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로드 페리
1. 소개
MLB 역대 최초로 양대리그에서 사이 영상을 수상한 레전드 투수이자, 라이브볼 시대 역사상 최고의 '''사기꾼'''이라 불릴만큼 악명높은 부정투구로, '''MLB 역사에 길이 남을 Cheater'''이면서 동시에 '''희대의 명투수'''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1] 또한 돈 서튼과 함께 60~70년대를 대표한 꾸준함의 상징이자 서튼과 마찬가지로 숨겨진 콩라인.
통산성적은 22시즌 동안 314승 265패, ERA 3.11, 5350.1이닝, 3534K, K/9 5.94, BB/9 2.32, K/BB 2.56, HR/9 0.67, 303완투, 53완봉을 기록했다.
형도 그 당시 뛰어난 투수였는데 1970년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상 수상자인 짐 페리가 그의 형이다.
2. 경력
2.1.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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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9만 달러의 사이닝 보너스로 계약한 페리는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회를 얻어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롱릴리프로서 206.1이닝을 던졌다. 1965년에는 다소 부진했지만 1966년 최초의 브레이크아웃 시즌을 맞아 전성기를 시작했다. 전반기에만 무려 12승 1패 2.51의 평균자책을 기록한 것. 그 결과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시즌 최종 21승 8패 2.99 ERA에 255.2이닝 13완투라는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로도 꾸준하면서도 화려하게 완투를 계속해 나가며[2] 자이언츠의 완투형 에이스 투수로 60년대를 지배했다. 특히 1970년에는 그간 승률이 영 좋지 않았다는 점을 뒤로하고 23승을 거두며 사상 첫 형제 동반 20승[3] 이란 대기록을 작성[4] 하기도 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2년 연속으로 320이닝 이상 투구'''를 하며 리그 최다 이닝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1971년 포스트시즌 NLCS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패퇴한 자이언츠는 포스트시즌에서 1승 1패 6점대 ERA로 부진(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이 되었다)했던 페리를 젊은 파이어볼러[5] 하나 얻자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했다. 그리고 자이언츠는 뒷목을 잡게 되었다.
다만 위 각주에 링크된 맥도웰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 트레이드 이전까지의 맥도웰은 인디언스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며 올스타 6회(1965~1966, 1968~1971), 1번의 평균자책점 1위(1965)[6] , 5번의 탈삼진 1위(1965~1966, 1968~1970)[7] 를 기록하는 등 오히려 페리보다 굵직한 기록들을 남겼다. 거기다 맥도웰의 나이는 페리보다 4살이 어렸던 28세였고, 두 선수가 풀타임으로 뛰기 시작한 1964년부터 1971년 간의 세이버 스탯을 비교해 보아도 맥도웰의 bWAR은 43.7(연평균 5.5), 페리의 bWAR은 37.0(연평균 4.8)으로 맥도웰이 한 수 위다. 페리의 장점이던 이닝 이팅 면에서도 맥도웰은 연평균 244이닝을 소화하며[8] 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즉 자이언츠가 페리를 트레이드한 것 자체는 나름 합리적인 선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트레이드 후에 맥도웰이 처참하게 무너져버려서 그렇지...
2.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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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페리는 무려 342.2이닝을 투구하며 24승 16패의 디시젼과 1.92의 ERA를 기록했다. 9이닝당 피안타 개수가 무려 6.6개! 그 결과 생애 첫 사이영상을 받게 되었다.[9][10]
페리는 3년 반 동안 인디언스의 유일한 에이스로 군림했다. 1974년에는 선발 15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 그러나 1975년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인 프랭크 로빈슨과 싸움을 벌였고, 1975년 중반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3. 저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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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레인저스에서 2년간 30승 26패를 거둔 페리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되어 나이 39세에 21승 6패 2.73 ERA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내셔널리그 역대 최고령 사이영 수상자가 됨[11] 과 동시에 역대 최초의 '''양대리그 사이영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하였다. 더불어 통산 3000탈삼진을 돌파하며 놀란 라이언, 스티브 칼튼과 함께 올타임 탈삼진 리더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페리는 레인저스로의 재트레이드를 요구하며 은퇴를 불사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결국 레인저스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돌아온 레인저스에서도 감독과의 충돌은 이어졌고,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4승 4패를 거두고 FA로 풀리게 된다. 페리의 남은 과제는 통산 300승 마일스톤.
그리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다시 300승 도전에 나서지만 11승이 남은 도전은 다음해 시애틀 매리너스에서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1982년 5월 6일, 얼리 윈 이후 20년만에 300승 마일스톤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해에 그는 3승 10패 4.94의 부진을 겪었고, 지명할당을 거쳐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다. 커리어 최종 314승 265패 3.11 ERA 5350이닝 3534탈삼진.
3. 피칭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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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투구의 절대달인이었다. 그야말로 커리어에서 부정투구를 절대 빼놓고 논할 수 없는 투수로, 경기 중간중간마다 신나게 만져대는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다만 실제로 부정투구를 한 것은 알려진 것보다는 적다고 한다. 침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부터 바셀린 등의 각종 기름을 발라 던지는 그의 부정투구는 수없이 몸수색을 당하는 등 수사의 선상에 올랐지만, 실제로 드러난 것은 단 한 번 뿐이었다.(은퇴 1년 전) 그는 자서전 ''Me and the Spitter''에서 실제로 부정투구를 한 적은 별로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써볼 것은 다 써봤는지, 소금과 후추, 초콜릿 시럽을 빼고는 다 이용해 봤다고.
페리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부정투구 의혹이 있던 돈 서튼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페리를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바셀린을 건내주었고, 나는 그에게 사포를 건네주었다."
실제로 1973년 페리가 그날따라 계속해서 머리 구석구석을 만져대자 뉴욕 양키스의 랄프 후크[12] 감독이 분을 참지 못하고 마운드로 돌진하여 모자를 벗겨서 집어던지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당연히 드러난 것은 없었다. 결국 이런 그의 부정투구 행각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부정투구 관련 규정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오히려 페리의 존재가 부정투구 퇴출에 있어 자극제가 된 셈.
그는 이런 부정투구 행위를 일부러 '''티나게''' 대놓고 자행하며 '''타자들을 혼란시켜 심리적인 우위를 가져갔다'''. 다시말해 페리의 경우 실제 부정투구는 다른 투수들처럼 은밀히 사용하였고 오히려 깨끗한 상황에서 마치 부정투구를 하는듯한 동작을 가져갔다고 볼 수 있다. 타자들은 이런 페리의 만져대는 행위에 치를 떨면서도 부정투구에 대한 물증이 없는(당연히 일부러 과장한 몸짓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에 속이 뒤집어졌다. 그 때문에 타석에서 오만가지 잡생각을 멈추지 못하며 페리의 강력한 싱킹 패스트볼에 스윙을 가져갔고 빗맞은 타구가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런 부정투구 외에도 싱커와 하드 슬라이더를 잘 구사했고 제구력이 뛰어난 이닝 이터 타입의 투수였다. 통산 300이닝 이상 소화 시즌이 6번이고, 11년 연속 200이닝 이상 투구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통산 5350이닝은 MLB에서 역대 6위이자 라이브볼 시대만 따지면 필 니크로, 놀란 라이언에 이은 3위에 해당한다. 또한 '''13년 연속 15승 이상 달성''' 기록은 사이 영의 15년 연속 기록에 이은 올타임 3위였다.(1위는 그렉 매덕스의 17년 연속 15승) 굉장히 꾸준한 이닝이터에 300승-3000K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돈 서튼과 자주 비견된다.[13]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측정하는 커리어 시믈러리티 스코어에서도 서로에게 가장 유사한 945점을 기록하고 있다.(둘 모두 2위도 버트 블라일레븐으로 같다.)
4. 명예의 전당
1991년, 77.2%의 낮은 득표율로 세번째 투표만에 헌액되었다. 부정투구로 악명을 떨쳤던 점이 안 좋게 작용하였다. 물론 여기서도 명예의 전당 플레이트에 바셀린을 붙여놔야 한다는 이 나오기도 했다.[14]
이후 2005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페리의 36번을 영구결번을 발표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Starting Pitcher (20th)
6. 이모저모
타격 실력은 투수답게 나빠서 "달나라에 사람이 가는 게 내가 홈런 치는 것보다 빠를 것이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을 밟은지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커리어 첫 홈런을 갈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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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로 은퇴한 뒤 바셀린 광고 회사의 모델을 한 바 있다. 광고에서 한 말은 '우리 제품은 아기의 몸을 부드럽게 해줍니다. 단 야구장에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로 게일로드라고 쓰기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지만 영어로는 Gay + lord이다. gay는 "명랑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번은 그의 가족들이 경기를 보러 왔는데 한 기자가 페리의 5살짜리 딸에게 '니네 아빠 지금 뭐 발라서 공 던지는거 맞지?' 하고 물어보자 5살배기 꼬맹이의 대답은 '아닌데요 '''하드 슬라이더''' 인데요'
캔자스시티 시절 조지 브렛이 파인타르를 과하게 묻힌 배트로 인해 홈런이 아웃처리되어 항의하는 사이에 심판에게서 배트를 뺏어간 적도 있다.
7. 관련 문서
[1] 기존에는 약물 혐의자들보다 더한 사기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런 평가를 받기에는 페리가 억울하다. 부정투구는 그의 이미지일 뿐 실제로 행한 것은 동시대 다른 투수들과 비슷하다는 게 정설.[2] 1968년에는 메이저리그 역대 길이 남을 시즌을 보내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밥 깁슨과 대결하며 노히트노런을 작성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페리가 노히터를 던진 바로 다음날 상대팀 카디널스의 레이 워시번이 자이언츠를 노히터로 침묵시키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한 시리즈 연속 2경기 노히터가 작성되었다.[3] 이 해 아메리칸리그에서는 24승을 거둔 형 짐이 사이 영상을 수상했다.[4] 1979년 필 니크로-조 니크로 형제가 다시 이 기록을 달성한다.[5] 샘 맥도웰. 트레이드 이후 4년 동안 19승 25패 방어율 4.16을 기록하고 32세로 은퇴했다.[6] 인디언스에서의 통산 평균자책점은 2.99로, 당시의 극 투고타저 성향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준수한 편이다. 이외에도 1968년에는 무려 '''1.8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나... '''1.12'''라는 '''라이브볼 시대 이래 역대 최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홍관조네의 어떤 괴수와 '''1.60'''의 평균자책점이었던 인디언스 팀메이트 루이 티안트(Luis Tiant)에 밀려 MLB 전체는 커녕 AL 평균자책점 타이틀 획득에도 실패.[7] 특히 1965, 1970년에는 '''300탈삼진'''을 달성했다.[8] 1970년에는 305이닝으로 AL 최다 이닝을 소화했다.[9] 빌 제임스는 페리의 1972년 시즌을 1931년 레프티 그로브 이래 아메리칸리그 투수 최고의 시즌이라 평가하였다.[10] 다만 부정투구 의혹 때문에 투표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너클볼러 윌버 우드에 불과 2표 앞선 9표를 얻어 수상했다.[11] 2004년 로저 클레멘스가 41세로 경신.[12] 1919-2010. 양키스 시절 요기 베라의 백업 포수였으며 양키스의 1961-63년 3년연속 리그우승과 1961-62년 2년연속 월드시리즈 제패 당시 감독이었다.[13] 서튼은 역대 투구이닝 순위에서 페리에 이은 7위를 기록하고 있다.[14] 악명에 비춰보면 세 번만에 입성한 것도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정투구만 없다면 당연히 첫 해에 헌액될 수 있는 성적이라 기자들도 외면할 수 없었던 듯... 또한 페리의 이 명전 헌액은 "부정투구는 약물 혐의와 마찬가지로 야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부정행위"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까임거리로 제공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