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기스문트
1. 인명
Sigismund
고대 게르만어로 sigu(승리)와 munt(수호)가 결합된 뜻을 지닌 남자 이름이다. 줄인 말은 지그문트.
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어: Sigismund von Luxemburg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
체코어: Zikmund Lucemburský (지크문트 루쳄부르스키)
헝가리어: Luxemburg Zsigmond (룩셈부르그 지그몬드)
라틴어: Sigismundus Luxemburgicus (시기스문두스 룩셈부르기쿠스)
신성 로마 제국 룩셈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황제. 룩셈부르크 왕가로서는 유일하게 헝가리의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2] . 블라드 드라쿨에게 '용'의 칭호를 준 사람이다.
2.1. 젊은 시절
지기스문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를 4세와 포메라니안의 엘리자베트 사이의 아들이었다.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의 왕 러요시 1세는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카를 4세 또한 헝가리 왕국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어린 지기스문트를 헝가리로 보냈다. 지기스문트는 어린 나이에 헝가리로 보내져 헝가리어와 그 밖의 교육을 받았다.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왕국 왕위 계승자로 내정해 두고 있었다.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자신의 장녀인 마리어 공주와 결혼시키고 왕위 계승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지기스문트가 7살인 1374년에 마리어와 약혼으로 맺어줬다. 지기스문트는 11살이 되는 1378년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다.
1381년에 14살이 된 지기스문트는 형인 로마왕 벤체슬라스에 의해 폴란드 크라코프로 보내져 그곳에서 폴란드 어를 배우며 사람들과 안면을 익혔다. 벤체슬라스는 또 그에게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노이마르크를 주었다. 노이마르크는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이었다. 그의 음모 때문에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서 쫓겨났다. 헝가리의 왕을 노리는 다른 후보가 나타나자 지기스문트는 약혼녀와 함께 탈출했다.
15살이 된 1382년에 헝가리 왕국의 왕인, 러요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딸인 마리어가 헝가리 여왕이 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그녀와 15살이 된 1385년에 즈볼렌에서 결혼했다.
1386년, 왈라키아 공국에는 미르체아 1세(32세)가 공작으로 오른다.
이후 아내 마리어와 그녀의 어머니가 반역자 마크바의 폴 주교에게 붙잡혔다. 그는 헝가리의 섭정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에 20살(1387년)의 지기스문트는 아내와 장모를 구출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실행하기 전에 장모는 1387년 1월 교살당하고 만다.
2.2. 1387(20세), 헝가리의 왕
헝가리의 왕.
마리어는 베네치아 인들의 지원을 통해 5개월 뒤인 1387년 6월에 구출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했다고 생각하여 지기스문트를 용서하지 않고 경멸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와 지기스문트는 별거했으나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그해 20살의 나이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의 왕이 되었다.
사촌인 모라비아의 변경백 요프스트가 많은 돈을 보내주었고 브란덴부르크를 저당잡혔다.
지기스문트는 이후 9년 동안 불안했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그는 왕가의 재산을 값으로 치러야 했다. 중앙 행정에 권한 복원에 10년이 걸렸다. 나라의 대부분은 거대한 가라이 가문이 지기스문트와 함께 운영했다. 그러나 사바와 드라바 사이에 있는 남부의 주들은 보스니아의 왕, 트브르트코 1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1395년에 니콜라스 2세 가라이가 이들을 진압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다수의 행사로 인해, 지기스문트는 귀족들에 의해 감금되었지만 능숙하게 뇌물을 써 탈출했다.
2.3. 1395(28세)
1395년 아내 마리어를 잃는다. 만삭인 상태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사고를 당해서였다고 한다.
2.3.1.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를 가신으로 받아들임
28살이 된 1395년에는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가 오스만 제국의 확장을 저지하며 입은 타격에 의해 도피하는 것을 받아준다.
이후, 블라드 드라쿨(블라드 3세의 아버지)은 왈라키아 공국의 볼모가 된다. 이후 블라드 드라쿨은 드래곤 기사단에 들어가서 '드라쿨'이란 호칭을 얻게되고, 훗날 블라드 가시공을 낳는다.
2.4. 1396(29세), 니코폴리스 전투에서의 대패
29살이 된 1396년에 오스만 제국의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선포한 십자군#s-7.7의 총 지휘관이 되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패하고 간신히 탈출했다.
1401, 34살에 두 번째 아내가 될 바르바라(10세, 지기스문트와 24살 차이)와 약혼.
1405, 38살에 두 번째 아내(바르바라, 14세)와 결혼
1409, 42살에 드디어 두 번째 아내(18세)와의 사이에서 외동딸(엘리자베트, 1세) 얻음
2.5. 1411(44세), 독일의 왕
헝가리 + 독일의 왕.
1418(51세), 왈라키아 공국의 미르체아 1세(64) 사망.
2.6. 1419(51세), 보헤미아의 왕 후스 전쟁
헝가리 + 독일 + 체코의 왕.
그가 51살이 된 해인 1419년, 형인 벤체슬라스가 죽자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현, 체코)의 왕의 자리도 얻게 된다. 하지만 체코인들이 그를 인정하기까지는 이때부터 17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독일 왕과 보헤미아 왕이라는 자리는, 외부에서 보기에 지기스문트에게 위엄을 덧붙였주고 명목상이나마 기독교도들의 속세 지도자로 만들어줬지만, 내부적으로는 힘이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직 헝가리 왕국의 왕위 만이 그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명령으로 무엇이든 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갖게 해주고 있었다.
암튼, 벤체슬라스의 미망인인 바이에른의 소피아가 보헤미아의 정권을 맡게 되자 그는 서둘러 헝가리로 갔다. 보헤미아 인들은 지기스문트를 얀 후스를 배신한 자로 여겨 불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무장했고 지기스문트가 이단자들에 대한 전쟁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십자군을 결성하고 있음을 선언할 때, 불길이 퍼져나갔다. 후스 파들과의 전쟁은 재앙으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이 다시 헝가리를 공격하고, 독일 제후들의 지원을 얻을 수 없는 왕은 보헤미아에서 힘을 잃었다.
특히 이 당시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얀 지슈카(생몰년: 1360년 ~ 1424년, 65세)가 제창한 새로운 전술의 덕이 높았는데 이 전술은 전투 마차#s-1.2[3] 를 진영 구축에 이용하고, 핸드 캐논과 석궁 등 효율적이고 진영을 무너트리는데 높은 효과를 보이는 발사무기의 적극적 배치, 평소 농사일로 자주 하던 도리깨 질에 숙달되고 종교적 신념으로 군기가 높았던 농민군의 대거 배치[4] 로 기사들의 기마 돌격을 본격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전술이었다. 따라서 주로 기사들로 구성되었던 당시 십자군은, 이 작정하고 구축한 상성 앞에 처절하게 복날 개 맞듯 얻어맞고 녹아내렸다.
그 후 후스파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지만 모두 패배했다. 그가 69세가 된 1436년에야 그들의 관습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후스파의 충성을 받아냈다.
2.7. 1429 ~ 1430(62세 ~ 63세), 비타우타스 대공을 도움 → 실패
한편 후스 전쟁이 벌어질 무렵, 지기스문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비타우타스 대공이 리투아니아 왕위를 교황으로부터 승인받으려던 계획을 1429년에 도왔지만 폴란드 의회(세임)의 견제 및 비타우타스의 죽음(1430년)으로 흐지부지된다. 민다우가스 대공 시절인 13세기 중반에 민다우가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교황령에서 그에게 리투아니아 왕위를 수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민다우가스가 왕위를 노리던 조카에게 암살당하고 리투아니아가 도로 발트 신화로 개종하면서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는 14세기 말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도 대공 칭호를 썼다. 비타우타스는 일찍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통치권을 두고 친척인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2세와 알력이 있었고, 리투아니아의 독자성을 유지하려 했다.
2.8. 1433(66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헝가리 + 독일 + 체코 + 신성로마제국
블라드 드라쿨,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으로.
2.9. 1437(70세), 사망
지기스문트는 후스 전쟁(1419 ~ 1436, 18년간)이 끝나고 일년 뒤(1437, 70세)에 사망
사후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블라드 드라쿨은 오스만 투르크 쪽으로 전향하게 된다.(1437년)
2.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Europa Universalis 2, Europa Universalis III에서 헝가리 군주로 등장한다.
-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 4에서 등장한다. 출생연도가 1368년이라 1382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재야로 등장하며, 시나리오 2는 1271년 시작이라 일부러 그 때까지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플레이어가 유라시아를 통일하고도 남기에 파워업키트에서 추가된 시나리오 4에서 볼 확률이 높다.
- 소녀전쟁에서는 메인 빌런으로 등장. 명군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나, 후스파를 제압하기 위해 악랄한 수도 사용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헝가리의 왕으로 등장, 오스만-왈라키아의 침공과 후스 전쟁에 시달리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일단 후스 전쟁은 체사리니 추기경의 중재를 통해 온건 후스파들을 대부분 회유하고, 왈라키아는 트란실바니아 전체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어 겨우 마무리하고 실제 행보와 비슷하게 오스만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 십자군을 결성하는 등 온갖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세르비아의 배신으로 인해 수천 명의 헝가리 의용군을 잃은 이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무라트 2세의 뛰어난 용병술에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며, 그 이후 지병이 생겨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자 후녀디를 헝가리를 통치할 전권을 위임한 고명대신으로 삼은 채 현실보다 일찍 숨을 거둔다.
-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1] 지기스문트 황제의 사위이다. 알브레히트는 로마왕까진 올랐지만 정식 대관을 받지 못해 신성 로마 황제는 되지 못했다.[2] '지기스문트' 라는 독일어 이름을 헝가리어로 발음하면 '지그몬드' 가 된다. 여담으로 아무래도 왕보다는 황제가 격이 높아서인지 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지만, 그의 헝가리 왕으로서의 재위기간은 1387년부터 1437년까지 50년이나 된다.[3] 바겐부르크Wagenburg라는 이름을 가진 접이식 목제 방벽 마차[4] 물론 사용 무기는 기마병에게 높은 상성을 자랑하는 도리깨를 무기로 만든 풋멘즈 플레일이라는 긴 철퇴와 장창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