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
雲揚號 事件'''

'''명칭'''
한국어: 운요호 사건(雲揚號 事件)
일본어: 江華島事件, 雲揚号事件
'''날짜'''
양력 1875년 9월 20일
음력 1875년 8월 21일
'''장소'''
강화도 초지진
'''결과'''
조선의 패배, '''강화도 조약 체결'''
'''교전국'''
[image] 조선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image] 이민덕[1]
[image] 이노우에 요시카
'''병력'''
400여 명
해안포
해군 육전대 22명
슬루프함 1척
'''피해 규모'''
전사자 : 35명
부상자 : 16명
전사자: 없음
부상자: 2명[2]
1. 개요
2. 전개
2.2. 교전
3. 결과
4. 영향
5. 논의
5.1. 패배의 원인
5.2. 국제법 준수 여부
6. 운요호의 제원
7. 여담
8. 관련 링크
9. 관련 동영상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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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당시 사건을 묘사한 그림
1875년 조선 왕조 후기 때 일본 해군의 군선(軍船)인 운요호(雲揚號, 운양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물러간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의 시초격인 사건이기도 하다.
봉건적인 막부 체제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유신이 선포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를 계기로 근대화 분위기가 장식됨과 동시에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 침공에 대한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추세가 고개를 들면서 이에 힘입어 정한론까지 가세하게 되자 침공목적으로 조선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이미 1854년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문호 개방을 선포했던 일본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과 함께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면서 상호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반양(反洋) 정서로 인하여 실패만 거듭했다가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하야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자 이를 계기로 조선의 침공을 위해 군선(軍船)인 운요호를 부산으로 밀파한다.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 사건 때 당했던 방식 그대로 차용해서 거의 똑같이 '''늑약(勒約)'''이라 할 정도로 근대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2. 전개



2.1. 일본제국 해군의 습격


[image]
운요호
운요호가 부산항에 오자 당시 '부산 훈도'였던 현석운이 부산 주재(駐在) 왜관(倭館)을 항의 방문하여 군선 침투 사유를 물었고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거짓으로 '일본조선 간의 상호 통상을 위해 방문하였으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운요호는 부산을 지나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북진하여 현재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달했고 9월 20일, 이노우에 소좌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을 타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는데, 때마침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수군일본군 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단정을 향해 돌아가라고 명령과 함께 경고 포격을 가하였고 단정은 이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후 운요호로 돌아갔다.

2.2. 교전



다음 날인 9월 21일, 운요호 모함(母艦)은 강화도에 접근하여 함포를 발사하며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였고 초지진은 파괴되었다. 뒤이어 승조원들로 해군 육전대를 편성해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기습 상륙하여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인 끝에 근대식 대포와 무기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영종도를 습격하여 성(城)을 점령하고 조선군의 대포 35문과 기타 무기를 노획하고 성내에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사 35명, 포로 16명이었다. 일본 해군은 단지 2명의 경상자만 냈을 뿐인데, 그나마도 교전으로 인한 부상이 아니라 수병 2명이 상륙 중 조수간만이 큰 뻘을 통해 가다가 발을 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강화도로 이동하여 조선 왕조에 무력 시위를 빌미로 나타나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묻게 하였다.

3. 결과



3.1. 근대적 불평등 조약 강제 체결



강화도 조약과 운요호 사건
결국 조선 왕조는 1876년 일본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 문호 개방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이 내세운 이유가 원래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7) 이후 조선에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재확인하고 서구식 영사관을 상호 설치하려고 했으나,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유는 국서에 일본이 "일본국 황제"라고 표기했기 때문)이 일어났고 그 후 협상이 실패해 외교가 단절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몽니를 부린 것이다.
이런 운요호 사건을 일제가 이유를 붙인 것이 있는데, 조선의 외교 관계 수립 거부가 정한론과 메이지 6년의 정변이 발생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의 불평등 조약으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같은 서구열강의 반식민지의 위기에 있었으며 조선, 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와의 평등 외교 관계 수립이 지상과제였으며, 운요호 사건은 조선이 철저하게 서구식 외교 관계를 거부하자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일본 내부에서 오쿠보 도시미치(정한론자, 강제 개항론자)와 같은 극우강경파들의 강제 개항론에 의한 것이라는데, 요약하자면 '''일본이 서양 열강에 침탈을 당했으니 조선을 침탈하여 손해를 만회한다.'''는 것이다.[3]

4. 영향


운요호 사건은 일본 제국조선과의 상호 통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조선 침탈에 눈독을 들인 결과 훗날 을사조약(1905)과 경술국치(1910)를 예고·예견하고 있었던 사건이기도 하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미 문호 개방을 했던 일본과 불평등한 강제적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쇄국 정책(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배제하였던 '문호 개방'을 완전히 하게 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결국 조선과 대륙 침공의 발판을 만들려고 했던 일본 제국이 만든 작품이자 정략적인 제국주의적 책략이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1882년 이후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의 서구열강과도 근대적인 불평등한 개항 수교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5. 논의



5.1. 패배의 원인


의문스러운 것은 '''왜 조선은 이보다 더 규모도 크고 무장도 잘된 프랑스 해군미합중국 해군을 상대로 비록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는데, 왜 일본제국 해군의 운요호 한 척에게 허무하게 털렸는가'''이다.
간단히 말하면 병인양요와 4년 전의 신미양요의 여파 때문이다. 신미양요는 상기된 것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고, 당시 조선은 강화도의 5개 요새를 함락당했다. 이때 빼앗긴 대포는 당시 조선에서 최고의 대포라고 할 수 있는 불랑기포를 대략 '''500문 가량''', 총기는 무려 '''2만정''' 가까이 나포되어 잃었다. 심지어 미군은 후퇴하면서 이것들을 물에 빠트리거나 불에 태웠기 때문에[4] 당연히 녹슬거나 녹아버린 대포들은 '''그대로 손망실'''. 이 어마어마한 손실을 고작 4년만에 복구한다는 것은 산업혁명으로 자동공장이 있던 것도 아닌 조선왕실로서는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5]
이게 고작 대포만 잃어버린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신미양요 당시 피해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거의 초토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요새의 성벽은 무너지고 화약과 식량, 군복 등이 대포와 마찬가지로 손망실 처리.
더욱이 문제는 이때 조선 조정에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증건과 당백전 발행으로 경제를 휘청이게 했던 것도 있지만, 당시 고종 10년(1873년) 11월 대원군이 축출된 이후다 보니[6] 이전의 실책을 바로 잡는데만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실제로 고종(대한제국)/생애 문서의 친정 목차를 보자. 인플레이션의 원흉이자 악화(惡貨) 자체인 청전을 폐지해야 하는데 '''당시 조선 왕실의 창고에는 청전밖에 없었다'''. 심지어 고종실록 11년(1874년) 3월 26일 기사를 보면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진무사(鎭撫使) 신헌(申櫶)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영에서 관할하는 오른쪽 연해 각진(各鎭)에 포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지금 막 시작하였으니, 비용으로 쓸 돈으로 3만 냥에 한하여 지급해 주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무기 등의 물품도 지급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포대의 설치를 시작하는 것은 긴급한 일로서 해당 장수가 오늘날에 이르러 옮겨다 쌓는 데는 반드시 소견이 있어서 일 것이니, 본 영에서 잘 처리할 것입니다. '''비용에 있어서는 경각사(京各司)의 저축이 바닥났으니, 실로 손쓸 길이 없습니다.''' 지난번 포세(包稅)의 원획(元劃) 중 1만 냥을 이미 실어 보냈으니, 우선 이것을 배정하여 쓰고, 나머지 비용은 사역원(司譯院)에 신칙해서 기일에 맞추어 모두 수송하도록 하며, 무기는 신의 부(府)에서 적절히 헤아려 내려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나온다. 즉 포대 설치 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요새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는데, 그걸 설치하라고 줄 돈도 시간도 없었던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운요호가 쳐들어오니 일단 맞아주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이 아주 방비 강화에 손을 놓았던 것도 아니다. 조선의 방비는 철저하게 두 양요로 초토화된 강화도의 방비 복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운요호는 탑재한 암스트롱 포로 초치진과 포격전을 펼쳐 제압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강화도에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다. 운요호라는 자그마한 배 1척과 그 안의 소수 병력으로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복구에 주력한 강화도를 친다는 전면적인 군사활동보다는 전력 및 장비가 차출된 강화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영종도를 강습해 공격하고 무력시위로 조선을 압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국정의 난맥으로 국력을 전부 소진된 상태였고 회복되기도 전에 이어지는 운요호에 허무하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7]

5.2. 국제법 준수 여부


운요호 사건은 한마디로 말해서 백주대낮에 타국의 군함이 불법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해서 조선 땅에 불법 상륙까지 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군사 시설을 명분 없이 공격해서 조선 수군 초지진수비대의 사상자까지 발생시킨 것으로 명백한 침공 행위였다.
일본에서는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사격한 것이 주권 침해라고 하지만, 이 역시 주객전도에 불과하다. 국제법상으로 조선의 영해를 침범한 일본이 조선의 영토 주권을 침해한 것이고, 조선은 이에 대해 침략으로 해석하여 교전(침공으로 해석해서 사격을 했어도 정당방위에 해당한다.)을 벌인 것으로 조선의 행위는 국제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으며 ''' "운요호 사건 역시 통상 상호수교를 빙자한 일본의 조선침공의 저의가 깔려있다." '''고 본다.
일본 측 위키백과에서는 운요호 측이 깃발로 미리 접근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어 국제법을 준수한 상황에서 경고 포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순 덩어리이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척화비의 영향으로 서구 열강과의 교류를 일절 거부해 왔으며, 당연히 서구가 주축이 되어 형성한 국제법의 질서에 편입은 커녕 국제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조선의 상황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에 근거한 행위로 통보한 일본의 책임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미리 접근하겠다고 신호했다 한들, 영해 진입을 허가하는 답신 없이 들어오면 그 신호는 딱히 의미가 없다.

6. 운요호의 제원



'''운요호의 제원'''
'''종류'''
프로펠러 슬루프(스쿠류 슬루프)[8]
'''건조국 / 제작사'''
영국 애버딘/Alexander Hall and Sons[9]
'''진수'''
1869년 3월 27일
'''취역'''
1869년 8월 11일
'''전장'''
35m
'''배수량'''
249톤
'''무장'''
6.3인치(160mm) 포 × 1문
5.5인치(140mm) 포 × 1문
'''추진 기관'''
1 샤프트 석탄 연소 증기기관 / 60 ihp (45 kW)
'''승조원'''
65명
'''동형함'''
호쇼[10]

7. 여담


  • 사건 당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던 영종진 터에는 2001년부터 '김찬삼세계여행문화원'이 들어섰다가 2013년 철거 후 2018년부터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8. 관련 링크


(위키 백과 - 한국어) 운요호 사건
(위키백과 - 영어) Ganghwa Island incident
(위키백과 - 일본어) 江華島事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

9. 관련 동영상






EBS(사회 탐구)한국사 - 강화도 조약의 원인과 과정은?
다듣사 10강 - 운요호 프로젝트와 강화도 FTA




(김흥수 공군사관학교 인문학부 교수) "일본 운요호 사건 관련 여론 동향에 민감했다"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 - 통상 수교 거부 사건, 운요호 사건 (한국사 근현대사 인강)

10. 관련 문서


  • 19세기
  • 메이지 유신(1867년)
  • 사이고 다카모리(대표적인 정한론자)
  • 흥선대원군[11]
  • 군함/배수량별 목록/1860년~1913년
  • 강화도 조약 체결(1876년)
  • 야스쿠니 신사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쿠로후네 사건 - 미국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개항시켰으며 일본이 이를 조선에 그대로 써먹었다.
  • 일본제국 해군
  • 해군력/중요성과 주요 사건
  •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위협 비행 사건
  • 강화도 조약

[1] 당시 영종첨사로 영종도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2] 갯벌에서 발을 삐었다고 한다(...).[3] 물론 당시 일본은 아시아 국가와의 평등 관계 수립은 국운이 걸린 외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어떡해서든지 자기보다 약한 나라를 짓누를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국운(國運)'''이 걸린 것이었다.[4] 사실 조선의 총과 대포는 근대적 무기를 갖춘 미군에게서는 쓸모 없었다.[5] 대포 자체가 무슨 틀에 넣고 대량생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1~2년의 자연시효를 거치고 열처리와 연마가공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6] 즉, 이 사이에 고종이 친정을 하여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정권이 집권했던 시기는 고작 2년, 달수로 치면 2년조차 되지 않아서 아직 이들로 당장 조선의 방어태세가 망쳐지지는 않았다.[7] 신미양요의 미군 군함은 4천 톤 짜리를 기함으로 하고 있었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는 군함 7척을 끌고 왔다. 운요호는 250톤 짜리 작은 군함이었지만 신미양요에 큰 피해를 당한 조선이 막기엔 역부족이었다.[8] #[9] #[10] #[11] 쇄국정책(또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병인박해,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까지 일어나게 했다는 빌미를 준 평가가 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본인도 그 당시 국내에 유입되어 있던 가톨릭 사제들을 통하여 꾸준히 서구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서구 열강은 좋은 먹잇감 하나 더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함대 군인이 쓴 일기에는 "조선이 베트남보다 풍요로운 것 같은데, 베트남 말고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기재된 내용도 있다. 신미양요 당시에도, 조선은 미국 함대 군인에게 전쟁할 때 하더라도 일단 음식과 물을 보낼 테니 잘 먹으라고 하였으나, 미국 함대는 가볍게 씹고 온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