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1. 개요
칠레의 의사, 정치가. 칠레 역사상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다.[3] 칠레의 제28대 대통령으로 빈부격차가 극악한 칠레의 현실을 개혁하려다가 미국과 보수파의 반발과 쿠데타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대통령으로 기억된다.'''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2]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젊은 시절
1908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아옌데의 집안은 칠레의 정치 명문가[4] 였고 아옌데 자신도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살던 구두 수선공에게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아옌데는 부와 권력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럼에도 발파라이소에서의 삶의 현실적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후 아옌데는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옌데는 입학을 1년 미루고 나서 사병으로 자원입대 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의학도의 길을 걸으면서 칠레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목격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이 집필한 사회주의 서적들을 읽으면서 사회주의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3. 정계 진출
칠레에는 합법적 활동을 인정받은 공산당이 이미 있었지만 아옌데는 공산당보다는 사회주의 정당이 더 칠레의 현실에 맞는다고 판단하고 193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칠레 사회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에 중도파와 좌파정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의사출신인 탓에 1938년부터 42년까지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해당하는 후생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속해있던 인민전선 정부는 '통치는 교육이다'란 구호를 내세워 교육제도 개선 확충을 밀어 붙였고, 약 38만 5000명의 어린이가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1945년부터 4번 내리 연속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의회 연설에서 밝혔듯이 아옌데는 평화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집권 기간 내내 보수정당인 기독민주당과의 연대를 집요하게 시도했었다. 1952년과 1958년 그리고 1964년까지 세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중도파가 따로 떨어져나갔던데다가 거기에 더해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 그리고 보수진영의 격렬한 방해공작으로 연달아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아옌데는 1952년 대선에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한 ‘인민전선’의 이름으로 나섰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 공산당 등이 모여 결성한 ‘인민행동전선’의 대통령 후보였다.
4. 대통령 당선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은 더 이상 진보진영이 분열해서는 대선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칠레 공산당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려 했으나 네루다는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사회당과의 연합을 주장했다. 결국 사회당과 공산당은 연합하여 인민연합을 결성하고 인민연합의 대선후보로 아옌데를 내세우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아옌데가 정작 자기 당인 사회당 안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공산당이 더 아옌데를 밀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불법으로 지정되어 활동이 어려웠을 시절 아옌데가 사회당원으로서 공산당의 권리를 옹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칠레 사회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이란 것을 내세워 공산당과 자주 대립했는데 아옌데가 여기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치열했던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보수진영 측의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을 2%차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1위로 당선했다. 그러나 아옌데나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이나 과반득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의회가 상위 1, 2위 후보 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의회가 아옌데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확산을 걱정하던 미국은 반미 성격이 강한 아옌데의 당선에 당혹해 하면서 칠레 내정을 흔들려 했다. 그리하여 군부의 정치불간섭 주의를 고수하던 르네 슈나이더 칠레군 총사령관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르네 슈나이더는 납치는 면했지만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3일 만에 사망했다.
- 르네 슈나이더 납치미수 사건에 과연 CIA가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CIA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적으로 개입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후에 헨리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이 CIA의 그런 계획을 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신저의 이런 해명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5. 사회주의적 개혁과 미국의 방해공작
아옌데는 자신과 비슷한 정강을 내세운 기독교민주당과 공조하여 1970년 9월 4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고, 11월 3일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아옌데의 경쟁자였던 호르헤 알레산드리는 34.9%를 기록했는데, 아옌데는 이것보다 2% 높은 득표율인 36.6%의 득표율을 올렸다. 민주적 선거에서의 아옌데 후보 당선은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예나 지금이나 칠레 경제에서 구리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큰데 대부분의 구리 광산들은 다국적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70년 당시 칠레의 1인당 국민소득은 954달러로 지금 기준으로 가난해보이지만 이건 화폐가치의 차이때문이고 당대 기준으로 보았을때는 이미 중진국 수준의 국가였었다. 1960년 기준으로는 일본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았고 이후로 경제성장이 쳐져서 그렇지 1970년 기준으로도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대만이나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이 훨씬 높았던 것은 덤이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1940년대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는 장기간의 안정적인 경제성장으로 제3세계 국가가운데서 산업화가 잘 이루워졌다는 평을 받은 멕시코도 1인당 GDP가 1970년 기준으로 칠레에게 밀린 682달러였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겉으로는 중진국이었지만 실제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이와는 영 딴판이었다. 우선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아 부의 대다수를 소수의 부유층이 점유하고 있고, 농토의 대부분도 독점하고 있었으며 중산층의 비율도 그리 많지 않았으며 인구의 대다수는 경제수준에 걸맞지 않게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빈곤층으로써 비참한 삶을 살았던것이었다. 이러한 극악한 빈부격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탄광, 구리광산들과 대형 은행들을 국유화했고, 빈곤층의 비율이 높아서 영양 부족으로 유아사망률이 심했던 칠레의 상황을 고려해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는 정책도 추진했다.[5] 다른 한편으로 다국적 기업과 미국, 부유층의 과도한 대토지 소유[6] 를 규제하고자 사유지의 4분의 1 내지 5분의 1을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추진했다. 또한 컴퓨터를 계획경제에 활용한 사이버신 계획이라는 것도 수립되었다.
이런 사회주의 개혁의 성과로 칠레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을 8% 이상까지 치솟게 했다.[7]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5% 이하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하고 있게 되자,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 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보수 언론과 기독민주당 등 야권 후보에 대한 미국의 재정 지원에도 굴하지 않고 이뤄낸 전례 없는 성과였다. 칠레 정치에서 집권당이 임기 중 지지율이 상승한 것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8]
아옌데는 당선된 직후 개헌을 제안했다. 공무원과 정치인에 대한 주민소환제도를 도입하기로 했고, 노동자 조직과 시민운동 진영에도 정치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기로 했다. 국방 분야에서는 칠레 민중을 중심에 놓은 새로운 주권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일련의 사회개혁 프로그램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남녀 동일임금제, 전국민 생활임금제, 사회보장제도 확대, 전 국민 대상 예방치료 의료보장 등이 있었다. 대규모 신규주택 건설 사업도 계획했으며 민간은 물론 민관 합작회사도 건설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차별을 당해온 여성과 혼외 자식에게도 평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의 공교육제도가 입안됐고, 성인 문맹을 뿌리 뽑기 위한 문해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9]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정책이었다. [10]
이러한 아옌데의 초기 성과는 미국의 고립과 경제제제 그리고 보수우익의 고립속에서 이루어 졌다. 하지만 집권 2년차가 되자, 지속되는 경제 고립으로 인하여 칠레 에스쿠도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각종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로 다국적 기업들의 반발과 의도적인 계략 및 공작으로 인해서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칠레 자본가 계층과 보수 야당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무엇보다 다국적 기업들 역시 반발하여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제적 문제는 당연히 극심한 경제적 고립 때문이었다. 아옌데 전기 작가인 빅터 프랭클에 따르면, 이러한 경제위기의 제1의 원인은 칠레 내부의 문제보다 미국의 경제제제와 우익 세력 지원이라는 외부적 조건이 가장 컷다고 한다.
더욱이 미국의 닉슨 정부는 아옌데 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긴 판국에 아옌데의 반미정책과[11] 다국적 기업 국유화 정책에 빡쳐서[12] 칠레 경제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1970년 아옌데가 당선되었을 때,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만~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닉슨정부와 CIA였다. 이런 행위에는 당시 칠레에 진출해 있던 미국계 초국적 기업도 자금을 보탰고, 거짓 선동이 '적색 공포'를 불렀다. 심지어 눈을 가린 죄수들이 총살당하는 장면이나 소련의 탱크가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진주하는 모습 등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언론을 통해 전파됐다. 물론 이렇게 조작된 거짓 선동이 아옌데의 당선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회를 극단적인 분열 상태로 몰아가며 금융시장을 패닉에 빠지게 만드는 목적에는 성공적이었다.
미국의 칠레 경제 고사 작전은 실로 치밀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였는데 칠레의 구리 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은 비축한 구리를 대량으로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13] 또한 칠레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가하여 계좌 동결로 대외차관을 막았으며 생필품과 의료품의 수출을 통제했다. 미국의 이러한 수출 통제정책으로 살바도르 아옌데의 핵심 공약이었던 분유 무상지급을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미국은 각 분유회사를 협박하여 칠레에 분유를 수출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고심끝에 살바도르 아옌데는 그 공약을 지킬 수없게 됐다. 또한 미국은 칠레의 최대 신문사인 엘 메르쿠리오(El Mercurio)를 매수해 아옌데 정권에 부정적인 기사와 사설을 대대적으로 쏟아냈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칠레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조성되면서 생필품은 동나고 물가는 치솟았다. 그 결과 칠레의 경제는 아옌데가 당선된지 2년 만에 물가가 5배 이상 상승하면서 경제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국민적 지지율을 하락시키기 위해 도시간 물류수송을 트럭에 의존했던 칠레의 운송회사에 스파이를 위장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통해 파업을 선동하고 주도했다. 그 결과 1972년 10월 미국이 계획했던 바와 같이 칠레 운수업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다.
다만 대중적인 정책들을 좋지 않게 보는 우익적인 입장에서는 아옌데 정권의 경제 정책이 워낙 조급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격렬해졌으며, 국유화된 기업들의 경영권을 원래부터 그 기업의 관리 사원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낙하산 인사로 채워넣었기 때문에 국유기업들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투자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사실, 칠레의 구리 광산들은 이 시기에 국유화가 되었어도 경영진들의 관리가 워낙 엉망이어서 증산이 아니라 감산 일변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성 구리 주문조차 제대로 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14]
하지만 미국의 닉슨정부가 원했던 것과는 달리 아옌데 정권은 진보진영의 내분과 보수진영, 미국의 은근한 압박 속에서도 야금야금 지지율을 올리고 있었고, 1973년 총선에서 대통령 불신임을 여유있게 막아낼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16] . 이로써 합법적 수단으로 아옌데를 실각시킬 힘을 잃은 보수파는 충격을 받았고 최후의 수단으로 반공 성향이 강한 군부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달라 부탁했다. 즉 아옌데의 지지율을 급격히 하락시키고자 했던 미국의 방해공작과 정책은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미국이 최종적으로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그게 바로 군부세력을 동원한 쿠데타다. 미국에 힘입은 군부가 이에 호응해 1973년 6월 22일 1차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군부의 중립을 강조하는 카를로스 프라츠 육군참모총장 겸 내무부 장관에게 사전에 간파당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아옌데는 최후의 정치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의했다. 그러자 보수파는 국민투표를 받아들이는 대신 육군참모총장을 친미 극우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로 교체할 것을 제의했고, 아옌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승낙한다.[17]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된다'''.
아옌데가 당선되었을 때 부터 그를 몰락시키고자 했던 닉슨 대통령은 당시 CIA 국장 리처드 헬름스를 통해 칠레 쿠데타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당시 화폐 가치로 약 9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즉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 세력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비용으로 각종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했고, 궁극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아옌데는 라디오 연설 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을 고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번역본:Compatriotas, esta será seguramente la última oportunidad en que me pueda dirigir a ustedes. Mis palabras no tienen amargura sino decepción, y serán ellas el castigo moral para los que han traicionado el juramento que hicieran. Ante estos hechos sólo me cabe decirle a los Trabajadores yo no voy a renunciar. Colocado en un tránsito histórico, pagaré con mi vida la lealtad del Pueblo. Y les digo que tengo la certeza, que la semilla que entregáramos a la conciencia digna de miles y miles de chilenos no podrá ser cegada definitivamente. Tienen la fuerza, podrán avasallarnos, pero no se detienen los procesos sociales ni con el crimen... ni con la fuerza. La historia es nuestra y la hacen los pueblos.
Trabajadores de mi Patria, quiero agradecerles la lealtad que siempre tuvieron, la confianza que depositaron en un hombre que sólo fue intérprete de grandes anhelos de justicia, y empeñó su palabra en que respetaría la Constitución y la Ley y así lo hizo. En este momento definitivo, el último mensaje lo dirijo a ustedes, quiero que aprovechen la lección.
Me dirijo sobre todo, a la modesta mujer de nuestra tierra, a la campesina que creyó en nosotros, a la obrera que trabajó más, a la madre que supo de nuestra preocupación por los niños. Me dirijo a los profesionales de la Patria, a los profesionales patriotas, a los que hace días estuvieron trabajando contra la sedición auspiciada por los colegios profesionales, colegios de clase para defender también las ventajas que una sociedad capitalista le da a unos pocos.
Me dirijo a la juventud, a aquellos que cantaron, entregaron su alegría y su espíritu de lucha. Me dirijo al hombre de Chile, al obrero, al campesino, al intelectual, a aquellos que serán perseguidos; Radio Magallanes será acallada, y el metal tranquilo de mi voz no llegara a ustedes. No importa. Lo seguirán oyendo. Siempre estaré junto a ustedes, por lo menos mi recuerdo será el de un hombre digno, que fue leal a la lealtad de sus Trabajadores. El Pueblo debe defenderse pero no sacrificarse, el Pueblo no debe dejarse arrasar ni acribillar, pero tampoco puede humillarse.
'''¡Trabajadores de mi Patria! 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 Superarán otros hombres este momento gris y amargo, donde la traición pretende imponerse. Sigan ustedes sabiendo que, mucho más temprano que tarde, de nuevo abrirán las grandes alamedas por donde pase el hombre libre para construir una sociedad mejor.
'''¡Viva Chile¡ ¡Viva El Pueblo! ¡Vivan los Trabajadores! '''
Estas son mis últimas palabras, y tengo la certeza de que mi sacrificio no será en vano. Tengo la certeza de que por lo menos será una lección moral que castigara la felonía, la cobardía y la traición.
이 연설은 아옌데의 두 딸과, 연인이자 통역 겸 비서인 미레야 '파이타' 콘트레라스 등 40명 남짓한 이들이 지켜봤다. 당연히 이 연설에 감동받은 이들 대다수가 눈물을 흘렸고, 아옌데의 측근들과 두 딸, 동지들이 그를 끌어안았다. 연설 이후 아옌데는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총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과 정부 각 부처 각료를 비롯한 동지들을 대통령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향해 돌격해 오는 반란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심지어 탱크에 맞서 휴대형 대전차포를 발사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교전 끝에 대통령궁 방어 작전에 동참했던 아우구스토 올리바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휴전 협상에 나서는 척 하면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잠근 채 예전에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로 받은 AK-47로[18]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19] 향년 65세."국민 여러분, 이번이 분명히 제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제 말들은 쓴 맛 대신 실망 뿐만 있고, 또한 그들 스스로 만든 맹세를 배반한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인 처벌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저는 노동자들에게 단지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인 변화 앞에 놓인 점에 비추어, 저는 제 일생을 민중의 명예를 위해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수백, 수천의 칠레 사람들에 해당되는 의연한 의식들에게 심는 씨앗들은 절대 눈이 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들(군부)은 힘이 있고, 우리를 압도할 수 있지만, 사회의 흐름은 범죄.... 그리고 권력으로도 막지 못합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민중들이 그것을 만듭니다.
칠레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정의에 대한 바람의 대변인에 불과한 사람을 항상 따라와 준 것에, 그에 대해 가졌던 믿음에 항상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고, 그 말대로 해냈습니다. 이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메세지를 여러분한테 전합니다. 부디 이 마지막 강연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모든 것에 앞서, 우리 땅의 겸손한 여인과, 우리를 믿은 농민 여인과, 그 누구보다 더 일한 일꾼과,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안 어머니들에 (이 글을)바치고 싶습니다. 나는 조국의 전문가들에게, 애국자인 전문가들에게, 자본주의 사회가 일부에게만 주는 이점을 지키기 위한 전문적인 학교들의 후원을 받는 폭동 선동에 저항해 하루하루를 보낸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나는 청년들에게, 노래를 부른 그들에게, 기쁨과 저항의 정신을 보여준 그들에게 바칩니다. 나는 칠레의 사람들에게, 일꾼들에게, 농민들에게, 지식인들에게, 박해 받을 이들에게 바칩니다. 곧 마가야네스(Magallanes) 라디오도 꺼지게 될 것이고, 제 목소리도 더 이상 여러분에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듣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여러분에게 노동자들의 지지에 충실히 보답하는, 품위 있는 모습을 보였다면 말입니다. 민중들은 스스로 보호하지만 희생하지 말아야 하고, 민중은 자멸하거나 스스로를 난도질 해서는 안되며, 스스로를 망신 주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잿빛의 쓴 순간, 반역자들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순간을 극복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알아두어야 하는 게, 많이 지나지 않아, 다시 큰 거리가 열려 자유로운 사람들이 걸어다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는 내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적어도 중죄, 비겁함과 배신을 벌할 교훈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후 그의 죽음은 영웅적인 항전 끝에 사살 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 낭설이 처음으로 나돌게 된 원인은 카스트로가 했던 아옌데 추모 연설이다. 이후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이 사실처럼 떠돌게 되었는데, 결국 2011년 7월 재부검 결과 확실한 자살로 결론났다.관련 기사 다만 그 가족들은 이미 그 전부터 정부 발표대로 그가 자결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동요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신은 암매장되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1990년이 되어 정식으로 매장되었다.
아직 칠레에서의 군사독재정권 세력은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고[20] 다시 집권에 성공하기까지 했던 만큼 영향력이 크다.
7. 미디어
- 칠레 전투(Battle of Chile)
8. 평가
8.1. 온건좌파의 견해
아옌데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급진적인 측에서는 그가 지나치게 온건했고 칠레를 온건하게 개혁하려고 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으며 또한 그가 기득권층과 미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 군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21] 더욱이 의회 내부는 연정을 이룬 기독교 민주당이 아옌데의 개혁에 반기를 들며 사사건건 충돌했기 때문에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도 문제였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는 남미에 퍼져있던 수탈 이론과 칠레에서 심해지고 있던 반 외국인 정서[22] 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아옌데가 국유화 이후에 다국적 기업에게 정책 협조를 구했던 점, 그리고 아옌데가 권력의 기반으로 선택했던 민족주의와 온건 좌파의 트로츠키주의와의 충돌 등으로 인해, 이론적으로도 칠레의 온건좌파와 어긋나는 행보를 보였던 점도 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8.2. 급진좌파들의 견해
MIR(혁명 좌파 운동) 등의 극좌들과의 견해차도 큰 문제였다. 미르 출신의 역사가 가브리엘 살라사르는 아옌데가 미르에 전면동조하여 민중권력 정부를 새로 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아옌데를 비판하는데, 여기에는 쿠바의 지원을 받아 쿠바식 혁명을 원하던 미르와 큰 틀에서나마 소련의 권고를 따른 합법혁명 노선을 지키려던 아옌데 사이의 갈등이 있다.
MIR 등 더 좌파적인 시각의 견해는 그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정치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충돌을 조율할 시점이 오면 언제나 일관되게 자유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 또한 아옌데는 사회주의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무토지 농민의 토지 점거 등) 법치를 주장하며 막고 적극적으로 분쇄한 데 반해, 자유주의 우익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 강경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언제나 협상과 양보로 일관했다고 해석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우익 세력은 시간이 갈수록 아옌데 정권에 도전할 용기를 얻었지만 사회주의-노동계열의 조직들은 갈수록 연계가 분쇄되었다고 평가한다.
여하간, 아옌데 정권에 당시 칠레의 급진적인 노동세력은 큰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산티아고의 가장 전투적인 공장 가운데 하나인 엑스수마르의 한 노동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결국 정권을 따돌리고 민중 조직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나는 사장들에 대한 양보 조처가 정부의 우경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정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구하고 애초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대중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자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지금 우익은 축제 분위기일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라디오 방송만 들어 봐도 의기양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IR 등의 주장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73년 8월에 아옌데 내각은 무기통제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군대가 치안유지를 빌미로 대중조직들에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증을 서준 꼴이었다. 물론 이 법이 만들어진 필요는 총을 들고 설쳐대는 극우 깡패와 극좌 혁명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이 무기통제법을 등에 업고 움직인다고 해도 합법적인 틀을 유지하려면 대통령의 계엄령이 필요한데, 아옌데는 이걸 승인해줬다는 것. 그리고 다음 달인 9월이 되자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대통령궁을 향하여 우익과 군부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는 해석이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은 아옌데를 배신자이자 실패하고 경계해야할 모델로 여긴다. 이러한 사민주의에 대한 급진 좌파들의 불신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1914년~1918년의 독일 정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꽤나 연식이 있는 정서이다.
8.3. 우파들의 견해
우파에서는 아옌데 정부는 무능했으며 제대로 된 집권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아옌데 정권이 할 의지만 있었지 현실적으로는 다른 상황과 능력 부족으로 스스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의 출현을 자초했다는 것. 아옌데 정권 자체의 경제정책도 너무 낙관적으로 짠 것이라 사회당보다 오히려 더 온건했던 공산당 쪽에서 자꾸 누그러뜨리려고 할 정도였던 것도 사실이다.
쿠데타 전까지 아옌데 정부의 지지율은 과반수인 적이 없었다. 인플레이션도 잡지 못해 오일쇼크 전까지 190%라는 기록적인 상승률을 보였다. 일부 음모론적 좌파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개입설과는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구리 보유분을 방출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무리한 국유화로 인플레이션 등 악화위기에 직면한 아옌데 정부는 더욱 큰 위기를 스스로 자초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개입과 보수의 우려'''보다는 '''아옌데 정부의 무능'''에서 찾아야 된다는 논리다. 왜냐면 1971년은 오일쇼크 전이였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리가 없음에도 그는 무리한 국유화를 벌였다. 영국계나 미국계가 잘 관리하던 광산을 갑작스럽게 국유화를 하여, 관리적인 면에서 극도로 생산성이 감소했다. 게다가 늘어난 인플레이션으로 외국계 자본이 전부 칠레를 빠져나갔다.[23] 미국이 아옌데 정권에 기겁해서 차관 투자를 거부한 것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등 총체적인 부정적 상황이 미국의 차관 투자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정권에 대한 고의적인 방해를 했던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이 공급 거부를 한 탓이 크며, 아옌데 정부만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부적절하다, 아옌데에 대한 미국의 방해는 아옌데 집권 이전부터 계속 있었으며, 아옌데가 집권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즉 아옌데의 집권 이전부터 쿠데타까지 미국은 칠레 좌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민당과의 연대도 아옌데 정부가 꼭 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과반수를 다 잡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을 이끌고 하려면 반드시 연립정권의 형태를 유지해야 했다. 기존 정권을 잡은 정당들은 아옌데의 급진적 개혁에 소극적이였고, 좌파 정당인 공산당-사회당조차도 그의 개혁에 미심쩍은 반응이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위기는 아옌데의 정치적 위치를 약화했다. 그의 무능한 정치력은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쿠데타를 방조하고 자초하기까지 했다. 다만 야당 중 가장 온건하다던 기민당은 정부와의 협력을 원하는 칠레 교회의 계속된 요청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정권에 대한 타협을 거부했다. 즉 아옌데의 정치력 문제보다는 이미 많이 벌어진 칠레의 양극화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봄이 타당하다.
8.4. 총론
아옌데는 칠레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혁명적 변혁에 평생을 바쳤다. 일부 오해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 목적을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았다. 아옌데는 삶을 통해 정치적 타협이 꼭 개량주의는 아니라는 점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존 체제에 기반을 둔 개혁은, 유혈과 폭력적 변화를 효과적으로 피하면서도 충분히 혁명적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뤄내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0
일각에서는 비판을 받지만 아옌데는 칠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2008년 칠레 국영 방송국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을 뽑는 프로그램인 Grandes Chilenos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24] 그러나 현재 칠레는 좌파들과 우파들이 교대로 정권을 차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많이 달라지는 면이 있다.아옌데는 인민전선 정부 집권 기간 동안 배출된 한 세대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좌파 진영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리고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인민전선 시기를 경험한정치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세계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고, 가장 잘 조직되고, 가장 효율적인 칠레 좌파를 형성했다. 아옌데가 이들 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치체제 전반에 대한 지식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전투적인 자세, 인민을 향한 깊은 열정, 교육할 줄 아는 능력, 재능 있는 인물들을 모아내는 능력, 수십 년 공직 생활을 통해 형성된 공적인 품성까지. 여기에 더해 아옌데는 주어진 정세를 읽고, 그에 따른 전략전술을 세우는 능력까지 탁월했다. 상황의 핵심을 재빨리 파악하고, 주변 동지들보다 더 멀리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이는 아옌데가 일련의 특정 정치사상과 지도 이념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옌데가 보편적인 정치이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아옌데 특유의 이념, 곧 '아옌데주의'의 원칙은 분명히 존재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57
참고로 문학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오촌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다. 이사벨 아옌데는 쿠데타 이후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해외로 망명해야 했었다. 이때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들은 데뷔작 '영혼의 집'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
아옌데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장녀 베아트리츠(1943년생)는 1973년의 쿠데타 직후 쿠바로 망명했지만, 4년 만에 타계했다. 차녀 마리아 이사벨(1945년생)은 1990년대 칠레가 민주화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상원의장 등의 요직을 거쳐 현재 사회당 당수로 재직하고 있다. 베아트리츠의 딸이자 아옌데의 손녀인 마야 페르난데즈 아옌데는 2012년 칠레 지방선거에서 산티아고의 현직 보수 구청장을 꺾고 승리했으나 재검표 과정에서 석패했다. #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재임 : 2006년 ~ 2010년)의 20대 청년 시절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한 공군 소장 아버지를 두고 있었고,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에게 고문을 당하는 등 아옌데와 관련이 깊었다. 퇴임 직전 지지도가 85%로 높았으나, 연임 제한 규정으로 한 번 쉬고 2013년 말 다시 당선되었다.
쿠데타에서의 미국의 개입 여부는 CIA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 좀 더 확실한 평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25]
1970년대에 아옌데는 우익 쿠데타에 물러난 사회주의 겸 진보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사회주의 계열 소설로 유명한 강철군화의 표지는 "강철군화(폭력적 우익을 상징)"에 짓밟힌 아옌데 팜플렛으로 디자인되었다. 80년대 한국에 번역된 표지 뒷면도 이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
아옌데는 비록 3년이라는 짧은 집권 기간을 가지고 있지만, 아옌데와 그의 정부가 남긴 유산은 절대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옌데 생애 부분에서 상술한 그의 구리산업 국유화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칠레 경제의 튼튼한 토대가 되고 있다. 비록 쿠데타 이후 무산됐지만 토지개혁도 시도하였고, 그는 집권할 당시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주고, 60세 이상에게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추진했으며, 사회보험 적용을 늘리고 전기와 수돗물 공급 확대를 추진했다. 이 밖에도 공직자의 투명성과 인권 증진, 서민 보호, 인프라 확보 등을 위한 광범위한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아옌데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무너졌지만, 세계 곳곳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아옌데의 유산을 들춰보고 있으며, 2000년 이후 집권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은 아옌데의 인민연합과 놀랄 만큼 흡사한 정책을 추진했다. 칠레에서는 특히 교육과 공공서비스 개선 예산 확보 방안으로 천연자원에 대한 공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번졌으며, 극심한 불평등을 해결하고 부의 재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반미성향이 강한 남미국가들 사이에서 그리고 진보진영 사이에서 커졌다. 아옌데가 ‘다른 방식’의 혁명을 꿈꾸었다고 해서 그를 ‘개량주의자’로 폄하하는 시선도 일부에 존재하지만, 아옌데는 평생을 사회변혁과 자본주의 체제 탈피를 꿈꾸었고 적대세력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키고 싶어 했다. 또한 아옌데는 다른 나라의 혁명 과정이 치른 혹독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 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이후 어디에선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확실한건 아옌데의 진보적 정신이 현재 진보를 추구하는 중남미국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지금도 빈부격차가 극심한 중남미 국가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9. 이야기거리
1960년대 칠레의 정치인이었던 아옌데는 북한과 베트남 쿠바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세 나라를 방문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에서 이룬 성과에 감탄했었다고 한다. 특히나 북한 방문에서 현제이 있는 공장과 농촌 지역 그리고 종합진료소를 방문하면서 "칠레에선 도시인들도 누리지 못하는 각종 혜택을 농촌 지역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는 말을 했다. 또한 베트남 방문에선 미군의 폭격을 받은 북베트남을 보고서 민중들의 용기에 감탄했다고 한다. 북베트남 방문에선 호치민을 만나기도 했는데, 호치민은 과거 프랑스의 증기선 보조로 일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배운 스페인어로 아옌데에게 "베트남 인민들에게 연대를 표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준 아옌데 일행에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다.[26] 사실 북한을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이상함을 느낄이유가 없는것다.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이 한반도 남부는 농업지대로 육성시킨 반면,북부 그러니까 북한지역은 공업지역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1950년대 중반~1960년대의 북한은 매년 두자릿수대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여 대동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을 지경이었고, 이러한 경제성장에 힘입어서 선진적인 복지제도들을 재빨리 도입했기 때문인데 고난의 행군 여파로 이러한 복지제도가 다 망가지고 현재도 회복되지 못하면서 형해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복지제도가 잘 돌아갔던 때였다. 달리 말하자면 이때도 칠레가 북한의 몇배에 달하는 소득수준을 지니고 있음에도 복지수준은 뒤쳐졌다는 점에서 칠레의 복지제도가 개판이었다는 점도 알수있기는 하지만.
1967년 체게바라가 사살되었을 때, 그 소식을 듣게 된 아옌데는 상원 연설에서 체게바라와의 개인적인 인연을 떠올리며 추모사를 남겼는데, 연설 도중 체게바라의 친필 사인이 담긴 저작 '게릴라전 교범'을 꺼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27]
2013년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서도 아옌데 정권에 대해 다룬적이 있다.
10. 관련 항목
- 1973년 칠레 쿠데타
- 미국/외교
- CIA
- 콜로니아 : 2015년에 제작된 독일영화로 1973년 칠레 쿠데타와 칠레의 군사독재정권 시절이 배경이다.
- 벤세레모스 : 아옌데의 인민연합 찬가
- 사이버신 계획 : 아옌데가 추진한 칠레판 오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