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니 무바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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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حَمَّدْ حُسْنِي ألْسَيِّدْ مُبَارَكْ[1]
مُحَمَدْ حُسْنِى ألْسَيِّدْ مُبَارَكْ[2]
Muhammad Hosni El Sayed Mubarak
호스니 무바라크‎
'''
'''본명'''
'''무하마드 호스니 엘사이예드 무바라크'''
'''출생'''
1928년 5월 4일 이집트 왕국 무누피아 주
'''사망'''
2020년 2월 25일 이집트 카이로
'''국적'''
이집트[image]
'''신장'''
170cm
'''직업'''
정치인,군인
'''정당'''
국민민주당
'''종교'''
이슬람교
'''가족관계'''
수자네 무바라크 배우자
알라 무바라크 장남
가말 무바라크 차남
1. 소개
2. 유년기
3. 군인 시절
4. 대통령 취임
5. 독재
6. 몰락
7. 관련 문서


1. 소개


이집트의 군인, 정치가, 독재자 . 제4대 이집트 공화국 대통령(1981년 10월 14일~2011년 2월 11일).
중동전쟁 때만 해도 이집트의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30년 가까이 독재하며 군림한 끝에 결국 인민들에 의해 끌어내려진 인물. 흔한 독재자가 된 영웅 중 하나.


2.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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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누피아주의 카훌 엘 무스리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묘하게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도 모누피아주 출신. 아버지는 중소지주이면서 모누피아주의 법무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지역 유지였다.
원래는 아버지의 권유로 카이로 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1948년에 일어난 제1차 중동전쟁이 무바라크의 인생을 바꾸었다. 본래 아랍권에서는 명문가 자제들만이 사관학교 입학이 허용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 철저하게 캐발리게 되자 널리 인재를 구해 군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중산층에게도 사관학교 입학의 문이 열리게 된 것.

3. 군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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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는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파일럿의 길을 걸었다. 1949년에 공군사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시나이 반도에서 공군 파일럿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50년대에는 소련으로 유학해 최신 전투기 조종술과 공군 전략을 수학했다.
1967년에는 칼루비아주 사관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궤멸당한 이집트 공군을 재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4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 공군 재건을 불과 2년만에 해치웠다. 이런 뛰어난 업무 능력을 덕분에 당시 나세르 대통령 치하에서 공군 참모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공군 사령관겸 국방차관에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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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사실상의 총지휘관으로서 다대한 전과를 이룩했다. 그는 이집트군의 기습 작전을 진두지휘해 이스라엘군을 몰아내고 시나이 반도 탈환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그는 국민적 전쟁영웅으로 부상했다.[3] 이를 계기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4. 대통령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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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암살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여기서 암살자 이슬람불리가 쏜 총에 손을 맞아 치료한다고 고생했다. 외교적으로는 사다트의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계승해 중동국가 중에선 요르단과 더불어 이스라엘 편을 드는 두 국가가 되었다(...). 이는 어느 정도 윈윈이 되었는데 이스라엘로선 골란 고원을 둘러싸고 시리아와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이집트와도 으르렁 댈 경우 생길 양면전선을 피할 수 있었고 이집트로서도 미국 등의 서구 국가들과의 유화적인 상황으로 정권의 유지가 가능했다. 2000년에는 이집트 국경 지역의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를 일으키자 이스라엘이 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이에 이집트 청년들은 거리 시위를 벌이며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무바라크는 "우리가 시나이 반도를 해방시켰을 때 너희들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너희가 전쟁을 진짜 안다고 생각하느냐"고 거절했다. 미국조지 부시 두 부자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서 전쟁을 하고 있을 때에도 무바라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자 지구 공습때도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피해 넘어오려는 것에 발포할 것을 지시해 넘어오지도 못하게 했다.[4] 또한 가자 지구 공격하는 이스라엘군한테 식량까지 보내어 팔레스타인과 아랍권, 이집트 내부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나마 가자 지구에서 땅굴로 거래하려고 오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관세만 받고 묵인했으며 이스라엘의 요구에도 땅굴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대한민국과는 1995년까지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이는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측 조종사들이 이집트 편에 참전한 이유로 김일성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한민국과 수교하지 않겠다는 무바라크의 뜻이었다.
무바라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내전중인 사하라 사막 이남의 몆몆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무기를 판매하거나 비밀리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집트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로 이스라엘을 승인한 후 중동, 북아프리카 이슬람 아랍세계 국가들로부터 왕따가 되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무기 제공, 경제 개발 원조 등으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한 바 있었다. 1989년 이집트가 아랍 연맹에 다시 재가입하고 다시 아랍 일변도의 외교로 돌아가면서 이 정책은 사실상 허사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이집트의 외교적 지분은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5.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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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가 얼마나 오래 집권했는 지 보여주는 사진.[5]
하지만 그 역시 사다트와 똑같은 권위주의자라서 내부적으로는 철권 통치가 진행되었는데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 이후 선포된 계엄령을 국가비상조치법이라는 이름으로 '''상설화'''해버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바라크에게 조금만 반기를 들어도 탄압해버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실제로 무바라크 집권 당시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도시에는 무장 경찰이 각 블럭마다 배치되어 시민 및 방문자들의 동향을 지켜보곤 했다. 또 선거 때마다 무바라크는 90%가 넘는 지지율로 당선되었고[6] 여당인 국민민주당은 과반을 넘어선 초과반의석을 확보했다. 야당무슬림 형제단이 돌풍을 일으켰을 땐 '''정당 해산''' 조치로 대응했다(...) 거기에 부유층들이 국가 기간산업을 독점해 엄청난 부를 누린 반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형편임에도 경제 분야에서 무능한 나머지 이를 개선하지도 못했다.
물론 무바라크의 통치 동안 경제 성장률과 기대 수명 그리고 문맹률 같은 문제는 일정 부분 이루어지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군부와 정치권, 재계를 비롯한 이른바 특권층들에게만 돌아갔고, 이집트 국민의 40% 정도가 하루에 고작 2달러도 안 되는 생활을 이어가는 극빈층이 되어버렸다. 또한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야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또한 계속해서 가했다. 무바라크 본인이 세속주의를 추구하다보니 이슬람 광신으로 뭉친 무슬림 형제단이 달가울리가 없었다.
이런 탓에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몇 번이나 암살기도를 당했지만 사다트와 달리 실패해 정권을 이어나갔고 나이가 들었지만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남인 가말 무바라크에게 세습 작업을 하는''' 양상까지 보여주었다. 2009년에는 귀여워하던 12살짜리 맏손자 무함마드의 갑작스런 죽음[7]으로 한동안 요양하기도 하고 2010년에 담낭의 염증으로 독일 바덴바덴에서 적출수술을 받기도 해 은퇴 가능성이 있어보였지만 2010년 12월,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당장 은퇴할 생각은 없다'''' 라는 망언(...)을 터뜨렸다.

6. 몰락


결국 2011년, 튀니지재스민 혁명에 고무된 이집트 국민들이 무바라크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2011 이집트 혁명) 그러나 무바라크 정권은 2011년 1월 반정부 시위대의 퇴진 요구를 거부하며 무력 진압으로 맞섰고 시위대와 군경 충돌 과정에서 850여명이 숨졌다. 그러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군부가 무력 진압을 거부했다. 무바라크는 2011년 9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를 무마하려 했으나 군부와 서방국가는 무바라크에 압력을 가했다. 이미 버락 오바마는 그 전해 6월부터 민주선거를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2011년 2월 11일, 하야하고 만다. 사고를 터뜨린 지 2개월 만이요, 집권한 지 만 30년을 8개월 채우지 못한 시점이었다.
2011년 2월 홍해의 휴양지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고 하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하면 받아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호시니 무바라크가 이집트 대통령직에서 쫓겨나자, 무바라크가 이집트의 국고를 횡령하는 것을 막으려고 무바라크 가족들이 스위스 은행에 보유한 은행 계좌와 부동산이 3년간 동결되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군부가 임시로 권력을 이양받은 상황이라 무바라크 커넥션 하에서 무바라크가 언제고 다시 재기하려고 국외 망명을 거부하고 있지 않느냐는 추측을 하고 있었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하면 그것도 다 물거품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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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3일부터는 두 아들과 함께 피고인의 신분으로 '''교도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혐의는 공권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과 공공 재산을 빼돌려 부정축재를 한 것.
2012년 1월 3일 오전 8시에는 어떤 이집트 군의관이 이집트 카이로 외곽에 있는 국제의료센터에서 치료를 위해 입원한 무바라크가 있는 병실에 들어가서 무바라크의 목을 졸랐다고 한다. 군의관은 무바라크가 있는 병실에 들어가서 무바라크를 목졸라 죽이려다가 경호원이 이걸 발견했고 그를 체포해 이집트 군 검찰에 넘겼다.
2012년 1월 5일, 이집트 검찰은 무바라크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고령이라 실제 판결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 6월 2일, 무바라크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6월 19일(현지시각), 상태가 악화된 무바라크가 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심장이 정지해 '''임상적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상 사망한 듯. 뇌사 여부는 미지수라고 한다. 결국 안 죽고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당선 소식을 듣고는 다시 혼수수면을 오가는 중이라고. 그런데 결국 안 죽었다.
12월 15일, 교도소 샤워실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다쳐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3년 5월 11일, 구금 2년 만에 이뤄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빈곤층의 궁핍 때문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부 부패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면서 ''''석방될 가능성이 높다'''' 라는 보도가 나와 충공깽인 상황. 그러나 사법부의 다른 소식통에 의하면 다른 부패 혐의로 구금은 계속 될 것이라고 한다. 시민혁명 당시 무력 진압을 한것에 대해서도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판결을 뒤집고 재심을 하라는 판결이 나온 상황. 일각에서는 군부가 무르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다시 무바라크를 앞세우려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단 석방된다면 대선 출마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군부 쪽에서 무바라크를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2013년 8월 20일 법원의 석방 명령이 떨어졌다.
무바라크의 석방으로 이집트 군부가 작정하고 무르시를 축출했다는 음모론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무바라크가 다시 대선에 출마하면 확인사살일 듯. 그러나 이집트에서는 압델 파타 엘 시시 국방장관을 거의 29만원 장군식으로 떠받드는 흐름이 감지되어서 무바라크가 직접 권좌에 복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거기에 2014년을 강타한 미친놈들이 출두하면서''' 무르시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다.
2014년 11월 법원의 무죄판결로 법적으로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기존에 받은 5년형을 복역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하고 사회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애초에 이번 판결도 IS가 판치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반발로 인한 세속주의자들의 위기의식의 표현이라는 말도 나올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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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를 쓴 무바라크가 선고 공판이 있던 2014년 11월 29일 병원을 나서며 지지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판결 직후 법원 주변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은 무바라크가 무죄라는 판결에 환호했고, 무바라크는 "나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다"고 말했다. 물론 법원 판결에 열받은 군중 약 2000명이 2011년 반정부 시위 장소 타흐리르 광장 등에 몰려가는 등의 반정부 시위가 이집트 곳곳에서 벌어졌고 CNN에 의하면 경찰 진압 과정에서 최소 1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당시 유혈 진압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 170명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며 "군중은 '그렇다면 대체 누가 시위대를 죽였단 말이냐'며 법원을 성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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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니 무바라크의 부인 수잔 무바라크는 ’레이디 맥베스’로 통했는데, 그녀는 막후에서 무바라크 전 대통령을 움직이며 대통령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둘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일화로 이집트의 학교 중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학교는 388개인데 그의 부인인 수잔의 이름을 딴 학교는 160개에 달한다는 점이 그녀의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한다
많은 이집트인들은 그녀의 야심이 아들 가말이 남편의 ’권좌’를 이어받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결국 쫒겨나서 그 야심을 이루지 못했다. 수잔은 암투병 중인 남편이 이집트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이 은행에 숨겨둔 비자금 34억원을 반납하고 혼자만 석방됐다.-
2018년 9월 무바라크의 모습이 공개됐는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생김새가 여전했지만 사진 속 모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백발 노인이 된 모습이어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사실 나이가 무려 90이어서 별로 이상할 것은 없지만.. #
2019년 10월 16일에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서 눈길을 끌었다.#
2020년 2월 25일에 이집트 국영방송이 무바라크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사인은 지병인 신부전이 악화돼서이다. 향년 91세.
무바라크의 시신은 이집트 카이로로 이송되어 현지 시간 2월 26일, 국장에 준하는 이집트 국군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에는 2011 이집트 혁명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이집트 혁명으로 서훈 취소, 몰수됐던 것으로 알려졌던 각종 훈장들이 다시 등장했으며, 무바라크 묘역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집트 정계에선 군장으로 치뤄진 것 자체가 무바라크에 대한 실질적 복권으로 여기고 있다.

7. 관련 문서



[1] 아랍어[2] 이집트 아랍어[3] 10월 14일, 만수라 공군기지 인근 공중전에서는 그 천하의 이스라엘 공군을 상대로 '''6:17의 교환비로 승리해'''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을 좌절시켰다. 지금도 이집트는 이 날을 '공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4] 실제로 가자 지구 주민들이 넘어오려다 이집트군의 총격을 맞고 사상자가 나오자 포기해야 했다.[5] 맨 아래부터 미합중국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41대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43대 대통령 조지 부시, 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이다. 레이건이 1981년부터 대통령을 했으니 기간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6] 선거인 명부를 조작해 '''사망자'''들이 여당에 투표한 것처럼 조작했다고 한다. [7] 심장에 이상이 있어 수술받다가 뇌출혈로 죽었다. 이제 보니 가족력인 듯? 그리고 결국 이 세손(...)의 죽음은 무바라크의 패망을 부르는 나비효과가 되었다. # 이때 이미 총기를 상실한 무바라크는 세자 격이었던 둘째 가말(무함마드의 삼촌이 된다)조차도 경계하기 시작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