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무르시
[image]
(1951~2019)
1. 개요
이집트의 전 대통령. 이집트 아랍 공화국 사상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다. 범아랍 정당 무슬림 형제단의 당수를 겸임했고 이집트 시민혁명에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세력이자 본인의 강경 지지기반인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목소리에 합치하는 국정운영을 펼쳤다. 하지만 혁명에서의 지분이나 정파의 강경함, 선명성과는 별개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집트 내에서 자신들의 강경함만큼 강력한 힘이 없었다.
지지세력의 요구에 부응하는 무르시의 정치행보는 근본, 원리, 극단주의적 독재로 비쳐 사회전이 및 혁명변질을 우려하는 범국민적인 반발을 초래했다. 2013년 이래로 국제적으로 서서히 악명을 떨치고, 아랍에선 이미 마각을 드러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에 대한 공포가 아랍과 서아시아를 흉흉하게 만들자 핵심 지지기반을 제외하고 무르시 정부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무르시 민선정부는 이를 타개할 국정장악력을 공포정치에서 찾는 우를 범한 끝에 민선정부의 부족한 정치력, 세속주의자 및 민주화 지지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민심이반, 정적과 청산되지 않은 군부 세력의 쿠데타로 1년 만에 무너졌다.
2. 생애
1951년 8월 20일에 이집트 북부의 아드와에서 태어났다. 1975년에 카이로대학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남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재료공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5년 이집트로 돌아와 자가지크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학력과 이때까지의 경력만 보면 전형적인 이공계 엘리트출신으로 1991년 무슬림 형제단에 입당해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후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무슬림 형제단 소속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다.
2010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IAEA 사무총장과 함께 "변화를 위한 국민행동"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에는 원외정당 무슬림 형제단을 모체로 '자유정의당'을 창당하고 얼마 못 가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뒤늦게 후보가 되었다. 무슬림 형제단은 당초 카이라트 샤티르를 후보로 선정했으나 샤티르가 테러 사주 혐의로 체포되어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부랴부랴 무르시가 대체 후보로 선정되었고 2012년 6월에 열린 대선에서 51.1%를 득표하며 48.9%를 득표한 군부 출신의 이슬람 세속주의자 샤피크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 1년의 재임기간과 군부쿠데타
재임 이전 후보 당시부터 친이슬람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무르시의 취임 후 종파갈등 및 각종 사회문제 표출은 격렬한 논란과 혼돈을 불러왔다. 하지만 더 큰 혼란은 국회를 장악한 살라피스트, 무슬림 형제단이 행정부 출범 6개월 뒤 신헌법 초안을 발표하면서 일어난다.
문제가 된 초안 내용은 대통령령+선언이 최종적 권한을 지니고 어떤 기관도 대통령령을 폐지할 수 없으며 사법부의 의회 해산권을 폐지하는 동시에 국가 운영의 근간을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통령에게 입법기능을 부여하고 사법부 기능을 제한한 뒤 사우디, 이란처럼 이집트를 신정국가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는 '''"네가 무슨 파라오냐"'''는 반대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초래했지만 국민투표에서 63% 득표율을 획득해, 2012년 12월 26일에 이 신헌법은 최종 승인된다. # 부정선거를 한 결과물로, 실제 득표율은 45% 정도로 추정된다고
불안정이 지속되고 사회가 혼란해지며 민심이 모두 등을 돌리고 결국 2013년 6월 30일에 취임 1주년을 맞이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다. 3일 뒤인 7월 3일에 압델 파타 엘 시시 주도의 군부 쿠데타가 발생해 무르시 행정부는 붕괴, 대통령 본인은 연금된 직후 검찰에 기소됐다. 이후 2015년 5월 16일에 "2011년 혁명 당시 무르시가 1월 28일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이틀 만에 교도소를 탈출해 혁명에 가담하는 와중 탈옥의 배후에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있고 이와 공모해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내란행위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당하나 2016년 6월 18일에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최종적으론 최고법원의 반려를 거쳐 # 간첩 혐의로 25년형을 선고 받았다. #
4. 사망
2019년 6월 18일 재판을 받던 중에 기절했고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수감기간 무르시가 학대수준의 처우 및 고문을 받았다는 많은 증거가 이집트 국내·국제여론에서 묘한 반응을 끌어냈다. 심정지 후 단 1시간 만에 시신을 매장한 정부의 졸속 대응에 UN은 독립진상조사단 구성을 주문했다.
5. 평가
무르시 전 대통령 본인이 이슬람주의자에 지지기반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고 정치기반이 범아랍 정당 겸 준군사조직, 미국에서 차후 테러집단으로 지정한 무슬림 형제단이란 점은 많은 유럽과 이슬람의 민주화 세력을 실망스럽게 했다. 정치 기득권 세력들도 무르시의 한계점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무르시가 사망한 2019년에도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민선 문민정부를 1년 만에 전복한 군부세력, 군사독재정부는 역시 국민과 국제사회가 당면한 실상이다. 이렇기에 무르시 축출 직전까지 고조된 경제 위기가 비교적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이집트 군부가 무르시를 축출하고자 경제에 사보타주를 가했단 음모론도 나오고 있으며[1] 하마스와 무르시의 관계에서 본 바같이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부를 도와서 장난질에 가세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엔 무함마드 무르시가 이집트 사상 최초의 민선대통령이란 사실에서 비판적 입장과 동정론이 공존하며 ISIS가 사실상 망한 2019년, 무르시가 옥중에서 의문사하자 동정론의 우세가 강화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이 혁명에 중도탑승하여 강경행동으로 그 주도권을 장악하고 혁명을 변질시켰다는 비난을 받아도, 당연히 이집트 사회는 군부독재도 환영하지 않는다.
무르시 축출과 무르시 본인에 대해선 견해가 이렇게 대립된다. 하지만 이집트 사회에 무엇이 필요하냐는 대부분의 견해가 일치한다. "제3의 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국제사회 주류와 이집트 시민사회 사이의 이론은 크지 않다.
2012년래 무르시의 극력지지를 받은 팔레스타인&하마스는 무르시가 사망하자 어느 정도 종교차원을 떠난 애도반응을 내놨다.
한가지 시선을 끄는 성명이 있다면 이렇다. 대표를 역임했던 무슬림 형제단, 그리고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2] 은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추도하며 그를 '''순교자'''로 칭하였다. 분명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무르시가 동류로 분류되는 사실은 확실해보인다.
세속주의적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독재자가 되어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신정체제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이란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호메이니가 국가원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호메이니가 세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신정체제가 호메이니 사후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호메이니 본인 또한 이란 국민들에게 국부로 추앙받는 반면, 무르시 정권은 1년 천하로 막을 내렸고 무르시 본인 또한 꼴통 독재자 취급을 받으면서 추앙이 아닌 경멸의 대상이 되었으며, 호메이니와 달리 국가원수가 아니라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신분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실패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