.1. 춘추시대
그러나 긴 시간이 흐르자 '''공신과 친족들이 세운 제후국과의 사이도 멀어졌고,[7] 자연히 주 천자의 회맹 소집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 이민족들도 날로 강성해져서 상대적으로 혼자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주나라는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유사시엔 봉화를 올리는 제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포사의 거듭된 사기 봉화 행각으로 막상 견융의 침략이 일어나자 봉화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제후국의 군대는 소집되지 않았다.[8] 때문에 수도인 호경이 공격을 받아서 거의 멸망하다시피 쑥대밭이 되고, 기원전 771년 평왕 때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한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하며, 춘추전국시대가 개막한다.
수도를 잃었으니 동주 시대부터는 천자의 권위가 극도로 미약해졌다. 이는 당연한 일인 것이 본국 지역인 옛 주나라 지역은 후에 제후국인 진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사실상 버려진 상태였고, 빈털터리가 된 채 동쪽으로 이동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 결과 상대적으로 제후의 힘이 강해졌으나,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제후국은 대체적으로 주의 왕이 천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의 침입은 주 천자뿐만 아니라 제후에게도 큰 위협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하고 당시의 세계 질서를 깨뜨리기는 힘들었다. 서쪽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초(楚)나라가 서주 시대부터 주나라의 책봉을 무시하고, 왕을 칭하며 제후국들을 병탄하며 성장하고 있었다[9] . 이 때문에 힘을 결집할 필요가 생긴(하지만 주 천자의 말을 듣기는 싫은) 제후들 중에 힘의 우위에 선 자가 천자를 대신해 회맹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패자는 기본적으로 명분상 왕을 보전하고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가 책봉했으나 이민족에게 멸망당한 제후국들이 그 지위를 이어가게 한다는 계절존망(繼切存亡)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그 사명으로 선전했다. 즉, 기본적으로 중화사상의 수호와 주 천자의 책봉 질서를 보전하는 것을 형식상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민족인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 등이 점차 중국 내부의 상황에 깊이 관여하고 스스로 패자를 자처하기까지 하는 등 이민족과 중국의 구분이 힘들어지면서 무력화되어 갔고, 패자의 의미도 퇴색되어 갔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자는 패자였던 제환공을 찬탄했지만, 맹자는 그런 거 없이 '패자 몹쓸 놈들 ㅉㅉㅉ' 하고 실컷 깠다.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부분.
이 시대 등장한 가장 유력한 사상가로는 단연 공자를 빼놓을 수 없는데, 특히 공자는 춘추 시대의 현시창을 한탄하며, 주나라의 크고 아름다운 기풍을 현실 속에서 되살리기를 평생토록 갈망했다.[10] 그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주 질서에 어긋나는 예를 뽑아내 지적한 것이 현재 전하는 춘추인데, 주 질서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이 책의 이름이 이 시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서 확립된다. 이외에 노자가 이 시대 사람이라고 하나 사실 여부가 불명확하고, 남겨진 저서에서도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사상가를 떠나, 이 시대는 이민족에 대한 경계와 전쟁으로 인해 중화사상이 강고하게 재확립된 시기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 월, 초, 진(秦)나라 등의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에 서서히 진입하면서 마침내는 중국의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판도는 주나라 대의 것을 훨씬 넘어 거대해졌고, 자연히 주의 통치 질서도 무력화되었다.
2.1.3.2. 전국시대
주나라의 질서가 소실되어 다들 제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자 다투는 시기.
우선 전국시대가 시작된 것 자체가 진(晉)나라가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의 세 나라로 쪼개진 것으로 산정된다. 기원전 453년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하여 주 천자는 50년간 손을 쓰지 못하다가 기원전 403년에 들어 그는 결국 진의 붕괴와 세 나라의 건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국의 폐지와 건립을 명하는 역할이 주나라 천자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시사하였으므로, 주나라의 완전한 무력화를 의미했다.
이 이후 각국은 서로를 힘 닿는 대로 병탄하며 부국 강병을 추진했으며, 전투의 양상도 귀족들만의 전차전을 넘어 더욱 더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으므로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집단 지배 체제를 넘어 인민에 대한 개별적 지배(와 이를 통한 백병전)의 필요성이 높아졌는데, 이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군현제는 초나라와 같이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제후국을 병탄한 뒤, 낯설은 주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나서 대신 도입한 통치 체제에서 유래한 새로운 통치 제도로 여겨지는데, 기원전 4세기 법가가 주도한 변법(變法)을 통하여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한편 정전제가 실존했다면, 봉건제는 집단 지배 체제에서 개별적 인민 지배 체제로 이행되었던 이 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주나라의 질서를 아예 뿌리 뽑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주는 완전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당연히 스스로의 질서에 가장 강고하게 매달려야 했던 주나라는 변법을 주도하고 여러 국들을 병탄할 수 없었다. 한때 주나라 군주가 신적인 제(帝)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제(齊)나라가 제(帝)를 자칭했다가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지탄을 받자, 제나라가 명목상으로 "동제(東帝)로 불리고 주나라는 서제(西帝)로 불리도록 각국의 정상들에게 제시하였던 타협안의 결과였을 뿐, 주나라가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상적으로 주나라의 약화를 잘 증빙하는 예는 바로 유가의 태도 변화다. 주 질서의 회복을 부르짖고 제후들을 지적하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주 천자를 포기하고 각국의 왕과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천자를 간절히 요구하였다. 즉, 주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질서의 회복은 어제 낮잠에서 꾸었던 봄날의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주의 복원이기는 하였지만, 유가가 주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한 것은 주의 위상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잘 시사한다.
설상가상으로,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전국 시대 후기인 난왕의 치세에 주나라는 동주와 서주로 분열되어 서로 전쟁을 벌이기까지 한다. 스스로 품위를 깎아먹는 이러한 짓에 전국칠웅 역시 이들에 대한 존경은커녕 멸시하고 이용하려고만 했는데, 역시 난왕 치세에 한나라가 초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동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려 한다. 이를 막을 힘도 없던 주나라는 두려움에 떨었는데 이때 주나라를 섬기던 소대라는 신하가 한나라를 찾아가 이들을 설득하여 징발을 중단하고 역으로 땅을 얻어오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한나라는 소대를 만나서 '''"아니 징발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내가 왜 거기에 땅을 줘야 함?"''' 이런 반응이었다. 소대의 뛰어난 말솜씨로 결국 주나라는 한나라에게 땅을 얻어올 수 있었지만, 이는 명색이 제후들의 위인 주나라가 제후들에게 섬김을 받기는커녕 전국 칠웅 중 최약체였던 한나라한테까지 멸시당하고 물자를 바쳐야 하는 안습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이후 이들은 진나라, 한나라, 위나라에 빌붙으며 명맥을 이어가려 하나 결국 서주는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동주는 장양왕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렇게 주나라는 망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으나,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일어서고 90여 년 뒤에 천자가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서 그 땅을 주어서 다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였다.
2.1.4. 주나라의 유산
이후 봉건제도 군현제에 밀려 거의 소멸하지만(한나라 초기에 군국제로 부활한 정도) 주나라가 남긴 유산은 매우 크다. 특히 일개 성읍 국가에 머무르는 신정 일치 체제를 넘어, 타 지역과 타국에 대해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치하는 세계 체제의 형성은 장기적으로 통일 중국을 마련하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내부의 봉건제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 외부에도 중국식의 통치 질서를 이식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책봉 - 조공 체계의 근간이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 이들 중에는 중국으로 흡수되는 이민족도 존재했다.) 이렇게 형성된 중국 질서에 대한 인식은 청의 외교가 붕괴하는 19세기 말까지, 대략 '''3000년'''간 지속된다.
통치 질서 외에도, 주나라는 인문주의적인 사상의 기틀과 현실적인 정치 체계, 가정 및 종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 중국 고대 질서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화되기는 했지만, 유가에서 상정하는 하 - 은 - 주 이상 시대의 이미지도 대체로 주 대의 통치 체계에 근간을 두었다.
대표적으로 맹자가 제시한, 왕 - 제후 - 대부 - 사가 제 역할을 똑바로 지키고 민간에서는 정전제가 시행되는(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논할 것이 많지만) 기본적인 이상 사회의 상은 주나라의 것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 제론과 정전 제론도 당연히 주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현실에서는 왕망이 주 대의 군주 칭호였던 '왕' 칭호의 권위 회복과 정전제의 재건을 시도했다...쫄딱 망했지만. 또한, 주나라의 관제는 전근대 중국왕조들과 고려, 조선의 관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천에 대한 숭배와 천하, 천자라는 용어 또한 근 3000년간 계속해서 사용되는 관용적 문구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보편적인 '하늘 신'이라는 의미가 강한 점도 있고 은의 상제 또한 후대에 계속 남아 신으로서 모셔지지만, 천명론을 비롯한 천에 관련된 이론은 이후 동양 질서에 크나큰 영향을 남기게 된다.
2.1.5. 역대 군주
연대는 모두 기원전. 단 21세기의 중국을 제외한 대다수 근현대의 학자들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으며, 기원전 841년 이전의 왕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니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게 좋다.
2.1.6. 계보
2.2. 소주(小周)
흔히 주나라(周國)과 구별하여 소주(小周) 또는 주읍(周邑)이라고 부른다.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으며 지금의 섬서성 기산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작위는 공작이었다. 소(召), 괵 등과 함께 주나라의 원로 관직이었으며 시조인 주공 단은 주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이었다. 그는 은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노나라를 분봉받았지만 멀리 있던 노나라를 직접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남 백금을 대신 노나라에 보내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주나라 멸망 시기즈음 멸망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멸망시기는 알 수 없다.
2.2.1. 역대 군주
역대 군주들의 남은 기록이 상당히 부실하다.
2.3. 북주(北周)
557년 공제의 선양을 받아 우문각(宇文覺)이 건국하였다. 과거의 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북주''', 우문주(宇文周), 호주(胡周)라고 부른다. 제3대 황제 무제 시대가 전성기이며, 577년에 북제(北齊)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무제가 35세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면서 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제4대 선제는 폭군으로 신망을 잃었고, 선제 사후 양견이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581년, 정제(靜帝)가 양견에게 선양하면서 24년 만에 멸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북주 참조.
2.4. 무주(武周)
당의 측천무후가 제위에 오르고 당을 대신하여 내세운 국호로, 국호 자체는 주이다. 중국 역사 상의 수많은 주나라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측천무후의 성을 붙여 무주라고 부른다. 실질적으로 당의 연장선상이나 다름없었으며, 후계자도 측천무후와 당 고종의 자식이라 사실상 당 혈통. 무엇보다도 얼마 안 가 측천무후가 퇴위했기 때문에, 별개의 왕조로 보지 않기도 한다. 이 시기에 쓰인 한자로 측천무후가 제정한 측천문자가 있다. 물론 측천문자는 당으로의 복귀와 더불어 거의 쓰이지 않게 된다.
기존 통일 왕조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선 왕조이지만 없는 셈 쳤다는 점에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s-3와도 비슷하다. 신나라는 한나라#s-3.2의 허리를 자르고 들어섰다가 망했고 전근대 역사가들이 따로 독립된 왕조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주와 비슷하다. 하지만 측천무후의 정치는 오늘날 재평가가 이뤄져 긍정적 측면도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아예 재평가 없이 흑역사 취급되는 왕망의 신나라와 다른 점도 있다.
한편 이 시기 당의 기미 통치가 무너졌고, 698년 영주에서 동모산으로 이동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다.
2.4.1. 역대 황제
2.4.2. 추존 황제
2.5. 후주(後周)
- 후주 참조.
2.6. 장주(張周)
원말명초 장사성이 소주에 세운 할거 국가로 주원장에게 패해 멸망됐다.
2.7. 오주(吳周)
주('''周''') 또는 초대 황제인 오삼계의 성을 따 오주(吳周)라고도 부른다. 1673년 오삼계가 삼번의 난을 일으키고 1678년 황제를 칭하면서 1681년 오삼계의 손자인 오세번이 쿤밍에서 청군에 포위되어 자살한 때까지 존속한 국가였다. 정통 왕조로는 보지 않는다.
2.7.1. 역대 황제
2.7.2. 같이보기
3. 邾
3.1. 개요
춘추시대 있었던 나라. 주루국(邾婁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동 추촌에서 위치했던 제후국으로 성씨는 조씨(曹氏). 작위는 자작이었다.
3.2. 역사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에 조협(曹挾)을 주(邾) 땅의 제후로 봉하였다. 노나라(魯)와 이웃하며, 노나라에 의해서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환공의 위세로 군사 원조를 보내거나 회맹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입지가 불안했던지 수도를 비, 추, 등, 제녕, 금향 등으로 전전했다. 추(鄒) 땅으로 이주하고 국호를 추(鄒)나라로 개명했다. 전국시대 초 중기 초나라에 병합되었다.
이래저래 듣보잡이지만 역사적 의의가 딱 두 가지 있다. '''맹자가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조참과 조조가 이 나라 제후의 후손이다'''.
3.3. 역대 군주
- 1대: 주자 협(邾子挾)
- 2대 : 주자 비(邾子非)
- 3대 : 주자 성(邾子成)
- 4대 : 주자 거보(邾子車輔)
- 5대 : 주자 장신(邾子將新)
- 6대 : 주자 자보(邾子訾父)
- 7대 : 무공(武公) 이보(夷甫) - ? ~ 기원전 796년, 자보의 아들.
- 8대 : 주자 숙술(邾子叔術) - 기원전 795년 ~ 기원전 781년, 무공의 아우.
- 9대 : 주자 하보(邾子夏父) - 기원전 780년 ~ ?, 무공의 아들.
- 10대 : 미상
- 11대 : 안공(安公) 극(克) - ? ~ 기원전 678년, 하보의 손자.
- 12대 : 헌공(憲公) 쇄(瑣) - 기원전 677년 ~ 기원전 666년, 안공의 아들.
- 13대 : 문공(文公) 거제(蘧蒢) - 기원전 665년 ~ 기원전 615년, 헌공의 아들.
- 14대 : 정공(定公) 확저(貜且) - 기원전 614년 ~ 기원전 573년, 문공의 아들.
- 15대 : 선공(宣公) 경(牼) - 기원전 572년 ~ 기원전 556년, 정공의 아들.
- 16대 : 도공(悼公) 화(華) - 기원전 555년 ~ 기원전 541년, 선공의 아들.
- 17대 : 장공(莊公) 천(穿) - 기원전 540년 ~ 기원전 507년, 도공의 아들.
- 18대 : 은공(隱公) 익(益) - 기원전 506년 ~ 기원전 487년, 장공의 아들.
- 19대 : 환공(桓公) 혁(革) - 기원전 487년 ~ 기원전 473년, 은공의 아들.
- 복위 : 은공 익 - 기원전 473년 ~ 기원전 471년
- 20대 : 주자 하(邾子何) - 기원전 471년 ~ ?, 은공의 아들.
- 21대 : 공공(共公) 우(盂) - ? ~ ?, 은공의 손자.
- 22대 : 누고공(婁考公) 량(良) - ? ~ ?, 은공의 증손.
- 이후 불명
- ?대 : 세공(世公) 구(艽) - 전국시대 시기
- ?대 : 역공(易公) 공보(孔父)
- ?대 : 목공(穆公) 각(胳)
- ?대 : 정공(静公) 아(牙)
- ?대 : 소공(蕭公) 항(夯)
- ?대 : 주백 토(邾伯討) - 주나라 마지막 군주. 자는 어융(御戎).
4. 州
춘추 시대에 있었던 나라. 호북성 감리현 동쪽에 위치했다. 초나라에게 멸망된 것으로 추정된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한어 발음은 tiw, 현대 중국어로는 Zhōu. 周는 현대의 한자이며 서주 시대의 금문으로는 다음과 같다.[2] 봉건제 특성상 수도와 그 근교 지역만 직할 통치하고 나머지는 제후들이 통치했다. 그리고 초, 오, 월, 이 등의 나라들은 원래는 주나라와 별개의 정체였을 것이며, 언제부터 주나라의 통치 질서에 편입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상고하기는 어렵다.[3] 단, 주나라 사람들은 상나라에 비해 세속적으로 변했다.[4] 이 공화시대는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오늘날에는 Republic(공화국), Republicanism(공화주의)를 번역하는 낱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공화'라는 말이 공백 화의 이름으로 해석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함께'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5] 이상은 심재훈, "발을 잘라 신발에 맞추기" - 하상 주단 대공정 서주 기년의 허와 실 (동북아 역사 재단, 하상 주단 대공정 - 중국 고대 문명 연구의 허와 실에 따랐다.[6] 로타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심재훈 역,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Chinese Society in the Age of Confucius (1000-250 BC))[7] 형제를 분봉했다 하더라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4촌, 6촌, 8촌, 10촌,...으로 점점 촌수가 멀어진다.[8] 기록대로 포사의 일이 결정적이긴 했으나 당시는 주의 권위가 떨어져 제후들 중 상당수는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는 주 왕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무리한 초 원정으로 왕 이하 수많은 병력이 죽은 일이나, 제 애공을 불러 삶아죽인 일 등 수백 년간 이어진 주 왕실의 삽질들이 누적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런 생각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거고 저걸 실현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중앙 정부라 할 수 있는 주 왕실의 힘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애초에 비슷한 수준에서 계약을 했는데(그렇다고 중세 유럽의 'Feudalism'과는 같지 않다. 계약은 편의상 대입한 단어일 뿐) 한쪽의 힘이 약해져서 상대방의 이해 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상대방이 좋다고 그 계약을 유지할 리 없다.[9] 그럴 만도 한 게, 초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묘족이 세운 나라다. 묘족은 영화 그랜 토리노에도 나오는 몽족의 조상격인 민족이다. 그래서 원래는 한족과는 별도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초나라는 물론, 주나라도 진나라도, 한나라도 모두 멸망한 서진 시대에나 한족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족들이 세운 질서에 순응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가면 한족들이 중심이 된 여러 제후국들과 주나라 왕실과의 교류가 큰 이득을 가져다 주는 것을 깨닫고는 뒤늦게 숟가락 좀 얹겠다고 주나라에 칭신하기 시작했으나, 이제와서 중화권 질서에 끼워달라는 초나라의 태도가 밥맛없게 여겨졌던 다른 제후국들은 초나라 측에서 자칭하는 제후로서의 작위를 쌩까고 초나라 군주를 그냥 왕이라고 불렀다.[10] 공자가 묘사한 주나라의 면면은 유가의 윤리학 및 정치철학으로 정립되고, 그리하여 한나라 이후로 2000년 넘게 유교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통치의 모델로 군림한다.[11] 상의 제후, 주 건국 후에 증손자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존.[12] 상의 제후, 주 건국 후에 손자 무왕이 왕으로 추존했으나, 시호가 실전되었다.[13] 상의 제후로, 반란을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주 건국 후에 아들 무왕이 '''문왕(文王)'''으로 추존.[14] 주 본기를 따를 시엔 공화, 죽서를 따른다면 공백화 간왕.[15] 다만, 사기색은에 따르면 난은 시호가 아니고, 정현이나 응소에 따르면 '난(赧)'의 옛 발음은 '연(延)'과 같기에 이름인 희연의 다른 표기라고 했다.[16] 오세번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