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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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33대

34대
리카르도 라고스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34대

35대

36대
세바스티안 피녜라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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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9. 29 ~
임기
2006년 3월 11일 ~ 2010년 3월 11일
2014년 3월 11일 ~ 2018년 3월 11일
1. 소개
2. 생애


1. 소개


본명은 베로니카 미첼 바첼레트 헤리아(Verónica Michelle Bachelet Jeria).[1]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이다.

2. 생애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군인고고학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1] 하지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 아버지 알베르토 바첼레트가 아옌데 지지자란 이유로 고문을 받다 사망하자 사회당에 투신하였고, 끝내 모녀가 1975년 DINA(국가정보국)에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악명높은 비야 그리말디와 쿠아트로 알라모스를 거친 모녀는 같은 해 호주로 망명하고 그 뒤 동독에 터를 잡았다. 바첼레트는 1979년에 칠레로 돌아오고 학업을 재개해 학위를 받았다.
피노체트 독재가 끝난 90년대에 그는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꾸준히 2000년 보건부 장관, 2002년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인지도를 높혔고, 2005년 대선에 출마해 2차선거에서 세바스티안 피녜라 후보를 제치고[2]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이란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다. 임기 초반은 신혼부부 첫날밤에 비유될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곧 교육정책 개혁을 부르짖으며 전국 고딩들이 길거리에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고, 전임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가 추진해오던 산티아고 대중교통 개혁이 시행 첫날부터 개발살나면서[3] 지지율이 급하락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 다가올 경제위기에 현명하게 준비해둔 덕에, 임기 말인 2010년에 칠레 대지진이 들이닥쳤음에도 지지율 84%란 기록을 달성하며 퇴임한다. '''인간 승리'''
경제위기에 대한 준비중 핵심은 전임자 리카르도 라고스가 설정한 정부 저축안이다. 주요 수출 원자재인 구리의 가격에 영향을 많이 받는 칠레 경제의 특성을 고려해 라고스 대통령은 설정해 놓은 가격 보다 구리의 가격이 높을 경우 생기는 차익의 상당부분을 정부가 지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이 200억 달러 정도 였고 이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유용하게 쓰였다.
임기 중 피노체트가 사망하면서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냐 마느냐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온 나라가 둘로 갈라지자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것은 양심에 위배된다"라고 밝혔으며, 결국 국장은 없되 전임 군사령관으로서의 경력만을 인정해 군장이 치루어졌다. 아버지가 피노체트 아래 돌아가신 걸 생각하면 최상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2009년 대선에는 연임 제한에 막혀 출마하지 못했고, 바첼레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이 없어서 우파 피녜라에게 플러스가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여당이었던 중도좌파연합 콘세르타시온(Concertación)이 여러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어쨌거나 이런 지지세를 바탕으로 2013년 대선에 출마했다. 1차 대선에서는 47%를 득표했고 결선투표에서 62%를 가져감으로서 다시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아들 부부가 권력형 비리 스캔들을 일으킨데다가 원자재 가격하락으로 인해 무상교육과 연금개혁등 공약으로 내걸었던 개혁작업도 덩달아 지지부진하여 생각보다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덕택에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간에 비토가 많아지다보니 지지율이 저조해졌다. 교육 부문에 있어서 일단 교육비를 낮추기는 했지만 그 대상이 상당수 중산층들은 맛보지 못한데다가 사립대 국공립화에는 주저하면서 재정지출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고, 2000년대 이래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왔던 연금도 공공성이 다소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지율이 추락했고, 2015년 11월 기준으로는 지지율 20%를 기록하고 말았다.# 여권 연정의 지지율도 야권보단 높지만(...) 16%까지 떨어졌다.# 이후로는 지지율이 어느정도 회복되어서 30%대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1기 집권기에 비하면 초라했다는 점이다.
2017년 기준으로 보았을때 우루과이의 타바레 바스케스[4]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와 지지율 차이가 얼마 안나는 수준(20%대)이며, 좌파로도 지지를 받지못하고 우파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애매한 행보와 경기침체로 인해 평이 매우 나빴다. 2017년 하반기 즈음에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어서 40%대 선까지 올랐지만 막판 결집에 실패하는 바람에 정권재창출에 실패하여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피녜라가 다시 당선되었다.
2018년부터는 UN 인권 고등판무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1] 발음기호: beˈɾonika miˈtʃel βatʃeˈle ˈxeɾja[1] 칠레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2] 그는 훗날 2010년 대선에 당선된 현직 대통령 그 사람이다.[3] 서울시 GRYB버스 데뷔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4] 1기 집권기 때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2기 집권기때는 경기침체 때문에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