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정변기
1. 개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의 오스만/로마 양국의 정변 과정에 대해 다루는 문서. 대략적으로 1421년 중후반에 해당하는 시기를 담고 있다.
2. 모레아의 개혁안 도입과 에디르네 정변
1420~21년 주인공이 중부/서부 그리스 대부분을 수복하면서, 메흐메트 1세의 입지는 완전히 무너지고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측에서도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한다. 마침내 메흐메트의 아들 무라트가 허리춤의 칼을 뽑아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면서 오스만 내에서 정변이 시작된다.
에디르네에서 벌어진 정변과는 별개로 모레아 궁정의 알현실에서 천하태평하게 지내고 있던 주인공은 니키포로스와 만나고, 그는 1204년 이래 오랫동안 가톨릭의 지배 하에 있던 아테네의 종교적 권위를 되돌려놓을 것을 요청한다. 이에 주인공은 정국의 빠른 안정화와 서방으로부터의 지원 등을 고려해 당장에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는 대신 파르테논 교회를 원래의 정교회식 모습으로 되돌려 종교 권위를 회복하는 정도의 타협안을 내놓는다. 200년 만에 제국의 품으로 돌아온 아테네와 복원된 파르테논 교회에 아테네 사람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모레아인은 축제를 벌이고, 그 와중 미스트라의 한 학자는 주인공의 업적에 감탄하며, 자신의 스승이 주인공을 돕게 설득하려 한다. 그렇게 조세 제도의 개편 등등 여러 개혁안을 요구했으나 외면당해 은둔한 당대 발칸 최고의 석학 게오르기오스 플레톤은 주인공에게 출사한다.
파르테논 교회의 복원으로 인한 축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주인공은 오스만의 재침을 막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다. 다른 것보다도 수복한 도시들을 도로 뱉어내지 않기 위해 통제력을 확고히 하려던 주인공[1] 은 시간만이 답일 기득권층의 충성 확보와 베네치아의 주재상인들에 대한 신민들의 반감에 골머리를 앓고, 결국 이 두 문제는 내버려두고 관료와 법조인을 확보하기 위한 전문 학원의 설립과 그 주임강사로 플레톤을 등용하는 것에 대해 고려한다. 하지만 이교[2] 를 신봉하는 플레톤은 모레아 정교회의 중심인 니키포로스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게 되었고, 끝내 주인공이 '플레톤을 직접 찾아가 심문하겠다'라고 이야기하고, 동시에 ''''나 자신과 모레아의 신앙심을 증명하기 위해 본국에 대주교좌의 설치를 요청하겠다''''[3] 라고 하면서 니키포로스와 아드리아노스를 비롯한 가신단의 분위기를 한방에 역전시킨다.
플레톤의 영입에 성공한 뒤 그리스 각지에선 주인공이 그의 명성을 이용해 귀족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설득해나갔고, 그들이 뛰어난 학자나 예술가를 후원해 얻을 수 있는 명예를 구실로 코를 꿰는 데에 성공해 학원의 설립에 필요한 자금 및 인재가 빠르게 모인다. 또한, 각지를 드나들며 무역과 거래를 하는 상인들 또한 그러한 주인공의 활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주인공 또한 상인들에게 최대한 호의적으로 접근하면서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롭게 학원 설립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렇게 모레아가 연일 발전하면서 소피야는 주인공과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자신의 완전한 패배를 인정하며 주인공에게 세르비아의 군사력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바치겠음을 제안한다. 그리고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일환으로 무라트의 정변으로 인해 에디르네가 완전히 봉쇄됐음을 알려주면서 둘의 관계는 소피야에 대한 주인공의 일방적 우위에서 다시금 대등한 협력 관계로 돌아온다.
오스만의 두 번째 수도인 에디르네에선 술탄에 즉위한 무라트 2세가 명을 내려 한 달여에 걸쳐 술탄 자리를 노리던 정적들이 철저히 제거당하는 피의 숙청이 이어졌고 마침내 궁정의 모든 가신이 그에게 충성하게 되었다. 정변 이전에 이미 제국으로 도망쳤던 소 무스타파를 제외한 모든 작위 요구자는 전부 살해당했고, 그렇게 무라트는 국내 정치를 휘어잡는다.
소 무스타파를 찾아서 죽이지 못했음에 무라트는 고심하지만, 그가 도망쳤다는 사실 자체가 술탄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판단을 내리고 이제는 외부의 적을 조지기 위해 궁정에서 학자, 가신, 전사들을 모아놓고 "그대들의 술탄이 그대들에게 묻노라. 우리의 적이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무신론자와 기독교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교황에 이르기까지 여러 답변이 나왔지만, 그의 마음을 끈 답은 예니체리의 답변인 주인공, 즉 드라가시스 친왕이었다. 비록 앞서 언급된 인물들에 비해 그 세력이나 위명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지만, 무라트는 예니체리의 설명을 귀기울여 들으면서 그를 고평가하고 나이와 상관없이[4] 자신과 대비되는 숙적으로 삼는다.
3.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변의 징조
주인공을 막아야 한다 생각한 요안니스는 모레아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에디르네의 봉쇄 소식 전달을 통제했지만, 이는 소피야의 개입으로 무위로 돌아갔을뿐더러 오히려 모레아가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들을 그대로 흡수해 주저없이 충성을 바치게 하는 등 본국의 통제를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소피야에게서 주인공이 에디르네의 봉쇄라는 정보를 알게 된 지 두 달이 지났고, 그 동안 콘스탄티노플과 에디르네 양쪽 모두 불길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주인공은 새로 술탄에 즉위한 무라트와 그의 주변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소피야에게 손을 벌렸고, 그녀의 정보자산인 유대인 밀정들이 주인공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면서 이전보다 우호적인 환경과 재정 지원 하에 신빙성 높은 정보를 여럿 가져다준다. 여러 정보들을 취합한 끝에 무라트의 공격적인 성향에 대해 파악한 주인공은 머지않아 제국을 비롯한 발칸의 각국과 오스만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질 것임을 간파하고, 그날부로 오스만을 막아내기 위해 밤낮을 지새우며 궁리한 끝에 베네치아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얼마 뒤, 연병장에서 훈련하는 병력들을 지켜보며 훈련도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 주인공은 아드리아노스에게 그리스의 불을 준비할 기술자들을 소집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전쟁 대비에 집중하는 주인공은 데미클레오테스에게서 오스만의 정변 이후 중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고, 상황의 악화를 당분간 멈춰줄 중재자의 필요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데미클레오테스와 플레톤, 그리고 이바니아를 중부 그리스로, 니키포로스를 총대주교를 설득시키게 수도로 보내고 병력 조련은 베네치아 출신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주인공은 이러한 결정을 대놓고 소피야의 앞에서 말하고, 그녀와 신경전을 벌인다.
주전파의 주도 하에 오스만과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던 주인공의 생각은 이내 현실에 가까워졌고, 소수만이 남은 보수파의 의견은 압살당하고 내전을 우려하던 중립세력들 또한 편을 정하면서 수도의 여론은 이제 단순한 주전파-보수파 간의 대립에서 황제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대립하는 요안니스파-콘스탄티노스파로 변질된다. 끝내 요안니스는 첫째 동생인 테오도로스와 작당하고 극단적인 수단인 반란을 시도하고, 마누일은 수도원에 유폐당하고 큰 무스타파가 다시금 오스만의 술탄으로 추대되어 오스만 내전이 재개된다.
[1] 실제 역사에서도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스만 술탄국이 바르나 십자군에 신경이 팔린 틈을 타 중부 그리스를 휩쓸고 많은 영토를 되찾았지만, 오스만의 처벌전쟁에 역으로 당했고, 이 틈을 타 들고 일어난 지역 유지들에 의해 펠로폰네소스 바깥의 점령지들을 모조리 뱉어내야만 했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을 걱정하는 것.[2] 정확히는 그리스 다신교와 조로아스터교.[3] 대주교좌의 수장인 대주교는 '''즉위식을 거행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즉, 주인공이 황제가 되겠노라 선언 한 것.[4] 사실 무라트 2세는 1404년 생이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1405년 생이다. 고작 한 살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