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스티안 피녜라

 

'''역대 칠레 대통령'''
[image]
33대

34대

35대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미첼 바첼레트
35대

36대

현직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
'''칠레 제34/36대 대통령
Sebastián Piñera'''
'''본명'''
'''Miguel Juan Sebastián Piñera Echenique
미겔 후안 세바스티안 피녜라 에체니케'''
'''출생일'''
1949년 12월 1일 (75세)
'''출생지'''
칠레 산티아고 지방 산티아고
'''국적'''
칠레 [image]
'''학력'''
Verbo Divino 고등학교[1] (졸업) (-1967년)
칠레 교황청 카톨릭대학교 (공학 / B.S.) (1967-1971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배우자'''
세실리아 모렐 (1973년 결혼)
슬하: 2남 2녀
'''약력'''
태평양 동맹 의장
칠레 상원의원
국민혁신당 대표
'''칠레 제34/36대 대통령'''
'''정당'''
'''국민혁신당''']] (1989년 - )
'''재임기간'''
2010년 3월 11일 ~ 2014년 3월 14일
2018년 3월 11일 ~
'''직업'''
정치인, 공학자, 교수
'''서명'''

'''SNS'''

1. 소개
2. 생애
3. 정치 활동
4. 대권 도전
4.1. 1차 도전 (2005년)
4.2. 2차 도전 (2009년)
4.3. 3차 도전 (2017년)
6. 비판
6.1. 사고 공화국
7. 기타


1. 소개


칠레의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34대 대통령을 지냈고 36대로 다시 취임했다. 기업인, 그것도 억만장자라는 점 때문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비교되며 특히 "칠레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범군사정권계 인사이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2018년 3월 11일에 재취임하였다.

2. 생애


1949년 산티아고바스크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피녜라 카르바요가 기독민주당 출신의 유력 정치인이었는데 본디 직업은 엔지니어로 재정적인 힘이 센 집안은 아니지만 대통령만 무려 4명을 배출한 에라수리스 가문과 더불어 칠레의 대표적인 바스크계 정치가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형인 호세 피녜라도 유력 정치인이다.
언급했듯이 스페인계의 한 갈래인 바스크계 출신이므로 혈통상으로는 전형적인 유럽계 백인 집안이기는 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메스티소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먼 조상으로 전 대통령인 아니발 핀토 가르멘디아와 그의 아버지인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가 있는데 잉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와이나 카파크와의 고리가 있기 때문.
물론 잉카와의 연관성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이며 후에 스페인 혈통의 백인 피가 잔뜩 섞인 지금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당장 얼굴만 봐도 페루볼리비아 등에 흔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같은 생김새는 아예 드러나지도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이 칠레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각국에 꽤 많은데 이들은 '''카스티소'''라 불린다. 칠레가 메스티소가 대부분이라고 할때 메스티소는 여기서 백인 혈통이 압도적인 카스티소를 뜻한다.
태어나자마자 집안이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했고, 이후 아버지가 국제연합 대사로 임명되면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1955년 금방 칠레로 돌아왔고 가톨릭계 남자 고등학교인 베르보 디비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교 졸업 후에는 칠레 교황가독대학을 졸업했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에는 교수로 활동하다가, 은행 및 방송사, 항공사[2] 등을 운영하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그 후 2009년2017년 선거에서 둘 다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현재 대통령에 재직 중이다.

3. 정치 활동


1980년대 후반 아버지를 따라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때마침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에 지친 국민들의 반발 속에 1988년 피노체트 정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시행되었는데, 부친이 속한 기독민주당이 "아니오(NO)" 진영에 서면서 본인도 아니오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후 기독민주당 후보로 나선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타글레를 지지했다. 사실 루이스타글레가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전 대통령의 아들인데다, 피녜라의 아버지가 프레이의 지원을 많이 받았던 것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연대 단일 후보로 파트리시오 아일윈이 선출되면서 루이스타글레는 자연스레 낙마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틈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도 결과를 인정하고 아일윈을 밀어줬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으나... 끝내 불복하고 범여권 단일후보로 나간 에르난 뷔히를 지원하면서 변절한 것. 뭐 누구를 지지하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나, 이러한 피녜라의 태도가 철새행각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후에는 범여권계 정당인 국가재개발당에 입당하면서 우익 인사로 변신한다. 1993년 대선에서는 자당연합인 민주진보연합의 대통령 후보인 에벨린 마테이를 지지했으나, 일명 "피녜라 게이트"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 스캔들로 정치적인 위기를 맞이하였고, 마테이는 결국 출마하지 못한 채 사퇴하였다. 결국 한동안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할 뻔했으나, 금방 복귀했고, 1998년에는 피노체트 전 대통령의 구속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1999년 대선 때는 자당연합 독립민주연합의 호아킨 라빈 후보를 지지했으나, 여권연합의 리카르도 라고스 후보에게 패했다.

4. 대권 도전



4.1. 1차 도전 (2005년)


이후 우파 정치인으로서 꾸준히 활동하다가, 2005년 5월 14일 차기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철학으로 기독교 인본주의를 강조했고, 곧바로 야권연합(민주화를 위한 정당 협력체, 콘세르타시온)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야권연합의 인기가 매우 높았고, 이 연합의 후보인 미첼 바첼레트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각계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리면서, 피녜라는 제대로 된 지지를 받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국가재개발당이 커다란 병크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본인들의 연합에 소속되어 바로 지난 대선에 나갔던 라빈을 '''제 발로 걷어찬 것'''. 당초 국가재개발당은 라빈을 지지하기로 했으나, 내부 갈등이 문제를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라빈이 축출되었는데 오히려 본인들이 매우 바보같은 자살을 한 것이다.
덕택에 우파 표심이 분산되면서 본선에서 2위를 했고, 이후에도 양측 간의 앙금을 걷지 못하면서 결선에서도 끝내 떨어졌다. 특히 라빈측 지지자들 중에서 바첼레트로 이동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4.2. 2차 도전 (2009년)


하지만 바첼레트 정권은 순조롭게 나아가지를 못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콘세르타시온(=야권연대)의 통치에 국민들이 서서히 질리기 시작하면서 피녜라는 이를 반등의 기회로 노렸다. 그러나 바첼레트의 지지율이 무사히 안착하면서 이 기회도 잠깐 가라 앉는다.
대통령 임기가 6년에서 4년으로 축소되면서, 당초 2011년에 예정되어 있던 대선 또한 2009년에 치뤄지게 되었다. 피녜라는 어김없이 다시 도전하겠다고 출마 의사를 밝혔고, 이후 국가재개발당의 후보로 다시 선출되었다.
바첼레트는 '연임 금지' 조항에 의거하여 이번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바첼레트의 지지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막상 대안 후보를 찾는 것인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각계의 유력 좌파 인사들이 속속히 출마하면서 표심이 갈라지고 말았다. 참고로 콘세르타시온의 후보로 선출된 것은 한때 피녜라가 지원했던 루이스타글레였는데, 이미 1994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을 지내면서 신선한 이미지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바첼레트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피녜라는 범여권 후보들의 분열 속에 어부지리로 본선 1위를 기록했고, 결선 때도 범여권의 결집 등이 변수가 되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결선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마침내 1990년 이후 20년 만에 우파 정권의 부활을 이끌었다.

4.3. 3차 도전 (2017년)


연임 금지 때문에 2013년에는 출마할 수 없었고, 대신 여권의 후보로 스캔들 때문에 말이 많았던 마테이 후보가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바첼레트 전 대통령이 다시 야권후보로 출마하여 재선했다.
하지만 바첼레트 정권 2기가 1기와는 달리 경제위기를 겪고 개혁도 지지부진한데다가 자기 아들이 비리를 저질렀다는것까지 밣혀지면서, 칠레 역사에서 튼튼한 기반을 자리잡았던 좌파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피녜라는 다시 차기 대권주자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기록했다. 거기다가 여권은 이번에도 수많은 후보가 나오면서 표가 갈라지게 생겼다.
피녜라는 개편된 나아가자 칠레여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콘세르타시온을 개편한 신주류알레한드로 기이에르 등을 상대하게 되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며 당초 40% 정도의 득표율이 예상되었으나, 애초에 여론조사에서 범여권 지지자들의 기권에 의한 거품 효과가 원인이 되면서 본선에서는 예상보다 부진한 36% 정도를 득표했고, 총선에서도 과반에 실패했다. 거기다가 본선에서 또다른 범여권 후보인 베아트리스 산체스가 무섭게 상승세를 탔을 정도였으니...[3]
이후 2위를 기록한 기이에르와 맞서게 되었는데, 안그래도 3위로 탈락했지만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던 산체스가 대놓고 기이에르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타 범여권 후보들도 잇따라 기이에르 지지를 선언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당장 피녜라를 제외한 범야권 후보는 무소속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 하나 뿐이었고, 설상 카스트가 피녜라 지지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선 득표율들을 단순 합계할 시 범여권이 과반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하는데 단순 합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더욱이나 피녜라는 정치 경력이 자그마치 '''30년'''인데다 리더십 검증이 충분한 기업인이었지만,[4] 기이에르는 2013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겨우 '''4년'''차 밖에 안 되는, 사실상의 신인이었으며 출신 직업도 리더십을 검증하기 어려운 방송인이었다.
결선 결과 피녜라는 54%를 득표한 반면, 기이에르 후보는 45% 정도를 득표해 피녜라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이로서 우파 정권은 4년 만에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며, 2018년 3월 11일 공식적으로 재취임했다.

5. 2019년 칠레 반정부 시위


하지만 야심찬 복귀에도 불구하고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을 올리려다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9년 칠레 반정부 시위 문서 참고.
시위의 여파로 지지율이 크게 하락하여서 2020년 1월에는 지지율이 10%까지 떨어졌으며, 같은 조사에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무려 82%에 달했다. #
나중에는 지지율 6%까지 더 떨어졌으며, 연금제도 개편안에 나선다.#

6. 비판


초기에는 재야 민주진영계 인사였지만, 후에 변절해 범군사정권계 인사로 돌변한 것은 현재까지도 큰 비판을 받고 있고, 여러모로 비리를 많이 저질른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1기 집권기때 여러모로 스캔들이 많이 벌어진데가 칠레사회의 문제점도 해결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13년 대선에서 우파후보가 꼴랑 37%의 득표를 얻는데 한 몫하기도 했다. [5]
거기다가 대통령 1기 시절 몇 마디 언행이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한번은 연설 중 mare'''m'''oto를 mare'''p'''oto라고 잘못 발음하는 실수를 저질렀다.[6] 그런데 한국어로 굳이 옮기자면, "'''지진'''해일"을 "'''궁디'''해일"이라고 잘못 발음한 꼴. 이는 현재까지도 대표적인 개그 소재로 손꼽히고 있으며, 유튜브에 marepoto라고 치면 관련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로빈슨 크루소 섬을 방문하면서 "여기가 바로 로빈슨 크루소가 살았던 데 맞죠?"라고 말해 비웃음을 샀는데, 페이스북에 이 글을 올린 뒤 좋아요가 '''0개'''(...).

6.1. 사고 공화국


흔히 피녜라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하고 비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애초에 트럼프는 군사친화적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군부독재 세력이 미국에 애초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철저한 정치적 아웃사이더 이미지로 승부를 하는 포퓰리스트이다.[7]
반면 피녜라는 중남미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가문 출신에 철두철미한 인사이더 엘리트이며, 정책 방향성도 권위주의적일지언정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캐릭터 자체가 서로 다른 인물들을 가지고 내외신 보도 가릴 것 없이 표피적인 비교를 하며 언론꼭지에 칠레의 트럼프, 남미의 우경화, 금권정치 대세 이런 문장을 쓰고 있다.
선거기간 전후의 경제적 현실 및 원자재 가격 하락에 대한 여러 분석들 또한 영미권 기사를 거진 대부분 복사한 것도 특기할 점.
사실 요즘 세계 언론의 보도가 사후적 결과를 가지고 그것의 원인이 된 인과관계의 선후를 뒤집는 보도나 그것의 맥락없는 표피적 분석을 자주 하기는 하지만[8] 이 경우는 너무 심했다(...). 애초 우파 성향임을 빼고는 두 사람 사이에는 별 공통점이 없는 편이다. 다만 공통점이라면 둘다 성공한 비즈니스맨 출신이라는 것이다.
의외로 김영삼하고 공통점이 많은데, 한때는 민주화 인사였으나 후에 군사정권과 손잡아 권력을 잡았다는 점이 그렇다. 그 외에도 비슷한 점이 다름아닌 '''사고 공화국'''인데, 피녜라는 더더욱이나 취임하자마자 온갖 사고를 직면하면서 심히 곤란했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가 도중에 넘어졌는데 이 장면이 찍힌 뒤로 네티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7. 기타


의전차량으로 제네시스 G90을 이용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때는 2번이나 방역수치를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1] Colegio del Verbo Divino.[2] 당시에는 브라질 소재 TAM이랑 통합하기 이전의 LAN CHILE였다. 1994년부터 최대 주주가 되었다.[3] 물론 그래봤자 의미는 없었다. 3위를 기록해 본선에서 탈락했기 때문에.[4] 기업이나 국가나, 어디까지나 모종의 '''조직'''이다. 이런 조직 경영 능력이 없으면 가장 간단한 집안의 가장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5] 다만 이건 미첼 바첼레트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일이기는 하다.(...) 사실 칠레는 20년간 중도좌파가 장기집권하기는 했다만 그 기간 동안 피노체트때의 경제정책을 부분적인 수정만 하고 그대로 간 것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젊은층에서 그놈이 그놈이라며 정치혐오 정서가 강한 편이고 투표율도 많이 낮다.[6] 사실 /m/과 /p/를 헷갈려 발음하는 말실수는 이 사람 외에도 저지른 사람이 종종 있다. M은 두 입술을 붙였다가 '''코로 숨을 흘려보내며''' 입술을 떼는 유성 양순 비음 /m/이고, P는 두 입술을 붙였다가 '''입 안의 공기를 터뜨리며''' 입술을 떼는 무성 양순 파열음 /p/으로. 두 발음은 '''조음 방법을 제외한 모든 성분이 동일하다.'''[7]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이전까지 정치 관련 발언을 한 적은 있어도 직접적인 정치활동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8] 세계 뉴스가 해당국가 및 지역권에 특파원을 별도로 두고 있지 않는 한, 개인 기자의 정보력 및 시사, 배경지식, 가치관, 입장에 기반을 두고 작성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회, 국내, 정치, 경제 보도 보다 심층적 취재 및 사실 인식의 미디엄으로서의 기능이 떨어지는 현실이기는 하다. 통신사 및 해외 속보, 단신, 기사를 주로 인용하는게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