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후네 사건

 

조정의 지시로 그려진 그림
민간이 그린 쿠로후네(흑선, 검은 배)#. 배가 괴물같이 묘사되어 있다.[1]
1. 개요
2. 일본에 입항한 '쿠로후네'는?
3. 일본의 개항
4. 페리 제독의 상륙
5. 개항의 결과
6. 창작물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


'''泰平の眠りを覚ます上喜撰'''

'''태평한 잠을 깨우는 조키센.'''

'''たつた四杯で夜も寝られず'''[2]

'''불과 넉 잔에 밤에도 잠을 이룰 수 없구나.'''[3]

- 가에이 6년 시절에 나온 것으로 보이는 .[4]

일본어: 黒船来航(흑선 내항)
영어: The Perry Expedition(페리 원정)
1853년에 미국매튜 페리 제독[5]이 이끄는 미 해군 동인도 전대(East India Squadron)가 아시아 원정 중에 이즈국 시모다 항에 'USS Susquehanna'(1850년 진수/2,489톤), 'USS Mississippi'(1841년 진수/3,272톤), 'USS Saratoga'(1842년 진수/896톤), 'USS Plymouth'(1844년 진수/989톤) 등 4척의 군함들을 몰고 와서 개항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벌인 사건.
여기서 쿠로후네(黒船, 흑선)는 서양식 철선을 가리킨다.[6][7]
현대의 일본에서는, 뭔가 대단한 외국인이 국내에서 활약할 경우 그를 '쿠로후네'라고 불러주는 관용적 표현이 존재한다.

2. 일본에 입항한 '쿠로후네'는?


증기선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증기기관이 불안정해서 모든 동력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고, 서스케아나호의 경우는 1개의 연통과 3개의 을 가진 증기선+범선하이브리드 형태였다.[8] 장기항해 최대시속은 18.5km.
USS Susquehanna(1850)[9]
[image]
종류
증기 프리깃(steam frigate; 호위함)
건조국/제작사
미국/뉴욕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10]
진수
1850년 4월 5일
취역
1850년 12월 24일
전장
78m
배수량
2,489톤
무장
9인치(230mm) 댈그런 포[11](smoothbore gun; 활강포) x 12문
150-pounder(68.0kg) 패럿 라이플[12] x 2문
12-pounder(14.5kg) 라이플 x 1문
USS Mississippi(1841) 제원[13]
[image]
종류
증기 프리깃(steam frigate; 호위함)
건조국/제작사
미국/필라델피아 해군 조선창(Philadelphia Naval Shipyard)[14]
진수
1842년
취역
1841년 12월 22일
전장
70 m
배수량
3,272톤
무장
10인치(250mm) 포 x 2문
8인치(200mm) 포 x 8문
추진 기관
스팀엔진
USS Saratoga(1842) 제원[15]
[image]
종류
sloop-of-war(슬루프)
건조국/제작사
미국/포츠머스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16]
진수
1842년 7월 26일
취역
1843년 1월 4일
전장
44.6m
배수량
896톤
승무원과 병력
210명
무장
8인치(200mm) shell 함포 x 4문
32-pounder(14.5kg) 함포 x 18문
추진 종류
범선
USS Plymouth(1844) 제원[17]
[image]
종류
sloop-of-war(슬루프)
건조국/제작사
미국/보스턴 해군 조선창(Boston Navy Yard)[18]
진수
1844년
취역
1844년 4월 3일
전장
45 m
배수량
189톤/989bm(톤)[19]
무장
8인치(200mm) shell 함포 x 4문
32-pounder(14.5kg) 함포 x 18문
추진 종류
범선
기타
1861년, 미국 남북전쟁에서 아메리카 연합국에 소속되었으며 1862년에 파괴됨.

3. 일본의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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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 그린 그림보다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그려진 막부 측 미 군함 그림[20]
1853년 7월 8일, 우라가(浦賀, 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위치)에 입항했다. 사실 막부는 이 사건에 크게 놀라지 않았는데 이미 네덜란드로부터 미국이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해 군함을 출항 시켰다는 정보를 습득했기 때문이었다.[21] 페리의 원정 목적은 일본과 류큐 왕국(현재 오키나와)의 개항이었고, 심지어 류큐는 군사적 점령까지 고려하고 온 것어서 매우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도 막부는 늘 하던 대로 시간을 끌어서 흐지부지하려고 했다. 대통령의 친서만을 받고 구체적인 협의는 하지 않았고 1년 후에 다시 오겠다는 페리를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 해 중국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자, 페리는 7개월 만인 1854년 2월 13일 우라가에 다시 나타났다.[22] 전년도에는 4척이었던 함대를 9척으로 늘려서 데려왔다.
결국 막부의 결정으로 일본은 에도 막부 초기부터 유지한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개항했고, 1854년 3월 31일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중간에 내항했던 류큐 왕국도 1854년에 미류수호조약을 맺었다. 여담으로 러시아 함대와 영국 함대도 시모다와 하코다테에 출몰했다.
막부가 개항한 데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내부 정치 사정.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죽자 그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13대 쇼군에 취임했으나, 문제는 이에사다가 병약해서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후계자도 없었다는 것. 때문에 막부는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놓고 반으로 갈라지고 만다. 막부의 실권을 쥔 다이묘들, 즉 신반 다이묘와 후다이 다이묘들은 기슈 번주인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으나, 사쓰마조슈 등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히토츠바시가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이렇게 대립이 격화되자 막부는 내부 문제를 단속하기 위해 먼저 외부의 문제부터 해결하려 했고, 그대로 개항으로 이어졌다. 후계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로 결정된다.
그러나 가장 주된 요인은 군사력의 열위로 개항했다는 것이다. 9년 전 네덜란드를 통해서 대국인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에게 거하게 털린 걸 알았고, 해안선을 면한 각 번들의 병력과 막부가 가진 해군력이 매우 형편 없어서 전쟁을 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걸 페리 내항 이전에 깨달았다. 몇몇 사람들은 이걸 보고 쫄았다는 둥 웃기는 이유라는 둥 하는데 전쟁하다 말아먹은 다른 아시아 나라랑 비교해보면 굉장히 현실적인 판단. 뒤이어 미국일본이 맺은 조약은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일본 측에 심각하게 불평등하게 맺어졌다. 또한, 개항을 주도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빈고 후쿠야마 번주이자 막부의 로쥬인 아베 마사히로조차 여러 번 이양선 추방령[23]을 부활하고자 했지만, 해안 경비대의 반대로 결국 실패했을 정도다.
한국에선 일본이 무저항으로 스스로 개항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무저항으로 열어줬다기보단 애당초 저항할 수가 없었다 라고 보는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페리의 함대는 일부러 에도 만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에도는 100만이 넘는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각종 물자들을 대부분 해운을 통해 수송하고 있었으므로[24] 미국 함대를 쫒아낼 해군력이 없는 일본으로선 그야말로 목이 졸려지는 것과 같은 치명타였다. 이대로 버티자니 에도의 수많은 인구가 굶어죽을 판이고, 그렇다고 미국 함대를 격파하자니 그럴 해군력이 없고...미국은 문자 그대로 에도막부의 손발을 묶어놓고 개항요구를 한 셈이다. 때문에 흑선개항은 국가간의 외교나 파워게임에서 해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은 13대 대통령인 밀러드 필모어였지만, 미일화친조약은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 재임기에 체결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개항을 필모어의 업적으로 넣는다.[25] 에도 막부쇼군은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였지만, 이에요시가 흑선이 내항한 지 3달 뒤에 병사했기 때문에,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 치세에 조약을 맺었다. 또한 이때 미국뿐 아니라 러시아 역시 이즈국 시모다항에, 영국은 에조국 하코다테항에 군함을 몰고 와 개항을 요구했다.

4. 페리 제독의 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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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제독은 해군 군악대The Star-Spangled Banner를 연주하는 가운데 500명의 해군 육전대해병대를 이끌고 요코하마의 해안에 상륙하였으며, 3주간의 협상을 벌여 일본의 개항을 이끌어내었다. 이후 페리는 일본인들에게 4분의 1 크기의 미니어쳐 증기 기관차전화기, 시계, 화로, 우산, 재봉틀, 색소폰이나 나팔, 클라리넷 같은 서양식 악기들, 미국의 화폐, 미국에 관한 서적과 각종 농기구와 무기 등을 보여주고 함상 파티도 열어 위스키 등의 서양식 음식을 대접하면서 흑인 밴드도 데려와 공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에도 막부 역시 답례로 금도금된 가구와 청동으로 된 장신구, 도자기로 된 잔과 함께 페리 제독이 개인적으로 조개 껍데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조개 껍데기를 모아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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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는 덩치 큰 미국인들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거구의 리키시(力士)(스모 선수)들을 시켜 쌀을 운반하게 했는데, 미 수병들과 해병들이 큰 덩치를 보고 신기해 하며 만지작대는(...) 그림이 대영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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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 경기를 관전하는 미 해군 장교들의 모습.

5. 개항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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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와 페리가 협상을 벌인 사찰, 료센 지[26]
일본이 개항을 결정함에 따라 미국과 조약이 맺어졌다. 1854년 최초의 조약인 미일화친조약[27]은 그런데로 일본도 수용할 만한 편이었으나, 4년 뒤인 1858년 맺어진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심각하게 일본 측에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우선 일본에게 관세자주권이 없는 반면에, 미국에게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28]
두 번째로 미국에게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이 인정되기 때문에, 설사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렀어도 일본의 법률로 심판할 수 없고 미국의 영사가 판결한다. 물론 일본인이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미국 법에 따라 처벌받는다.
세 번째로 최혜국 대우이다. 일본이 미국 이외의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 시 해당국에 미국과의 조약보다 더 좋은 조건을 체결했을 경우, 미국에게도 그 혜택과 동등한 조약이 자동적으로 체결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혜국 대우를 해준다는 말이다. 단 쌍방 모두 최혜국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미국만 받는 조약이었다. 즉 반대로 미국이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에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을 시, 일본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참고로 조선이 일본과 맺은 여러 불평등조약들을 비교하면, 꼭 맞는다 볼 순 없지만 미일화친조약이 우리나라의 강화도 조약 포지션에 위치해 있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이 무역규칙의 포지션이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은 1899년 미일통상항해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폐기된다.
같은 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이와 동등한 수준의 불평등한 조약들이 맺어지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에도 막부의 권위는 점차 실추되었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양이운동이 거세지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초슈 번이나, 공무합체를 내세워 중앙 정치에 진출하려한 사츠마 번 등이 에도 막부와 대립하면서, 이들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자는 도막(倒幕)파 운동으로 번졌다. 이른바 막말(막부 말기)의 시작이다. 결국 1867년 대정봉환무진전쟁으로 에도 막부는 사라지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는 신정부가 세워지고 메이지 시대로 접어들었다.
개항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우선 개항 이전까지 쇄국을 하던 일본의 교환가는 1:4.6이었지만 세계 표준은 1:15정도였다. 다시 말해 널리 쓰이던 멕시코 은화를 일본에 가져와서 금으로 바꾸고 그걸 다시 중국에서 은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3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외국으로 금이 엄청나게 유출되었고, 동시에 은이 엄청나게 유입되었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일반인들은 금화를 볼 일이 별로 없었고, 실생활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통화는 은이었는데, 은이 엄청나게 일본에 쏟아 들어오게 되자 당연하게도 환상적인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외국 배들은 금은을 교환하기만 한 게 아니라 금은 교환으로 올린 수익으로 일본의 이나 생사를 대량으로 사서 중국에 팔아 물가는 더더욱 폭등하게 된다.
1855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쌀 1석(1石=약150kg)의 값은 은 80문(匁)정도에 불과했으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2년 뒤인 1860년에는 은 162문으로 2배 이상 뛰었고, 대정봉환이 일어난 1867년에는 은 870문으로 쌀값이 10배 이상 올랐다. 그나마 금을 갖고 있었던 거상들은 버텨낼 수 있었으나, 일본의 서민들은 버틸 수가 없었다.(출처:日本米価変動史 저자:中沢弁次郎) 물론 막부에서도 조악한 금화(万延小判-만엔고반)를 만들어 화폐 부족 현상을 메우려 했으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조치였다. 그 결과 농민반란인 잇키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결국 무진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6. 창작물


일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라서 창작물에서도 많이 묘사되는 사건이며, 이 사건의 주인공인 페리 제독도 창작물에 자주 등장한다. 페리는 아마 일본에서 제일 유명한 미국인일 것이다.
  •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는 사건을 일으킨 페리 제독을 주인공으로 하여 통상수호조약을 맺으러 가는 내용을 병맛 넘치게 개조하여 다루었었다. 유명하진 않아도 애니화가 이루어진 에피소드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듯.
  • 경사청 24시에서는 초마초적 인물로 등장하며, 그 후손이 미국 경찰 비밀조직의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예의가 굉장히 바른데 일본어를 잘못 배워서 "안녕하십니까 빌어먹을 녀석아"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일본 쪽 경사청의 시조는 사카모토 료마다.
  • 마계학원에서도 흑선내항을 행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작품이니 만큼 흑선내항 또한 괴랄하다.
  • 태고의 달인 시리즈 남코 오리지널에는 黒船来航이라는 이름의 곡이 수록되어 있다. 시작 부분에 뱃고동 소리가 울린다. 태고의 달인 DS 도로롱! 요괴 대결전에서는 규슈에서 요괴로 등장하는데 테마곡이...
  • 영웅전희 GOLD에서는 페리가 궁극기를 사용하면 거대한 흑선 1척이 포격하는 컷인이 뜬다.
  • 전설의 용자 다간에서는 사쿠라코지 호타루를 곁에서 모시는 할머니가 호타루를 방문하러 변장하고 나타난 타카스기 세이지와 다간 일행을 보자 이런 광경은 쿠로후네 사건을 본 이후 처음이라고 반응한다. 다간은 시간대가 1993년이고, 쿠로후네 사건은 1854년에 벌어진 일이니 이 할머니 최소한 100살은 거뜬히 넘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 사무라이 마라톤에서는 본 사건에 위기감을 느낀 지방 영주가 사무라이들의 단련을 위한 경연을 개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피 비린내 나는 사투로 번지게 된다.
  • 크레용 신짱 애니판에서도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외전 에피소드가 있다. 여기서는 에도시대에 찾아온 인물이 페리가 아니라 캬리(...). 캬리 파뮤파뮤가 전파한 인조 속눈썹으로 여자들이 예뻐진 나머지 남자들이 정신을 못 차려서 사회문제로 커지자 막부에서 캬리를 수배했지만, 쇼군이 인조 속눈썹을 장착당한 뒤, 마음에 들어하면서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맞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후 찾아온 이가 진짜 페리 제독.

7. 여담


한국에서는 쿠로후네 사건에 대해 "한반도는 구한말이었을 때 벌어진 일"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하다 보니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진 시기에 대해서도 19세기 말 고종(대한제국) 시기였겠거니 하고 잘못 넘겨짚는 일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연표를 따져보면 일본의 쿠로후네 사건은 '''1853년'''에 벌어진 일로, 고종이 즉위하기도 전인 철종 재위기에 일어났다. 고종은 1살 갓난아기였던 시기이고 미국조차도 지금과 같은 형태의 미합중국으로 건국된 지는 70년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조금 무식하게 이야기하면, 서부극들의 배경이 되는 시기보다도 더 옛날이다.결국 대한제국 시기의 시작점으로 보는 서기 1897년으로부터 44년 전의 사건이니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 않다고 할수 있다.이 때 조선 왕은 철종이었다. 서부극들에선 극히 일부 캐릭터를 제외하면 모두 이미 후미장전식 라이플을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후미장전식 총포가 처음으로 안정적인 형태를 갖춘 것이 암스트롱포가 개발된 1855년이다.
조선이 일본보다도 먼저 개항할 뻔한 적도 있었다. 1846년(헌종 13년)에 장 바티스트 세실 제독 휘하(조선왕조실록에는 슬서이瑟西耳 제독으로 기록되어 있다)의 프랑스 해군 군함들이 조선에 정박하여 자국 천주교 신부 3명[29]참수형에 처한 1839년의 기해박해 건을 들며 '너님들 자꾸 이러면 확 침공해버리는 수가 있음?'이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나라 문이나 좋은 말 할 때 열라'고 페리 제독과 비슷한 소리를 하며 내년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이듬해 2척의 함정과 700여 명의 병력들을 조선에 파견해 더 강한 개항 압력을 가하려고 했는데[30], '''오다가 암초에 걸려''' 죄다 가라앉았고, 결국 졸지에 조선의 홍주 외연도에 고립되어 버렸다. 조선의 전투력을 몰랐던 프랑스는 700명 가량의 병력에 보급품도 없는 상황이라 지난 번처럼 고압적으로 나올 수가 없었고, 결국 놀라울 정도로 공손하게 꼬리를 내리며 조선에 구호를 청하게 되었다. 조선은 성심성의껏 식량 등을 프랑스 해군에 전달했고, 상하이에서 큰 배 3척을 빌려다가 보름 만에 이들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저 배들은 베트남을 막 정벌한 배들로, 베트남을 정벌한 김에 조선도 먹겠다고 의기양양한 상태였다가 저런 황당한 일을 당하곤 조선에게 살려달라고 엉엉 울면서 빌었던 것이다.[31]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프랑스가 보낸 글이다.
대불란서국(大佛蘭西國) 수사 총병관(水師總兵官) 납별이(拉別耳, 본명은 라피에르Lapierre로 계급은 대령, 당시 보직은 프랑스 중국파견함대 분함대장이었다.)는 조회(照會)할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전 수사 제독(水師提督) 슬서이(瑟西耳)는 본국(本國)에서 보내어 이 바다에 온 각전선(各戰船)을 거느리는 원수(元帥)이었는데 지난해에 이곳에 와서 귀국의 보상 대인(輔相大人)에게 공문을 바치고 이듬해에 배를 보내어 와서 회문(回文)을 받기로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총병(本總兵)이 이 임무를 맡게 되어서는 불란서국과 대청국(大淸國)이 이미 만년(萬年)의 화호(和好)를 정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본총병이 배 2척이 곧 영광스럽게 개선할 때에 호의(好意)로 와서 회문을 받아 본국에 복명하려고 전 수사 제독이 갔던 곳으로 가다가 뜻밖에 어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이 사나운 바람에 부수어졌으므로, 본총병이 어쩔 수 없이 이곳 가까운 섬의 민가에서 떨어진 곳의 바닷가에 잠시 수수(水手)·사졸(仕卒)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인원을 두고서 구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람은 많고 은 모자라며 양식은 태반이 죄다 바닷물에 침괴(浸壞)되었는데, 귀국에서 늘 너그러이 예대(禮待)하여 먼 나라의 파괴된 배에 탄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고 물과 양식을 도와 주기를 절실히 바라서 살펴 주시기를 거듭 빕니다.
배 2척을 삯내어 본총병의 차원(差員)을 시켜 곧 대청국 상해(上海)에 가서 다른 배를 삯내어 와서 이 곳의 부수어진 배들에 탔던 인원들을 싣고 일찍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고마운 은덕이 그지없을 것이고, 삯낸 배와 도와 준 먹을 것의 값은 절로 공도(公道)로 보내어 갚을 것입니다. 혹 귀국에서 지금 배를 많이 삯내어 이 어려움을 당한 뭇사람을 싣고 일제히 상해로 간다면 더욱 편리하겠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삯낼 수 있으면 하루라도 덜 머물러 귀국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불란서 황제가 반드시 귀국에서 그 나라의 인원을 환난 가운데에서 구조한 은혜를 생각할 것이고, 본총병도 귀국과 영구한 화호를 맺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 때문에 귀도사(貴道使)에게 조회하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이 고려국(高麗國) 전라도사 대인(全羅道使大人)에게 조회합니다.
구세(救世) 1천 8백 47년 8월 13일, 도광(道光) 27년 7월 3일.
물론, 이런 조치가 불과 수천 명의 병력으로 그 거대한 청나라도 개발살낸 것을 볼 때, 삼정의 문란으로 아작나고 있던 조선이 버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취한 현실적 조치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다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병인양요에서는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결과적으로 '패퇴'시켰고, 신미양요에서도 조선군이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지만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정치적 목적은 달성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스스로 공식적으로 병인양요가 프랑스의 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관 의사였던 마르탱이 1883년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명백히 병인양요를 "프랑스의 패배"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의 당시 내정이 혼란스럽긴 했지만, 겨우 700명의 병력으로는 여러 요새로 보호받고 있는 내륙 도시인 한양을 공략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32] 사실상 내전 상태였던 중국이나 네덜란드 등을 통해 서구의 위험을 상세히 알고 있던 일본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음은 프랑스인들이 떠났단 보고를 들은 조선 조정의 반응이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홍희석(洪羲錫)의 장계(狀啓)를 보니, 고군산(古群山)에 왔던 이양선(異樣船)은 이미 떠났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서봉(書封)이라는 것은 사의(辭意)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미 떠났고 미처 물리치지 못하였고 보면,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곧 뜯어 본 뒤에 글을 베껴서 본사(本司)에 올려보내고 원본(原本)과 물건들은 우선 그 진장(鎭將)한테 봉류(封留)하고 두 막(幕)을 봉폐(封閉)하고 또한 유의하여 지키게 하고, 섬 백성이 1달에 걸쳐 물건을 대어 주느라 폐단이 많았을 것이니, 본도(本道)에서 각별히 조치하여 있을 곳을 잃고 흩어지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갑자기 응변(應變)하느라 혹 잘못된 것이 많을 것입니다. 답서(答書)를 써서 보이는 일도 늦어서 미치지 못하여 저들이 돛을 올리고 헛되이 돌아가며 물건을 남겨 두었으니, 뒷날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의 글 가운데에 이미 대청국(大淸國)과 화친(和親)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반드시 오문(澳門)에 살도록 허가된 자들 가운데의 일종(一種)일 것입니다. 일찍이 임진년(壬辰年) ·을사년 영선(船)이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도 다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은 두 해에 비하여 더욱 정상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전후 불란서의 사실과 기해년 양인(洋人)에게 용률(用律)한 일을 괴원(槐院)을 시켜 연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부쳐 보내고 이어서 황지(皇旨)로 양광 총독(兩廣總督)에게 칙유(飭諭)하여 다시 오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 관련 문서



[1] 당시 일본인들의 서양 증기선에 대한 두려움을 잘 느낄 수 있다.[2] 원문의 たつた는 tatsuta가 아닌 tatta로 읽는다. 지금은 つ가 촉음으로 쓰일 적엔 작은 가나로 써서 っ로 적고 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구별이 없이 큰 つ로만 적었기 때문.[3] 이 시에 나오는 조키센이란 교토의 우지(宇治)지방에서 생산되는 고급 차 상표의 하나로, 증기선을 뜻하는 일본어 '조키센'과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한 말장난이다.[4] 가나가와 신문에 따르면 1853년 쯤에 쓰여졌다고 한다.[5] 당시 페리의 임무는 타국 해군의 제독과 거의 같았지만, 타국 해군 전단장들과 달리 계급은 준장(Commodore : 미 해군에서 현재는 이 단어를 전대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하는 대령들에게 붙여주는 명칭으로 쓰지만, 당시에는 준장을 뜻했다.)에 불과했다. 전통적으로 문민 통제 원칙하에 군인의 권위를 필요 이상으로 높이는 것을 경계한 당시의 미 행정부의 방침에 따라, 육군 최고 계급을 Major General로, 해군 최고 계급은 Commodore로 제한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윗 계급이 존재는 했으나 이 이상 진급을 안 시켜줬다.[6] 에도 막부 이전에도 서양식 배들을 일컬을 때 쓰이긴 했다.* 그래서 토탈 워: 쇼군2에 나오는 포르투갈 카락선흑선이라고 나온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당시 서양 배들이 내수성을 높이기 위해 시커멓게 바른 타르 때문이었다.[7]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한국어에는 '이양선'(異樣船)이라는 단어가 있다. 조선 말기에 한반도에 나타난 서양식 배들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배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라서 '모양이 이상한 배'라는 뜻으로 이양선이라 불렀던 것.[8] 이런 종류의 배를 기범선이라고 한다. 장기항해에선 연료소모 없이 돛으로 순항하고 무풍시, 입출항시엔 내연기관의 출력을 이용하는 형식으로써, 연료효율이 낮은 초기 증기기관 특성으로 장기항행에 지속적으로 발동기를 돌릴 수 없고 석탄의 중간보급기지도 많이 갖춰져있지 않던 시대에 과도기적으로 쓰이다 중간 석탄보급기지가 갖추어지고 결정적으로 수에즈 운하가 뚫리면서 항행거리가 크게 단축되자 사라지게 된다. [9] 왼쪽이 서스케아나 오른쪽이 USS Congress (1841) USS Susquehanna (1850)[10] http://en.wikipedia.org/wiki/Brooklyn_Navy_Yard[11] http://en.wikipedia.org/wiki/Dahlgren_gun[12] http://en.wikipedia.org/wiki/Parrott_rifle[13] USS Mississippi (1841)[14] http://en.wikipedia.org/wiki/Philadelphia_Naval_Shipyard[15] USS Saratoga (1842)[16] http://en.wikipedia.org/wiki/Portsmouth_Naval_Shipyard[17] USS Plymouth (1844)[18] http://en.wikipedia.org/wiki/Boston_Navy_Yard[19] http://www.wrecksite.eu/wreck.aspx?219239[20] 일본인 화가 히바타 오스케(樋畑翁輔, 1813~1870)가 흑선 내항 직후에 그린 그림[21] 일본은 제2차 아편전쟁 이후 1년에 1번 씩 정기적으로 네덜란드 본국에서 제공되던 오란다 풍설서와는 별도로 해외에서 주목할만 한 사건이 벌어졌을 경우 관련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즉시 제출하도록 네덜란드 상관에 명령했다. 이를 별단(베츠단) 풍설서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에도 막부는 사전에 미국이 파견하는 군함의 척수와 명칭, 톤수, 대포수와 승무원 수 등의 제원과 지휘관인 페리 제독의 개인 신상까지 알아내었다.[22] 료마전에서 페리의 함대가 일본에 다시 왔을때, 이 소식을 들은 막부 관리들이 너무 빨리 왔다고 중얼대는 이유가 1년도 채 안 돼서 왔기 때문이다.[23] 1825년 막부에서 내린 명령으로, 일본의 해안선에 접근하는 외국 배는 보이는 대로 포격하고 내쫓는다. 또한 상륙 외국인에 대해서는 체포를 명한다는 내용이었다.[24] 현대에도 철도와 비행기는 해운의 수송량을 따라잡지 못한다[25] 덧붙여 최초로 일본 외교사절을 맞이한 미국 대통령은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이다. 한국 외교사절의 경우 21대 체스터 아서.[26] 오늘날에도 시모다에 남아 있으며, 페리 제독과 흑선, 서양과 에도시대 일본의 관계에 관련된 유물들이 보관된 작은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27] 이 조약은 시모다, 나가사키, 하코다테의 3항을 개항하지만 물자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지 통상조약은 아니었다.[28] 다만 조약 부칙상에 미국 물품에 대해 20%정도의 관세율을 정하기는 했으나, 정작 중요한 쌀과 생사 등 일본의 주요 산업품에는 고작 5%의 관세만을 물릴 수 있었다.[29]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이들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이 중 모방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자라나 신부가 되었다.[30] 그전 3월에는 소치제의 가톨릭 박해 때문에 다낭을 포격했다.[31] 사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 막가파로 나가봐야 지리도 모르는 조선에서 고립되어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자존심은 좀 구겨지겠지만 일단 살아야 나중에 조선을 정벌하건 말건 할 것 아닌가. 그들에게 다행인 사실이라면 조선의 방침이 쇄국을 하되 표류해온 외국인은 먹여주고 재워준 뒤 빨리 자기 나라로 가버리게 하는 것이지만.[32] 조선의 지리적 특성에 대해서도 자세히 몰랐을 것이다. 당장 위의 암초 침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에 스파이를 풀어서 조선의 사정을 속속들이 캐내고 조선 지도까지 만든 뒤 수도 한양을 함락하고 왕을 굴복시키려 침략했는데 왕이 튀어서 목적 달성에 실패한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