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이란 초대 라흐바르
آیت‌الله العظمی[1]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آیت‌الله روح‌الله خمینی[2] | Ayatollah Ruhollah Khomeini
'''
<colbgcolor=#84193a><colcolor=#febe00> '''본명'''
سید روح‌الله مصطفوی موسوی خمینی[3] (페르시아어)
세예드 루홀라 모스타파비 무사비 호메이니
'''출생'''
1902년 9월 23일
이란 숭고국 마르카지주 호메인군 호메인
'''사망'''
1989년 6월 3일 (86세)
이란 테헤란
'''국적'''
이란 [image]
'''신장'''
176cm
'''직업'''
종교인, 정치인
'''종교'''
이슬람교(시아파)
'''가족'''
배우자 하디제 사가피(خدیجه ثقفی‎, 1916–2009)[4]
슬하 3남 2녀
'''약력'''
'''이란 초대 라흐바르 (1979–1989)'''
1. 개요
2. 이름
3. 사상
4. 생애
4.1. 초기 생애
4.2. 반정부 활동 및 망명 생활
4.3. 종신 최고지도자
4.4. 사후
5.1. 현대적인 면모
6. 일화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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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초대 종신 최고지도자(라흐바르).
친미-친서방적이던 팔라비 왕조를 전복시켜 왕정을 폐지한 이후 다른 면에서 억압적인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란 내에서는 부패한 팔라비 왕조를 무너트린 카리스마적인 국부로 추앙받지만, 그의 치하에서 중동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던 이란의 여성 인권 수준은 나락도 모자라 시궁창 수준으로 빠졌고, 중동권에서 터키와 함께 가장 세속적이던 '''이란을 꼴통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또한 전세계 이슬람 권에 이슬람 근본주의 광풍을 불게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정치적 능력과는 별개로 이란과 이슬람 세계가 시대에 역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호메이니가 사망하면서 이러한 면이 완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이란은 종교에 따른 인권 탄압 국가이며, 시아파뿐만 아니라 수니파 이슬람 세계도 호메이니 때문에 시대를 거스르는 수준의 보수화를 겪었다.[5] 이란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1979년 타임지에서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테헤란 신 공항의 이름이 '이맘 호메이니 국제공항'이며, 모든 화폐에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거국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6]

2. 이름


'호메이니'는 '호메인(خمين‎, Khomeyn) 출신'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현재 이름만 불리고 있으나, 1980년대를 통틀어 그가 사망할 당시까지 국내 언론에서는 '호메이니 '이라 불렀다. 사망일인 1989년 6월 4일(한국 시간) 뉴스데스크. '세예드'는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언자 혈통에 닿는 사람에게 붙는 칭호이며, 호메이니의 이름을 풀이하면 '호메인 출신 무사비 가문의 모스타파의 아들인 루홀라'이다. 그의 이름 앞에 따라 붙는 또 다른 칭호인 '아야톨라'는 페르시아어로 '알라의 신호'라는 뜻으로 시아파 고위 성직자에게 주는 칭호이다.
또한 이란에서는 그를 호칭할 때에 보통 '이맘 호메이니(امام خمینی)'라고도 부른다. '이맘'은 고위 성직자에게 수여하는 호칭으로 호메이니의 뒤를 이어 현재까지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1939년생, 1981년부터 호메이니 사망 때까지 대통령 역임.)와 헷갈리기 쉽다. 호메이니는 이 칭호를 1950년대 후반에 받았다. '이맘'은 수니파에서는 단순히 지도자, 설교자라는 의미지만, 이란은 12이맘파에 속하는 시아파이다. 시아파에서 '이맘'이라는 칭호가 가지는 의미는 엄청나게 크다. 시아파의 이맘은,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신앙의 지도자로 여겨진다. 그의 후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아야톨라이기는 하지만 이맘은 아니다. 12이맘파에서 초기 12이맘 이외에 '이맘'이라는 칭호를 가진 자는 오직 호메이니 뿐이다.
이란의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후손인 알리, 후세인 외 그 후손들을 포함한 12명을 이맘으로 보는 12이맘파인데, 호메이니는 12이맘이 아님에도 이맘 칭호를 공식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13이맘파로 바뀐 건 아니고, 호메이니가 12이맘의 리스트에 추가된 것은 아니지만 이란에서 그를 12이맘급으로 위대하게 여긴다고 보면 된다. 한때는 호메이니를 '마흐디(مهدی, 구세주)'라고 칭송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썰도 있지만 호메이니는 뻔뻔스럽게 자신을 마흐디라고 칭하는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7] 또 12이맘파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호메이니의 권위는 전설적인 12이맘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3. 사상


그의 사상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샤리아에 기원해야 한다'''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쿠란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의 지도자는 이슬람 성직자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왕조 타도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세속 정부 위에 신권 정부가 존재하며, 세속 정부는 군통수권을 가진 신권 정부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8] 신권 정부의 수장이자 국가 전체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성직자('파키'라고 부른다)는 다른 성직자들이 뽑아야만 하며 또 그들만이 쫓아낼 수 있다. 그리고 18세 이상 남녀는 이 파키를 선출하는 성직자들(이들의 협의체를 보통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라 한다)을 8년에 한 번 선거로 뽑을 수 있다.[9] 그리고 종교 성향도 매우 극단적인 편이라 시대착오적 발상도 많이 하였고 근대화된 많은 이란인들을 탄압하였다.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았던 모하메드 모사데크 역시 세속주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개인적으로 대단히 싫어하였다. 호메이니는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10]

4. 생애



4.1. 초기 생애


호메이니의 가문은 이란 토박이인 율법학자 가문이며, 증조할아버지 대에 니샤푸르에서 인도 러크나우로 옮긴 후 할아버지인 아흐마드 대에 이란으로 돌아왔는데 아흐마드가 호메인마을[11]에 정착해서 낳은 아들인 모스타파의 아들이 루홀라 호메이다. 호메이니가 갓난아기일 때 모스타파는 지방 지주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피살당했고, 호메이니는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이슬람 율법을 배웠다.
[image]
1938년의 호메이니
호메이니는 종교 도시인 나자프에서 시아 이슬람 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뒤 정식 율법학자가 되었고, 1929년에 하디제 사가피(1913–2009)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다. 그 후 1960년대 초까지는 쿰에 머물며 이슬람 율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보냈다.

4.2. 반정부 활동 및 망명 생활


1965년 이란에서 터키로, 1965년 터키에서 이라크로, 1978년 이라크에서 프랑스로 망명을 반복했다.
그가 정치 문제에 개입하고 팔라비 왕조에 반대한 계기는 1960년대에 팔라비 2세가 실시한 세속주의 및 서구화 개혁인 백색혁명이었다. 백색혁명의 주요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서구화 및 세속화
  • 문맹 퇴치
  •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히잡, 차도르 착용을 금지함
  • 토지개혁 및 사원의 토지 축소
백색혁명은 성과를 거두어 팔라비 시절 이란은 터키처럼 세속주의를 지향했으나 팔라비 2세가 전제군주제를 지향하면서 반대파들을 탄압하여 국내에서 반발을 샀다. 또한 친서방 노선도 모하메드 모사데크 축출 건으로 반서방 감정이 강해진 이란 국민들의 불만을 일으켜 이슬람주의자를 포함한 많은 세력이 팔라비 왕조에 저항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1963년 3월에 쿰에서 반정부 발언을 한 혐의 및 미국을 비난한 이유로 체포됐다가 1964년에 풀려났고, 1965년에 터키로 추방당했다. 거기서 이라크로 옮겨가게 해 달라고 요청해 이라크로 건너가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서 1978년에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후 이라크 정부는 호메이니의 존재에 부담을 느껴 반왕조 활동을 그만두든지 떠나든지 택일하라고 압박했고 이에 호메이니는 주저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 교외 노플로샤토로 건너갔다. 1977년에는 장남 모스타파가 이라크에서 급사했는데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호메이니 지지자들 사이에선 샤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12]
프랑스 정부는 워낙 소란을 만드는 그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막은 사람이 호메이니의 철천지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었는데 그 이유는 호메이니를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고 뒤따를 국민들의 저항(특히 이슬람주의자들)을 우려했기 때문이다.명망 높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손을 대서 망한 독재자는 한둘이 아니다.
호메이니는 프랑스 노플로샤토로 몰려온 이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 및 추종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이슬람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다. 망명 당시에 본국에 그의 영향력이 남은 건 카세트 테이프의 영향력이 컸다. 일단 크기가 작아서 숨기기 쉬웠기 때문에 유럽에서 돌아오는 종교지도자들이 파리에서 녹음한 호메이니 설교 테이프를 들고 와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들으며 팔레비 왕조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4.3. 종신 최고지도자


1979년 이란 혁명이 일어나 팔라비 왕조가 물러나자 이란으로 돌아와 임시 이슬람 혁명정부를 조직하여 메흐디 바자르간(مهدی بازرگان‎‎, 1907년 9월 1일 ~ 1995년 1월 20일)을 수상에 임명했다. 이후 샤푸르 바흐티야르(شاپور بختیار‎‎, 1914년 6월 26일 ~ 1991년 8월 6일)[13] 수상이 이끄는 정부군과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이란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은 호메이니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호메이니는 만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들에게 공화정 찬반투표를 실시했는데 98% 이상이 '''이슬람 공화정'''을 찬성했다. 이에 1979년 12월 신 헌법을 공포하여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새로운 헌법에서 매 4년마다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했는데, 자신의 비서였던 최측근 세예드 아볼하산 바니사드르(سید ابوالحسن بنی‌صدر‎‎, 1933년 3월 22일 ~)를 대통령으로 삼고, 자기는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14] 하지만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는 과정에 이란 혁명에 참가했던 다른 정파들이 반발했고 이슬람 정권은 이들을 박해했다. 우선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15] 세속주의자들은 종교인들이 정치를 해선 안 된다는 이유로 공화국엔 찬성을 했지만 이슬람 공화국에는 고개를 저었다. 종교지도자의 정치 개입에 대해 비판하며 서구 민주주의를 절충하자고 주장한 당대의 대아야톨라 세예드 모하마드카젬 샤리아트마다리(سید محمدکاظم شریعتمداری‎‎, 1906년 1월 5일 ~ 1986년 4월 3일)는 호메이니에 의해 1979년 11월 가택연금에 처해지기도 했다.
1979년 3월 30일~31일에 실시된 국립투표에서 나온 이슬람 공화국 수립에 대한 거의 100%에 육박하는 찬성률은 당연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왕정의 협력자들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자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중 신정체제를 반대하는 세속주의 정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가 망명해야 했다. 좌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문화혁명을 주도하여 1980년부터 2년 동안 이란 내 모든 대학교가 폐교되어 이슬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게 과목이 바뀐 후에야 다시 개교했다.
급속도로 근본주의로 흘러가는 분위기에 반대하여 진보주의자들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으나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은 시위대를 '창녀', '제국주의 추종자'라고 하면서 시위대를 몰아세웠다. 신정 체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가택연금했다. 호메이니는 바니사드르 대통령이 지나친 반미 정책에 회의감을 표하자 그를 이란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여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만들고 스스로 사퇴하도록 종용했다. 결국 바니사드르는 호메이니의 뜻에 따라 1981년 스스로 대통령직을 내려 놓은 뒤 해외로 탈출했다.[16] 이러한 강경 조치가 이어지자 반근본주의 움직임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때부터 미국과의 계속되는 갈등이 벌어진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영화 아르고의 배경)으로 지미 카터 행정부에 큰 타격을 입혀 재선을 실패시키지를 않나,[17] 뒤에는 사담 후세인의 침공을 받아 이란-이라크 전쟁에 걸리질 않나... 하지만 이란 콘트라 사건 같은 흑역사를 보면 또 실용적으로 살 무기는 산 모양이다.
외교 능력은 막장으로 미국, 소련, 유럽, 중국, 터키, 이스라엘, 이집트를 죄다 적으로 돌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팔라비 왕조를 미국의 개로 비하했으니 미국과는 당연히 사이가 나빴고, 이란은 이때부터 미국에 경제제재를 받기 시작해 2016년에 핵 협상으로 해제될 때까지 고생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도 사이가 나빴는데 호메이니가 반정부적 인사들을 목매달 때 쓰던 레퍼토리 중 하나가 '저놈은 좌파다, 소련 첩자다.'였다.[18] 유럽 역시 서방권인데다가 이단으로 매도하며 유럽이 빌려준 돈 다 떼어먹으니[19] 역시 사이가 틀어졌고 혁명 수출론이다 뭐다 해서 중국 이슬람 교도들 중에서 위구르족들에게 혁명을 일으키길 자극하니 중국과도 사이가 틀어졌으며 친서방 국가에다가 세속적인것도 모자라 종파까지 다른 터키, 이집트와도 당연히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20]
게다가 아랍권 국가들과는 종파가 다르다보니 아예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였다. 팔라비 왕조의 우방국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시아파가 아니란 이유로 일방적으로 우호관계를 파기했고[21] 시아파 율법주의로 그나마 좀 개방적이 되어가던 아랍권에서 수니파 율법주의와 와하비즘이 대두되는 연쇄 효과를 낳았다.[22][23]
이러한 외교의 결과로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과 소련, 중국, 사우디 등 전 세계가 손을 잡고 이라크에 무기와 자금 대주면서 이라크의 대량 살상 병기 사용까지 눈 감아 줬고, 이란은 이라크 대비 우세한 국력에도 이라크를 압도하지 못했다.

4.4. 사후


이런 고립을 타개하려던 차에 시비 걸어온 이라크를 조지려고 이란 이라크 전쟁에 적극적으로 싸웠으나 승리도 못하고 엄청난 피해만 입은채 끝내야 해서 실의에 빠진다. 결국 1989년 6월 3일 노환으로 사망한다.(사망 당시 만 86세) 사후에 그의 장례식을 지켜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이란 정부 추산 약 1000만 명)가 몰려들었는데 호메이니의 시신을 운구하기 위해 마련된 헬리콥터 주변으로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면서 당시 상황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고 한다. 호메이니가 사망한 후 이란 최고지도자는 당시 대통령이던 알리 하메네이가 승계했다.

호메이니의 장례 영상
이후 테헤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 남부 지역에 그의 시신을 안치한 영묘가 건설되었고 그곳에 호메이니의 시신이 현재도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이 엄청난 규모의 건물인지라 일부는 2015년에도 공사했을 정도. 호메이니를 기념하는 곳이자, 거대한 모스크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비무슬림 역시 출입이 가능한데, 기본적인 보안검사와 짐을 맡기는 절차만 끝나면 내부를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5. 이슬람 근본주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 후 원고를 집필하고, 편지를 쓰고 읽었다.
  • 외국어 신문 읽기가 끝나면 아침 기도를 올렸는데 이게 새벽의 주요 일과.
  • 아침 식사는 7시에 시작하여 9시까지는 이란의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었다.
  • 이후 10시까지 휴식을 취하다 다시 기도를 올리고 12시에 점심을 먹었고, 2시부터 3시까지는 낮잠을 잤다.
  • 자고 일어난 후에는 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24]
  • 저녁은 9시가 되어서야 간단하게 먹었으며, 오후 11시에 자기 전까지는 외국의 페르시아어 방송, 특히 BBC를 즐겨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범적이고 성실한 생활과 윤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그의 태도에 집권 초반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지만, 지독하게 이슬람 광신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점때문에 이란 밖에서도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게다가 자신에 반대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서, 이란 신정정권에 반대하는 자유인사들 및 정적에 대한 고문이나 사형, 암살도 빈번했다. 당시 이란에서 팔레비가 천단위의 사람을 잡아넣고 사람들을 고문했다면 호메이니는 '''십만단위로 잡아넣고 죽인 셈'''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종특인 '''여성 차별'''도 빠지지 않았다. 한 예로 시린 에바디(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는 팔레비 왕조 시절 판사로 일했지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자 여자는 법관이 될 수 없다는 근본주의 논리에 따라 비서로 강등당했다. 그리고 처녀들을 죽이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처녀들이 총살되었다. 어떻게 된것인가 하면 처형 전날 혁명수비대원과 '''억지로 결혼을 시킨 다음에 강간을 하여 처녀성을 빼앗아 '처녀가 아니다! 처형할수 있다!''''라고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지참금'이 처형된 처녀의 집에 보내졌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어느 공산주의자 소녀가 혁명수비대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을 때 강제결혼 후 성폭행을 당하고 처형당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25]
또한 이러한 처형 과정에서도 비인간적인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연맹은 이란 당국이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범들의 피를 빼내 부상한 군인들에게 수혈한다고 폭로한 것. 보도에 의하면 이란 정부가 일부 정치범을 완전히 피를 짜내는 방법으로 처형하고 있으며, 일부는 총살형을 당하기에 앞서 혈액일부를 헌납토록 강요당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이란 검찰총장이 각 지방검찰청에 발송한 공문서 사본을 인권연맹이 1980년대에 비밀리에 입수했는데, 이란의 검찰총장이 작성한 후 서명한 이 문서에서 "믿을만한 의료진이 사형선고를 받은자들의 피를 비밀리에 빼내줄 것"이라고 씌어있었는데, 타임즈에 따르면 이 문서가 호메이니가 이같은 지시는 회교율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실로 보아 호메이니의 지시라고 판단된다는 주장을 했다.[26]
해외 기업의 진출도 대부분 무산되었다. '그래도 팔레비 왕조보다야 낫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반대파 억압은 이쪽이 한술 더 떴다. 그리고 당연히 세계인권단체에서 호메이니는 '''지금도 비난 받고 있다.'''
또 혁명 이후 이란의 대학들을 폐쇄하고 모든 학교를 이슬람 학교로 바꾸는 등 서구 문물을 일방적으로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시대착오적인 일들을 많이 하였다. 특히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그의 집권 시절 이란군에서 소년병을 징집하여 지뢰 제거에 투입된 극악한 범죄에도 책임을 피할 순 없다.

5.1. 현대적인 면모


전 항목을 읽으면 다에시탈레반급 막장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하게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팔레비 왕조의 유대인 우대정책에 불만을 품고 자신을 지지한 아르메니아계들에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상업적 특권을 준 것이야 그렇다쳐도, 종교와는 별도로 동성애적으로 번민한 끝에 성전환을 할까 고민하던 남성 군인에 관한 얘기를 전해듣고는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자를 구제해줘야 한다"라며 기꺼이 성전환 수술을 허락하고 아예 국비로 수술비 부담까지 해줬다.''' 이를 두고 이란에서도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알라가 주신 몸을 수술로 강제로 바꾸는 짓은 용납할 수 없다고 결사반대했음에도 법적으로 허용하여 지금도 이란에선 동성애는 금하지만 아예 그냥 여성이나 남성이 되고 싶다면야 국비로 부담해주며 허용하게 된 것도 그의 뜻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사실 성 정체성과 동성애는 상관관계가 없다. 남자 좋아한다고 성 정체성이 여자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호메이니는 동성애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으며 호메이니 치하의 이란에선 "나 동성애자요" 하고 농담 한 마디라도 했다간 그대로 경찰들에게 몰매를 맞던 시절이었다. 지금이라고 나아지진 않아 남성 동성애자들은 사형, 여성 동성애자들은 채찍형을 받고 치료를 빙자하여 임신할 때까지 교정강간을 당하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거나 해외로 망명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서 트랜스포비아 페미니스트들이 들먹이는 18번 레파토리가 이란이다.
비록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지만 결국 그도 어쩔 수 없는 이란인이었는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던 고대 페르시아 왕조들의 문화재를 훼손하는 막장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고 강경한 시아파 성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수니파 왕조 문화재 또한 훼손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수니파 무슬림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탄압의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및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시아파 탄압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인접한 또다른 페르시아 문화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의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바미안 석불을 파괴하고,[27] 더 나아가서 수년 뒤 옆동네 아랍권 국가인 이라크와 시리아에 강림했던 최악의 테러리스트 집단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최고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팔미라, 바빌론 문명 시기의 유적과 유물들 및 비수니파(특히 시아파) 이슬람 문화재들을 파괴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이란 내 종교적 소수자 중 역사가 오래된 종교 신자(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조로아스터교 등등)들에 한해서는 박해하지 않았다. 다에시에서 야지디교인들을 성노예로 삼아 국제 사회에서 공분을 산 일이나 이집트의 수니파 근본주의 세력이 고대부터 있던 콥트 정교회 신자들 및 파티마 왕조 시절부터 있던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갖은 막장 행동을 일삼는 것과 비교하면, 이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 가능하다.
사실 호메이니와 뜻을 같이 했던 보수 율법학자 중에서는 아예 문맹퇴치 운동조차 반대하던 심각한 꼴통들도 꽤 많았는데, 적어도 호메이니는 이들의 극단적인 주장을 무마시켰다. 즉 이란을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만들었다는 책임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최악은 아닌 차악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물론 그것 때문에 시아파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돌려까는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6. 일화


이탈리아의 유명한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일화도 흥미롭다. 호메이니와 팔라치는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팔라치는 호메이니의 면전에서 현재 이란은 파시즘 정권이 아닌가?라고 까자 호메이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파시즘과 이슬람은 양립할 수 없소. 파시즘은 이슬람 문화권이 아니라 서구에서 생겨난 것이오."라고 반박했는데, 팔라치는 호메이니가 광신자처럼 날뛸 줄 기대했는데 그러지 않아 놀랐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여성인권 문제, 정적 탄압 등에 대해서 계속 논쟁했는데, 이때마다 호메이니가 정중하면서도 교묘히 논점을 흐리는 대답으로 반박하자 그다지 논리적인 답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라치는 미리 준비했던 인터뷰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벗어나 호메이니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그런데 팔라치는 딱 한번 호메이니를 격분하게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차도르 논쟁이었는데 호메이니는 차도르를 둘렀던 여자들은 혁명투사였지만 화장이나 하는 여자들은 에게 충성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팔라치는 그것은 사실왜곡이며 혁명 이후 여자들은 차별받고 차도르는 이미 여성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팔라치가 여자들이 대학에서 남자들과 공부하는 것도 금지당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금지당하고 수영복도 입을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차도르를 입고 어떻게 수영을 합니까?

이 대목에서 화가 난 호메이니는 성을 내면서 무례하게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우리 관습에 왜 당신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겁니까? 이슬람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옷을 입지 않아도 됩니다. 이슬람의 옷은 훌륭하고 품위있는 젊은 여성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빡친 팔라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이맘.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걸레조각을 지금 당장 벗어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차도르를 벗어 찢어버린 다음에 호메이니의 발치에 던져버렸다. 격노한 호메이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고 팔라치는 호메이니의 등 뒤에 '''오줌 싸러 가시느냐'''고 빈정댔다. 통역을 맡고 있던 이란 대통령 아볼하산 바니사드르와 호메이니의 아들이 팔라치에게 이제 나가주서야 겠다고 애원했지만 팔라치는 호메이니가 다음날 인터뷰를 할 것을 쿠란에 대고 맹세하기 전에는 못 물러난다고 버텼고 호메이니가 정말로 쿠란에 대고 맹세한 후에야 자리에서 물러났다.
두 번째 인터뷰 전에 호메이니의 아들이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아버지가 아직도 차도르 건으로 화가 나 있으니 차도르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충고에 아랑곳없이 인터뷰 시작하자마자 차도르 얘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난리가 나나 싶었는데 호메이니는 씨익 웃더니 껄껄 웃어버렸다고 한다. 그에게 제발 두 번째 인터뷰는 산통깨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아들 아흐메드조차도 '''아버지를 웃게 만든 건 기자가 처음이오'''라고 말했다. #
물론 팔라치와 호메이니가 서로를 이해하거나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지만, 호메이니는 막장 신정 통치와는 별개로 의외로 인간적인 면 내지는 소탈한 면도 있었다. 사실 정치적으로 악행을 많이 저지른 독재자나 악인들이 개인적으로 일정부분 소탈하거나 인정이 많은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아돌프 히틀러도 개인적으로는 친절하고 소박한 이미지였다.
1988년인도 출신의 영국 작가인 살만 루시디가 "악마의 시"를 출간하였을 때,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작가를 포함해 악마의 시의 번역, 출판에 관여한 모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종교적 해석 겸 칙령인 '''파트와'''를 내렸다. 이후 일본에서는 악마의 시를 번역한 사람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고로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자 우스운 사실이 하나 있는데,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를 보자마자 노발대발해서 사형선고 파트와를 내린 것이 아니다. 호메이니가 처음 악마의 시를 접했을 때는 "세상에는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식으로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넘겨버렸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반감여론이 서서히 일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자''' 루시디를 죽이라는 파트와를 낸 것이다(!) 그의 이중적이고 정치적으로 악한 면을 잘 볼수 있는 사례다.[28]
10년 후인 1998년, 이란 정부는 이제 괜찮다는 듯한 요지의 외교적 발언을 했으나 파트와를 선언한 호메이니는 9년 전인 198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파트와를 선언한 사람만 파트와를 철회할 수 있다는 규정에 의해 '''루시디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은 그가 죽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물론 이란 정부도 이거 철회하고 싶은데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대신 살만 루시디 살해에 대해서 일체의 협조도, 살해자에 대한 일체의 보호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이다.
축구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호메이니는 축구를 이슬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악의 산물로 봤고, 정권을 잡자마자 먼저 시도한 것 중 하나가 이란에서 축구를 영원히 못 하게 만드는 축구 금지령이었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많은 부하들에서부터 지지층과 이슬람 성직자,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혁명 주요 인사들까지 축구광이라서 반대가 심했고, 국민들의 반응도 축구에 미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약 축구를 탄압하면, 우리는 당신들을 몰아내고 다시 팔라비 2세를 데려올 거다'''는 반응이 압도적이라(...) 결국 축구 탄압은 유야무야 되어버렸고 탄압하지 못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끝까지 축구 지원에는 인색했다. 그리고 호메이니가 물러난 이후부터 정재계가 모두 나서서 국가 단위로 축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고 이권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대신, 팔라비 왕조 시절 실업리그로 이뤄지던 야구농구배구같은 종목은 미국이 고향이니 금기시되면서 이란은 이들 종목은 아주 박살났다. 그러다가 이 종목들은 호메이니가 죽고 나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는데, 2000년대 와서는 배구와 농구는 아시아 최강급이 되었다.
이런 축구 및 스포츠 혐오 정서는 이슬람 극단주의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란의 이웃나라인 아프가니스탄탈레반을 비롯해, 이슬람 극단주의 군벌 지도자인 헤크마티야르도 호메이니처럼 축구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혐오해서 집권 이후 축구장이란 축구장은 죄다 '''총살 처형장'''으로 만들어서 거기서 반대파와 여성들을 공개처형으로 학살했다. 그리고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ISIL 지도자 알 바그다디 역시 한때 축구 매니아였으나 본격적으로 이슬람 광신 근본주의자가 되고 나서는 축구를 하면 극형에 처하는 법률을 만들 정도로 축구를 혐오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일부 와하브파 광신도 율법학자들도 축구를 금지하든지 아니면 축구 방식과 제도를 완전히 마개조해 '''이슬람식 공차기놀이''' 정도로 바꿔야 한다는 무리수적인 설교를 해 논란이 일곤 한다.
사실, 축구가 유럽에서 온 비이슬람 종목이라고 극단주의자들이 반대하는 것도 있고 당연히 모든 스포츠에 대해 금지하고 혐오하는 것도 있다. 탈레반은 연날리기조차 금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스운 것은, 탈레반의 경우 똑같이 서구권에서 유래된 권투를 즐기고 금지하지 않고 있다. 예외 사항이 제멋대로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7. 기타


  • "아야톨라 루홀라"라는 말은 아랍어로 '알라의 계시이자 알라의 성령'이라는 엄청난 뜻으로 순니파 앞에서는 그냥 호메이니라고만 부르는 게 좋다.
(후보자 등록을 마치고 회견하는 하산 사이이드 루홀라 모스타파비 무사비 호메이니)
2015년 12월에는 손자인 하산 호메이니가 이란 정치계에 입문한다고 해서 꽤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사 그는 2016년 2월에 치러지는 이란 율법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 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후보자 등록을 했다. 율법 전문가 회의는 88명으로 이뤄진 회의인데 이 자리는 고위급 성직자만 입후보할 수 있으며 국가 최고지도자의 후계자 선출 권한을 갖고 있는 권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다. 보수파의 수장인 할아버지와 반대로 개혁 진보적이고 어릴적 축구선수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출마 신청은 최종 기각되었는데 그럼에도 혈통이 혈통인지라 이란 정계에서 거물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다.
배우 숀 코너리가 호메이니와 은근히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 레슬리 닐슨 주연 코믹 영화 <총알탄 사나이>(1988)에서 초반부에 나와서 주인공 프랭크에게 고르바초프, 이디 아민, 아라파트 ,카다피 등과 같이 신나게 쳐맞는다. 그것도 프랭크가 터번을 벗기자 주황색 모히칸족 머리를 하고 있어서 이란에서 종교적 경건함 타령하던 호메이니는 정작 터번 벗으면 이런 머리 하고 있는 놈이라는 비아냥적 묘사로 나온다... 배우는 미국 배우인 찰스 게라르디 (Charles Gherardi).
  • 솔로몬의 딸(Not Without My Daughter, 1991)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가 1992년 한국 개봉 당시 서울 극장 간판에 호메이니를 괴물같이 그려서 주한 이란 대사관이 항의하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덕분에 서울 상영관에서 이 간판이 내려지고 새로 고쳐 그리던 소동이 일어난 바 있다. 해당 영화 관련 정보는 이란/사회 참고할 것.

[1] ''Âyatollâh-ol-'ozmâ''[2] ''Âyatollâh Ruhollâh Xomeyni''[3] ''Seyyed Ruhollâh Mostafâvi Musâvi Xomeyni''[4] 1929년 결혼.[5] 한 예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 운전이 2010년대 중순까지 금지되었던 유일한 국가로 악명 높았는데, 1960, 70년대까지는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였다가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사우디 왕가에서 근본주의 성향 성직자들을 달래기 위해서 여성들의 운전을 금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란은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보수화되긴 했었으나 사우디처럼 여성의 차량 운전을 금지하지 않았다.[6] 그러나 이란내 세속/민주주의 성향의 반 체제 세력들과 옛 팔라비 왕조 시대의 이전 지배층 인사들 상당수는 호메이니를 이란의 국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적대한다.[7]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헌법으로 "마흐디가 나타나면 국가 통치권을 헌납한다"고 규정한다. 장난으로라도 호메이니가 마흐디라고 주장했다면, 이렇게 써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8] 대통령과 국회의원으로 입후보하려면 전문가회의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며, 당선 후 정책을 결정할 때도 신권정부의 방침에 따라야 한다.[9] 세속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은 직선제 투표로 선출하는 4년 중임제로 1회 연임할 수 있다. 국회의원도 4년 직선제+임기제로 유지된다.[10] 출처 : 유달승 저,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11] 이란 중부인 마르카지주에 있다.[12] 참고자료: 유달승.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152페이지.[13] 당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중동 지식인들의 정석 그대로 레바논의 프랑스 학교에서 배우고 유럽행 유학을 나가 경력 태반을 프랑스 사회당, 공산당 등 유럽 국제 좌파와 함께하며 심지어 스페인 내전당시 국제여단에 지원하여 싸운적도 있을만큼 대외적, 특히 불어권을 필두로한 서방에선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이 사람도 팔라비 왕정 시절 내내 반체제 민주화 인사로 정권과 싸웠는데 팔라비 왕조가 물러나면서 그나마 세속주의적, 자유주의적, 근대주의적 성향이란 점에서 말이 통하는 바흐티야르에게 덤터기 씌우듯이 임시정부의 수장직을 맏긴것이다. 하술한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호메이니에게 정치적으로 제압당한 바흐티야르는 파리로 돌아가 반체제 이란인 망명단체를 이끌다 1991년 호메이니 정부가 보낸 자객들에게 자택에서 암살당했다.[14] 좀 더 젊었다면 장기독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 이미 70대의 노령으로 의외로 독재기간은 10년에 그쳤다.[15] 당시 이란에는 자생적 좌파 정당인 투데당과 좌파 무장단체인 페다이네 할크, 무자헤딘 할크가 있었다. 페다이네 할크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고 무자헤딘 할크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지향했는데 이슬람 정부 수립 후에는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이어갔다.[16] 바니사드르는 서구식 민주주의를 지지해서 호메이니와 상성이 맞지 않았고, 무자헤딘 할크와 연계를 시도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밀려났다. 망명 후 바니사드르는 지지자들을 모아 이란국민저항위원회를 만들었다(북한의 자유조선 비슷한 단체로 보면 된다).[17] 세속주의와 비세속주의의 경계를 넘어서 카터는 많은 이란인들이 싫어했다. 이는 카터 행정부가 겉으로는 인권 외교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팔라비 왕조의 인권탄압 정책들을 묵인했기 때문이다.[18] 빨갱이 만들기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독재자들의 인권 탄압 명분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혁명 직후 이란의 정세를 다뤘는데, 팔라비 왕조에 저항하다가 고초를 겪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공격받는 모습이 나온다.[19] 당시에 석유값이 사상최고점(30달러대)을 찍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자율이 20%대에 육박했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다른 후진국도 아니고 세계적인 산유국인 이란이 돈을 떼니 서구권 국가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20]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대놓고 호메이니를 '미친놈(Lunatic)'이라고 불렀으며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도 이라크에 헬기와 총기를 팔아넘겼다.[21] 물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군과 전쟁을 벌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지지해주긴 했다.[22] 그럼 이라크 시아파들과 사이가 좋았느냐? 그러긴커녕 되려 '''미국보다도 사이가 나쁘며''' 호메이니가 이라크의 남동부 절반 시아파 지역을 내놓으라고 하자 '''적대적이었던 이라크 시아파들이 후세인 곁에 붙어버렸다.''' 실제로도 이라크와 이란은 같은 시아파 이슬람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도 바빌론과 페르시아 문명 때부터 오랜 기간 싸워오는 등 사이가 안 좋은 앙숙관계이다.[23] 종교적으로 비슷한 이슬람권 국가들도 이웃나라끼리 역사적/정치적으로 사이가 앙숙인 경우들이 허다하다.[24] 이러한 생활은 망명지에서도 이어져서 망명지에서도 이란의 혁명을 지휘했고 이 와중에도 기도는 매일 드렸다고 한다. 심지어 업무를 보는 중간에도 계속 기도를 올렸다고[25] 그리고 그렇게 끔찍하고 반인륜적으로 죽이고 난 후 남은 가족들에게는 위로금이랍시고 500투만(5000리알)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5000리알은 현재 한국 원과의 환율을 비교하면 140원에 불과한 돈이다. 거의 40년 전 일이기는 해도 이슬람 혁명 직후로 리알화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에 그 때도 많은 돈은 절대 아니었다.(약 3만 원 정도.) 무엇보다 단지 공산주의자였을 뿐인 무고한 소녀의 목숨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푼돈인 것이다.[26] [27] 심지어 오죽했으면 이란조차도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를 비난했을 정도였다.[28] 출처 :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유달승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