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1. 개요
메이지 유신이란 일본이 '''정치·경제·군사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과 일련의 대사건을 말한다.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메이지(明治) 원년인 1868년으로 간주한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명칭은 현대 역사 용어[3] 로, 당시에는 '고잇신(御一新, 어일신)' 등으로 불렸다.[4]
2. 상세
200년 넘게 근세 일본은 에도 막부 체제 하에 있었다. 막부가 사무라이 봉건 영주들을 다스리는 봉건제로, 조선 원정 실패 후 어수선했던 일본을 안정시키고 문화 발전을 이룬 시대였다.
1853년 미해군 증기선 함대가 도쿄 근해에 나타나면서 모든 게 변했다. 1840년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대영 제국에게 얻어터지게 되면서, 조선과 일본에서는 놀랐는데, 이는 '천하의 청나라가 고작 서양인에게 얻어터지다니' 하고 충격을 먹었고, 에도 막부는 혹시 있을 침략을 걱정하고 긴장 상태였다. 그후 13년뒤 페리 제독의 요구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었다. 침략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개항 약속이나 외국인 신분 보장 등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에도 막부는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의 주도 아래, 통상조약을 맺자는 데로 기울었다. 청나라처럼 얻어맞고 개항하느니 그냥 선제적으로 해주는게 낫다고 본것이다.[5]
그러나 외교 문서는 막부에서 써도, 최종 수결은 천황이 한다. 막부는 교토 황궁의 재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고메이 천황이 '짐은 이인(오랑캐, 서구인)이 싫다'며 수결을 자꾸 미뤘다. 천황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막부는 천황을 제끼고 조약에 서명했다. 미군 함대는 곧 귀국했지만 일본 국내는 들끓었다. 외적을 막아야 할 막부가 굴욕 외교를 한데 대해 강경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막부의 신분제에 엎드려 있던 하급 무사들의 탈번이 잇달았고, 칼 든 낭인들의 기세가 살벌했다.
문제는 에도 막부가 단순히 권위를 잃었다 정도가 아니었다. 요시다 쇼인을 위시해 서구 열강의 침략을 알던 선구자들이 막부로는 외세를 막지 못한다는 주장 및 그 사상적 토대를 제시한 것이다. 단지 불평 불만자에 불과했던 젊은이들이 정치적 확신범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존황양이의 기치 아래 천황과 국가는 곧 그들의 종교가 되었다.
존황양이는 천황이라는 일본 그 자체를 오랑캐(서구)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고, 에도 막부를 적폐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존황양이의 방법에는 온건, 급진 등 여러가지가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목표는 동일했다.
그런 와중 막부는 아랑곳없이 근대화를 진행시켰다. 그러나 기득권의 속성이 다 그렇듯, 막부의 근대화는 막부를 중심으로 한 정치 구조는 그대로 둔 채로 서구의 과학 기술과 병기, 학문 정도를 천천히 도입하는 온건적 개화였다.
죠슈 번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바꿀 수는 없었다. 1차 죠슈 정벌 때 막부가 대군을 움직이자, 죠슈 번은 급진 개화파들을 다 쳐내고 최고위 3명의 중신들이 할복하고 막부에 항복했다. 막부의 승리로 끝나는 줄 알았던 당시 정세는 사카모토 료마 등의 노력으로 삿초 동맹, 삿토 맹약 등으로 사쓰마 번, 도사 번이 죠슈 번과 손을 잡으면서 일순간에 변한다. 여기에 쐐기를 박는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막파(천황 중심 정부 추구)가 막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압박해 대정봉환에 성공한다.
평화롭게 정권 교체가 되나 싶던 일본은 사쓰마 번의 도발로 내전에 휩싸이고, 신무기와 서양 병제를 먼저 도입한 도막파가 도쿠가와 군을 일본 동북부로 밀어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타도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68년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선포된다.'''
대강 보면 이해가 힘들지만 여러 상황들을 다 살펴보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걸 알 수 있는데, 우선 이 당시 정변을 주도했던 지역이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이었고 그 중에서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잔류 중이던 사쓰마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를 이유로 영국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 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 사이에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이 돋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비교적''' 적은 사건으로 끝난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하면서 존황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양선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조슈 번도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서구의 문물, 제도 등 많은 걸 배웠는데, 이런 배움 속에서 내린 결론은 전면 개국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국내에서 반발이 없을 리 없고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발생했다. 이후로도 신정부에서 정한론이 무산된 점과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사무라이들은 특권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6] 이었지만 결국 진압되고 개국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1. 메이지 유신과 그레이트 게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와 시기가 겹친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하는데 영국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많은 도움을 줬었다. 이는 그레이트 게임 때문이다.
러시아가 1850년대에 크림전쟁으로 동유럽에서 부동항을 얻는걸 실패하자 러시아가 대신 제2차 아편전쟁때 중재자 역할을 맡아 연해주를 가져오고, 블라디보스토크 즉 부동항을 가지는데 성공하자 대영제국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러시아가 해양진출을 할수있게 됬기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가 계속 남하하는걸 막을려고 했다.
당시 대영제국은 세계 곳곳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있었는데 문제는 너무 많은 나라를 점령하게 되면서. 곤란한 상황에 쳐하게 되었다.. 초창기 식민지가 별로 없던 시절과 달리 '''이제 영국은 영국인이 다 군대를 가도 저 식민지 지역을 지키기가 벅찰정도'''였다.[7]
특히 1857년에는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발발했는데 이로인해 상당히 영국이 골머리를 앓았어야 했다. 총 대 창으로 해야 싸움에서 이기는데 똑같이 영국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영국식 군사훈련을 받은 게 바로 세포이 항쟁을 일으킨 인도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이 매우 고전했다.
또한 영국이 이런식으로 아프리카, 인도전선에서 식민지 독립을 막느라 많은 국력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 동아시아의 일본이나 조선을 점령할 겨를까지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택한것이 일본이다. 영국은 근대화가 된 일본을 통해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일본은 그 기회를 잘 잡아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고, 일본 제국이 되어 대영제국과 영일동맹을 맺으면서 같이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러일전쟁이다.
3. 근현대 한자어의 탄생
현재 한국인,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한자어(漢字語)들 중에는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서 근대식 번역어로 선택되고 많이 사용하게 된 것들이 있다. 근대적 개념들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많이 쓰이던 한자어나 중국의 고전에 있던 한자어로 번역하여 차용한 것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같은 당대의 석학들은 1873년 메이로쿠샤(明六社)라는 학술 단체를 결성해서 한자 용어들을 번역어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사회(社會)'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외국어를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고전에 있던 단어를 서구의 society에 맞춰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후 'society'에 해당하는 동양 한자권의 단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회사(會社)는 사회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만 영어의 Company를 번역했다.(단, 중국에선 공사(公司/gōngsī)로 번역했다)
'철학(哲學)'도 마찬가지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인’(個人)도 마찬가지로 일본 학자들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거치면서 영어의 ‘individual’을 한자어(漢字語) '개인'(個人)으로 번역한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도 그렇다.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자유'(自由)라는 단어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인들이 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한자 번역어(飜譯語)다. 원래 중국의 고전에도 있었던 단어이고, 영어의 liberty, freedom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自由'를 근대적 의미로 새롭게 전용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는 '제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된 '자유(自由)'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자유(自由)'라는 단어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바뀌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서구에서 건너온 외국어와 개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자(漢字)를 사용해 만든 단어는 '개인'(個人) 뿐만 아니라 '민족(民族)', '자유'(自由), '권리'(權利), '사진'(寫眞), '헌법'(憲法), '내각제'(內閣制), '대통령'(大統領) 등이 있다. 현대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상당수 근대 한자 단어들이 메이지 유신 직후에 일본이 주로 중국의 고전에서 발굴하고 선택하여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군의 계급도 일본식 한자로 번역된 것이다. 하사(下士), 소위, 소령, 소장(小將) 등등
이렇게 주요 근대 한자어들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이미 조선과 중국에서도 오래전 부터 쓰이던 단어들에 단순히 서구식 개념만을 추가하는 방식 또는 이미 고전에 있던 단어들을 그대로 번역어로 선택해서 차용하는 방식으로 재탄생한 경우들이 상당수였다. 실제로 인민(人民), 문화(文化), 공화제(共和制), 국가(國家), 주의(主義), 사상(思想), 운동(運動), 노동(勞動), 국민(國民), 경제(經濟) 같은 단어들은 검색을해보면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링크 '''즉, 아예 없던 단어들을 힘들게 창조하기 보다는 이미 한자문화권에 존재하던 기존 단어들에 서구식 의미만을 번역과 차용 과정에서 새롭게 의미부여를 해준 경우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연하지만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을 뜻하는 '사회'(社會)라는 단어도 원래는 중국의 고전인 <근사록>에 이미 나오던 단어였지만 이후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에서 영어 Society의 번역어로서 중국 고전에 나오던 사회(社會)라는 단어를 선택함에 따라 지금의 의미로 주로 쓰이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근대 일본식 한자어에 대해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화제한어, 일본어 발음 : 와세이칸고[わせいかんご]) 는,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한자어로서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 (일본스러운 뉘앙스) 을 섞어서 조어(造語)되었으며,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가 의미하는 범위는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르고, 통일된 견해가 없으며''', 「공화(共和)」 처럼, 고전 중국어에 용례가 있어도, 새롭게 일본인이 근대적 개념·의미를 넣어 사용하게 된 경우도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 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예를 들어 순한자어였어도 일본에서 오랜 세월 어떤 일정한 의미변화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의 확장만으로 일본제 한자조어(和製漢語)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도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공화(共和)나 인민(人民), 주의(主義) 같은 이미 한자 문화권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단어들에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이 단순히 서구식 의미만을 새롭게 추가한 경우들에는 과연 그러한 단어들도 일본식 근대 한자어로 볼 수 있는지 일본내에서도 '''논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서구의 여러 개념들에 해당하는 적절한 단어들이 없어서 고심하던 근대화 당시 일본의 일면을 보여준다.''' 일본지식인들의 한학전통(漢學傳統)에 대한 존중과 낯선 원어를 한자가 아닌 가나를 이용해서 원어 그대로 받아들이고 표기하기 보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따라, 조어력이 빈약한 일본고유어에 견주어 왕성한 조어력을 갖춘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을 기반으로 참조하면서, 때에 따라 일본어의 어휘·어법·문법의 영향을 섞는 방식을 통해 서구 용어의 번역어로서 원어들을 가나로 표기하기 보다는, 고전에 등장하거나 이미 오래전 부터 쓰였던 익숙한 중국식 한자와 한자어를 써서 번역, 차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구 용어인 '''Democracy'''를 가나를 사용해 '''デモクラシー'''(데모크라시)로 번역하는게 아닌 한자인 '''民主主義'''(민주주의)로 번역하는 식이었다.
만약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지식인들이 한자어와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이 매우 부족했다면 society(사회)나 Company(회사), liberty(자유) 같은 '서구식 용어'들은 중국식 한자어들이 아닌 테레비(テレビ)의 경우처럼 일본의 가나로 주로 표기되고 직번역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민주주의 할 때의 민주(民主)라는 단어도 단어 그 자체는 중국의 고전인 '서경'에도 등장하는 오래된 단어였지만 의미는 지금 현재의 민주와는 다른 의미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어로 선택된 경우로서 가나를 사용해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로 발음 그대로 직번역해서 사용하지 않고 한자인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번역을 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 지식인들이 고전 중국어·근대 북방 중국어의 어휘·어법·문법에 대해서 해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번역과 차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중국식 근대 한자어인데 일본식 근대 한자어로 착각하는 경우들도 일부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삐라’의 번역어인 ‘전단’ 또한 1920년대 쑨원의 중국 혁명 세력이 군벌들을 상대로 뿌린 선전물을 가리키던 중국식 근대 한자어이다.
4. 조선에 끼친 영향
이때부터 국서(서계)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천황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렇게 개항을 결정하던 사이 청나라는 한창 아편전쟁을 겪으며 차차 개항해나간 덕에 그냥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해서 아편전쟁만 빼면 개항 과정 실패 이후 그리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아직 통상 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한국).'''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칙의 용어를 일본이 쓴 것(즉 기존 화이질서의 위계상 일본<조선)에 심히 불쾌해하며 국서(서계)의 접수 자체를 반환·거부해버렸다. 186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국서 거부 사건(서계 거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또 거부했다.[8]
1872년 당시엔 점점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 사태까지 일어나는 바람에 정식으로 국교가 단절되기까지 했으며 그전에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의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되었다.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지만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사이고 다카모리)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하였다. 두 나라 모두 다시금 협상을 시도했지만, 수뇌부만 어느 정도 잘렸을 뿐이지 양국 모두 그 당시엔 척화파/정한론이 주 파벌이었기에 협상도 의미 없이 계속 결렬되고 그 와중 운요호 사건까지 터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건너버렸다.[9]
또 그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청(淸)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고 그 범위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그 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로 양란(洋亂)이 연이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을 필두로 쇄국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으며 또한 서양에 문호개방을 한 일본에 대해서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보이고 있었다.
4.1. 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5. 관련 문서
5.1. 시대적 사건
- 쿠로후네 사건
- 미일화친조약
- 미일수호통상조약
- 무오의 비밀칙서
- 안세이의 대옥
- 사쿠라다 문 밖의 변
- 사카시타 문 밖의 변
- 테라다야 사건[10]
- 분큐의 개혁[11]
- 나마무기 사건
- 사쓰에이 전쟁
- 8.18 정변
- 이케다야 사건
- 금문의 변
- 시모노세키 전쟁
- 쿄호지 사건
- 제1차 조슈 정벌
- 시모노세키 거병[12]
- 삿쵸 동맹
- 제2차 조슈 정벌
- 테라다야 사건[13]
- 삿토맹약
- 대정봉환
- 오미야 사건
- 덴마야 사건[14]
- 왕정복고의 대호령
- 보신 전쟁
- 토바·후시미 전투
- 고슈 가쓰누마 전투
- 우에노 전쟁
- 호쿠에쓰 전쟁
- 아이즈 전쟁
- 하코다테 전쟁
- 에도 개성(江戸 開城)
- 판적봉환
- 폐번치현
- 단발령
- 이와쿠라 사절단
- 메이지 6년 정변
- 사가의 난
- 폐도령
- 서남전쟁
- 키오이자카의 변[15]
- 대일본제국 헌법
5.2. 조직
5.3. 사상
5.4. 인물
- 오쿠보 도시미치
- 사이고 다카모리
- 기도 다카요시
- 고메이 덴노
- 메이지 덴노
- 도쿠가와 이에모치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 곤도 이사미
- 히지카타 토시조
- 무츠 무네미츠
- 사카모토 료마
- 코마츠 타테와키
- 카츠 카이슈
- 카와카미 겐사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에노모토 다케아키
- 존 만지로
- 요시다 쇼인
- 이노우에 가오루
- 이와쿠라 도모미
- 이이 나오스케
- 이토 히로부미
- 타카스기 신사쿠
- 후쿠자와 유키치
- 매튜 페리
- 해리 스미스 파크[17]
- 어네스트 사토[18]
-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19]
[1] 1867년 대정봉환 당시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로부터 22년 뒤인 1889년 제국헌법 제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2] 이처럼 메이지 유신은 복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3] 단군이 통치했던 나라도 그냥 '조선'이지만 현대에는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르는 것처럼 생각하면 쉽다. 아니면 서로마가 망하고 남은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른다든가.[4]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 메이지 유신이 아닌, '어일신(고잇신/御一新 )'이라 부르는 등 고증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인다.[5] 원래 막부에서는 항전을 주장했지만 이이 나오스케등 소수파가 '''"저 배를 폭파시키는건 문제가 없지만 저 배를 폭파시켰을 때 떼거지로 몰려올 철갑선들을 어떻게 막을건데? 청나라도 못막았는데"''' 라면서 반대했다. 그리고 이이 나오스케등 소수파의 의견이 받아들여진다.[6] 현재까지 일본 내의 마지막 내전[7] 초창기에는 영국의 자국민 중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외부로 보내려고 일부러 식민지를 확장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지가 호주.[8] 이에 대해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의 책임자가 독단으로 국서(서계)를 먼저 읽고 양국이 불편한말한 단어 등은 살짝 고쳐서 보낸 일이 있었기에 그게 빌미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 책임자가 바보도 아니고 발신자를 바꿔적으며 일부 수정을 거쳤다는 사실은 양국에 확실히 밝혔다.''' 애초에 조사하면 다 나올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선 양국의 중계지점일뿐인 쓰시마 섬(대마도)으로선 그런 독단을 똥배짱으로 밀어붙이는 건 무리였다. 즉 중계지점인 쓰시마 섬 측의 독단은 큰 의미가 없었고 문제는 양국의 외교에 대한 태도였는데 외교문서이니만큼 일본 측은 정부가 바뀐 만큼 따라서 바뀌는 관례가 있으면 먼저 조선 측에 알려줬어야 했지만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고 조선 측도 그나마 서계를 받은 이후라도 일본 측에 제의를 하던지 해서 합의보면 될 것을 건방지다고 올바르지 않은 관례 운운하면서 일체의 타협도 보지 않아 서로 간의 골이 깊어진 게 문제였다.[9] 애초에 강경파가 실각당했을 뿐이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조금 뒤에 하자'''는 일단 정한론 자체는 긍정하는 사람들이 온건파인 시점이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은 수단이나 기간만 안 정해져서 그렇지 일본 내에선 사실상 정해진 사항이었다. [10] 사쓰마 번 무사들이 서로 칼부림을 한 사건[11] 테라다야 사건으로 조정의 신임을 얻은 사쓰마 번이 주도한 막부 개혁[12] 번에서 쫓겨난 타카스기 신사쿠가 번의 정책을 막부 토벌로 되돌리기 위해 벌인 쿠데타[13] 삿쵸동맹 이후로 막부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포박하기 위해 급습했던 사건[14] 사카모토 료마가 기슈 번에게 살해되었다고 믿은 해원대의 대원들이 기슈 번의 미우라 규타로를 습격해, 그를 호위하던 신센구미와 칼부림을 한 사건.[15] 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 사건[16]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조직한 번의 정치결사단체[17] 주일 영국 공사로서 에도막부를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와 경쟁해 조슈와 사쓰마 등 웅번 연합을 지원하였다.[18] 해리 파크 휘하의 영국 외교관. 해당 항목으로.[19]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주름잡던 Jardine & Matheson Co.란 영국 상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와서 무기 밀수를 포함한 다양한 밀무역을 활성화 시켰다. 글로버는 회사의 자본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쓰마와 조슈에 최신 무기를 넘겨주는 한편, 당시 그 어떤 일본인도 에도막부의 승인 없이 국외에 나갈 수 없었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청년 인재들을 영국에 몰래 보내주기도 하고(이토 히로부미가 그 중 한 명이었다.) 무역에 특혜도 주었다. 일본 제국이 성립된 이후 일본 정부는 그에게 제국 해군을 위한 첫 증기선 군함의 사업권을 주어 호의를 갚았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남아 오늘날에도 일본 최대의 기업집단이 되는 미쓰비시의 설립에 관여하는 등 산업화에 기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