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토 피노체트
1. 개요
칠레의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1973년 9월 11일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군사쿠테타를 일으켜 민선 사회주의 좌파성향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다.'''"민주주의란 때론 피로 목욕을 해야하는 것"'''[1]
쿠데타 성공 직후
40년간 유지되었던 칠레의 민주주의는 쿠데타로 중단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이런 막장행각은 그대로 이어져 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노체트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 예를 들어 1973년 산티아고 월드컵경기장에서 반대파 민간인들을 모아 집단으로 학살한 바 있다. 2015년 9월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피노체트 집권 기간 인권탄압 피해자는 4만여 명, 사망·실종 인사는 3225명에 달한다. 출처[2] 현재까지도 산이나 사막 등지에서 실종자들이 유기되었다는 문서가 나오고 있으지만 피노체트 본인은 죽을 때까지 이런 악행에 대한 뉘우침이 전혀 없었다. #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며 자신을 애국천사 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권기간 동안 칠레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와 함께 남미의 대표적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칠레의 기적이란 용어도 만들어졌고 지금도 경제성장이라는 이유로 피노체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세월이 지나서도 변함없이 욕만 먹거나 재평가를 해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당시 남미 독재자들과는 다른 편.[3] 물론 20년간 중도좌파연합이 집권해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반피노체트 여론이 더 우세하기는 하지만, 매년 피노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론 조사를 실시할 때마다 계속 찬반 비율이 바뀐다. 피노체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50%를 넘긴 적이 없지만 반대로 40% 이하로 내려간 적도 없다.
피노체트(Pinochet) 가문은 프랑스에서 들어온 프랑스-바스크계 칠레인이라[4] 일부 학자들은 프랑스식으로 '피노셰'라고 읽기도 하며, 피노체트 자신도 생전 그렇게 불러주는 걸 더 좋아했다고 한다.
육군으로 출세했고 군사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한 바 있다. 쿠데타 후 대통령 취임식에서 "민주주의란 때론 피로 목욕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망언으로 전세계의 지식인들에게 공분을 샀던 일이 유명하다.
2. 초년 생애
피노체트는 1915년 발파라이소에서 브르타뉴계 프랑스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5]
산티아고 소재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사관학교(Escuela Militar del Libertador Bernando O'Higgins)에 지원해 나이와 자격미달로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17살이 되던 해 결국 입학허가를 받는다. 육군 장교로서 두드러진 자질을 보여 졸업 후 곧바로 부교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제6사단장, 1969년 육군참모장, 1973년 대장으로 육군총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인 1973년 9월 11일 육군, 해군, 공군 및 헌병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군사평의회를 결성하여 칠레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켰다.
3. 쿠데타와 집권
[image]
1973년 9월 11일에 미국과 기득권층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군사 쿠데타[6] 를 일으켰다. 쿠데타 당일인 1973년 9월 11일, 미국 중앙 정보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는 자신을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한 아옌데 대통령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 중앙정보국이 작성한 쿠데타 계획에 따라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호커 헌터 전투기[7] 로 폭격하고 전차와 보병으로 둘러싼 뒤, 사격을 가해 모네다궁에 남아 저항하던 아옌데 대통령의 경호원들과 측근들을 살해하기 시작한다. 피노체트의 투항 권고에 결국 아옌데는 같이 싸웠던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투항하라 한 후 자결했다. 물론 피노체트는 약속 따윈 지키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본인은 죽일 의사는 없다고 주장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부 인사들은 아옌데의 곁으로 보내졌다. 그래도 일말의 죄책감 때문인지 혹은 국제사회의 시선 때문인지 아옌데의 가족이 망명가는 걸 막진 않았다.
그렇게 쿠데타로 사회당 소속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끌던 민선 정부가 무너졌고,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곧이어 저항하는 모든 민중세력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살아남아 미국에 망명해 있던 아옌데 정부의 외무장관까지 끌고와 죽였다. 당연히 아옌데를 싫어하는 미국에서 그의 측근이 도망쳐왔다고 받아줄 리가 없었다. 바로 붙잡아서 칠레로 보내주었다.
피노체트 정권은 좌파라는 의심이 가면 끝까지 추적해 모조리 체포해서 구속하거나 살해했다. 재판이나 합법적인 절차는 무시됐고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좌파정당에 가입한 자들과 많은 지식인들, 예술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칠레의 유명한 가수 빅토르 하라도 이때 군부의 손에 의해 희생당했다.[8] 쿠테타가 일어난 지 일주일 만에 3천 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피노체트는 1973년 12월까지 쿠데타 직후 3개월 동안 수천 명을 처형했다. 공산당원을 포함한 좌익계 인사들을 체포하여 공설운동장에서 사살하는 바람에, 옆에 흐르는 마포초 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의회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 조치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라는 칠레정치 고유의 특성과 배치되는 학살이었다. 집권 이후 17년 동안 "내 허락 없인 낙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칠레를 통치했다. 하여튼 이때 이미 59세의 중늙은이. 이후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 동안 4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불법구금되었고, 고문까지 당하여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고, 3,000여 명이 강제로 끌려가서 실종 되었거나 살해되었다. 당시 칠레에서 연행된 사람은 10만 명을 헤아리며 이 가운데 수천 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9]
특히 칠레 육군 정보부를 개편해 창설한 국가정보부(DINA : Dirección de Inteligencia Nacional)를 시켜서 쥐도 새도 모르게 반정부 운동가들을 태평양 한가운데로 던져 넣어 칠레 앞바다가 피로 물들 정도였다. 특히 이들은 밤에 급작스럽게 찾아와 사람들을 잡아갈 정도로 치밀했다. 그야말로 DINA는 당시 칠레에서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로, 만약 칠레의 한 마을에서 '호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호세는 다음날 고문받은 시체의 몰골로 칠레 앞바다에 떠밀려 오는 경우가 흔했을 정도다.
칠레 사람들은 이러한 피노체트의 정부에 만행에 질려서 아르헨티나의 히틀러라고도 불렸던 호르헤 비델라 치하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갈 정도였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정권은 오히려 칠레 피노체트 정권만큼이나 악랄한 정권이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수만 보더라도 아르헨티나는 1만은 넘어갔고 비공식 추계로 보면 3만은 넘는다고 했다. 칠레는 공식 수치만 3~4천 수준이고 개별 학자 차원의 비공식적 추계 중 가장 높은 수치가 만 오천가량이다. 문제는 칠레 피노체트의 집권기간이 73~89년으로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의 76~83년보다 더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인구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우고 살리나스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10] 자신은 당시에 24살로 공산당의 청년당원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집으로 밀어닥친 경찰에 의해 눈을 가린 채 미지의 장소로 끌려갔는데 그곳은 악명 높은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였다. 이곳에서 그는 5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고 고문이 끝나자 다시 다른 감옥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2년이라는 형기를 다 채우고서야 풀려났다. 매우 "운 좋게도" 살아남은 그가 1977년 석방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삼촌이 끌려갔고 "그때 경찰에 끌려간 삼촌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석방된 뒤에도 경찰의 계속되는 사찰로 칠레에선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다시 체포될 것을 감지한 그는 몰래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서 10년을 그곳에서 보낸 뒤 1986년에 칠레로 돌아왔다.[11] 그러나 여전히 칠레는 피노체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사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이어졌기에 그는 다시 국경을 넘어서 몰래 아르헨티나로 망명했고 그는 1991년 피노체트가 물러난 뒤에야 칠레로 돌아올 수 있었다.
[image]
쿠데타 직후 반동분자 색출 명목으로 칠레 산티아고 월드컵 경기장에 갇힌 사람들. 상부의 지시가 내려오자마자 군인들의 발포로 칠레 공산당원(주로 빈민층),좌익 대학생들이 총탄을 맞고 죽어갔다.
이후 3년여 동안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DINA는 자신에 반대하는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했다. 물론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국가정보국에 등용시켰다. 훗날 피노체트의 범죄행위를 기록한 기소장에는 피노체트가 칠레, 아르헨티나, 스페인,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의 국가에서 약 4,00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관여했으며 여성 죄수들을 강간하거나, 손톱과 발톱을 뽑기, 신체를 불로 지지기, 썩은 음식이나 동료를 죽여 놓고서 죽은 동료들의 인육 먹이기 등의 잔인하고 조직적인 고문 등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노체트 치하 칠레에서는 심문을 시작하기 전 일단 연행 당한 사람이 남성일 경우 고환을 발로 짓밟아 하나를 터트린 다음 심문을 시작했다고 한다. 얼마나 효과가 좋았던 지 DINA(칠레 보안군)은 음낭을 진실을 담은 주머니(Bolsillos de la verdad)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물론 피노체트는 난 그런 적 없다며 부정했지만.(구글 검색에도 나오지 않음)
또한 최근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비틀즈 멤버인 조지 해리슨과 스페인 출신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가 반정부 인사를 고문할 때 '배경음악'으로 이용됐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이들은 고문을 하면서 반정부 인사에게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높은 볼륨의 노래를 수일간 계속 듣게 했다고 하며 고문할 당시에는 해리슨의 '마이 스위트 로드'와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이외에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운드트랙도 있었으며 증언에 의하면 해리 닐슨의 '당신없이는 못살아'(Without You)와 길버트 오 설리반, 캣 스티븐스의 노래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사실로 데려가 고문하면서도 노래를 계속했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되며 또다른 수감자들은 피노체트 정권이 고문을 하기 전에 고문을 더 잘하라고 음악을 틀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기사
물론 최근에도 피노체트 정권에서 자행된 고문과 가혹행위가 아직도 드러나고 있다. 2015년 드러난 자료에 의하면 1986년 7월 2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던 두 10대 남녀에게 군인들이 붙잡아서 폭행한 다음 남녀에게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그들의 몸에 불을 붙였으며, 끔찍한 화상을 입은 두 사람은 군 트럭으로 짐짝처럼 실려갔고, 군인들은 이들을 산티아고 국제공항 주변에 버린 뒤 달아났다는 자료도 나왔다, 이 10대 남녀에게 저지른 끔찍한 백색테러는 당시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의 잔혹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 중 하나다.[12]기사
군대가 경찰 역할을 대신하고, 경찰도 군대처럼 기관총 들고 설쳐온 나라 칠레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한 폭력 통치로 공식 수치에 따르면 그 당시 칠레 인구 약 1000만 명 중 3~4천이 죽고, 100만 명이 해외로 망명하였다.[13] 같은 사망자와 '실종자[14] '도 많이 나왔다. 또 피노체트는 자신에 반대하는 자들을 유럽을 비롯해 외국까지 쫓아가 암살했는데, 이를 위해 비밀경찰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부독재자들과 일종의 '국제협력 군경테러조직'을 창설했다. 또한 좌익분자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국가들 간에 반정부 인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합동작전[15] 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국제협력은 미국과 여러 유럽국가들,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도 참여하였다. 당연히 유럽, 미국인, 한국인이라도 남미에서 반정부 운동 시 미국, 유럽, 한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벌된다. 물론 운 좋게 유럽으로 망명한 남미인들이나 귀국한 미국, 유럽인들도 본국으로 강제송환되어 처벌되었다. 이는 냉전 분위기 탓에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다 남미국가들과의 경제, 외교, 안보협력을 중시했기 때문. 탈출을 법으로 금지하고 탈출 시 발각되면 처벌은 당연.
비록 군부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협력은 했으나, 칠레군도 육해공군 및 헌병, 경찰 간의 알력이 심해, 디나 외에 각 군경이 별도의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국민을 탄압했다. 서로 정보 공유도 제대로 안 해서, 어떤 사람은 해군 정보부에 끌려가 몇 년간 수감생활 후 풀려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육군 정보부에선 자신을 체포하자마자 사살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해 놓았고(해군은 단지 잡아다 고문하고 징역만 부과할 대상으로 분류) 해군에서 그가 잡혀 있다는 정보를 타군에 제공 안 해 육군이 계속 자신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을 다큐멘터리에서 하기도 했다. 칠레 역시 육군의 힘이 센 편이지만, 쿠데타 당시 해공군 참모총장과 경찰사령관이 공동 명의로 성명을 내는 등 타군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1. 경제정책
80년대 초반의 세계 경제 쇠퇴에도 불구하고 피노체트 집권기 칠레의 성장률은 높았으며 이전 정권에서 라틴아메리카 평균보다 낮아졌던 1인당 GDP도 그의 집권기 후반에 따라잡는다. 물론 그 배경에는 아옌데 정권 당시 미국의 철저한 경제적 고립정책과 제재가 뒤따랐고, 반대로 자신들이 사주한 피노체트에는 미국이 이곳저곳에 통 큰 지원을 쏟아냈다는 원인이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남아메리카, 아니 사실상 개발도상국 최초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행했다고도 평가받는다. 자유시장과 금융개방, 통화정책을 중시하는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서 사사한 유학파 출신들(소위 시카고 보이즈)을 경제 관료로 중용하면서 이전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의 토지개혁, 의료체계 개편과 같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들이 취소되었고,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 규제 철폐, 무역장벽 완화 등의 정책들이 그의 집권기에 실시되었다. 그 때문인지 비슷한 시기에 강력한 신보수주의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나 로널드 레이건 등과는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도 임기 후반기로 갈수록 피노체트와 사이가 멀어져갔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이 민주주의로 향해가고 있었는데 칠레를 지원해주기 난감했던것도 사실이기는 사실이었기 때문. 참고로 이 정책들은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로 수출되었는데[16]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웠던 칠레에서와는 다르게 중남미 국가에서는 처참하게 망해버렸다(...) 물론 외채위기와 겹치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해야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중산층 이상에서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했으며 1988년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 찬반을 묻는 투표를 피노체트 측이 수락한 것도 이 지지기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당한 표차로 피노체트가 지기는 했지만.) 피노체트식 경제정책은 민주화 이후에도 계속 이뤄져서 칠레는 비록 빈부격차는 여전히 어지간한 남미급으로 심각하나 1인당 GDP, 1인당 소득은 남미 최정상급이 되었다. 80년대 이후 칠레 경제의 고성장을 칠레의 기적이라고 한다.[17] 칠레 경제의 고성장이 구리에 힘입은 것도 맞지만 칠레 내에서 나름의 구조 개혁을 철저히 수립한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89~2000년까지만 해도 구리가격이 꼭 그리 상승세이지만도 않았다. 그리고 89년부터 90년대초까지는 하향세였다. 거기에 더해서 선진국 기업들의 생산기지가 칠레만 그런 것도 아니다. IT에서 잘나가는 인도 역시 자국의 해당 산업에서 외국계 기업의 비중이 족히 절반은 된다.# http://www.kfranchise.kr/?p=10687 말레이시아 역시 제법 괜찮게 성장하는 축에 속하는데 이들 역시 제조업 분야에서 외국계의 비중이 크다.
초기의 피노체트의 개혁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19] 1982년후에는 좀 더 온화한 정책을 펼쳤으며, 오히려 몇 은행들과 사업들은 국유화한 후 나중에 민영화를 했다. 그리고 오히려 정부가 크레딧과 보조금을 대주어 사업들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이러한 온화한 정책 덕에 칠레는 상당한 GDP 성장을 맞았다.
민주화 이후 중도좌파라 하는 Concertación Democrática가 집권했고 이들은 대략 90년대 이래 칠레 정치사에서 대부분 과반 이상 내지는 제1당 자리 및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류를 차지했다. 물론 피노체트 쪽의 우파들도 40% 정도의 지지를 확보하여 기반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상원은 여전히 피노체트 계열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으며, 군부도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콘세르타시온 정권도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을 이어나갔다.[20]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복지에 대한 지출을 늘림으로서 형평성을 챙기거나 노동조합들의 이익 추구를 도와주는 법을 통과하는 등 구체적인 부분에서 피노체트 시절의 경제정책에서 상당히 다른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21][22] [23] 그 결과 가령 87년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칠레의 평균 GDP 성장률은 6%를 유지해왔다.(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평균 GDP 성장률은 2.8%) 빈곤율도 87년 45%에서 노동조합 법이 통과되고 피노체트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해인 1990년에는 무려 약 7% 하락한 38.6%에서 2007년 13.7%로 떨어지고 소득 격차도 소폭 감소하긴 했다. 물론 콘세르타시온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소득 분배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요원하며 아직까지 관련 지표들은 여전히 다른 남미국가들처럼 심각하기는 하다.
그 외의 경제지표를 논하자면
이 pdf 문서로.
실업률은 80년대 당시 위기를 겪으면서 뻥튀기 되어 20%대로 급상승했다. 이것이 80년대 피노체트 정권 말년에는 10% 밑으로 겨우 회복되었고, 민주화 이후 90년대 중반에 6%대로 내려갔다가 10%대로 급증했다.
인플레이션율은 아옌데가 퇴진한 73년 당시 약 500%에 달하던 수치에서 점차 하락하여 80년대 위기 직전까지는 10% 이하로 내려갔다가 위기를 겪으면서 잠시 20% 상승했고 여기서 다시 회복되는 형태를 보였다. 피노체트 당시의 경제 성장률만 놓고 보자면 심지어 80년대 당시의 외채 쇼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옌데의 경제성장률보다 두 배 이상을 기록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 수치가 더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질임금은 대체로 아옌데 시절보다 하락했고, 잘쳐봐야 정체 수준이었다.
소득분배 관련 지표의 경우 대부분 아옌데 시절보다 악화되었다. 이는 공공부문에 대한 지출 축소, 각종 복지정책의 후퇴, 그리고 80년대 외채쇼크 등에 기인한다. 특히 의료와 교육부문의 부실화는 지금까지도 과도한 교육비와 의료비 부담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으며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평가될 정도다. 피노체트 군사정권 당시 이뤄졌던 공공지출 감소와 무분별한 민영화는 빈부격차를 증가시키고, 칠레의 복지수준을 나락으로 이끄는 등 부정적인 영향에 한몫 했다. 현재 칠레의 GDP 대비 1인당 교육비 지출이 대한민국을 넘어섰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고, 의료계급화도 뿌리박혀서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는 한다. [24] 그나마 빈곤율 자체는 87년의 45%부터 90년까지 38%로 하락한 것을 시작으로 민주화 이후에도 콘세르타시온 정권이 최저소득계층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서 급락했다. 유아사망률 급락이나 10대 이하 취학률 지표 역시 급상승했다.
다만 사실관계를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위 시카고 보이즈가 주류를 점하고 활약하게 된 때는 80년대 경제위기 극복 과정 이후부터다.[25] 이 점에서 아르헨티나와는 구별되는데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을 맡은 경제부 장관 오즈 본인은 경제 개혁 과정에서 재벌기업에 불리한 금융개혁이나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나 오히려 이들이 군사독재정권과 밀착해서 개혁을 수포로 되돌렸다. 참고로 미국, 중국, 캐나다, 호주, 중동국가 등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반드시 1차 산품을 판다고 해서 꼭 경제 성장을 안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가급적 2, 3차 산업 테크를 타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그 나라 여건에 맞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개도국이 어거지로 산업화 테크를 탔다가 말아먹은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장 소련, 북한, 인도[26] , 베네수엘라[27] 가 그러하다. 또, 시카고 보이즈들은 피노체트 물러나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칠레 경제 정책을 짰다.
거기에 더해 칠레의 민주화 세력이 피노체트의 경제 운용 방식에 적대적이었음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수용한 거 아니냐는 식의 지적이 있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피노체트의 경제 운용방식에 대한 국내외적으로 호의적인 여론은 이미 민주화 당시에도 충분히 조성되어 있었고 심지어 1999년 대선에서도 여야 양쪽은 공약 등을 통해 피노체트의 자유시장 경제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했다. 다만, 복지 지출에 대한 견해 등에서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간혹 칠레의 경제적 성공을 국가의 수출주도적 정책 등의 결과라고 한다. 물론, 규제 완화를 정책이라 볼 수 있으면 그 말은 맞는다. 그러나 만약 국가의 개입을 시장 자유의 축소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이 말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매년 나오는 경제 자유도 순위 관련 통계를 보면 1~10위권 안팎의 초상위권 국가 중에는 미국, 중국, 북유럽&서유럽 국가(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말레이시아 등과 더불어 반드시 칠레가 들어가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과 일본은 20위권대 수준이다.
3.2. 외교정책
피노체트 본인이 친미, 친서방 성향이라 서방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특히 미국의 지원으로 집권한 만큼 집권기간 동안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유럽과도 관계가 무척 좋았다.
다만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에 칠레의 영공을 개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말이야 좋다지만 남미 대 유럽의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던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게는 제대로 된 역적, 팀킬이었다. 결국 칠레는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는 물론이고 아르헨티나의 영구 우방국인 우루과이, 그리고 안 그래도 칠레와 사이가 나쁘던 볼리비아와 페루 기타 브라질, 콜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당하고 칠레를 남미의 왕따로 전락시켰다.
사실 포클랜드 전쟁 당시만 놓고 보면 아르헨티나를 지지해 준 나라는 페루뿐이었고 다른 남미 국가들은 별로 아르헨티나를 지지하지 않았다. 포클랜드 전쟁 문서로.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칠레 영공 개방 행위로 인해 전쟁이 남미대륙 전체로 확대되고 남미 전체가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문제는 있었고, 남미 국가들이 항의했던 것도 그런 문제였던 측면이 컸다.
피노체트 정권이 끝난 이후의 칠레의 민주 정권에서는 포클랜드 영유권 문제에 있어서 아르헨티나를 지지해 오고 있으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외교 관계도 우호적인 관계로 개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와의 관계는 여전히...[28]
3.3. 몰락
폭압적인 피노체트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1983년 기독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연합(AD)이 결성되었다. 피노체트는 1984년 6월, 점점 거세지는 반정부 투쟁에 대처하기 위해서 더욱 더 큰 탄압을 했으나 이러한 피노체트의 강압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세력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칠레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당시 목격자들은 "그 광경은 눈 뜨고는 볼 수 없다"라고 증언할 정도로 미군과 마피아를 동원하여 피노체트는 미국을 등에 업고서 '''가혹한 국가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1986년 산티아고 인근 도로에서 받은 공격으로 경호원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각종 집회에 참여한 시위대 '''수백명을 살해'''하고 학살하는 유혈 탄압으로 맞서면서 그의 잔인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민중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로 마지 못해서 선거가 치러졌을 때에 피노체트 반대 진영에서는 텔레비전 광고와 토론 프로그램 참여 등으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언론의 자유 통제로 감추어졌던 인권 탄압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로 인해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미국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칠레의 유권자들도 피노체트에게 표를 주지 않는 비폭력저항을 벌였다. 사실 당시 미국이 피노체트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던 것이 당시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여타 남미국가들이 잇따라 민주화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피노체트를 감싸줄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에야 그나마 도미노 이론이 먹혀서 군사독재정권을 지원보낼 명분이라도 있지만, 이웃나라들이 속속 민주화되고 있던 데다가, 소련도 세계 혁명은 커녕 내부신경쓰기 바빴는데 그 와중에 학살과 야당탄압으로 악명높은 독재자에게 친미정책을 편다는 이유만으로 지속적으로 지원을 보내주는 것은 그냥 명분없는 바보짓이었다.[29] 그래서 미국도 슬슬 발을 빼려고 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피노체트에게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image]
라울 실바 엔리케스(Raúl Silva Henríquez)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정도의 위상을 가지는 인물이며 칠레에서는 성인 반열에 오른 인물로 칠레 500페소 동전의 모델이기도 하다. 라울 실바는 개혁 교황인 요한 23세에 의해 1961년 수도인 산티아고의 대주교, 1962년에는 추기경에 임명되어 칠레를 대표하는 성직자 반열에 오르게 된 인물이며 당시 칠레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과 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앞장서 피노체트 정권에 저항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라울 실바 추기경이 그 정점에 있었다, 그는 사제들에게 '그대들이 나서서 죽어가는 국민들을 보호하라'고 말했고 사제들은 거리로 나가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평신도 옆을 지켰고 이로 인해 사제들도 정권의 희생자가 됐다. 피노체트 정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몇몇의 사제들을 잡아 고문하거나 7명을 살해했으며 라울 실바는 정권으로부터 '빨갱이 추기경'(스페인어: Cardenal Rojo - 영어: Red Cardinal)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정교회와 개신교, 유대교까지 포괄하는 '정의평화위원회'를 구성하고 피노체트의 만행에 저항했다. 교회의 저항으로 칠레 국민들도 저항을 시작하였고 끝끝내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칠레 국민들은 "만약 라울 실바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들이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교회 안에서 거룩한 미사만 드렸다면, 칠레 국민이 간절히 원하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0]
그렇게 가톨릭교회와 여러 단체들이 서로 힘을 모아서 1985년에 11개 이상의 야당들이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합의서를 발표했고, 1986년 4월에는 200여 개의 사회단체가 '시민회의'를 결성했다. 이러한 야당과 시민단체들에 의한 저항에 직면한 피노체트는 1988년 10월, 자신의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중도와 좌파성향 정당들이 '아니오를 위한 정당연합(Concertación de Partidos por el 'No')'을 결성하여 국민을 상대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폈고, 1980년 국민투표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칠레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수만 명의 참관인들이 선거를 감시했다. 이 선거에서 54%의 국민이 이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비록 국민투표에서 패했지만 꼼수를 써서 1998년 3월까지 군 통수권자로서 역할을 인정받았고, 그 이후에는 종신 상원의원[31] 으로써 면책권도 부여받았다.[32] 그리고 군부가 국정에 다양하게 개입할 수 있도록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존속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47명의 상원의원 가운데 9명의 상원의원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78년 동안 군부가 저지른 심각한 인권침해에 면죄부를 주는 것을 틀로 하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형사상의 기소를 할 수 없게 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호해줄 인물들을 대법관에 임명했다. 이처럼 칠레의 민주주의는 피노체트에 의해 감시받고 억압받는 민주주의일 뿐이었다.
4. 민주화 이후
4.1. 하야
[image]
'아디오스 헤네랄!(Adiós! General!, 장군이여 안녕!)' 1988년 국민투표에 앞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벽보가 칠레의 산티아고 시내에 붙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12월 피노체트와 공산당이 참여하지 못한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 후보가 당선되었다.[33] 17개 야당연합의 단일 후보로 출마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의 아일윈 후보가 1차 투표에서 55.2%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일윈은 집권하자마자 400명의 정치범 가운데 43명을 특별사면조치 했으며, 칠레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1973년 이후 단절되었던 소련, 동독, 체코 등과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그는 또한 멕시코와의 관세장벽 제거와 임금인상, 전신, 철도 및 송유관 건설사업 등을 통해서 1992년에 칠레의 경제성장률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가장 높은 9.7%로 끌어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아일윈 대통령은 1990년 9개월 동안,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쿠데타와 17년간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기간에 벌어진 인권유린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담당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레틱(Rettig)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레틱 보고서"를 발간하여 피노체트 정권이 자행했던 4,000건이 넘는 인권침해 사례를 수집하여 공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진실규명보다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화해만을 강조하여, 가해자들이나 인권침해에 개입했던 국가기관과 그 인권탄압 책임자들의 책임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또 사망이나 실종사례만 조사했을 뿐, 체포, 구금, 고문, 추방 등 그 이상의 인권침해 사례를 다루지 않아, 피해 관련자들과 인권단체가 주장한 과거사 청산 요구의 기대에는 매우 미치지 못했다. 피노체트는 본인이 만든 사면법과 지지세력을 통해 오히려 정권에 협박을 하면서 평생 잘 먹고 잘 살았다.
이에 아일윈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사죄하고 범죄를 저지른 군 관계자가 사과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아일윈 대통령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군인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다치는 일이 생기면 그날로 헌법질서는 끝날 것이다" 자신을 건드리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을 하며 위협한 것이다.[34] 이처럼 레틱 위원회의 활동은 완벽한 과거사 청산을 끝내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통한 과거사 청산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자, 인권단체와 피해자들은 법적인 방법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8년 피노체트 정권이 정한 사면법은 이러한 해결에 많은 제약을 생기게 했으며, 1998년 8월, 레틱위원회 이후 정부와 군, 민간 인사 등으로 구성된 대화위원회가 소집되어 활동했지만 정작 이 위원회에는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었고 군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2. 체포
1998년 10월 17일 디스크 치료로 방문했던 런던의 한 병원에서 스페인 국민 살해 문제[35] 로 영국에서 체포되었다.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가 영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범죄인 인도협정과 유럽테러협약에 의거, 피노체트를 과거 집권 때 스페인 시민 등 9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영국 귀족원[36] 까지 갔다. 국제법상 중요한 판례로 꼽혀 국제법을 배우는 사람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사건.[37] 이 사건은 칠레에서 피노체트를 보호하고 있었던 다양한 보호막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피노체트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내세워 영국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스페인의 요구가 법적인 하자가 없음을 확인했고, 영국의 상원 5인 재판부 역시 피노체트가 면책특권을 갖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영국 상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스페인 상원 재판부는 피노체트의 이의를 받아들여 결국 5인 재판부에서 인원을 추가하여 7인 재판부를 구성하고 피노체트를 심리한 끝에 피노체트가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피노체트의 귀국을 허용했다. 이에 잭 스트로 내무장관은 피노체트를 석방한다.[38][39]
[image]
죽기 보름 전인 2006년 11월 25일 생일 때
[image]
손녀와 위아래 다 2006년 생일 때다.
이렇게 간신히 칠레로 돌아왔는데, 휠체어에 치매기까지 있던 그는 놀랍게도 고국에 닫자마자 두 발로 걸어 일어서는 기적을 보인다.
4.3. 드러나는 치부
1999년 집권한 라고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을 강구함과 동시에 피노체트가 임명한 대법관 상당수를 교체했다. 2000년 3월, 칠레 대법원은 영국에서 칠레로 돌아온 피노체트의 면책권을 박탈해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열었으나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종결시켰다.[40] 그러나 칠레 사법당국은 남미지역에서 반체제 인사 9명을 납치해 그중 1명을 살해한 혐의로 피노체트를 재판에 회부하여, 피노체트를 가택 연금시켰고, 막대한 횡령을 저질렀던 사실도 밝혀져 '청렴한 독재자'란 이미지도 잃어버렸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 동안 공금을 횡령하고 무기 밀수출을 통해 2600만 달러를 빼돌렸고, 그 돈을 레드 폭스라는 코드명으로 125개나 되는 차명 계좌에 분산해 미국 워싱턴시에 본점이 있던 릭스은행에 보관했다. 그런데 9.11 테러가 발생한 뒤 미국 안 은행들에 은닉되어 있던 외국 테러단체의 자금을 미국 상원이 조사하던 중 피노체트의 비자금이 드러났고, 이 중 800만 달러가 5만 달러짜리 수표 다발 형태로 칠레로 재반입된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피노체트가 빼돌렸다고 확인된 돈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60억 원 정도. 하지만 피노체트는 이번에도 3,500달러의 보석금으로 가석방되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물론 계속해서 비리행위는 캐도 캐도 나오고 있는데, 피노체트의 아내 루시아 이리아르트는 탈세로 두번이나 구속되었고, 피노체트의 다섯 자녀들도 공금횡령 등으로 조사를 받았다.
[image]
피노체트의 수많은 미국 은행 계좌 중에서 일부 문서들.
5. 죽음
[image]
이후 2006년 심장 질환으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은''' 12월 10일 "세계 인권 선포일"이었다.''' 칠레 정부에서는 피노체트의 국장은 불가함을 밝혔고 따라서 국가애도일 선포나 조기 게양도 없었다. 다만 병영에서 조기를 게양하는 건 막지 않았고 전직 군사령관이었으므로 군장을 치르는 건 허락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첼 바첼레트는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건 양심에 위배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바첼레트 대통령의 아버지는 피노체트의 군사정권 때 감옥에 끌려갔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5.1. 장례식
그가 죽었을 때 칠레 현지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image]
민주화 세력과 이들의 지지자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고,
[image]
피노체트의 지지자들은 침통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칠레 전역에 방송을 통해 알려지자 피노체트가 입원한 병원 정문 앞에는 경찰 수십 명이 배치되었고, 정문 앞 인도에는 시민 수십 명이 피노체트 사진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고 하는데 그들은 피노체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피노체트 사진 위에 ‘INMORTAL’(불사)라는 글씨를 보이면서 이들은 피노체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신으로 믿고 있었다고 취재진들은 증언했다. 병원 정문 앞 잔디밭에는 장기간 취재할 마음을 먹었는지, 칠레 취재진들이 아예 짐을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취재진의 병원에 출입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취재진들은 피노체트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출입하면 모두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갔으며 이런 지루한 기다림 끝에 피노체트가 그날 정오에 사망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위독하다는 방송이 처음 나갔던 이틀 전과는 달리 병원 앞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으며 병원 주변은 아예 이동하는 것이 차단됐다, 심지어 기마경찰까지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들이 계속 불어나는 인파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대부분 칠레 국기와 피노체트의 사진을 들고 병원 앞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고마워요, 피노체트’라고 쓴 피켓을 든 여성들과 ‘고마워요, 나의 장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궁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피노체트의 죽음을 환영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고 거리 곳곳에서 타이어나 나무를 태우거나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이후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열리던 12월 12일 산티아고 거리는 시위로 인한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평온했으며 오전부터 대통령궁인 ‘모네다’ 앞에서 공산당에서 주최한 피노체트 사망 축하 집회가 열렸다. 약 5천 명의 인파가 모네다 광장을 가득 메웠는데 그들의 상당수는 칠레 공산당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었다. 피노체트 집권 시기에 칠레 공산당은 피노체트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였는데,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은 뒤 죽인 공산당원 수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며 피노체트 정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늙은 공산주의자들의 표정에서는 죽어갔던 동료들로 인한 슬픔이 배어있었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집회가 끝나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피노체트의 사망을 축하하는 춤판을 벌였고, 그 와중에 칠레의 육군군사학교에선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군인장’으로 치러졌다. 많은 군인들이 여전히 피노체트를 군의 최고지휘자로 예우하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약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칠레의 국방장관이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국방장관에게 야유를 퍼붓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정부가 국장을 거부한 것에 몹시 분노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장례식 도중에는 피노체트의 가족들이 나와 피노체트를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시체는 화장되었다. 반달당하는 게 걱정된다는 유족들의 요청에 의해서.
6. 평가
전체적으로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 내지 전두환 대통령과 유사한 평가를 받는다. 독재를 겪었던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과거의 독재자들을 옹호하고 지지하거나 싫어하듯이 어쨌든 칠레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남긴 사람이라 지금도 칠레 사람들 사이엔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1989년부터 2009년까지 누에바 마요리아(중도좌파연합)이 계속 집권했고, 2013년 다시 재집권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는 피노체트를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41] 공산주의를 막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는 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민주적 권리가 봉쇄되고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다.
피노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노체트를 '타타', 곧 할아버지라 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페로체트'(perrochet, 개XX 피노체트)라 한다. 괜히 이 이야기 칠레 사람들 앞에서 꺼냈다가 말다툼 일어날 수 있으니 꼭 이야기 하고 싶다면 사람 봐 가면서 하도록 하자. 피노체트가 독재자라는 이야기만 전해들은 한국 관광객이 칠레 식당에서 영어로 피노체트 험담을 했더니 곧바로 그 사람 멱살을 잡으려는 사람과 틀린 말도 아닌데 왜 이 사람 갖고 그러냐고 관광객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동시에 나타났다고(...).
7. 대중매체에서
피노체트의 집권기는 칠레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수많은 이들이 죽고 또 사라진 만큼 그 시절을 조명하는 영화 및 드라마는 군부정권 당시[42] 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과 비슷한 위치. 프란시스코 프랑코처럼 자국 뉴웨이브를 작살낸 사람이기에 당연히 언급되면 엄청나게 까인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영화로 1975년작 프랑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칠레인 감독 헬비오 소토가 감독했으며 쿠데타 당시의 학살도 제대로 다루고 있다. 위에도 언급한 빅토르 하라가 죽는 장면도 나온다.
또 다른 영화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1982년작 의문의 실종(Missing)이 있다. 아카데미 각본상, 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젊은이가 칠레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 됐기에 아버지가 찾으러 왔는데 쿠데타 군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 강력히 의심되는 상황에서 미국 외교관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대충대충 덮으려고 한다. 이는 칠레와 미국 간 협약으로 미국인일지라도 칠레에 반정부 활동을 하는 건 미국에 반기를 드는 것이므로 당연한 수순. 결국 아들의 사인은 밝혀내지 못한 채로 시체를 관에 담고 공항에서 출발하면서 아버지는 미국 외교관에게 "당신을 반드시 고소하겠다."라고 일침을 놓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는 실화를 기초로 제작되었으나 범인은 여태껏 밝혀지지 않다고 최근에서야 전모가 드러났다. 뉴스 미군, 정확히 말하자면 미 해군의 데이비스 대령이 살해 사건의 종범(從犯)이었던 것(...).
2010년대에 제작된 영화로는, 2012년에 나온 칠레 영화 파블로 라라인의 <NO>와 2016년에 나온 독일 영화 콜로니아가 있다. NO는 윗단락에 기술된 피노체트의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있었던 반대투표 광고 캠페인을 소재로 삼은 정치픽션 영화이고, 콜로니아는 피노체트 정권 시절 사이비 종교집단과 결탁하여 반정부 인사들을 수용했던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바탕의 영화. 칠레 뉴웨이브의 일원이자 아옌데 정권의 지지자였던 파트리스오 구스만 역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와 자개 단추에서 칠레 원주민들을 주 소재로 피노체트 정권의 악행과 피해를 담담히 고발하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독재정권 당시 칠레 상황을 우화 형식으로 표현한 Bear Story라는 제목의 단편 3D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2016 오스카상 단편 애니메이션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감독 Gabriel Osorio는 오스카 수상소감에서 "1973년 체포되어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 밝혔다.
8. 기타
피노체트의 딸은 아버지 피노체트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는 70세의 나이임에도 친 피노체트 세력들을 이끌며 정치를 하고 있으며 2006년 피노체트의 장례식에서는 "아버지는 자유의 불꽃을 태우셨다"고 찬양했다. 그녀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려다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포기했지만, 산티아고시 비타쿠라구의 구의원을 지냈다.
쿠데타 직후 연설 중 피노체트 가라사대:
정권탄압에 대해 피노체트 가라사대:지금까지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피노체트 가라사대:이게 '''독'''재라고? 천만에, 이건 바로 '''순'''재(dictablanda)란 말이오![43]
이 말고도 수많은 베리에이션이 존재한다.꼼짝마라! 내 허락 없인 낙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다!
(마당 앞에 심어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지 않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음.)
또한 피노키오라고 까이기도 했다. 그의 주옥같은 망언이 나올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연출도 빠지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죽은 날에 조기를 달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피노체트 찬가도 있다. 곡명은 Mi General Augusto Pinochet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6sSRO1CnKLc 심지어 이걸 집회에서 연주하기도 한다(...)
피노체트 정권 전과 후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피노체트 전에 길가의 빈민층 아동한테 돈을 주면 그걸로 우유를 사먹었는데, 피노체트 이후 길가의 빈민 아동에게 돈을 주니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8.1. '무상 헬리콥터 탑승' 드립(Free Helicopter Rides)
미국의 대안 우파들이 가끔 "헬리콥터에서 빨갱이를 던지기" 드립을 치고는 하는데, 이는 피노체트가 칠레 공산주의자 등 정치범들을 헬리콥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 생수장한 것에서 유래했다. 피노체트의 정적 처형 방식이 대안 우파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정착된 계기는 pol(4chan)에서 버니 샌더스 지지자의 게시판 도배에 반감을 가진 대안 우파 4chan유저들이 '저 샌더스빠 헬리콥터에 태워주자'라고 말한게 그 시작이면서 각종 좌파, SJW, 버니 샌더스를 헬리콥터에서 내던지는 합성 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안 우파 네티즌들이 티셔츠 주문제작 사이트에 수주 혹은 자체적으로 제작한 티셔츠들중에 이 밈을 차용한 티셔츠도 만들었는데, Free Helicopter Rides 수제 티셔츠가 아마존닷컴에도 팔려서 물의를 일으킨 끝에 아마존닷컴에서 부랴부랴 해당 티셔츠 판매 페이지를 내렸다. 관련기사
한국에서 자유의새벽당 같은 우파들이 말하는 무상북송[44] 드립과 일맥상통한다.
[1] 원문은 Muchas veces la democracia ha de ser bañada en sangre. 로 추정됨[2] 물론 이건 공식조사의 수치고,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다.[3] 다만 볼리비아에서는 군부독재자였던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가 선거를 통해 복귀한 적이 있기는 했다. 1970년대 볼리비아가 여러 명의 군사독재자들이 쿠데타를 수시로 일으키던 혼란스러운 시기였기는 해도 경제적으로는 자원값 상승으로 그나마 제법 윤택했던 시기였었기 때문에 향수가 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대에 직면한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에보 모랄레스 집권 이후로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없던 링이 되다시피했다.[4] 정확히는 브르타뉴계와 바스크계 이민자 집안 후손이다.[5] 흥미롭게도 자신이 훗날 무너뜨린 사회주의 정권의 수장인 살바도르 아옌데도 역시 같은 발파라이소에서 피노체트보다 7년 앞서 태어났다.[6] 남아메리카에 대한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못마땅하게 본 미국이 지원을 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물증이 하나둘씩 나오고, 거의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살바도르 아옌데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7] 여담이지만 이때 사용된 호커 헌터 전투기들은 몇년 후 죄다 앉은뱅이 신세가 되었다. 1974년 전투기에 탑재된 Avon 엔진 오버홀을 위해 스코틀랜드 이스트 킬브라이드의 롤스로이스 plc 공장으로 엔진을 선적했는데, 이 엔진이 칠레 공군용인 것을 알아챈 공장 노조원들이 '''살인마에게 엔진을 공급하지 않겠다'''며 엔진 수리를 거부했고, 대충 나무 상자에 쑤셔박은 다음 공장 마당에다가 비닐 덮개도 없이 방치해 둔 것. 그렇게 칠레로 배송되었어야 할 엔진들은 구질구질한 스코틀랜드의 기후 아래에서 장장 4년간 숙성(...)되는 신세가 되었고, 이후 영국 정부가 몰래 빼돌려 가져다 줬지만 사실상 수리 불가판정이 나왔다. 결국 피노체트는 1982년 마가렛 대처 정부 시절 포클랜드 전쟁을 지원한 댓가로 중고 헌터를 몇 대 넘겨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당시 수리 거부를 주도한 노조원들에게는 칠레 정부가 2015년 훈장을 수여했다.[8] 이 사람은 아옌데의 지지자였으니 피노체트 정권에서 반역자로 찍혔다. 끌려가서 3일뒤에 산티아고 공동묘지 바깥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손가락이 전부 뭉개졌으며, 잔혹한 고문 흔적과 44발의 총상이 온몸에 남아있었다.[9] 정황상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10] 1975년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체포돼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풀려났던 사람이다.[11] 망명지인 스웨덴에서도 미국과 칠레의 협박도 그렇고 냉전시대다 보니 스웨덴 정부는 당연히 받아줄 리가 없었다. 스웨덴 주재 칠레 대사관 직원들과 칠레정부에서 파견된 DINA, CIA 칠레지부, 스웨덴지부 직원들, 인터폴에 의해 쫓긴 적이 있었고 이들을 피해 계속 숨고 도망다녔다. 스웨덴 전역에 지명수배된 건 당연. 1986년에 스웨덴 정부에 의해 본국으로 추방되었다.[12] 피해자들은 칠레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10대 사진가 로하스였는데 로하스는 이 사건 이후 나흘 만에 숨졌다. 또 한 명의 피해자인 퀸타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수차례 대수술을 받은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2015년 현재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13] 같은 군부 독재 정권이라도 아르헨티나는 많은 부분에서 칠레보다 딸렸다. 집권 기간도 칠레의 반이 채 안 되었고, 영토를 공식적으로 상실하다시피 했으며, 피노체트의 경제정책은 민주 정부에서도 이어나간 것과 달리 아르헨티나는 그냥 경제가 망했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평생 잘 먹고 잘 산 반면, 아르헨 군부 정권 관계자들은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14] 경찰에 끌려간 뒤 사라진 사람.[15] 일명 '콘도르 작전'으로 불린다.[16] 참고로 당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해있었다. [17] 1982~2007년 칠레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대략 6%로 남미지역 평균 성장률인 2.8%를 훨씬 능가한다.[18] 이 당시 재정부 장관은 시카고 학파였다. 그러나 정작 프리드먼을 위시한 다른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고정환율제를 반대했고 변동환율제 이행을 촉구했다. 이는 80년대 이후 이루어졌는데 이 때는 경제가 잘 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시카고 학파의 주문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한 사람은 시카고대 출신이 아니라 케임브리지대 출신 재무장관이었다. 미국의 볼커도 그랬지만...[19] 정책 미스 탓도 있고 더 결정적으로 폴 볼커 실험으로 달러 가치가 폭등하면서 달러 부채를 진 남미 국가들이 전부 다 부채 위기에 시달린 탓에 남미 지역에 엄청난 경제위기가 불었다. 1979년~1983년 칠레의 무역은 27% 감소했고, GDP는 15% 증발했다. 그러나 볼커 전에도 군사정권이 경제를 통제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펼친 결과[18] 1975년에는 공업 생산량이 26% 감소했다. 게다가 볼커 실험의 경우에도 칠레가 다른 남미 국가보다 훨씬 더 막장이였다. 다만, 칠레의 산업이 전반적으로 구리 등 천연자원 등의 생산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공업 생산량 감소가 그다지 나쁜 건 아니다. 그리고 GDP PPP 통계를 보면 알지만 칠레의 GDP PPP는 70년대 초반 아옌데 시기에 마이너스를 찍었고, 피노체트 집권 이후 남미 외채 위기 이전까지는 남미 평균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20] http://www.forbes.com/sites/realspin/2013/10/28/is-this-the-end-of-the-chilean-economic-miracle/[21]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의 경우 피노체트와 시카고 보이즈들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다.[22] 복지가 경제 성장에 일률적으로 무슨 영향을 주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실증분석이나 개별 정책마다 다 다르니 뭐라 하기는 어렵다.[23] 구체적으로 집권 초기에는 누진세제 등이 도입되었으나 점차 그 세율은 인하되었다. 다만 경제성장 덕에 세수는 줄지 않았다.[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222583 사이트로.[25] 그 이전에는 시카고 보이즈들보다는 통제를 좋아하는 군측 인사들이 정책을 주도했다. 70년대에도 재무부 장관은 시카고 보이즈였기는 했으나 정작 밀튼 프리드먼 등 시카고 학파 네임드들이 하지 말라는 고정환율제 등을 밀어붙이는 등 삽질을 했고, 재무부 장관이 갈리고서 시카고 학파의 주문대로 변동환율제를 실시하자 이 때는 경제가 잘 굴러갔다. [26] 라구람 라잔이 폴트라인에서 70년대의 모국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어거지로 수입대체화 전략을 취해 중공업을 보호하려 했던 자국의 경제현실을 지적했었다.[27] 차베스와 마두로가 석유 의존 경제를 어설프게 탈피하려 했다가 나라만 거하게 망친 최악의 사례.[28] 사실 이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인데, 이 전쟁으로 인해 볼리비아는 해안과 접하는 자국 영토를 잃고 내륙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29]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 출범한 민주정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충분히 내보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중남미에서 엄청나게 까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경제적인 지원을 보내주기는 주었는데 그것이 '''구조조정과 시장 자유화'''을 대가로 지원을 보내준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정책을 펼친 대가로 빈부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되려 늘어나서 빈민층들은 상당기간 동안 민주화의 혜택은커녕 그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누려야했다. 물론 미국은행들이 중남미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고이율로 빚을 못갚게 되면서 여러모로 채권회수가 난감해져있던 참이고 미국정부 자체도 대규모 감세로 인해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던 때라서 여유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 군사독재정권 때 좌파 때려잡으라고 대대적인 경제적인 지원을 내보냈던 걸 생각하면 까일 수밖에 없었기는 했다.[30] 훗날 사제직에서 은퇴하고 1999년 4월 9일 라 플로리다에서 91세로 사망했다. 이에 칠레정부는 5일간의 국가적인 애도를 선포하고 2000년 500페소 주화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어 그의 위대한 삶을 기리도록 했다. 현대 국가에서 성직자가 국민의 동의를 받아 화폐의 주인공이 되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31] 피노체트가 만든 헌법에 따른 것이다. 칠레는 사실 아직도 상당 부분 피노체트 헌법을 따르고 있다. 이는 반 피노체트파가 20년간 장기집권했어도 의회 개헌선까지는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교하긴 어렵지만 이탈리아도 전임 대통령이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 대통령은 의원내각제라는 국가 특성 상 국군통수권과 국회 해산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하다.[32] 1973년과 1979년 사이에 저지른 정치 범죄를 모조리 사면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사면한 것이다![33] 1970년대 초반 당시에는 우파정권의 당수로서 좌파계정당 지도자였던 아옌데의 정적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지만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되자 정치적민주화를 요구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피노체트와 각을 세우게 되었다.[34] 우리나라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이 났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87년, 1992년 대선 당시 "군의 김대중 비토설"이 많이 흘러나왔다는 점을 보면, 김영삼이 1994년~1996년 사이 하나회와 민정계를 아예 숙청시킨 것이 정의구현뿐만 아니라 문민통제 확립이라는, 신의 한 수가 된 셈.[35] 1976년 7월 칠레 민주화 운동을 돕던 스페인 국적 유엔 직원 카르멜로 소리아를 DINA(칠레 보안군)이 납치해서 고문살해한 뒤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사망으로 꾸며 시체를 유기했다.[36] 2009년 이전까지 영국은 귀족원(상원)이 대법원의 역할도 수행했다.[37] 당시 전 세계의 인권운동가들은 사악한 국가 지도자들이 더 이상 자신이 조작한 법률 뒤로 숨을 수 없게 되는 선례가 생기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칠레의 좌파들도 "잘됐네. 이대로 영원히 칠레에 돌아오지 마라"라는 입장이 대다수였다. 다만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리카르도 라고스는 독재자를 우리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현실에 한탄하였다고 한다.[38] 이런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피노체트의 칠레는 중립이였지만 개전초 아르헨티나군의 공습 출격을 영국에 알려준다거나 영국 전투기 폭격기 편대가 칠레 공군기지에 대기하도록 허용해 아르헨티나 공군전력을 분산한다거하 하는등의 지원으로 영국이 승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피노체트와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체포당시에는 블레어의 노동당이 집권기에 체포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시 석방되었다.[39] 독재이후 99년까지는 기독사회당 00년부터 09년까지는 사회당이 집권하던 시기이다 두당 모두 중도좌파성향의 당이지만 군을 중심으로 하는 피노체트의 세력은 당시에도 막강한 권력을 유지중이였고 군뿐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큰 지지 세력을 보유중이였다. 그 권력은 피노체트 사망까지도 이어지고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도 그유족들과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이어지고있다.[40] 다만 재판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치매가 심하다면 그의 종신상원의원 자리도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사면과 권력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없었던 피노체트는 결국 종신 상원의원을 사임했다.[41] 위대한 칠레인 목록에서 피노체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1등을 차지한 반면, 피노체트 본인은 순위권 밖에 있으니, 실제로 칠레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4위와 9위를 차지한 빅토르 하라와 파블로 네루다도 반피노체트 운동을 펼쳤다.[42] 물론 칠레 본국에서 제작할 수는 없으니, 해외에서 제작된 매체물이 대부분이다.[43] 스페인어로 독재는 dictadura인데, 여기서 dura는 단단함이란 뜻도 있다. 말끝의 dura를 blanda(부드러운, 온순한)로 바꾼 말장난이다.[44] 한국 급식/전면 무상급식 논란이 일어나면서, 진보정당의 무상정책에 대한 반발로 '무상'이라는 말을 가지고 우파 네티즌들이 "그러면 우리도 저 좌빨들 무상으로 (토사구팽당해 아오지로 죽든 말든간에) 북에 보내버리자" 비꼬는 것이다. 꼬북이와 비슷해보이지만 꼬북이는 '꼬우면 니가가라 북한'이지만 무상북송은 '북한으로 내쫓자'는 뉘앙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