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일본의 육국사'''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일본삼대실록
일본서기의 판본. 게이초 4년(1599) 발행.
1. 개요
2. 상세
3. 고사기와의 비교
4. 특징
5. 평가
5.1. 한반도 관련 기사와 해석문
6. 다른 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
7. 그 외
7.1. 위서가 아니다
8. 언어학 관련
9. 국내 번역
10. 관련 문서


1. 개요


日本書紀[1]
720년에 완성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육국사(六国史)[2] 중 첫 번째 역사서다. 순수 한문체,[3] 편년체로 기록했고 총 30권이다. 일본에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를 아울러 기기(記紀)라고 부르곤 한다.[4]
역사 왜곡 등의 비판과 연대나 내용에 있어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으므로 교차검증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책이다.
일본서기는 (당시 일본은 정치적 호족 연합체 였던 시기였고, 여러 지방 분국들이 병존 하던 시기었다] 지방국가에서 전해지는 구전을 집대성하고, 후대에 마치 통일된 단일왕조에서 벌어진 사건들인 양 소급적용해서 기록한 것이다. 대게 학자들은 일본의 정치적 통합시기[5]는 5-6세기로 추정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왜5왕이 송나라에 보낸 국서를 보면 478년에 무(武)[6]가 자신의 조예(祖禰)가 통일을 이룩했다고 하는데, 일부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학자들중에는 이를 근거로 일본에서는 4세기 말엽쯤에는[7] 일본이 통일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부 일본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도 근거로 활용하여, 391년 즈음에 신라와 백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일본열도가 통일이 4세기 말에 통일을 이룩했기 덕분이라고 전제 조건을 깔고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통일을 이룩한 뒤 막대한 중앙권력으로 군사력을 강화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주류 학설이 아니고, 5세기 중반에야 그것도 통일이 아닌 왜국 중심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것으로 보는게 주류이다. 이에 대해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에서 노중국 교수와 5세기에 일본이 어느정도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이시이 마사토시와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토론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노중국 교수는 조예(祖禰)가 춘추좌씨전연남생묘지석의 문장을 용례로 들어가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해석해서 일본이 통일 왕조를 이룩한 시기를 상대적으로 낮추어 봤고 [8], 일본 학계는 조예(祖禰)가 조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사학계의 주장은 최근 고고학적 연구결과로 5-6세기 경에 큐슈 일대를 통합했다는 주장은 근거 없음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한 김태식 교수의 반론은 이러하다.

그 상표문에서 더욱 중시되어야 할것은 왜왕 무의 자부심으로서, 일본열도의 각 지역 수장을 통합한 최고 권력자자라는 사실의 연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사이타마현 (埼玉縣)과 구마모토현(熊本縣)에서 출토된 철검명(鐵劍銘)을 통해서 擭加多支大王, 즉 왜왕 무의 통치 범위가 관동(關東)부터 큐슈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대왕의 아래에서 특정의 직장(職掌)을 분담하는 중앙 호족과 그 직장(職掌)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고, 그 지방 수장의 독립성은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즉 상표문을 통해 5세기 혹은 그 훨씬 이전에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 하였고 큐슈 일대를 통일 하였다는 주장은 고고학적 연구로 증명 할수 없으며, 다만 큐슈 일대의 수장으로써 연합체의 정치적 지도자급의 위상을 지녔다고 추정한다. 당대 무(武)가 자신의 작위도 황제에게 요구하는 한편 자신의 세력과 연합한 지방호족들에게 평서(平西)征虜(정로)冠軍(관군)輔國(보국)將軍(장군)의 관직도 하사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 하였는데, 이는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9]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외교 관련 기사는 통일왕조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통일왕조가 병합된 지방국가들에서 전해오는 구전을[10] 취합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주갑인상과도 아주 연관이 짙은데,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시점이 왜가 통일을 이룩한 시점(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은 시점)과 절묘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로 이주갑인상은 한반도 국가들의 역사를 의식해 천황의 위엄을 세우고자 연도를 조작한 것 같다.
이것은 하마다 고사쿠 규슈대 교수의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 투고한 논문에서 발췌한 일부이다.

일본서기 중에서 4세기에 상당하는 기사로 표현된 천황이나 일본은 4~5세기에 아직 성룁되지 않는 다는 것, 또한 천조의 칭호도 중국 남조로부터 책봉을 기본으로 하는 백제의 외교자세를 고려하면, 백제가 일본에 대해 주창하는 호칭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이것도 8세기 초반의 일본서기를 편찬하기 전후의 천황의 왕건을 수식하는 용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씨족 시조의 업적을 '이야기'화하고 또 후세의 백제 관련 기록도 일본서기 편찬 시의 '지금', 즉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율령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씨족 국가에 대한 기여를 현시하면서 '이야기화'가 계속 된 것으로 생각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화가 전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기억'을 이야기했던 점은 유의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내용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설[11]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학자들이고[12], 하맏 고사쿠 교수들은 일본에서도 통일왕조에 의해 병합된 지방국가들이 옛부터 전해지는 구전[13]을 후대에 취합해서 마치 통일 왕조의 역사처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전혀 거짓의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 정도 사실을 바탕으로 전한 구전이라는 것. 즉 과장은 되었지만 임나일본부설의 학설에 대한 가치와 여지는 어느정도 열어둔 것이다. 이렇게 일본서기와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 시기,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매우 강력하게 논리적으로 엮였다.
일본서기에서는 웅략천황 기록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직접 충돌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기사가 나온다. (물론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나 가야정복 기사는 제외하고...)

2. 상세


일본의 역사책이지만 주로 백제 측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대한 한국사 관련 정보도 들어 있는 덕분에 사료의 절대량이 절실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도 참고가 되는 귀중한 사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웃나라의 사서라고 하더라도 《일본서기》는 편찬 연대 자체가 《삼국사기》보다 '''4세기'''나 이르다.(일본서기 720년, 삼국사기 1145년) 백제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채 안 지난 시점에서 편찬된 사서인 만큼 아무래도 백제 측 기록이나 전승이 풍부하게 반영되었을 수밖에 없다. 한국 측의 고대사 주요기록인 《삼국사기》는 신라가 남긴 기록 위주로 수록되었다. 당연히 신라가 삼국시대의 승리자이고 그에 따라 수백 년간 나라가 더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같은 사건도 일본서기의 기록이 훨씬 자세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관산성 전투 부분은 삼국사기에선 간략하게 서술된 편이지만 일본서기는 고구려와 신라가 손을 잡았다는 배경 설명, 성왕이 죽기 전 상황부터 도도와의 대화,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까지 세세하게 적었다.
백제뿐 아니라 많은 가야계 소국들 등 당시 일본이나 백제와 관련이 있었던 나라들에 대한 기록도 한국 사서들보다 훨씬 풍부한데, 예를 들면 안라회의, 사비회의 같은 주요 사건이나, 탁순국아리사등 같은 인물들.
다만 일본서기의 가야 기록이 국내 계통 기록보다 자세하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백제계 사서를 통해 전해진 것이고 '백제의 입장'을 거쳐서 남은 기록이므로 이를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또 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자주성과 천황 가문, 일본 조정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고대 역사서 특유의 서술 태도 때문에 일본의 신화시대와 한국 관련 서술 등은 이 책에 쓰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비록 그 바탕에는 귀중한 사료가 가득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일본을 상위에 놓는 방향으로 심각하게 과장됐다는 것이 문제.
  • 647년 김춘추가 일본에 인질로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국제 정세와 김춘추의 지위상 절대 신라가 인질로 보낼 사람도 아니고, 김춘추는 금방 신라로 멀쩡히 돌아와 계속 활동하기도 한다. 즉, 김춘추가 647년 일본에 간 것 자체는 맞는데 인질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642년 고구려에, 648년 당나라에 간 것처럼 외교관으로서 갔다고 이해한다.
  • 백제 성왕이 541년 가야 각국 국왕과 일본 사신을 사비성에 초청한 사비회의 기록도 일본서기에만 있는데, 일본서기 원문에서는 가야 국왕과 일본 사신이 긴메이 덴노의 조칙(詔勅), 즉 명령을 들으러 백제에 갔다고 적어놨다. 일본부 요인들은 당연히 천황이 내리는 명령을 직접 받아야 정상이지, 상식적으로 가야 땅에 머물던 자들이 본국 일본 반대편인 서쪽 백제까지 가서 성왕에게 얻어들을 필요가 없다. 즉 백제에 각국 요인들이 모여 회의를 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지만, 주체는 백제 성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일본서기 흠명 4년, 548년 기사를 보면, 왜왕이 백제왕에게 고구려의 임나 침공에 대비해, 방비를 당부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자신들이 임나를 직접 통치하는상국이었다면, 직할령인 임나를 통해서 백제의 왕에게 시키면 된다. 하지만 부탁은 모조리 백제왕을 통하여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나일본부설의 모순이 나타난다.
[image]
>六月辛酉朔壬戌, 遣使詔于百濟曰, 德率宣文, 取歸以後, 當復何如. 消息何如. 朕聞, 汝國爲狛賊所害. 宜共任那, 策勵同謀, 如前防距.
>6월 신유삭 임술(2일)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를 내려 "덕솔 선문(德率宣文)이 돌아간 후에 잘 도착하였는가?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박적(狛賊)의 침해를 받았다고 한다. 임나와 함께 잘 논의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백제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당부함
시기상, 다음으로 등장하는 기사는 冬十月, 遣三百七十人於百濟, 助築城於得爾辛로써 왜국이 인부 370명을 파견해 백제의 득이신(得爾辛)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는 것이다.
또한 백제에 가려 부각되지 않을 뿐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도 일본서기는 중요한 사료이다. 예를 들어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이 '이리카스미'로 나오는데, 실제 고구려인들의 음차를 적었기 때문에 고구려어 발음 연구에도 꽤나 도움이 된다. 또한 장수왕대나 안원왕대 등에 발생한 고구려의 내부 반란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에 없는 내용들이 기재되어 있어 고구려사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이다. 이는 왜의 동맹인 백제가 고구려와 육로로 접해 있어 백제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들을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왜국 역시 고구려와도 사신을 자주 주고 받아 비교적 고구려 내부의 상황에 대해 왜가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다른 시대 역사서도 다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일본서기는 위와 같이 '무조건 일본이 짱이다' 성향이 매우 강한 편이다. 19~20세기 초중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신뢰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되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일본 역사학자들조차도 일부 사이비 역사학자가 아닌 이상, 일본서기의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과장들은 당연히 거르고 본다. 즉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하지만, 엄밀한 사료 비판과 교차검증과 고도의 연구를 필요로 하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역사서'''.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설은 과거 일본서기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결과[14]와 다른 여러 가지 근거들[15]을 모아서 완성된 것이다. 이런 임나일본부설을 본격적으로 반박하는 계기가 되었던 1970년대 천관우의 주체교체설[16] 이전까지는 국내 학계에서도 일본서기를 한국사 연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된 임나일본부설 관련 기록을 간파하고,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이 가능해지고서야 이런 금기에 가까웠던 분위기가 반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사서 삼국사기삼국유사 외에 한국사를 알기 위해 일본서기의 기사를 해석하고 활용한다는 개념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대다수 고문헌들이 그러하듯 최초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사본만 현전한다. 가장 오래된 사본이 헤이안 시대 초기인 9세기 무렵 것이라고 한다.

3. 고사기와의 비교


고사기》가 먼저냐 《일본서기》가 먼저냐를 두고 논란이 있으나 고사기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을 인정하되 일본서기가 최초의 정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고사기는 과거의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현대에서는 신화지만)를 문자화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
681년 40대 덴무 덴노가 "옛 기록들을 모두 정리하여 새로이 만들어라." 하는 명을 내린 후 고사기(712년)와 함께 완성된 일본서기(720년)는 과거에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17] 역사를 통일하라는 덴무 덴노의 지시로 편찬된 책으로 고사기(712년)와 함께 편찬되었다. 고사기는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일본서기는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순수 한문체를 사용했고, 고사기보다는 신화적이지 않고 사서적 성격이 강하다.
신화성과 내용 왜곡이 짙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교차검증을 통한 기록만을 인정한다.

4. 특징


  • 중국 측 기록은 삼국지와 진기거주(晉起居注)를 인용했다. 그 외의 기록들은 후한서 등 중국 역사서를 다른 역사서들을 통해 간접인용했다고 현재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 일본이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5-6세기이므로, 일본은 그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전의 기록은 구전에 기초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18] 그러므로 4-6세기 이전의 기록으로 갈수록 신화나 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과한 내용이 많으며, 국내 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백제의 기록을 대거 인용했다.

5. 평가


《일본서기》는 고대 천황제국가 건설을 기념하여 8세기 초 '''일본의 지배층이 천황가의 유구성과 존엄성을, 나아가서는 일본열도 지배의 정당성을 천명할 목적으로 편찬한 고도의 정치성을 띠고 있는 역사서'''이다. 그 결과 국내 관계 기록이나 대외관계 기록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개작과 왜곡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일본서기》에서 백제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의 근거가 된《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記》라는 이른바 백제 3서는 백제가 망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여 일본 조정에서 일하던 백제 사람들이 가지고 건너간 본국의 역사 기록을 당시 사정에 의해 개서하고 수식하여 일본 당국에 제출했다고 짐작한다. '''이들에 의해 제출된 내용들은 일본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윤색되어《일본서기》에 인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일본서기》의 백제 관계 기록으로부터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양적으로 풍부하지 못한 《삼국사기》의 내용과 양적으로는 풍부하나 내용상에 많은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사료비판을 통해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하느냐 하는 점이 백제와 왜의 관계를 밝히는 데 가장 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일치된 해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일본서기는 사실상 일본이 국가적으로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사서라고 볼 수 있지만, 애시당초 편찬의 목적이 역사 정리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천황과 고대 일본 및 유력 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치계급 중심으로 원사료 수집과 서술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일본서기 자체에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아...'하는 말이 있는데, 즉 '''야마토 정권프로파간다를 퍼트리겠다는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일본 내부 자료로서의 신빙성은 높지만, 외교에 관한 부분만큼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으로 한중일 삼국 학계의 의견이 동일하다. 외교적인 내용 중에서 한국과 중국의 자료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은 오직 하나, 금강 전투(일본 측 기록은 백촌강 전투)에 관한 기록이다. '''이 부분은 사상자 숫자까지 똑같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그 이외의 국제 뉴스 부분은 관점부터 많이 다르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이런 점은 일본서기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역사서들도 외교에 관한 부분은 확실하게 일본서기와 맥을 같이 한다. 특히나 중국 측의 자료와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다. 중세로 넘어오면 명나라에서 아시카가 막부에게 일본 국왕이라고 쓴 것도 있는데 이 부분마저 왜곡하는 사례가 발생하니 비단 일본서기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든 사서 중 외교 부분은 주의하면서 봐야 한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우리 일본이 최고라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조성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서술하자면 일본서기에서 처음으로 '귀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귀화라는 의미는 '무언가를 흠모하여 자연스레 그리되다.' 하는 의미로 수당 교체기와 신라의 통일사업 기간 동안 많은 중국인,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키면서 일본서기에서는 귀화인(歸化人)이라고 칭했었는데, 이 귀화인이 앞서 이야기한 개념의 '귀화'를 통해 일본인이 되었다는 한국 ≤ 중국 < 일본 이라는 일종의 개념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19]
신화시대까지도 편년체로 기록한 탓에 역사서로서의 정확한 기술성도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왜곡사례로는 진구황후가 돌로 주술을 행하여 출산을 늦추고는 배를 타고 단 몇 개월 만에 삼한을 평정했다는 황당한 기록이다.[20] 대체로 학자들은 이런 황당한 서술이 진구황후를 히미코와 동일시해 히미코와 그녀의 종녀(宗女)인 토요의 치세를 숨기려는 의도로 일본 역사를 2갑자(120년) 앞당긴 데서 나온 것으로 본다.[21] 일각에서는 가뜩이나 당대에 문자가 없었던 일본은 인용할 단편적인 문헌도 압도적으로 부족했는데 천황의 위엄을 세우려고 120년을 뻥튀기했으니 그 빈 자리는 당연히 외국기록 특히 백제삼서가 자리할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22] 하지만 의도적으로 2갑자를 당긴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일본서기가 여러 개의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는 과정에서 기록이 뒤섞이며 혼돈이 생겼다는 것. 백제사를 연구하는 쪽에선 주어를 일본에서 백제로 바꾸고 2갑자를 당기면 백제역사와 일본서기가 딱 들어맞는 점을 들어서 백제의 사서를 일본서기 편찬자가 보고 주어를 일본으로 바꾸는 얕은 수의 조작을 하였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23]
과거 일본 사학계는 한때 이 주장만을 굳게 믿고 내부의 반론을 무시한 채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웠다가 현재는 축소되었다.[24] 다만 진구황후 이야기 자체는 일본 민속학계에서는 타계(他界) 귀환 신화와 태양신 재생신화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 말고, 진구황후를 다룬 다른 기록을 보면 진구황후가 배며 군사들을 붉게 칠하고 삼한을 정벌했다고 하는데, 붉은색이 영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25]
사실 일본서기 내에서도 웃긴 게 있다. 일본서기 내 기록에서 신라구의 피해를 받는 기록을 보면 일본은 제대로 된 정식 군대가 있던 적이 없어 맨날 당한다느니, 그래도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신국이니 앞으로는 안 오겠지 하며 자기위안만 하고 있는 내용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것.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최소한 정신적 위안용으로라도 진구황후 얘기가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데, 안 나온다. 심지어 신라구로 인해 신라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일본에 살던 신라인들을 일본인들이 공격하는 일도 기록되어 있으면서 신화시대 기록 이후에는 안 나온다. 또한 백제와 관련된 부분에서도 백제를 아랫나라로 보면서도 일본서기 곳곳에서 심지어 진구 황후 시절 일본이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있던 소국 침미다례국은 일본 입장에서는 서쪽이나 북쪽이지 남쪽이라고 볼 여지는 하나도 없는데도 남쪽 오랑캐라고 '남만(南蠻)'이라 적고, 출병과 전투 시에도 일단 쓰기는 일본이 상국이고 시키는 식으로 쓰는데 모든 면에서 백제가 주력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서기가 신화시대를 벗어나면 사실적이지만 그러한 기록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일본서기의 모순이 극에 달하는 부분은 긴메이 덴노에 관한 기록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긴메이 덴노의 분량에서는 긴메이 덴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80% 정도가 백제 관련 기록들이다. 대놓고 백제기를 인용했다고 쓰여있다. 특히 백제 성왕 관련 기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어서 그냥 백제 사서다. 일본서기답게 성왕이 긴메이의 신하라서 마치 아바타처럼 긴메이는 계속 지시를 내리고 성왕은 행동하는 식으로 쓰여있다.
즉 일본서기는 기본적으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이리저리 짜맞춰서 왜국에 유리한 식으로 재구성했다고 추정된다(물론 앞서 말했듯이 초기 신화시대는 말 그대로 그냥 신화다). 따라서 한국 관련 기록들은 조공, 인질 같은 일본이 상국이라는 뉘앙스를 발라내고 주체를 백제로 바꾸거나, 관계를 역으로 생각하면 해결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자면 삼국이 일본에 조공을 올린 것은 사실 선물이고, 백제가 가야 땅 어디를 하사해 달라고 왜국에 요청하는 건 실제론 백제가 그 가야 땅을 점령했다는 뜻이며, 왜국이 고구려를 친 기록은 사실은 백제가 고구려를 친 것을 바꿔 써놓은 기록이었다는 식이다. 애초에 항해기술이 백제와 신라보다 낙후되어 4~8월경에만 도해가 가능했고, 항해에 소요되는 세월도 상당했는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일본에게 도움을 청하고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은, 백번 양보해서 일본의 군사력이 실제로 강대했다해도, 유사시 긴급 지원이나 지원군 동원이 사실상 불가능 하므로 말이 안된다.[26] [27] 예를 들자면,
<일본서기 601년 (추고9년) 3월 5일>

三月甲申朔戊子, 遣大伴連囓于高麗, 遺坂本臣糠手于百濟, 以詔之曰, 急救任那.

3월 갑신삭 무자(5일)에 대반련설(大伴連囓;오도모노무라지쿠이)를 고구려에 파견하고,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사카모토노오미누카테)를 백제에 각각 파견하여 고하기를 “급히 임나를 구하라.”고 말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신라로부터 임나를 구하라고 백제와 고구려에게 급히 사신을 파견해 명령을 하는데, 왜왕의 조칙을 보낸 발송지는 가까운 임나가 아니라 일본 본국이다. 차라리 그렇게 조칙을 보낼 정도라면 일본 본국에 있는 정규군을 파병하는게 나을뻔 했을것이다. 자신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직할령인데 왜 백제와 고구려에게 부탁하며, 고구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부탁할바에야 자신들이 직접 구원병을 파견하는게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인데, 역사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일반인조차도 논리적로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윤색이다.또 일본서기에서 이르길 임나는 이미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멸망 했는데, 수십년 후인 601년에 버젓이 살아 돌아온다 (?)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이리저리 왜국에 유리한 대로 백제기 등의 기록물을 짜맞췄지만, 근본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잘 판별하면 실제 사건에 대해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누가 봐도 어설픈 마무리 때문에 일본서기의 사관들이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라는 상부의 지시에 무언의 저항을 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반응도 있지만,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28]
본문 외에도 다른 전승을 일서의 형태로 정리한 덕분에 여러 가지로 유용한 고대 전승을 간직했다. 하지만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으로 간주한 내용은 어디까지나 본문이며, 그와 다른 전승을 '일서에 말하기를' 하는 형식으로 주를 달았다. 신화시대 부분에서 아마테라스니니기를 강림시키며 '천하는 너와 네 자손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고 말했다는, 그 유명한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일본서기에 기록됐는데, 그게 본문이 아니라 일서다. 본문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니니기를 파견했으며, 천양무궁의 신칙 또한 없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일본서기의 본문이 아닌, '천양무궁의 신칙'을 담은 일서의 내용을 표준판으로 가르쳤다. 그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상술했던 천황, 일본등에 대한 표현과 덧붙여 일본을 귀국(貴国)이라고 표현하고 신라나 백제의 사신이 자신의 나라를 칭할 때는 신국(臣國)이라고 칭하는 등, 천황의 신격화가 본격화된 시점의 명칭을 사용하는 등 걸러 들어야 할 것이 많다.
또한, 일본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문자가 없었으며,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5~6세기라고 파악된다.
수서(隋書)의 내용을 빌리자면

沒水捕魚 無文字 唯刻木結繩 敬佛法 於百濟求得佛經 始有文字

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글자는 없고 나무에 균열을 만들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불교를 숭상하여 백제에게 불경을 구하니 비로소 글자가 생겼다.

이다.
고로, 일본서기에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일들 즉 5~6세기 이전의 기록은 구전에 의존한 것이며, 사전적 정의로 역사라고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각색되고 살이 붙어 과장 내지는 없던 사실을 신화마냥 부풀려서 전해진 거라고 추정할수 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서기에 대한 서술도 수서의 기사를 인용하며 5~6세기 이전의 문자는 없으며 단지 口承(구전)에 의존한 기록이라고 한다. [29] 문자가 생긴 시점은 놀랍게도, 일본서기에서 대략적으로 사료로써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5~6세기의 일이다.
이에 한술 더떠서,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원래 기억과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을 6세기에 집대성해서 8세기에 이르러 편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12]。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13][14][15]。さらに、文字に残された系譜情報を「史書」として見るならば、雄略朝(倭王武、ワカタケル大王、5世紀後半)にはその種のもの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稲荷山鉄剣銘の存在によってわかる[16]。


5.1. 한반도 관련 기사와 해석문


일본서기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아주 많은데, 특이한 점은 4세기 이전에는 백제와 관련된 기사는 없고 죄다 신라와 가야 관련 기록이다. 제국주의 시절에 한일동족론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진무천황이 신라인이라는 등의 학설이 아주 많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건국 신화에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 먼저 도착한 곳은 신라이고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삼국사기에는 도일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 되어있고, 가야왕자 쓰누가 아라시토의 기록도 있다. 언어학적인 부문에서도 신라와 연관이 짙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국가 형성 전부터 백제보다 신라나 가야와 관련이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서기에서 신라에 집착하는 이유도 일견 납득 할수 있다. 애초에 고사기에는 진구황후는 천일창의 여식에게서 나온 모계 후손이라고 대놓고 나온다.


6. 다른 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증거


야마토 정권은 임나에 대한 의사를 전부 '''백제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그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고''' 일본서기에서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이 임나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기록은 거의 없고, 하나같이 백제를 통해서만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은 임나 문제에 대해 야마토 정권은 단순히 '''백제를 지원하는 위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김현구, 임나일본부는 허구인가

일본서기를 보면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는커녕 오히려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 일본서기만 제대로 인용하면 되려 '''임나일본부설 주장 세력을 버로우시켜 버릴 수 있다'''. 사료를 분석해 보면 '백제가 야마토 정권의 아래'이기는커녕 오히려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지원했다'''(즉 백제가 위, 야마토가 아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 김현구는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 保和)[30]와 임나일본부설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스에마쓰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자 일본서기를 근거로 들어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반박했다. 일본서기를 근거로 든 주장이었으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김현구의 주장과 같이 왜왕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이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백제왕에게 부탁하는데 몇가지 예를 들자면,
548년 긴메이 덴노(흠명 천황)가 백제왕에게 서신을 보내,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해 임나와 힘을 합쳐 방어를 해달라는 당부와
544년 흠명천황이 백제 성명왕에게 임나를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서신
543년 11월 기사, 왜왕이 임나에 있는 백제의 군령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 등이 있다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김현구 교수가 직접 예시를 들었던 기사는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에서 찾을수 있다.
541년 4월, 543년 11월, 544년 2월, 544년 11월 기사이다.
[image]
즉, 왜왕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수 없어 백제왕의 힘을 빌려서 해결하고 있다는 증거로, 임나는 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날조를 분쇄할 수 있는 증거다.

7. 그 외


일본서기에 대한 한국 역사학계의 태도는 '''무척 미묘하다'''. 일본이 한반도의 삼국 모두를 복속시키고, 종주국으로 행세했다는 굉장히 거북한 주장이 실려있는데 일단 이건 한국 측 사료와 전혀 들어맞지 않고, 중국 자료까지 갖다놓고 비교해보면 혼자 삼천포로 빠지는 일본서기 내용에 그저 막막해진다. 사실 일본서기의 내용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영 좋지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삼국사기나 여타 다른 사서도 오류와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31] 일본서기에 있는 한반도 기록은 당대 한국과 중국에 남은 어떤 사료보다도 자세하기 때문이다.[32]
예컨대 일본에 문화를 전파했다는 아직기나 왕인, 고구려에서 양원왕 즉위시에 왕위계승을 놓고 도성에서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은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 외에 삼국사기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의 목을 베었다고만 기술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그 전후의 상황을 주고받은 대화까지 자세히 서술하는 등[33] 백제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도 제법 실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그나마 삼국사기에서 다뤄주지만 가야에 대해서 제대로 다뤄주는 건 일본서기가 거의 유일하다.[34] 이러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서 대략 난감한 것.
물론 삼국사기나 고고학적 자료들과 대조해서 평가해봐야 되겠지만, 삼국사기의 내용이 훨씬 간략하고 일부가 중국 사서를 복사 붙여넣기 하다보니 한계가 있으며, 과연 삼국사기가 더 정확한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생긴다. 그대로 믿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한일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내용 중 신뢰할 만한 부분을 추출하려고 노력해왔다.[35] 이는 풍납토성 발굴과 신라 나정 발굴, 고구려사 연구 발전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진 지금도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마찬가지다.[36]

7.1. 위서가 아니다


천황 중심주의와 고대 일본에 대한 애국심 고취 사상을 이유로 위서 논란이 팽배했지만, '''일본서기는 위서가 아니다.''' 위서 여부는 내용의 사실성으로 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내용상 많은 허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일본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된 그 서책임은 분명하다. 임진왜란 이전 필사본이 있고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서도 천황 계보를 확인할 수 있기에 위서가 아니며, 야마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한 사서이기 때문에 정사에 해당하며 야사조차 아니다.
위서가 아니라고 해서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일본서기는 엄연히 황실을 칭송하기 위해 사관(史官)이 가치 중립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날짜와 부대상황을 조작하는 등 광범위한 문헌오염을 저지른 책이지만, 서기에 기록된 내용 자체는 대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편찬 방향도 저자 나름대로 설정한 서술 원칙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정제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서기는 고대사 관련 문헌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사 연구에도 필수적인 책이라,[37] 역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책에서 사실을 적은 부분과 사관이 의도적으로 신격화・왜곡한 부분을 구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일부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종교 단체에서는 일본서기가 소설이라거나 반대로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의 재야사서를 일본서기랑 비교하면서 재야사서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은 역사서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책들은 단순히 저술연대나 저술자같은 서지정보를 속이지 않아서 좁은 의미의 위서에만 부합하지 않을 뿐이며 책의 사실여부와는 무관하다. 특히 이러한 책들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담았다"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따라서 이러한 책들이 위서라는 말은 그 내용 자체로 "거짓 책"이라서 거짓 위(僞)를 써서 위서가 되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비록 거짓이나 과장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서술한 부분도 있으며 무엇보다 당대의 사료 절대량이 부족하기에 엄격한 교차검증의 전제 하에 나름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모르고 출판이 넘쳐나는 20세기에 가짜 역사책을 내밀면서 이것도 진실된 부분이 있으니 검증해봐야한다는 주장은 수많은 역사가들의 오랜 노력과 연구 성과를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8. 언어학 관련


일본서기는 역사학 사료로서뿐만이 아니라 고대 일본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매우 이름이 높다. 이런 연구 끝에 일본서기에서 한자음으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방식이 서로 두 가지로 나뉨을 밝혔다. 한쪽은 당시 한자의 '중국음'으로 일본어를 음역하고, 다른 한쪽은 한자의 '일본음'으로 일본어를 음역한 것이다. 일본서기를 작성할 때 중국계 인사와 일본계 인사가 서로 다른 부분을 각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음을 사용하여 음역한 부분은, 일본어 중 중국인들이 잘 구별하지 못하는 음소가 구별되지 않아, 그 필자가 일본으로 건너온 중국인이리라 추정한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중국계 인사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대부분이 정통 한문체로 작성되었으나, 일부 기사[38]에서 당대 일본식 언어 습관이 다수 발견되어서 이 부분이 후대에 모종의 이유로 가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여기서 중국 본토와 동일한 정통 한문체로 쓰여진 부분(일본서기 α군)은 속수언(續守言)과 살홍각(薩弘恪)이, 일본식 언어 습관이 첨가된 한문으로 쓰여진 부분(일본서기 β군)은 야마다노후히토 미카타(山田史御方)가 쓴 것으로 추정한다. 미카타는 통일신라에 유학했던 경험이 있는 학문승으로, 당대 신라는 당나라와 교류가 많아서 일본보다는 좀 더 한학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나라에 직접 유학한 경험은 없어 한문을 정음으로 직독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
또한 일본서기에는 한자를 이용한 당대 일본어 표기법이던 만요가나를 일부 인명, 주석 등에서 사용해서, 고사기, 만엽집과 더불어 만요가나 연구에 있어서 굉장히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9. 국내 번역


1987년에 성은구가 발췌번역본을, 1997년에 심리학자 전용신이 완역본을 내놓았다. 전용신의 번역본이 널리 읽혔는데 그러다가 2013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사학계에서 제대로 된 번역본을 내놓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사학자들이 모여 번역한 것이니 사실상 오피셜.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격은 각 3만 원 정도. 동북아역사재단 자료실에서 pdf로 볼수 있다.링크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운영 중인 동북아역사넷에서 온라인 열람도 가능하다.
다만 주석을 달 때 참고한 자료가 너무 오래돼 본문의 지명과 주석에 달린 현재 지명이 전혀 맞지 않고, 학설 또한 오래돼 폐기된 학설이 버젓이 실려있다는 문제가 있다. 일본의 행정구역은 심심하면 이합집산하니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주석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1. 1921년 폐지된 이래 행정구역으로서 존재하지 못한 '군'을 행정구역으로 실어두었다. 현재 일본에서 '군' 단위는 옛날부터 불러왔으니 그냥 존치 중인 지리적 구분에 불과하다. 주석에 실린 무수한 군郡은 지금 거진 다 시市로 승격되거나 정町, 촌村으로 갈라진 지 오래다.
  2. 동북아재단의 역주서가 나온 2013년 당시 대구광역시 현풍면이었던 현풍읍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도 아닌 '경상북도 현풍군'으로 게재했다. 현풍군이 달성군으로 편입된 게 1914년인데 1번의 군 행정구역과 같이 생각해보면 주석 달 때 참고한 문헌이 보통 구닥다리가 아니다.
  3. 大字雷[39]를 大宇雷로 적질 않나, 大和郡山市(야마토코오리야마 시)를 군(郡)이 들어갔다고 大和郡 山市라고 띄어 써버리는 등 오기도 수두룩하다.

이렇게 지명 주석만해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류 투성이이니 인물 주석이나 관련 학설 주석의 내용에 신빙성에 의심이 가도 재단 측에서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일본서기 관련 연구서가 몇 권 출간되어 있다. 읽어볼 만한 책들은.
  •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 (전 3권): 사학자들이 모여서 쓴 책으로 학계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책
  • 일본서기의 비밀
  •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40]
일본서기적 관점을 정리한 책을 보고자 한다면 도쿄대학에서 발행한 《일본역사》를 읽으면 그 개략이나마 알 수 있으니 관심있는 역사 지망생들은 참고하도록 하자. 단 한중 측 사료도 같이 보는 NPOV적 입장은 필수.

10. 관련 문서



[1] 니혼쇼키, 야마토부미라고도 읽는다.[2] 일본서기를 포함해 속일본기(続日本紀), 일본후기(日本後紀), 속일본후기(続日本後紀),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日本文徳天皇実録),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을 통틀어 육국사라 부른다.[3] 다만 부분부분 정통 한문이 아니라 왜습이 가미된 한문체로 씐 부분도 있다. 아래 언어학 단락 참조.[4] 한자의 순서를 바꾸어 紀記라고 쓰는 경우도 없진 않으나 드물다. 고사기가 더 먼저 쓰였기 때문에 고사기의 기(記)를 앞에 두는 듯?[5] 호족이 연합하여 왜국을 주축으로 모인 시기이지,지방분국들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는 아니다[6] 이러한 관념으로 왜5왕 중 한명인 무(武)을 웅략천황에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7] 祖禰라고 기록됐으니 일본에서는 통일을 이룩한 시점을 3-4세대 정도 앞으로 당겨오는 거다. 노중국 교수는 춘추좌씨전의 용례를 언급한 것이고 같은 단어를 중국 사이트에 기입해서 번역기를 돌려보면 고대에 사용된 돌아가신 부친을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 수 있다.[8] 노중국 교수의 논지는 일본은 5세기 이르러 통일의 초석을 마련했으므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다. 또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군의 실체를 왜국 정규군이 아닌, 일개 지방에서 파병한 용병 내지는 해적 집단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는 광개토왕릉비를 연구한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의 의견과도 일치한다. 왕건군은 북큐슈 일대의 해적으로 봤다. 일본서기에서 교차검증 할수 없는 이유가 왜국의 정규군이 아닌 이합진산의 해적이나 지방국가의 소규모 군대이기 때문일수도 있다. 일본의 주장은 최대한 일본열도가 통일된 시기를 빠르게 잡아, 최대한 왜군의 영향력을 인정받으려는 취지이다. [9] 자신보다 낮은 관직을 주어 수직적인 주종의 관계를 공고히 하며, 대내외적으로는 연합체의 수장으로 인정 받으려는 취지이다.[10] 당연히 사료보다 객관성이 매우 결여 될수 밖에 없다[11] 전통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이 아닌,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막대하게 끼쳤다고 해석하는 학자들[12]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이시이 마사토시나 사토 마코토 같은 학자들이다.[13]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5-6세기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14] 사실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모순이 많긴 하다.[15] 임나일본부설 문서에 하나하나 반박되고 있다.[16] 요약하자면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바꿔서 읽으면 말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17] 고사기에 따르면 이전까지 제왕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제기(帝紀)와 임금의 말씀을 기록한 본사(本辭) 등이 통일되지 않고 기록되어 있어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제황의 일과 과거 있었던 사건들을 암기하는 신하가 있다고 되어 있다.[18] 고로 문자가 생기기 이전의 사건을 서술한 내용은 구전을 기초로 했으며, 역사라고 부르기에 어렵다. 역사는 기록이 있어야 성립한다[19] 이 때문에 한중 사학계에서 귀화인 대신 바다를 건너 넘어온 사람이라는 '도래인'을 쓰도록 권장한다. 물론 일본 측에서도 이 도래인을 쓰기는 하는데, 귀화인도 병용하는 형편.[20] 진구황후 문서에 반박하는 문단이 존재한다.[21] '''여왕'''의 지배를 숨기려 한 것이라면 스이코 덴노, 고교쿠 덴노 등의 기록도 삭제되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니다. 이에 대해 히미코와 토요가 중국에 조공했기 때문에, 혹은 일본의 정통 천황족이 아니기 때문에 숨기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22] 물론 삼국지 정사, 한서등 중국의 사서도 인용 했지만 압도적으로 차용을 많이 한것은 당연 백제삼서다.[23] '''이 때문에 반 우스개로 일본서기의 본명이 백제서기라는 말도 있다'''. 우스개치고는 너무 잘 맞아서 문제지만. 실제로 백제사 연구 시 많이 참고하는 주 사료 중에 일본서기가 있다.[24] 다만 임나일본부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은 출선기관설로 이미 80년대에 사실상 폐기된 학설이다. 현재 임나일본부가 외교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는 외교 사신설이 대세. 여기서 찌그러졌다고 표현한 설은 출선기관설.[25] 참고로 진구황후의 기록을 이주갑인상 문제와 결부시키면 근초고왕 시기가 되는데, 이 때문에 근초고왕이 삼한을 정벌한 것을 일본서기가 왜곡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26] 당시 일본의 항해기술 수준은 임나일본부설#s-6을 참조바람.[27] 백강 전투만 보더라도 일본은 준비에 긴 세월과 항해기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모든 것을 파악한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과 일본 정규군을 철저히 농락하여 궤멸시킨다.[28] 이런 점 때문에 삼국시대, 특히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적절히 인용한다. 위에 나타난 점 때문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록이라도 써놓은 게 어디냐.[29] 『日本書紀』は日本の現存最古の「正史」とされるが、その編纂までには日本における文字の使用と歴史的記録の登場の長い歴史があった。日本(倭)における歴史、即ち過去の出来事の記憶についての記録としてまず言及されるのは「帝紀」(大王家/天皇家の系譜を中心とした記録)と「旧辞」(それ以外に伝わる昔の物語)である. これらは津田左右吉が継体・欽明朝(6世紀半ば)の頃に成立したと提唱して以来、様々な議論を経つつも、元々は口承で伝えられていた伝承が6世紀にまとめられたものと一般的には考えられている[30] 김현구는 자신의 책에서 그를 S씨라고 칭했다.[31]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있는 인물들의 나이를 따져 보면 말이 안 될 정도로 장수한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이희진은 순서와 연대도 완전히 뒤바뀌는 일본서기와 순서는 다른 사서, 자료와 거의 비슷하고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삼국사기와 같이 비교할 수 없다는 얘기를 했다.[32] 아쉽게도 한국에는 이 시대에 편찬된 역사서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게 아예 없다.[33] 일본서기에는 말 먹이는 종 고도(苦都) 또는 곡지(谷智)라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는 김무력의 비장이라고 서술됨) 이름이 비슷하기에 본래 말 먹이는 종이었으나 왕을 참하여 비장으로 인생 역전 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34] 일본서기가 가야를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이 가야와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았느냐는 추측도 한다.[35]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를 '복어'로 비유한 적도 있다. 그만큼 까다롭고 다루기 곤란하다는 뜻. 이영식, "《일본서기》 활용의 성과와 문제점" 에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새 동향》(한국고대사학회편, 서경문화사, 2007)[36]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실질적인 국가로서 삼국이 정립된 때는 훨씬 후대라고 본다. 백제의 국가성립과 관련된 풍납토성이 3세기 중엽에 축조되었다고 본다. 한때 방사선탄소연대치로 삼국사기와 일치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 신뢰도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고 최근에는 실제 측정을 했던 기관에서도 그런 말이 나왔다. 게다가 상대편년에서는 풍납토성 아래 발견된 전문도기(錢文陶器: 동전 문양을 새긴 도기) 때문에 3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고고학계에서는 대세다.[37] 특히 백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38] 특히 다이카 개신을사의 변 관련 기사[39] 오아자 이카즈치. 오아자(大字)는 한국의 동 정도 되는 행정구역이다.[40] 이 책에서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기기신화를 지토 천황과 후지와라 후히토, 특히 후히토가 주도적으로 '창작'했다고 주장한다. 기기신화의 성립에 있어서 덴무, 지토 천황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됐으리란 설은 이미 기기신화에 관한 학자들간 논의가 있으나, 이 책의 저자인 오야마 교수는 이러한 논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기기신화와 관련된 다른 연구성과를 무시하는 단점이 있다. 기기신화 성립 이전 일본의 종교적 토양과, 지토 천황 무렵의 정치적 상황이 기기신화에 반영된 바를 정리, 연구한 책으로는 김후련 교수의 《타계관을 통해서 본 고대 일본의 종교사상(2006, 제이엔씨)》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