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일수호통상조약

 

서양 국가들은 증기 통신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의 가족이 되기를 바란다.

The nations of the West hope that by means of steam communications all the world will become as one family.

'''타운센드 해리스, 홋타 마사요시와의 대담, 1857년 12월 12일'''[1]

19세기 일본 에도 막부미일화친조약 체결 이후에 1858년 7월 29일 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 쿠로후네 사건으로 맺은 불평등조약이며, 안세이(안정) 5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여 근대화를 시작했다. 이후 일본도 한반도로 들어와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 운요호 사건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과정과 유사하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하코다테, 니가타, 요코하마, 효고(현재 고베), 나가사키 등 5개항의 개항
  • 무역에 대한 일본 관원의 불간섭[2]
  • 일본 내에서 미국의 영사 재판권 인정
  • 협정 관세 원칙
막부 로주수좌 아베 마사히로와 그 뒤를 이은 홋타 마사요시는 막부 내부 및 여러 지방 번주들과의 논의를 거친 끝에 조약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조정 평공가 세력이 막부와 인척관계를 맺어 막부를 지지한 고셋케 세력을 누르고 고메이 덴노를 설득, 덴노는 칙허 불허 입장을 밝혔다. 홋타 마사요시가 천황의 칙허를 받기 위해 교토로 상경해 조정을 설득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사이 이이 나오스케가 이끄는 대 조정 강경파인 난키파가 막부 권력을 장악, 조정을 무시하고 조약을 승인했다.
이 조약을 맺음은 존왕양이 사상을 내건 막부 타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안세이의 대옥사, 사쿠라다문밖의 변 등을 거쳐 막부로부터 조정 및 웅번들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 결국 막부가 몰락하고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99년 7월 17일 미일통상항해조약이 시행되며 효력을 잃었다.

[1] 해당 인용구는 문명 5/기술에서 증기기관 기술의 인용구로 쓰이기도 하였다.[2] 이를 통해 무역의 전면 자유화를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