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모와케

 


御友別.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등에 나타나는 고대 일본의 인물로, 한국 한자음으로는 '어우별'이라고 읽는다. 그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높은 망대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봤다. 이때 비 예히메(兄媛)가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서쪽을 보면서 크게 한탄하였다.[원주]

『일본서기』 권10 응신천황 22년 3월 14일 조

다시 하다(葉田)의 아시모리노 미야(葦守宮)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미토모와케'''가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카시하데(膳夫)로서 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덴노는 미토모와케가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키비노 쿠니를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카하시마노 아가타(川嶋縣)를 나눠서 큰아들 이나하야와케(稻速別)에게 주었다. 그가 시모츠미치노 오미(下道臣)의 시조다. 다음으로 카미츠미치노 아가타(上道縣)를 둘째 아들 나카츠히코(仲彥)에게 주었다. 그가 카미츠미치노 오미(上道臣)와 카야노 오미(香屋臣)의 시조다. 다음으로 미노노 아가타(三野縣)를 오토히코(弟彥)에게 주었다. 이가 미노노 오미(三野臣)의 시조다. 또 하쿠기노 아가타(波區藝縣)를 미토모와케의 동생 카모와케(鴨別)에게 주었다. 이가 카사노 오미(笠臣)의 시조다. 그리고 소노노 아가타(苑縣)를 그의 형 우라코리와케(浦凝別)에게 주었다. 이가 소노노 오미(苑臣)의 시조다. 다음으로 하토리베(織部)를 예히메(兄媛)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키비노 쿠니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일본서기』 권10 응신천황 22년 9월 10일 조

요약하면 미토모와케는 오진 덴노의 처남이다. 형은 우라코리와케, 남동생은 가모와케, 여동생은 오진 덴노의 후궁인 예히메, 장남은 이나하야와케, 차남은 나카츠히코, 3남은 오토히코이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그는 우경(右京)의 황별씨족의 후손으로서, 고레이 덴노의 아들인 와카타케히코(稚武彦命)의 후손이다. 와카타케히코는 키비노 타케히코(吉備武彦)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일본삼대실록』에 따르면 키비노 타케히코의 자식이 바로 미토모와케 남매들이다.

(원경 3년[879] 10월) 22일 무인에 (…) 좌경 사람 좌대사 정6위상 이나미노노오미무네오(印南野臣宗雄)와 아들 3명, 딸 1명, 여동생 1명에게 카사노노아소미(笠朝臣)의 성씨를 하사했다. 그 선조는 키비노 타케히코로부터 나왔다. 무네오가 스스로 말하기를, 키비노 타케히코의 둘째 아들인 '''미토모와케'''의 11세손 히토카미(人上)가 천평신호 원년(765)에 사는 땅의 이름을 취하여 이나미노노오미(印南野臣)의 성을 하사받았다. (키비노 타케히코의) 셋째 아들인 카모와케는 카사노노아소미의 조상이다. 형제의 후손은 성씨가 같음이 마땅하다.

일본삼대실록 권36

일본서기에 따르면, 키비노 타케히코 본인은 게이코 덴노 40년 7월 16일에 덴노의 아들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가 동쪽을 정벌하러 갈 때 오호토모노 타케히노 무라지(大伴武日連)[1]와 더불어 따라갔으며, 그의 딸인 키비노 아나토노 타케히메(吉備穴戶武媛)는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와 혼인하여 타케카히고노 미코(武卵王), 토워키와케노 미코(十城別王)의 두 아들을 낳았다. 키비노 아나토노 타케히메가 위 미토모와케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원주] 예히메는 키비노 오미(吉備臣)의 조상 '''미토모와케(御友別'''의 여동생이다.[1] 스이닌 덴노 25년 2월 8일 조의 소위 '오대부'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