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15대 천황. '''일본 최초의 천황'''이라는 기록도 있으며 10대 스진 덴노와 마찬가지로 시호에 '신(神)' 자가 들어간다.
주아이 덴노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氣長足姬尊), 즉 진구 황후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어머니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온 200년 겨울 12월에 츠쿠시(筑紫)의 가다(蚊田)에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물을 깊이 생각하며 멀리 내다보았다. 하는 행동이 법도에 맞아 성스러운 징표가 있어 203년 3살이 되었을 때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날 때 팔 위에 굳은 살이 있었고, 그 모양이 활을 쏠 때 착용하는 팔 보호대와 같았으며, 이는 진구 황후가 용감하게 몸단장을 하고 활 보호대를 했을 때의 모양과 같았다고 했다. 활 보호대는 '호무타(褒武多)'라고 불렀기에 그 이름을 높여 '호메타 덴노(譽田天皇)'라 불렸다고 한다.
일본서기 응신천황 조에 이런 일화가 있다. 오진 덴노가 황태자이던 시절에 코시노 쿠니(越國)에 가서 츠누가(角鹿)의 케히노 오호카미(笥飯大神)를 참배했는데, 이때 신령과 태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령은 이자사와케노 카미(去來紗別神), 황태자는 호무타와케노 미코토(譽田別尊)가 되었다는 것. 일본서기의 필자는 이 부분을 서술하며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신령의 원래 이름은 호무타와케노 카미(譽田別神), 황태자의 원래 이름은 이자사와케노 미코토(去來紗別尊)였을 테지만, 다른 기록이 없으므로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라고 부언했다.
나라~헤이안 시대 이래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를 비롯한 일본의 네임드 무가들로부터 무신(武神)으로써 열렬한 숭배를 받았던 '''하치만신(八幡神)'''과 동일시된다. 하치만은 그 전까지는 오이타 지역의 농업의 신이었고, 오진 덴노와는 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
2. 행적
270년 1월 1일에 즉위했고, 처음에는 타카키노 이리비메(高城入姬), 타카키노 이리비메의 동생인 오토히메(第姬),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오나베히메(小甂媛), 오토히메(第媛), 이토히메(糸媛), 히무카노 이즈미노 나가히메(日向泉長媛) 등 비 7명을 두어 아들, 딸을 합쳐 자식 20명을 낳았다. 271년 3월 3일에 나카츠히메(仲姬)를 황후로 삼았다.
272년 겨울 10월 3일에 북방의 에조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우마야사카노 미치(廐坂道)를 만들도록 했고, 11월에 바다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오호하마노 스쿠네(大濱宿禰)를 파견해 그들을 평정하고, 오호하마노 스쿠네를 미코토모치(宰)로 삼았다. 274년 8월 13일에 여러 나라에 아마베(海人部), 야마모리베(山守部)를 정했고, 겨울 10월에 이즈국(伊豆國)에게 배를 만들도록 명령해서 길이가 10장이 되는 배가 완성되자 '카라노(枯野)'라고 불렀으며, 275년 봄 2월에 오미국(近江國)으로 가 우지노(莵道野)에 이르러 노래를 불렀다.
278년 여름 4월에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츠쿠시로 보내 백성들을 감찰하게 했지만 그의 동생 우마시우치노 스쿠네(甘美內宿禰)가 자신의 형이 츠쿠시에서 삼한을 차지하고 왕이 되겠다는 모의를 했다며 모함했고, 오진 덴노는 사자를 파견해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죽이려 했다. 그러다가 오진 덴노는 두 사람을 추궁했고,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자 두 사람의 손을 탐탕(探湯)[3] 하도록 했으며, 이에 두 사람이 시키노 카와(磯城川)의 물가에서 탐탕을 했다가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기자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기노 아타히(紀伊直) 등의 선조에게 예민으로 주도록 했다.
280년 겨울 10월에 츠루기노 이케(劒池), 가루노 이케(輕池), 가노 카키노 이케(鹿垣池), 우마야사카노 이케(廐坂池)를 만들었다. 히무카국(日向)의 가미나가히메(髮長媛)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뻐해 찾고자 했다. 282년 봄 3월에 사람을 보내 가미나가히메를 불러 가을 9월에 오자 구와츠노 무라(桑津邑)에 살게 했고, 아들인 오호사자키노 미코토(大鷦鷯尊)가 가미나가히메를 좋아하자 오진 덴노가 이를 알고, 결혼시키기 위해 후궁에서 열린 연회 때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 가미나가히메를 주었다.
288년 겨울 10월에 요시노노 미야(吉野宮)로 행차했고, 291년 봄 3월에는 나니하(難波)에 행차해 오호스미노 미야(大隅宮)에 머물렀으며, 14일에 비 에히메(兄媛)가 부모를 그리워해 서쪽을 보고 탄식하자 88명을 뱃사공으로 삼아 배를 타고 서쪽에 가도록 했다. 가을 9월 6일에는 아와지마(淡路嶋)에 사냥을 나가면서 키비(吉備)에 행차하고 아즈키시마(小豆嶋)에서 놀았으며, 10일에는 하다노(葉田)의 아시모리노 미야(葦守宮)에 머물렀고 미토모와케(御友別)가 자신을 공손히 받들자 그의 가족들에게 키비를 나눠서 주었다.
306년에 사람을 중국 오(吳)나라에 보내 봉공녀를 구하게 했고, 이에 오나라 왕으로부터 봉공녀 4명을 받았으며, 309년 봄 정월 8일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를 불러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 큰아들과 작은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는 큰아들을 사랑한다고 했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는 큰아들은 성인이 되어 걱정이 없으나 작은아들은 성인이 못 될지도 몰라 가엾다는 말을 했다. 오진 덴노는 우지노와키 이라츠코(菟道稚郞子)를 황태자로 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두 황자의 마음을 알고자 질문한 것이라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의 답에 기뻐하지 않았다. 24일에 우지노와키 이라츠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오호야마모리노 미코토에게는 산천임야를 관장케하고, 오호사자키노 미코토에게는 황태자를 보좌해 국사를 다스리게 했다.
310년 봄 2월 15일에 아키라노 미야(明宮)에서 죽었는데, 이때의 나이가 110세였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오호스미노 미야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때 오나라로 보낸 자들이 봉공녀를 데리고 돌아왔지만 오진 덴노가 이미 사망해 만나지 못했다.
사후 에가노모후시노오카 능(惠我藻伏崗陵)에 묻혔다고 한다.
2.1. 아버지?
일본서기나 고사기에서는 오진 덴노가 주아이 덴노의 유복자라고 서술했지만, 이상하게도 일본 내의 다른 기록에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도 있다.
8세기 ≪스미요시 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는 진구 황후가 남편 주아이 덴노가 죽은 뒤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4] 과 관계하여 오진 덴노를 잉태했다고 서술했다.
14세기 ≪하치만 우사궁 어탁선집(八幡宇佐宮御託宣集)≫에서는 진구 황후가 적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신령에게 기원하자, 스미요시 대신이 나타나 관계하여 하치만(오진 덴노)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15세기에 저술된 ≪애낭초(壒嚢鈔)≫[5] 의 「미롱사(尾籠事)」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진 덴노가 해신의 아들이라 몸에 꼬리가 달렸기 때문에, 꼬리를 가리고자 옷에 쇼조쿠쿄(装束裾)라는 것을 달아 길게 늘어트렸다. 어느 날 오진 덴노가 문 밖으로 나가는데 시종이 아직 옷자락이 다 빠져나오지 않았는데도 실수로 문을 닫아버리자, 천황이 "꼬리가 안에 있다."(尾籠也) 하고 말했기 때문에, 이후 비로(尾籠)라는 말이 '무례'를 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적 이야기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라면, 오진 덴노가 바다와 연결이 되어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해신의 아들, 용의 꼬리, 스미요시 대신의 아들. 이러한 표현은 전부 바다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오진 덴노가 해안가 쪽 세력과 연계하여 정권을 탈취, 천황이 되지 않았는가 하고 추측하는 설이 있다.
2.2. 신라와의 공방전?
그의 재위 연간에 왜가 신라를 특히 자주 공격했다. 287년에는 왜군이 민가에 불을 지르고 신라의 백성 1천 명을 잡아서 도망갔으며,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쯤 되니 당시 신라의 유례 이사금도 빡쳐서 왜를 원정할지 논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왜, 특히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 실성 마립간 때도 비슷하게 일본으로의 예방전쟁을 왕이 제안했지만 그 때도 비슷하게 대신의 만류로 그만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 년 후 조선시대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신라의 왜국 침공 기록을 적었다.
즉,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의 사서(기록)인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서는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나서서 명석포(아카시시)까지 가 왜국을 공격하고는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례왕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있어서 《연대기(年代記)》[6] 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에서 기록한 291년 침공시점과 약 4년 정도가 다르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하였지만 295년의 침공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할 수가 없다.
추가로 에도막부 초기에 쓰인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8] 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진 원강(元康) 원년(291)[7]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image]
지도 출처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면 신라는 어떻게 일본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에 다다르는 방법, 주고쿠 지방(규슈 옆에 있는 섬)을 통해 육지에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두 번째 방법,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규슈 남부를 지나 시코쿠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세 번째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하지만, 신라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유례왕 왜국 정벌 당시 추정 지도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신라는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 덕분에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 응신(應神) 22년(291) 조에 있는,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오진 덴노가 여섯 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 하다노)[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 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 카시하데)로서 (천황의) 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 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 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 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 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 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 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 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 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 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 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 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 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 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 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 하토리베)를 형원(兄媛: 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웅신 22년(291) 9월 10일 원문
2.3. 기록의 왜곡
일본서기의 목적인 '''천황과 유력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라는 것때문에 곡필 윤색된 부분이 많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 272년에 백제의 진사왕이 무례해서 사신을 보냈고, 백제에서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다.
- 276년 가을 9월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내조해서 여러 한인(韓人)을 거느려 연못인 한인지(韓人池)를 만들었다.
- 277년 봄 3월에 백제가 내조했다.
- 281년 봄 2월에 백제에서 봉의공녀를 바쳤다.
- 285년 가을 8월 6일에 백제에서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으며,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을 불러 고국에 돌아가도록 하면서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었으며,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왕이 놀라서 사죄했다.
- 288년에 국소인/쿠스히토(國樔人)[9] 가 내조해 감주를 바쳤다.
- 294년에 구이신왕이 왕에 오르면서 목만치가 국정을 잡고 왕의 어머니와 밀통해 무례한 행위를 저지르자 이를 듣고 목만치를 소환했다.
- 297년에 고구려의 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 고구려의 왕이 일본국에 교(敎)한다고 적혀있어 우지노와키이라츠코가 그 표를 읽고 노해 고구려의 사신을 꾸짖고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면서 그 표를 파기했다.
- 300년 가을 8월에 관선 중에 이즈국에서 바친 카라노가 썩어서 사용할 수 없자 담당 관리에게 그 배의 목재를 땔감으로 해서 소금을 굽도록 했으며, 500 광주리의 소금을 얻자 여러 나라에 나누어주고, 배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치자 무코노미나토(務古水門)에 집결시켰다. 이 때 신라의 조공 사신이 무코(務古)에 머무르다가 신라정에 불이 나서 그 불이 배가 있는 곳까지 번져 많은 배들이 불에 타자 신라인을 책망했으며, 신라왕이 그것을 듣고 놀라 뛰어난 장인을 바쳤다. 소금 굽는 땔나무를 태운 후에 타다 남은 재가 있어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그것을 헌상받았는데, 오진 덴노는 금/코토(琴)을 만들도록 했고 그 소리가 맑아서 멀리까지도 들렸다.
3. 추측
오진 텐노를 실존했던 천황이라고도 말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전설적인 천황으로 여기기도 한다. 오호도왕(26대 케이타이 덴노)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시호를 가지고 있고, 고분의 출토로 실존인물이라고 확인된 16대 닌토쿠 덴노와 달리, 오진 덴노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진무 덴노라는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낸 사례의 재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닌토쿠 천황조의 기록의 중복과 혼란 등이 있어, '오진, 닌토쿠 동일인물 설' 등이 있다. 그 연대는 고사기 간지붕년(干支崩年)에 따르면, 4세기 후반쯤이 된다. 기기(記紀)에 기록된 오진 덴노의 계보는 당시에 권력을 차지했던 자의 계보를 조작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이 있다.
오진 덴노의 실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어, 여러가지 설이 나왔다. 오진 덴노의 일본식 시호인 '호무다'가 8대 이전의 가공의 천황과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점에 의거해 실존했다는 설, '3왕조 교대설'에 있어서의 정복왕조의 창시자로 보는 설, '야마타이국의 동천설'에 관련되어 황실의 선조로서 제사지내지고 있는 신으로 보는 설, 진무 덴노=스진 덴노와 동일인물이라는 설, '''카와치 왕조'''(河内王朝)의 시조라고 보는 설 등 있다.
또, 일본 밖의 사료와 비교하여, 송서, 양서에 보이는 왜5왕(倭五王) 찬(讃)에 비정하는 설, 닌토쿠 덴노나 17대 리추 덴노에 비정하는 설 등이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과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따르면, 오진 덴노는 진구 황후와 함께 고대 한국어를 모어로 쓰던 한국어족 출신으로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 정복왕조의 시조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 설에 따르면 본명인 '호무다(<pômunda, 당대 발음은 "버문다"에 가까움.)'는 한국어 '팔'과 '묻-(파묻다)'의 고대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https://homaranisto.tistory.com/38?category=772561)
4. 가계
- 황후皇后 : 나카쓰히메노미코토(仲姫命)
- 딸 : 아라타노히메미코(荒田皇女)
- 4남 : 닌토쿠 천황(仁德天皇, 257~399)
- 아들 : 네토리노미코(根鳥皇子) - 여동생인 아와지노미하라노히메미코의 남편
- 비妃 : 다카키노이리비메(高城入姫) - 나카쓰히메노미코토의 언니
- 아들 : 누카타노오나카쓰히코노미코(額田大中彦皇子)
- 아들 : 오야마모리노미코(大山守皇子, ?~310?)
- 아들 : 이자노마와카노미코(去来真稚皇子)
- 딸 : 오하라노히메미코(大原皇女) - 오토히메노미코토의 소생이라고도 함
- 딸 : 고무쿠타니히메미코(澇来田皇女)
- 비妃 : 오토히메노미코토(弟日賣命) - 나카쓰히메노미코토와 다카키노이리히메의 여동생
- 딸 : 아헤노히메미코(阿倍皇女)
- 딸 : 아와지노미하라노히메미코(淡路御原皇女) - 오빠인 네토리노미코의 왕비
- 딸 : 기노우노노히메미코(紀之菟野皇女)
- 딸 : 시게하라노히메미코(滋原皇女)
- 딸 : 미노노이라쓰메(三野郎女)
- 왕비王妃 :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 아들 : 우지노와키이라쓰코노미코(菟道稚郎子皇子, ?~312) - 오진 천황의 황태자
- 딸 : 야타노히메미코(矢田皇女) - 제16대 닌토쿠 천황의 황후
- 딸 : 메토리노히메미코(雌鳥皇女)
- 왕비王妃 : 오나베히메(小甂媛) - 미야누시야카히메의 여동생
- 딸 : 우지노와키이라쓰히메노히메미코(菟道稚郎女皇女) - 제16대 닌토쿠 천황의 왕비
- 왕비王妃 : 오키나가마와카나카쓰히메(息長真若中比賣)
- 아들 : 와카누케오후타마타노미코(稚野毛二派皇子) - 제26대 게이타이 천황의 고조부
- 왕비王妃 : 이토히메(糸媛)
- 아들 : 하야부사와케노미코(隼総別皇子)
- 왕비王妃 : 히무카노이즈미노나가히메(日向泉長媛)
- 아들 : 오하에노미코(大葉枝皇子)
- 아들 : 오하에노미코(小葉枝皇子)
- 딸 : 하타비노와카이라쓰메(幡日之若郎女) - 제17대 리추 천황의 황후
- 비妃 : 가구로히메(迦具漏比賣)
- 딸 : 카와라타노이라쓰메(川原田郎女)
- 딸 : 다마노이라쓰메(玉郎女)
- 아들 : 가타지노미코(迦多遅王)
- 비妃 : 가쓰라기노노이로메(葛城野伊呂賣)
- 비妃 : 에히메(兄媛)